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 강원도 감자와 북한 선군팔경(先軍八景) “감자꽃 바다”

기사입력 2018.05.18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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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소설가 박종화(朴鍾和.1901∼1981)는 “일찌기 강원도는...옛날엔 교통이 불편하던 산협(山峽) 지대...땅은 넓고 사람은 희소하니, 대문만 나서면 산이요 밭이다. 평야가 없으니 화곡(禾穀)을 심을 생각을 안한다. 쌀밥을 아니 먹으니 반찬도 그리 필요치 않다. 감자를 심고 콩을 거두어, 감자밥에 산채(山菜)를 씹으니 소금 한 가지면 그만이다.”(청산백운첩/靑山白雲帖)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옛 이야기이고, 작가의 주관적 시선(視線)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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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군팔경 “대홍단의 감자꽃 바다” (사진 자료 <조선>)

 

조선 중기 이후 임진왜란 등을 겪으면서 백성들은 배고픔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뭄과 홍수 등 극한상황이 겹치면서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에 대한 욕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감자 등이 도입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감자는 1824~25년 경에 청나라를 통해 전래되었다고 합니다.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조선에 직접적으로 전해졌다는 설도 있고, 청나라 사람들이 조선에 인삼 서리하러 넘어왔을 때 먹고 버티려고 감자를 심었던 게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당시 감자가 조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감자를 심자, 정부에서 금령(禁令)을 내린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함경북도 무산군의 수령 이형재가 감자를 보급하려 할 때도 감자를 심던 사람들이 벌 받을까봐 시치미를 떼며 씨감자를 주지 않아, 많은 양의 소금과 교환하고 나서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도입되어 감자는 한반도 북방 지역과 강원도 산간까지는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청나라 심마니가 조선 국경에 몰래 침입하였다가 재배가 손쉬운 감자를 산중에서 재배했는데, 그들이 떠난 후 감자가 그대로 자라게 되고 번식력이 높아서 식량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무산지방의 수령은 소금을 내걸고 감자의 전파에 힘써서 각지에 전파시켰고, 양주, 철원, 원주 등지에서 구황작물로서 한 몫을 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의 강원도 감자가 유명해진 것은 다른 경로를 통해서입니다. 1920년경 독일에서 들여온 신품종 감자가 강원도 난곡 농장에서 재배되었고, 이것이 화전민에게 퍼져 강원도의 주요 산물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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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군팔경 “대홍단의 감자꽃 바다” (사진 자료 <조선>)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무산지방의 감자’입니다. 무산군(茂山郡)은 함경북도 중부에 있는 군(郡)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대형 무산지구전투승리기념탑을 세워 크게 기념하는 무산지구전투’는 1939년 김일성의 항일 부대가 현재의 대홍단군 지역인 무산군으로 진격해 들어와 군사 작전을 벌인 사건이었습니다. 현재의 무산군의 범위는 1952년의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서 형성된 것으로 그전까지는 서쪽의 백두산·마천령산맥까지를 포함한 광대한 군이었습니다. 현재의 무산군은 대홍단군·백암군·삼지연군 동부(량강도)의 범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감자꽃 바다”의 ’대홍단군(大紅端郡)은 현재 량강도(兩江道)입니다.

 

1998년 이전까지 북한에서 ‘밭곡식의 왕’은 옥수수였습니다. 1956년 김일성의 지시로 재배하기 시작한 옥수수는 주체농법인 밀식재배의 대표적인 작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비료가 부족한 북한의 현실을 감안하면 옥수수는 밀식재배로 생산량 증가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의 지시로 시작한 옥수수 재배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극심한 식량난과 대량 탈북으로 이어지는 현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들 김정일이 옥수수 재배에 따른 문제점을 직접 나서서 해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선택한 것은 감자였습니다. 그는 그해 10월 량강도 대홍단군을 찾아 감자를 ‘밭곡식의 왕’ 이라고 말하면서 감자의 증산을 독려, 대체작물이 옥수수에서 감자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선군팔경 대홍단의 감자꽃바다-대홍단군 지도.gif
선군팔경 “대홍단의 감자꽃 바다” (대홍단군 지도)

 

북한의 월간 홍보잡지 <조선>은 ‘선군8경’이라는 연재물에서 <대홍단의 감자꽃 바다>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보면, “조선의 최북단에 있는 량강도 대홍단군은 김일성주석께서 항일무장투쟁을 벌리신 곳이며, 이곳 인민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여러차례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신 유서 깊은 곳이다. 김정일 령도자께서는 대홍단을 감자 명산지로 만드실 원대한 구상을 안고 여러 차례 현지지도하시면서 감자농사혁명을 일으키도록 하시였다. 그리하여 이곳의 넓은 대지, 대홍단벌에 감자밭이 펼쳐지게 되였으며 감자꽃들이 피어나는 6~7월이면 무연한 흰 꽃이 피여나 황홀경을 이룬다. 그 감자꽃 바다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엄혹한 시련을 겪던 지난 세기 90년대 인민들의 식량문제를 두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시던 김정일...그이께 최대의 영광과 감사를 드리고 있다. 뜻 깊은 혁명 사적이 깃들어있는 대홍단의 감자꽃 바다를 두고 우리 인민들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선군혁명령도의 길에서 이룩된 사회주의 선경, 《선군8경》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작문(?)’!

 

다음은 ‘대홍단의 감자꽃 바다’를 소재로 한 시(詩) 중 하나인 ‘가사’ <감자꽃 바다에서 떠날줄 모르네>(리광 씀)이다. “대홍단벌 아득히 감자꽃 피여났네/ 처녀총각 다가서며 그 향기 맡아보네/ 겨우내 땀흘린 그 보람 꽃에 어렸나/ 감자꽃 잎새마다 입술을 대여보네/ 아 제대군인 총각과 대홍단벌 처녀/ 감자꽃 바다에서 떠날줄 모르네// 하이얀 감자꽃 그 빛갈 담아선가/ 청춘의 마음도 티없이 깨끗해/ 감자꽃 진한 향기 가슴에 안아선가/ 처녀총각 터치는 진정도 뜨거워라/ 아 제대군인 총각과 대홍단벌 처녀/ 감자꽃 바다에서...”

 

‘꽃’...‘바다’...얼마나 많은 詩人들이 인간에게 감동을 선사했던 낱말인가요! 그 시인들의 언어를 보면, “달에게 그 가슴을 드러내 놓은 바다”, “하늘 밑에서 반짝이며 유동하는 바다”, “활짝 편 부채 그대로의 바다”, “태양과 죽음의 바다”...이처럼 아름답거나 의미가 깊은 ‘바다’라는 언어에 “꽃”을 합성하면 더 수려한 언어가 됩니다. 그런데 북한은 이 ‘꽃바다’에다 ‘감자’를 더했습니다. 위대한 시인들도 쉽게 찾지 못할 언어입니다. 이것이 ‘선군8경’ 중 하나! 비록 선경(仙境)은 아니지만, 곧 그 바다에는 감자꽃이 핍니다. 잘 자라서 북한 백성들의 식생활에 큰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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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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