[청로 이용웅 칼럼] 필자의 <연극과 영화의 세계> 와 한국연극의 미래(未來)

기사입력 2018.03.08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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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종이책 <연극과 영화의 세계> : 이용웅 지음. 출판사; 경남대학교 출판부. 1998.01.3 형태 판형 A5. 페이지 수 278. /책 소개 : 연극과 영화의 개념과 과정을 설명한 전공서. 연극이 란 무엇인가, 연극의 형태와 사조, 한국 연극의 지역 성과 미래, 다양한 영화적 전통의 이해, 에로티시즘과 포르노그래피 등을 해설하고 작가와 작품 소개, 한국영화 소개 등을 부록으로 엮었다.”

 
인터넷에서 “연극과 영화의 세계”를 검색하면, 윗글이 나옵니다. 필자가 지금은 사이버강의를 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강의실에서 프랑스 문학과 연극을 가르쳤습니다. 그 때 “연극과 영화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새로 개설했습니다. 당시 한 일간지는 “신학기 대학가 수강과목 이변. 연극영화강좌 인기 폭발. 경남대 1천 4백 여 명 몰려...”라고 보도했습니다. 예상 밖의 사건(?)인데다가 강의실이 없어 홍역을 치렀는데, 그 이후 대학 출판부에서 <연극과 영화의 세계>을 발행했습니다.
 
그 책의 제1장은 “연극이란 무엇인가”인데...BC 6세기 이전의 고대 연극의 탄생 이후 많은 학자, 연극인 등이 연극의 개념에 대해 얼마나 많은 말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 입니다. 오십 보 도망친 사람이 백 보 도망친 사람을 보고 겁쟁이라고 비웃는다는 데서 나온 말로, 좀 낫고 못한 차이는 있으나 크게 보면 서로 어슷비슷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어쨌든 ‘연극’은 “배우가 특정한 연희(演戱)의 장소에서 관객을 앞에 두고 극본 속의 인물로 분장하여 몸짓·동작·말로써 창출해 내는 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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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영화의 세계(책과 관련 기사)

 

우리는 연극을 보면서 즐기는 동시에 인생의 어떤 의미나 경험, 인간성이나 섬세한 감정, 언어구사력 등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연극의 개념은,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어떤 이야기를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정도입니다. 희곡을 가리키는 ‘drama’라는 용어는 그리스어인 ‘bran’(행동하다)에서 파생된 말이고, ‘theatre’라는 용어도 그리스어 ‘theatron’(지켜보는 장소)이라는 말이 그 어원입니다. 이 같은 어원은 연극이 사람의 행동을 모방한다는 사실과, 또 이 모방행위를 바라보는 관객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결국 연극은 배우가 말과 행동으로 이야기를 꾸미고 만들어서 관객에게 보여주는 일체의 행위를 말합니다. 들려주기가 아니라 직접 ‘보여주는 것’, 즉 실연(實演)이 갖는 관객과의 현장성과 동시성이 관중에게 생생한 느낌과 함께 연극예술의 묘미를 즐기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극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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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홍당무>(1966년. 드라마센터)의 필자

 

<이윤택 공연대본전집 9>(전 10권)에서 이윤택 씨는 ‘작가 서문’에서 “나는 공연예술의 독자적 성격과 미학적 수준을 결정짓는 것은 배우와 연출가와 극작가보다 더 극단이 중요하다고 믿는 입장이다. 배우나 연출가 극작가의 존재 또한 극단이라는 연극적 뿌리에서 뻗어 나오는 꽃가지일 것이다.”라고 하고 “이 전집 또한 연희단패거리와 함께 한 백년 버텨주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스스로 ‘패거리’를 뿌리 채 뽑아버렸습니다. 최근 국내 언론들은 앞 다투어 그를 “연극계 대부”라고 했습니다. 기사 내용은 '연극계 대부' 이윤택, 성추행 시인하고 연극계를 떠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것입니다. 백년? ‘연희단패거리’는 이미 지구를 떠났습니다. 슬픈 일은 연극에 매진했던 단원들의 미래입니나. 더 슬픈 일은 ‘한국연극’의 미래입니다.

 
“연극계 대부 이윤택”!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마 연극의 ‘연(演)’자도 모를지 모릅니다. 이윤택 씨는 무대가 축제 · 놀이의 형식을 빌어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여과시키는 공간인지도 모르는 사람 같습니다. 그는 연극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인간성 회복의 실마리를 찾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는 예술 장르라는 것도 모르는 인간 같습니다.
 
<이윤택공연대본전집>(전 10권)의 ‘편저자’는 한국 연극계의 원로(元老)인데, 그는 “이 대본전집을 만드는 데에 수고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먼저 이윤택의 작품을 읽고 작품 해설을 쓴...XXX...교수들에게 깊이 감사한다. 그들은 바쁜 와중에서도 자신의 일을 미루어두고 이윤택을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우리는 그들의 노력이 계속되어, 변함없는 애정으로 이윤택을 읽고 연구하고 또 사랑하기를 희망한다.”고!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한국의 현대연극! 1902년 최초의 유럽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생겼으며, 1908년에는 원각사(圓覺寺)에서 이인직의 〈은세계〉가 공연되었습니다. 1910년대는 신파극으로 대표됩니다. 1920년대 연극은 대략 3가지 흐름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실주의극운동으로 학생극운동 단체들이 앞장을 섰습니다. 둘째, 1910년대의 신파극을 개량한 소위 개량신파극입니다. 젊은 연극인들이 극예술연구회를 설립해 사실주의극을 받아들이는 한편, 창작극 발굴에도 힘썼습니다...그리고 지금 21세기의 한국연극! 그 ‘연극적 뿌리’는 튼튼합니다. 그런데...극소수의 파렴치(破廉恥)한 사이비(似而非) 연극인들 때문에 그 뿌리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국연극협회를 비롯한 관련 단체와 연극인들이 한국연극의 ‘명예회복’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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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3월의 눈의 한 장면 (조선일보 자료)

 

최근 <조선일보> 기자는 한 편의 연극을 보고 “공연 중인 연극 '3월의 눈'(연출 손진책)은 채우기보다 비우고, 소리 높이기보다 오래 침묵한다. 이 요즘 보기 드문 연극에 매진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관객 성원이 땅에 닿아도 녹지 않는 눈처럼 단단하다...어느 때보다 연극을 아끼는 이들의 근심이 깊다. 바깥은 소란스러우나 연극 '3월의 눈'은 고요하다. 무대는 비울수록 차오르고, 꽉 찬 객석엔 눈물 흘리는 관객이 있다. 결국 좋은 배우가 선 곳이 좋은 무대다. 그 무대에 기립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은 여전하다. '3월의 눈'은 허물어져가는 집과 사람의 역설적 힘으로 연극이 꿋꿋해야 할 이유를 증명하는 무대다. 공연은 11일까지.”라고 기사를 썼습니다.
 
연극 <3월의 눈>을 통해 본 한국연극의 미래는 밝습니다. 하지만 모든 연극인들은 춘원(春園) 이광수의 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이성과 난삽한 말을 하거나 육체적 접촉을 할 때에 어떤 관능적 쾌미? 그것은 너무 순간적일 뿐더러, 그 쾌미보다 몇 백 배나 되는 회한의 고통과 심신의 피로와 불괘를...이 모든 것을 돌아보면 지긋지긋하고 더럽고 괴로운 것이다.” (李光洙 / 그 女子의 一生)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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