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칼럼] 문재인 대통령께 드리는 고언 : 80년 민주화 봄의 진실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이여!
기사입력 2021.03.1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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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김평 시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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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평교수, 시인, 칼럼니스트] 유럽에서 가장 슬픈 역사와 아우슈비처 수용소가 있는 폴란드 PL의 '슬픔의 노래' 작곡가인 헨릭 구레츠키는 예술가란 ‘남은 자의 형벌을 가장 민감히 느끼는 자’라고 했다.


슬픔의 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있지만 그 강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이 강이 있음을 깨우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예술가다. 그렇다. 우리나라 80년 민주화 봄의 민주화의 진실이 바로 그러하다.


필자는 예술가이자 교수로 80년 민주화 봄 당시 직선 대학학생회장으로서, 직접 현장에서 국내 최초 민주화를 선언하고 실천한 당사자로서 역사적 의무와 책임감으로 현재까지도 역사의 뒤안길에서 숨겨진 그 역사적 진실을 그 당시 계명대신문 축쇄판과 저의 경험과 담당 형사의 증언을 토대로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의 잘못된 오류를 바로잡아 청사에 빛나는 민주 역사가 되는데 일조를 다하고자 함이다. 이점 깊이 깊이 재인식하시어, 민주화의 봄의 꽃 봉오리가 활짝 핀 오늘 이 시점까지도 역사의 뒤안길에 파묻혀 오도되고 잘 못 기록되어 있는데도, 그 누구도 역사를 바로잡아 역사의 진실을 망각하고 있음에 안타깝고 서글픈 마음으로 힘겹게 동분서주하며 이 글월을 고언드리오니, 부디 역사 바로 세우기에 관심과 격려있으시기를 앙망합니다. 이러할 때만이 대통령께서 얼마 남지 않는 임기를 마치시고 길이길이 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시옵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바랍니다.


현재까지 민주화의 봄 또는 서울의 봄의 기록은 1979년 10.26 사건 이후, 신군부의 1980년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까지의 일련의 과도기적 민주 역사로 의미있는 시기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를 회고해 보면 긴급 조치로 일관된 정치 암흑기로, 10.26사건을 계기로 암울했던 유신체제의 터널을 빠져나와 새로운 민주사회로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넘쳐나고 꿈과 희망에 온 국민이 부풀어 있었던 혼란과 희망이 뒤범벅된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국민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 이런 혼란을 틈타 암암리에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집권야욕에 불타서 제2 구테타인 12.12 군사반란을 자행하고, 계엄령 하임에도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 김재규 일당의 검은 돈을 받아 전두환 합수부장의 수사에 비협조적이라는 굴레를 씌워 제2군사 구테타인 12.12군사반란을 결행하고, 로보트 대통령 최규하에게 사후 재가를 받아 합법화 하여 군사정권 창출을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중앙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현실을 모르는 채로 민주화의 봄이 왔다고 들떠서 민주화의 희망과 꿈으로만 시간을 보내고만 있었지요. 심지어 정치 구단이라던 삼김씨들 마저도 서로 대통령병에 걸려 꿈만 꾸고 있었으니, 일반 민초들이야 당연히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대학생회에서는 신군부가 정권을 창출해 향후 군사정부가 들어선다는 사실을 중앙 정보국과 전국대학생연합회로부터 정보를 입수하고, 민주화를 선언하고 전두환 퇴진을 미리 외쳤던 것입니다. 계명대학교 대학생회에서는 향후 전개될 민주화 항거 실행 계획을 미리 예견하고 그 때까지 산발적으로 우리나라 민주화를 외치면서도 또 한편 학내민주화도 병행하였던 것입니다. 민주화의 봄 또는 서울의 봄이란 이름으로 불린 연유는 그 당시 우리나라 민주화 상황이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있었던 민주화운동을 지칭하는'프라하의 봄'에 닮아있어 그 비유로 그렇게 명명되었던 것입니다.


