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⑦3·1운동 100년 기념 DB와 “3.1인민봉기”

기사입력 2019.03.16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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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1919년 3.1인민봉기 주요지역도-북한 조선대백과사전(13)‘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3.1운동(기미독립만세운동, 기미독립운동, 삼일만세운동) :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거국적인 독립만세운동.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중 서울에 있던 20여 명은 2월 28일 밤 재동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 회합을 가지고 거사 계획에 대한 마지막 검토를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조선총독부의 헌병·경찰의 정보망도 사전에 탐지하지 못할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3월 1일 정오경부터 민족대표 33인 중 29인(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泰華館)에 모여 독립선언 시각인 오후 2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한편 최린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安淳煥)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나서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게 하였다. 이 통고를 받은 일본경찰대 80여 명이 즉각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하였다. 이 때 민족대표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를 들은 후, 그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한 뒤 의연하게 일본 경찰에게 연행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8년 7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출범식에서 남북이 함께 3·1 운동 100주년(2019년)을 기념하는 방안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대한민국 건국(建國) 시점을 1919년 임시정부로 규정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문화역서울 284(옛 서울역사)에서 열린 출범식에서 "3·1운동으로 분출된 민족의 역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며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의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음날인 7월 4일, 정부의 고위 당국자가 100주년을 맞는 2018년 3·1절에 맞춰 남북 대표단이 함께 열차로 중국 내 독립운동 유적지를 방문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당국자는 “지난 3일 3·1절 100주년 행사를 위한 위원회(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공식 발족함에 따라 관련 사업을 본격 추진할 것”이라며 “관련 부처에서 공동 방중 계획을 연초부터 검토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 당국자는 “남북관계 진전에 맞춰 남북이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사업에 대한 1단계 검토를 이미 마쳤다”며 “남북한의 대규모 대표단이 함께 열차를 타고 국내외에서 진행했던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는 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2019년 3월 1일은 이미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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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중국 동북 및 로씨야 연해주지방 동포들의 3·1인민봉기 주요지역도-

 

최근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는 [3·1운동 100년 기념 데이터베이스 구축]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데이터베이스(database.DB)에는 1919년 3·1운동 당시 발생한 시위는 1692건이며, 참여 인원은 79만9017∼103만73명이라는 연구 결과가 포함돼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소요사건 관계 서류, 일본 외무성 기록, 경성지법 검사국 문서, 3·1운동 관련 판결문, 재한 선교사 자료, 한일관계 사료집에서 3·1운동 관련정보 2만1407건을 추출했습니다.

 

위원회는 이 정보를 분석해 1919년 3∼5월에 시위 1692건, 철시 25건, 파업 3건, 휴학·휴교 61건, 계획 350건, 기타 활동 333건 등 일제에 저항한 사건 2464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 수치는 일제가 발표한 시위 건수 800여 건보다 월등히 많고, 독립운동가 박은식이 1920년 펴낸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기록한 1542건보다도 약간 더 많습니다.

 

DB를 보면, 지역별 시위 건수는 서울·경기가 427건으로 최다였습니다. 이어 황해도 177건, 평안북도 148건, 경상남도 140건, 경상북도 118건, 충청남도 117건, 평안남도 112건 순이었습니다. 국외에서도 시위 99건이 발생했습니다. 사망자가 발생한 시위는 모두 174건으로 집계됐으며, 사망자 수는 725∼934명이었다. 일제는 3·1운동 사망자를 약 550명으로 추정했습니다. 여기서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13)>의 “3.1인민봉기”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3.1인민봉기 :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주체8(1919)년 3월 1일에 폭발한 우리 인민의 전민족적 반일봉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1919년 3월 1일은 우리 민족이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조선독립만세!>의 구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강도 일제를 반대하여 전 민족적 투쟁을 전개한 날이며 우리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날입니다.

 

이날은 우리 민족이 자기의 자유를 위하여 고귀한 피를 흘린 날입니다.⨠(<김일성전집> 3권, 185페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야만적인 무단통치로 말미암아 쌓이고 쌓인 조선인민의 민족적 울분과 사무친 원한은 마침내 주체 8년 3월 1일에 전만족적 반일투쟁으로 폭발하였다...⪡그때 여덟살이었던 나도 다 꿰진 신발을 신고 시위 대렬에 끼여 만세를 부르면서 보통문 앞에 까지 갔다...어른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면 나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김일성 저작집> 45권, 36~37페지). 평양시민들의 시위대렬은 삽시에 10만여명으로 늘어났다...”(<조선대백과사전(13)>)

 

“...일제 살인귀들은 3.1인민봉기 초기에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치떨리는 대중적 학살 만행을 감행하였다. 3월 초순에 맹산에서 독립만세 시위투쟁이 벌어지자 일제 헌병들은 총칼로 위협하면서 수많은 시위참가자들을 체포 구금하였다. 이에 격분한 시위참가자들이 헌병주재소로 밀려가 체포 구금한 사람들을 당장 내놓으라고 들이대자 일제 교형리들은 그들에게 마구 사격을 가하여 60여명을 무참히 학살하는 귀축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

 

일제 살인마들은 또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무고한 부락민들을 교회당에 모이게 해놓고는 교회당 건물에 석유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고 뛰쳐나오는 사람들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하여 마구 죽이였다. 일제 야수들의 잔인무도한 만행으로 이날 제암리에서 300여명의 주민들이 일제 살인귀들에 대한 사무친 원한을 품은 채 집단적으로 학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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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3·1운동 시위 참여 인원과 사망자 수.

 

일제는 1919년 3월 하순 평안북도 정주에서 5,000명의 평화적 시위대렬에 집중사격을 퍼부어 120명의 사상자들을 내였다. 실로 반일인민봉기의 전기간 일제의 총칼에 맞아 쓰러진 조선 사람의 수는 10여만명에 이르렀다.

 

한편 일제침략자들은 전국 도처에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켜 수많은 애국자들을 검거 투옥하였다.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의 기간에 국내에서만 하여도 약 4만 6,700명에 달하는 애국적 인민들이 체포 투옥되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일제의 이러한 탄압 만행을 적그 지지하고 부축였으며 저들이 <선교사>, <의사> 등을 내세워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반일항쟁의 기운을 갈아 앉히려고 책동...” (<조선대백과사전(13)>)

 

북한 <조선대백과사전(13)>의 “3.1인민봉기” 등이 국사편찬위원회의 DB에서 활용되었는지...비록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되긴 했지만 “1919년 3.1인민봉기 주요지역도”와 “중국 동북 및 로씨야 연해주지방 동포들의 3·1인민봉기 주요지역도” 등은 중요한 데이터인데...북한에는 이외에도 많은 자료들이 있을 것입니다. [3·1운동 100년 기념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북한의 관련 자료들은 계속 발굴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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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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