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학자를 꿈꿨던 서울대 문리대학생, 반(反)유신 운동에 뛰어들다… 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격변의 시대, 감시와 고문 아래 꽃피운 ‘민주화 학생운동’
기사입력 2020.10.2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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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한국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지만, 가슴의 외침을 따라 3번의 징역과 중정(당시 중앙정보부)의 고문으로 유신의 탄압 아래 파묻힌 청춘. 하지만 다시 촛불로 꽃피울 그 삶을 들여다 본다.

 

Q. 안녕하세요. 대표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제 성명은 ‘송운학’입니다. 저는 충남 아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주 시골이었죠. 대학교 3학년 때까지 전기가 안 들어왔으니까요. 저희 집은 당시 중농에 속했습니다. 아버님이 땅을 좀 가지고 계셨어요. 제가 신화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4학년이 되던 해 형님께서 외가댁이 있던 대전공전에 합격하여 공부하러 집을 떠났습니다. 그 때부터 저 또한 형님과 함께 공부하려고 열심히 노력해서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대전에 있는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책 읽기를 좋아했어요. 충남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전고등학교를 부수석으로 합격했고요. 고교시절에는 문과에서 선두를 다투는 등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심리학과에 진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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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Q. 시민‧민족 운동에는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 


시민‧민족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안병욱 교수님(당시 숭실대 철학과)의 강연을 듣고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도산 안창호 선생님에 대해 알려주셨어요. 그 말씀을 듣고 생각이 많이 트였죠. 제 생각으로는 도산선생님께서 평생 살아오신 삶 속에서 실천하신 사상이 매우 새롭고 진취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신민회(新民會), 흥사단 등을 창립한데서 알 수 있듯이 근대적 시민의식, 근대적 주권자의식으로 무장된 새로운 국민을 양성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신 분이라고 존경하게 되었고, 저 역시 도산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자고 결심했습니다.  


*흥사단(興士團)은 1913년 5월 13일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흥사단은 공립협회와 구국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신민회 산하 청년학우회가 흥사단의 전신이다. (위키백과) 


그래서 흥사단 대전고 아카데미(결성준비모임)를 만드는데 동참했어요. 거기서는 지덕체, 정의돈수 등을 학습하고 실천했습니다. 5분 스피치(연설), 윤회악수 등과 같은 자기훈련, 집단훈련, 상호학습 등 지금 생각해봐도 상당히 새로운 엘리트 양성과정이었죠. 


*정의돈수(情誼敦修)는 정답고 의좋은 것, 친애와 동정의 결합, 사랑, 두텁게 닦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서로 사랑하기 공부’, 사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출처 : 음악이 있는 세상, 다음 블로그)  


고교시절 제가 입주해서 가정교사를 했던 집안이 대단한 부잣집이었는데, 책장에 출간된 책과 월간지가 많이 있었어요. 그런 책들을 읽다보니, 민족‧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죠. 게다가, 1969년 박정희 전(前) 대통령의 3선 개헌, 71년 사법파동 등 고교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여러 사건이 있었죠... 


격변의 시기였죠. 특히, 72년 대학 1학년 때 ‘7.4 남북공동선언’이 있었어요. 그런데 좀 이상했어요. 당시 정부는 “멸공해야한다”며 국민을 가르쳐놓고 국민 몰래 자기들끼리 만나 통일을 하겠다고 발표했으니까요. 접촉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는 의심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약 100일 뒤에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어요.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과 같이 일사불란한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어요. 


원래 공부를 해서 세계적인 대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안창호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어요. 자유를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컸죠. 73년도 10월 2일 대학가에서 최초의 ‘반유신 민주화 학생운동’이 벌어졌어요. 

 

저는 사실 처음에는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나도 모르게 시위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어쩌다보니 점점 깊숙하게 빠져들게 되었죠.  


학생들이 시위를 기밀로 했기에 처음에는 정부도, 경찰도 아무도 몰랐어요. 시위가 일어난 뒤 30분쯤 후에야 경찰이 출동했죠. 경찰이 30여명 정도는 구속시키고, 나머지 학생들은 군대로 끌고 갔어요. 강제징집을 해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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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니던 서울대 문리대에서 첫 시위가 일어나자 서울대 법대와 서울대 상대 등 다른 단과 대학도 시위를 했죠. 언론통제로 한 달 정도는 시위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차차 입소문이 나게 되었고, 구속사실을 알리는 단신으로 언론도 간헐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해서 사람들이 알게 됐죠. 그러자 서울시내 거의 모든 대학에서 시위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전국적으로 번질 조짐마저 보였어요.  


최초로 제가 주체적으로 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닌 아주 작은 일이었어요. 즉, 구속학우와 선배들을 석방하라는 취지로 유인물 초안을 작성한 것이었어요. 그 시기 유명한 재야인사들이 유신정권에 반하는 개헌서명운동을 시작합니다. 그것을 막으려고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1호’을 선포해 ‘중앙정보부’에 모든 권한을 주게 되죠. 또, 자신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군인들이 민간인을 심판할 수 있도록 긴급조지 2호도 선포해서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도 설치했고요.   