타 대학은 우리대학이 민주화 운동을 외치고 결행하는데도 모든 대학이 불구경하듯 보고만 있을 때 우린 지속적으로 대학 내 민주화를 부르짖으면서, 국가 민주화 쟁취를 위한 항거를 병행하다가 결국 직선학생회장 선거 전,후로 국가 민주화로만 물꼬를 돌려 전국에서 최초로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민주화를 선언하고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학 물러가라. 계엄령 철폐하라.'고 구호를 외치며 민주적 절차로 대구 대명동 계명대학교 캠퍼스에서 2.28 민주 성지까지 행진한 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선언까지 대구지방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을 주도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문익환 목사나 백기완 소장, 김동길 박사 등 민주투사들로부터는 계명대학교가 대학 민주화 성지로 일약 인정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순정코도 용감한 어린 중,고등생들이 중심이 된 2.28학생의거가 거룩한 4.19혁명의 도화선과 길라잡이였듯 민주화의 봄 시절 대구 계명대학교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은 민주화의 가는 길에서 꽃 봉오리인 광주민주운동의 도화선이요, 길라잡이다.


따라서, 민주화 봄꽃이 활짝 핀 오늘 41년 전 그 당시 그날을 회상하고, 기억 하며 계명대학교 민주화 관련 기사내용과 현황 등을 계명대신문 축쇄판을 중심으로 사건 진행 과정별로 살펴보고, 기록하여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동안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 가는 잘 못된 민주역사의 오점을 바로잡고, 기록함으로 청사에 빛나는 민주역사가 되도록 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으며, 한편 그 때 그 당시 민주화 과정 속에서 희생되거나 합수부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핍박받고 아직도 사회와 단절된채 아무른 보상도 명예도 회복되지 못한 진정한 민주열사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자함에 그 목적이 있음을 깊이 인식하시어 선처 있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먼저, *2권(1974년~1980년,신문202호~401호) 739 Page를 살펴보면,


긴급조치 9호 해제로 데모사태로 구속되었던 본교학생 8명이 석방된다.


(1979.12.8.)그 명단을 보면 권오국 임진호 이성면 이춘성 박찬수 박명규 정인석 이근무 등인데 왜 이들을 살펴보냐면 이 복학생들이 80년도 민주화의 봄 민주 항쟁 과정에서 학생회 구성과 데모사태를 이끄는데 주도적으로 깊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긴급조치로 구속된 이들이 긴급조치해제로 구속에서 해제된 8명의 학생들이 80.2.19일 학칙및시행세칙 개정안 부칙을 근거로 모두 복교 조치되었고, 한편 여태까지 학생회가 대학교로부터 임명되던 호국단 체제에서


처음으로 자율적인 직선제 선거로 구성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학보 80.2.19일자를 살펴보면, 80.1.21일 오후2시에 총장및학생처장과 관계교수들과 학생대표 60명이 학생대표 간담회에서 80년 민주화 봄맞이 자율화 방안을 모색하였다.


1980.3.18일 신문을 보면,  1980.3.6일 이문용학생처장은 '학생 자율 최대한 보장하고 학도호국단 조직 준비위원회 준비위와 단규기초위원회 발족'하기로 하였다.

 

1980.4.1일자 신문에서는 1980.3.15일 총 학생회 새 체재 회칙 마련, 각급 학생회장 직선으로 결정한다로 발표되었다.


1980.4.8일자 신문을 보면, 80.4.1일 오후 본관 앞 빌라도 광장에 모여 총장 신일희 사태와 어용교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등 학원 자율화 진통이 계속 되었고, 총장이 학생들에 의해 총장실에서 노천강당으로 끌려나와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사항을 해명 하고 사과해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또한 1980.4.2일 계명대학교 학원 민주화 추진위원회 이름으로 5개항 결의문이 선택되고,80.4.4일 어용교수 10명이 발표 되었고, 교무처에서는 특별시험 실시도 발표하는 등 민주화 과정으로 가는 수 많은 진통 끝에 결국 이문용 학생처장은 80.4.7일 직선학생회장 선거를 4.17일에 실시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 후에도 민주화를 향한 진통이 계속되다가 *1980.4.15일자 신문에서는 1980.4.8.일 오전 12시 민주화촉진위에서는 노천강당에서 4.4백서에 대한 해명을 하다가 지난번 결의사항에 대한 총장의 확답을 요구하다가 오후 3시30분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고 기물을 들어내고 농성에 들어갔고, 긴급 소집 된 교수회의에서는8인 소위원회의가 구성되어 농성학생들과 함께 철야 농성에 함께 했다.


