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산책] 상상 속의 태아를 보다, 국동완 개인전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

0주에서 40주, 뱃속에서 창조되는 무의식 속 생명의 기록을 담다.
기사입력 2020.07.22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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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중희 기자, rhkrwndgml@naver.com]

 

무의식 속에서 태어난 생명인 태아는 인간의 계획이 아니었다. 어떠한 인간도 그 탄생의 신비를 알 수 없다. 신 혹은 누군가에 의해 설계됐을 뿐이다. 설계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생명은 정교하고 치밀하다. 과학은 인체의 역할에 대해서는 설명했지만, 존재의 이유를 규명하진 못했다.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 그것을 찾는 마음은 교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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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플레이스막2 입구, 국동완 개인전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 포스터)

 

 

이번 전시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국동완 작가의 개인전으로 추성아님이 기획에 협력했다. 전시 장소는 '플레이스막2'이며,2020년 7월 4일부터 26일까지 전시가 진행된다.

이달 플레이스막 전시 관람의 마지막으로 플레이스막2를 찾았다. 요즘은 전시를 자주 볼 수 있어 좋다. 평소에 전시 관람을 좋아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보지 못했었다. 취재를 하기 위해 가는 것 같지만, 실로는 전시가 보고 싶어 취재를 가는 것이다. 나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을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생각한다. 생각의 창과 틀을 연다. 마치 계시(啓示)와 같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서 본다. 이는 머리가 지끈거리면서도 기분 좋은 일이다.

추성아 전시 협력기획자는 이번 전시에 대해 "이번 전시는 두 개의 주축이 되어 작가가 탐험하고 발굴해내는 40주간의 기록을 보여준다" "0주에서 40주까지 뱃속에서 성장하는 생명체를 상상하며 한 주엥 한 장씩 하나의 형태를 그려나간 기록들은, 극동완이 '손이 알아서 그리는 것을 보는 일. 손이 그려버리고 만 선과 이미지들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했듯 그의 무의식을 따라간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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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플레이스막2)

 

아담한 크기의 집들이 바둑판처럼 줄을 선 연희동의 주택가 사이, 플레이스막2가 있다. 전시를 보러 갈때는 아무런 의식 없이, 힘을 빼고 그저 그 공간과 시간에 젖고 싶다. 이성의 끈을 모두 놓아 버리고. 논리의 고리를 모두 부숴버리고. 오직 느낌과 감각에만 의지한 채 말이다. 머리를 넘어서 의식에서 벗어나 가슴으로 단전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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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 중 일부, 국동완, 한지에 흑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에 대한 열망, 욕망, 상상을 손이 가는 대로 써낸, 아니 그려낸 작품이다. 태아의 탄생이란 틀 안에서 작가의 감정과 생각이 미묘하게 응축돼 있는 듯하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 걸 그랬어"라는 음성이 자꾸 머릿속에 맴도는 건 왜일까.

전시에 대한 기록은 "0주에서 40주까지 뱃속에 품고 있는 생명체를 상상하며 한 주에 한 장씩 하나의 형태를 그려나간 기록들은 무차별적이고 유기적인 이미지로 화면의 중앙에 태어나지 않은 이의 초상으로서 정체성에 대한 관계를 모호하게 드러낸다. 현실에서 아직 마주하지 않은, 다가올 미래에 마주하게 될 생명에 대한 상상은 존재 혹은 주체 이전에 검은색과 하얀색 사이의 추정된 등가성 가운데 순환하는 그 ‘무엇’에 대한 힘 혹은 욕망을 대변한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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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 중 일부, 극동완, 한지에 흑연)

 

 

응축된 감정의 일부일까. 아니면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일까. 작가들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의식과 감정의 세계를 자신만의 감각과 도구로 표현한다. 개인적으로는 아래 작품의 실타래처럼 얽힌 끈이 슬프게 느껴졌다.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태아는 10달의 시간을 견딘다. 오롯이 엄마라는 모태의 의지에 맞겨진 채. 하지만 태아는 언젠가 다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세대에 존재의 규명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추성아 전시 기획자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이와 같이, 사유에 대한 오작동이 아니라 아무것도 결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엇이든 가능하고, 무언가의 이름이자 존재해야만 하는 모든 것의 이름, 그것은 ‘검정’으로 관철된다.