*중앙정보부 : 1961년 6월 10일 법률 제619호 <중앙정보부법>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발족된 정보·수사기관. 약칭 중정(中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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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했고, 우연히 전태일 열사의 일기를 봤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큰 결심을 하게 되었죠. 사람마다 다른 이유와 동기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대학생들이 앞장서서 전국적인 시위를 하자는 분위기가 이심전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드디어 시위예정일이 밝아왔습니다. 


1974년 4월 3일이었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이 삼엄하게 경비해서 집회와 시위를 개최하기는커녕 유인물도 교정에 운반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선배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내용도 읽어보지 못한 유인물을 제가 운반해서 하숙집 주인에게 폐기해달라고 부탁하고 피신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배포하려던 유인물에 약칭 민청학련이라 부르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단체명이 인쇄되어 있었어요. 박정희 정부는 당일 저녁 긴급지휘 4호를 발동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민청학련은 반국가단체며, 주모자 등을 사형 등에 처한다는 아주 무시무시한 명령이었습니다. 그 당시 반국가단체란 이북이나 이북과 연결된 조직을 말하는 것으로서 국민다수가 이를 믿지 않았어요. 그러자 ‘자생적 빨갱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어요. 그래도 국민다수가 믿지 않자 ‘인민혁명당’(약칭 인혁당)이라는 단체를 날조하여 이북과 연결되어 있는 바로 이 ‘인혁당’이라는 반국가조직의 배후조정 아래 ‘민청학련’이 만들어졌다고 선전했어요.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어요. 


*인민혁명당 사건 : 1960~70년대 중앙정보부가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을 결성했다”고 발표하여, 다수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 교수, 학생 등이 검거된 사건. 2007년과 2008년 사법부의 재심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두산백과)


저 역시 4월 5일 중앙정보부가 있는 남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어요. 학교에서도 제적당했어요. 하지만, 학우들이 구속학생을 석방하라는 학내시위를 계속했고 국내외 민심이 이를 지지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 형 집행정지를 명해 약 1년 만에 풀려났죠. 


석방은 되었지만 곧바로 ‘사회안전법’이 만들어졌어요. 희대의 악법인 이 법에 따라 저는 아무런 재판도 없이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되어 늘 감시를 받았어요. 또, 보안감호라는 이름으로 언제든지 저를 투옥시킬 수 있었어요. 형집행정지, 요시찰대상자, 신원조회 등 이중삼중으로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미행했어요. 심지어는 아무런 압수수색 영장도 없이 무단으로 제 거주지에 침입하여 이 잡듯이 뒤지는 일도 발생했어요.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빨갱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낙인이 찍혔죠. 하지만,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과 비교하면, 그것은 약과였어요, 왜냐하면, 전두환 시절에는 이른바 ‘녹화(綠化)사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빨갱이를 정화하겠다.”는 명분으로 적나라한 국가폭력이 수반된 이른바 ‘프락치양성사업’이었어요. 민주화운동에 연관된 친구와 선후배 및 노동운동가, 농민운동가, 빈민운동가, 종교운동가 등을 팔도록 강요했어요. 그 때 양심의 가책으로 또는 양심을 지키고자 자살한 사람도 있고 국가폭력에 시달리다가 의문사한 젊은 학생들이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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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화사업 : 강제 징집된 대학생들에 대한 정훈교육 계획으로, 전두환 정권 1981년~1983년 사이 시행되었다. 당시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과 관제 프락치 활동을 통한 정보 수집을 위해 당국이 실시한 강제징집과 군복무 중 ‘특별정훈교육’이란 이름으로 이뤄진 육체ㆍ정신적 폭력이 수반된 정신교육 등을 가리킨다. 박정희 정권 때에도 녹화사업은 있었으나 단순 입대에서 그쳤다. 

 

 그 이후 학력과 전과를 속이고 공장 등에 취업했으나, 한 직장에서 6개월 이상 일해본 적이 없었어요. 요시찰 대상자로서 ‘형 집행정지’라는 신원조회서를 직장에 제출했다가 제가 공장에 취업했다는 것이 정보기관에 알려지면, 다시 투옥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상당히 많은 공장을 전전하면서 돌아다녔지만 원래 목적인 노동운동에 큰 기여를 하지는 못했어요.  


Q. 당시 연애나 결혼을 할 여력도 없으셨을 것 같은데... 그리고... 

 

다행히 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동참했던 아내와 79년 11월 결혼했죠. 그리고 신혼생활 약  6개월 후에 ‘5.18광주민주항쟁’이 발생했어요. 전두환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주인사들을 사전에 검거할 것이라는 정보를 하루 전에 입수하고 저는 피신했어요. 5월 17일 자정 경이었어요. 임신 중이었던 아내 말로는 5월 18일 새벽 4시경 홀로 있는 신혼집에 자칭 정보과 형사라는 4∼5 명이 난입하여 난장판을 만들었다는 군요. 사복차림이라 신분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1∼2명이 군화를 신은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보안사 군인도 있었던 것 같다더군요. 