1980.4.9.일 오전 철야농성학생 일동은 9개항의 결의문을 발표하고 총장사퇴와 학원 민주화 선언하자 오후5시30분 동서 문화회관에서 속개된 교수회의에서는 총장지지를 선언하자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계속 교내 시위를 벌였다. 1980.4.10일 농성 3일째 되던 날 교수8인 소위원회가 해체되고 각 단대 학생대표와 학교 간부 3인으로 9인 소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오후2시30분급기야 300여명 농성학생들이 본관 교수실을 점거하자 교수 회의로부터 전 권한을 위임 받은 9인 소위는80.4.11일 휴교를 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한편 이날 교수실에서 농성 중이던 학생들은 밤11시경 복학생을 통해 외부인 개입이 되어 농성이 깊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극적으로 농성을 풀게된다. 그 후 새벽 1시에 순수학생으로 돌아가 해결방안을 모색하여 일련의 사태에 대한 총장의 사과를 받고 자율화 터전을 극적으로 마련하였다. 9인 소위는 교수회의 결의사항 전문을 공개 발표하고 ,교내 민주화 사태에 대한 총장 특별 담화문을 전교생에게 서신으로 발신하여 사태에 대한 책임과 학원민주화 그리고 학원 정상화 방안 관련 내용을 통지하게 된다.


1980.4.22일 신문에 보면, 그러다가 드디어 그토록 갈구하던 6년 만에 학도호국단에서 되돌아온 직선 학생회장 선거를 위한 입후보자 지상소견발표가 선거일 이틀 전에 총학생회장 위주로만 소개되었다.


그 면면을 보면 기호1권봉이, 기호2 장일성, 기호3 이현묵, 기호4 장상호, 기호5 장지헌, 기호6 최상룡, 기호7 배희진 등 7명이 입보하였고, 각 단대 학생회장 소견발표는 단대별로 선거일 전에 노천강당에서 학생들이 집합된 가운데 직접 연설로 진행하였다.


1980.4.22일 신문에 의하면, 학생회장 선거는 대강당에서 4.24일 오후 9시30분까지 진행 후 4.25일 새벽2시경 개표 완료후 25일 당선 공고하게 되었다.

 

1980.5.6일 신문 발표에 의하면, 주간 총학생회장에 복학생들이 주축이 된 배희진군이 961표로와 154표 차점자를 누르고 당선되었고,2부대 학생회장 은 제가 5명의 후보자중 240로 차점와 27표차로 새벽 2시에 당선이 확정되었다. 그 외 단대 학생회장으로 문과대 박노덕 외국어대 이상윤 사회과학대 이지인 경영대 신 양 이공대 감수상 예술대 이영기로 총학생회를 구성한 후 바로 1980.5.1일 출범을 위한 5개항의 민주화관련 성명서부터 4월28일부터 5월1일까지 치르게 된 중간고사를4월26일 학생회가 교무처에 건의한데로 5윌8일 부터 각 단대별로 교수의 재량으로 맡기되 한학기 동안 옳은 강의가 없었으니 현실적으로 가능한 레포트로만 담당교수가 평가해 학점을 준다고 교무처 허락 없이 벽보로 공개 발표했고 대학역사상 처음으로 중간고사를 변칙시행 한다고 공개 발표했다. 그래도 총장도 교무처장도 담당교수들도 인정하고 시행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행여 학생들로부터 어용교수로 몰려 집에 애기보러갈까 두려워 학생회장에게 잘 보이려 먼저 회장님으로 모시던 학생회장 천국이었으니 따를 수밖에 없는 해괴망측한 민주화 시절의 한 슬픈 단면을 볼 수있었다. 특히 계명대신문 축쇄판1980년~1985년(402호~560호)81년2월 3일호에 의하면 80년 9월9일 휴교중임에도 동서 문화회관에서 뻐젓이 직선학생회장 임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각 과 대표들을 모아 간선으로 김시학을 회장으로 선출하여 호국단을 재출범시키는 한 학교 2체제 학생회가 구성되는 아이러니한 사실이 그 당시 국가적 혼란상을 잘 설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고 본다.


다시는 이러한 비극적인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끝으로 광주민주화의 도화선이요 시발점이 된 계명대학교 민주화 봄의 진실을 깊이 살피시어 잊혀져가는 민주화 봄의 진실을 바로 잡아주시어 빛나는 역사가 되도록 하시어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 여태까지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이 보람되게 하시고, 그 당시 함께한 민주열사들의 젊음과 인생이 헛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귀감이 되도록 해 주시기를 앙망합니다. 감사합니다.

[곽중희 기자 rhkrwndgm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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