이처럼, ‘나’라는 여러 분신을 묘사하는 문장들은 마치 악보를 읽는 느낌으로 띄어쓰기는 변칙적이고 당김음이 된다. 문장에서 드러나는 어떤 어조와 어떤 리듬은 시각적인 것을 청각적으로 접근하거나 그 반대가 되기 위해 음 하나하나가 글자의 의미를 서서히 되살린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분신들은 마흔한 개의 드로잉에서도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배경으로부터 떠올렸다가 물러서기를 반복하여 등장인물과 상징하는 장면들을 유추할 수 있도록 각각의 프레임 안에 집약된다.

여기서 국동완의 드로잉과 글에 등장하는 ‘모나’의 분신들로부터 특유의 복수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가 “이명(異名)”이라는 발상으로 자신을 일흔 개 이상의 자아-타자로 지칭했던 것처럼, 상상 속의 인물들에게서 이름 외에도 고유하게 갖춘 구체적인 특징들을 분신으로서 동일하게 그려내는 것과 유사하다. " (협력기획자 추성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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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촛농호수, 국동완, 종이와 콜라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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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엄...마, 국동완, 종이와 콜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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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 다리는 팔이 되어, 국동완, 종이에 콜라주)

 

 

작가가 그려놓은 작품들은 사유의 확장을 불러온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모호하다. 하지만 선명하다. 무엇이라 규정할 수 없는 존재를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모든 걸 수치화하고 형상화하는 이 시대에 '모호함'은 '무기력함'으로 심판 받기도 한다. 하지만 또 자연은 모호함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모호한가, 선명한가.

 

"작가가 파헤치고 분류하는 상상과 기억들은 종이 위에 가득하면서도 공허하다. 그의 손에서 사정없이 그려나가고 적어 내려간 자리들은 무엇을 지키는 자리였을까? 검정을 지키는 자리일지, 검은 무엇을 지키는 자리일지, 검은색의 자리일지, 우리가 부르는 그 자리는, "셋 넷 아니 다섯," 그 이름은 나, 여럿 그리고 검정이다." (협력기획자 추성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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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 중 일부, 국동완, 바운더리북스(2020)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집념에 빠지면 존재의 허무감을 느낀다. 이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죽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다시, 살아야지 '세상'의 거품같은 위로에 취한다. 먹고 사는 일이 전부인 양, 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건데 뭐..."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끝없는 사건 사고에 인간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말한다. 인간은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죽음을 막는 방역을 할 뿐이다. 작가가 끝없는 내면으로 여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 나는 혼자일 때도 있고 여럿일 때도 있다

나는 열다섯 개가 되어

나는 일곱, 일곱이 살아 있다

여섯의 나는 이상하고

다섯 개의 나는

나는 넷이 되었고 ”

(국동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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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 40주, 국동완, 한지에 흑연)

 

 

전시에 대한 기록은 "40주라는 긴 시간 동안 베일을 한 겹씩 걷어내어 알고 있는 것과 알고자 하는 것의 불투명함을 헤치고 나아가는 예민하고도 농밀한 감각은, 불확실했던 긴 여행을 거쳐 존재와 사물들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나’이자 ‘여럿’의 몸짓들이다. 작가가 파헤치고 분류하는 상상과 기억들은 종이 위에 가득하면서도 공허하다. 그의 손에서 사정없이 그려나가고 적어 내려간 자리들은 무엇을 지키는 자리였을까? 검정을 지키는 자리일지, 검은 무엇이 지키는 자리일지, 검은색의 자리일지. “나는 셋 아니 넷 아니 다섯,” 내 이름은 검정이다"로 마무리 된다.

 

한편 이번 전시의 작품은 플레이스막2 사무실에서 직접 구매가 가능하다.

 

[곽중희 기자 rhkrwndgm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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