공개수배자가 안 되었을 뿐 집 앞에는 경비초소가 세워졌고, 비공개수배 대상자로서 약 120일 동안 피신했어요. 숨어서 지냈던 곳이 화장실 아래 굴과 같이 열악한 환경이었어요. 기억이 나요. 그때 종아리에 똥독이 퍼져 그 후 3년 동안을 제대로 걷지도 못했었죠.


당시 학생처장이었던 심리학과 교수님이 보증을 서고, 담당형사가 저를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등하교 시간과 수업시작시간부터 종료시간까지 심지어는 강의실 이동시간까지 동행하는 조건으로 그해 9월 중순 비공개 수배가 해제되었어요. 형사와의 동행 및 경비초소 감시 아래 졸업했고, 졸업 이후에도 보이지 않게 감시가 지속되었어요. 


하지만, 졸업 이후에도 기사, 기능사 등 자격증을 5개 취득하여 기능직 노동자로서 다시 공장 등에 취업했어요. 85년 5월 말까지 이른바 현장노동자로 생활했어요. 당시 노회찬(前 정의당 의원), 심상정(전 정의당 대표) 등 많은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에 기여하고자 공장생활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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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6월 22일 저는 전태일 기념사업회 부설 안양노동상담소를 자비로 설립했고, 초대소장으로 약 36일간 근무했어요. ‘안양지역 노동운동사’라는 책에는 당시 전태일 기념사업회 김문수 사무국장의 제안으로 안양노동상담소가 만들어졌다는 취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저에게 진위도 확인하지 않고 이를 인용한 몇몇 책들이 있어 김문수 선배가 제안한 것은 명칭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싶어요.  


그 당시 위장(僞裝)취업을 선택한 지식인들은 노조결성 및 파업 등에 적극 동참하기 시작했고, 정보기관이 위장취업자들을 색출하여 심한 탄압을 개시하던 시점이었어요. 그래서 여기저기서 구속자와 해고자가 속출했어요. 저를 신뢰하던 후배들과 노동자들이 저에게 자문과 상담 등을 요청했어요. 상당수는 종교적인 보호막에 들어가면, 노동운동이 추구하는 대의가 변질될 우려가 있으니 그러한 외피 없이 진보적인 시각에서 운영되는 노동상담소를 독자적으로 개설하라고 저에게 요구했어요. 


그래서 제 거주지였던 안양에서 (가칭) 송운학 안양노동상담소를 설립하려고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소식을 들었던지 어느 날 평소 교류가 있던 김문수 선배가 연락이 와서 만났어요. 자신은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있고, 장기표 선배가 집행위원장이며, 문익환 목사가 이사장인데 돈도 없이 홀로 상담소를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상담실장이건 교육실장이건 원하는 직책을 다줄 테니 전태일 기념사업회가 있는 창신동 사무실로 출퇴근하면서 함께 상근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제가 정중하게 거절했더니 그러면,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을 테니 전태일 기념사업회 부설 안양노동상담소라는 이름을 사용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어요. 그 때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헤어졌어요. 김문수 선배가 집요할 정도로 여러 차례 요청했어요. 그래서 결국 그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안양이 원래 보수적인 지역이라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너무 자극적이었는지 이 이름 때문에 저는 너무 심한 탄압을 받았어요. 형사들이 여러 차례 찾아와서 상담소 문을 닫으라고 협박했죠. 거절하자 건물주 아들이 선배라고 부르는 깡패 2명과 함께 와서 사무실 출입문과 창문, 문짝과 유리창 및 비품 등을 때려 부수었고, 똥물도 마구 뿌려댔어요. 심지어는 깡패 2명이 각각 제 두 팔을 붙잡아 꼼짝 못하게 만들고 얼굴 등에 인분을 바르고 나중에는 날카로운 과도로 제 목을 겨누면서 임대차 계약을 해지하라고 협박했어요. 


함께 근무하던 상근자가 경찰서에 신고했지만,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경찰은 약 1시간 뒤에야 출동하더니 민사상 문제라면서 다시 약 1시간 동안 수수방관했어요. 특수살인죄가 발생할 것만 같은 위태로운 상황이 상당히 긴 시간동안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끝까지 임대차 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하자 형사들이 비로소 건물주 아들과 깡패 2명을 뜯어말려 귀가시켰어요, 


냄새도 심했고, 출입문과 창문, 문짝과 유리창 및 비품 등이 파손되어 청소와 원상회복 및 손해배상 등을 요구하면서 사무실 앞 도로에 천막을 치고 앉아 2∼3일 농성했어요. 또, 유인물도 만들어 뿌리고 집회계획도 세우는 등 항의했더니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집회를 주최한 죄 또 그러한 집회 예비음모죄 등을 뒤집어 씌어 구속시켰어요. 10개월 넘게 복역했어요. 

 

(2편에서 이어집니다) 

[곽중희 기자 rhkrwndgm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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