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장은숙의 세상이야기...“그녀에 눈속엔 사계절이 있다(?)”

“78년도 ‘춤을 추어요’로 데뷔... 성우, 모델, 영화 모두 섭렵한 만능 엔터테이너”
“뼈깍는 시련기 거쳐 일본 신인상 수상. 권위의 상징 NHK 홍백전 출연”
“일본 오리콘 챠트순위 14곡 1위 기록... 이제 한국에서 마지막 열정 불 태워”
기사입력 2021.09.16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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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숙 가요무대

 

[선데이뉴스신문=이정엽 선임기자] 고고와 디스코를 겸비한 세대날까?

70년대 生 이상 이라면 누구나 기억 할 만한 노래 “춤을추어요”를 기억할 것이다.

당시의 TV를 보면 미니스커트 또는 청바지를 입고 노래 부르는 장은숙의 모습은 한편의 멜로 영화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날 홀연히 일본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우리 가요계에서 잠시 사라지게 된다. 그랬던 영원한 요조숙녀, 가수 장은숙이 우리 곁으로 돌아왔단다. 그것도 꽤 오래전에...

일본에서 뼈를깍는 듯한 고생과 가슴아픈 사연을 안고, 한국가수로 일본가요계에 입지를 다지고 돌아온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세월이 무색 할 만큼 변함이 없고, 인생의 구력이 더해져 농익은 모습이다.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 그동안 일이 궁금해진다.  혜성처럼 나타나 70년대 후반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가수, 장은숙을 만나 그동안에 있었던 喜怒哀樂(희로애락)에 대해 들어보자...

 

■ 안녕하세요. 장은숙씨! 팬들께 인사한 말씀 주시죠...

▶여러분 안녕하세요. 너무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가수 장은숙 입니다. 건강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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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장은숙

 

■ 최근 장은숙씨 근황이 궁금합니다.

 

 

▶ 저는 작년에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몇 개월 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정신적으로 말이죠.  사실은 2년 前에 결성한 장은숙 밴드를 활성화 하기위한 방안으로 작년 4,5월경부터 3개의 라이브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코로나가 계속되면서 모두 취소가 됐어요. 코로나가 바로 없어질 줄 알았어요.  우리 모두 그렇게 생각을 했었죠.  2, 3개월 동안 주변 사람들과 전혀 연락을 안 하고 지내다 보니, 무의미하게 세월을 보내는것 같아, 뭔가를 해보자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생각난 것이 “장은숙 뮤직 TV”를 만드는 거였습니다.  노래 할 곳이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노래를 마음껏 해 보자 하는 취지로 뮤직TV를 하게 됐어요. 지금 현재 저희 유튜브에서 일주일에 1~2회 정도 노래를 올리고, 여러분들과 소통도 하고 또, 운동도 하고, 잠은 6시간정도... 그렇게 24시간을 나름대로 알차고 건강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 다시 한국에 돌아온 이유(?), 그리고 언제 돌아왔나요.

▶이유는 없고요. 저는 2006년부터 서울과 일본을 왕래 하면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마침 서울에서 방송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이 계셔서 최근까지 서울과 일본을 왕래하면서 활동을 했습니다.  2020년도 부터 코로나19로 일본을 갈수 없지만, 그 전까지는 일본에 전속 계약한 게 있어 매년 신곡을 2곡 봄가을에 취입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20여 년이 흘렀는데, 제 마음속에서는 항상 ‘한국에 와 있다’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는 내가 집이 여긴데 왜 또 일본으로 돌아가야 되지(?) 하는, 아쉬움과 좀 슬픈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전속계약이 있어서...

작년쯤인가요...  어느 날 제 뒤를 돌아보니 “내가 몇 살이 됐지(?)”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더군요.  제가 78년도 ‘춤을추어요’로 데뷔해서 이렇게 44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늦지 않게 여러분들을 찾아봬야 되겠다” 하면서,  2019년 말 쯤 완전히 돌아오게 됐지요. 돌아와 막 활동을 하려고 하니 코로나가 시작이 됐잖아요? 사실 제가 일본에서 2013년도에 “장은숙 오피스 장수”라는 프로덕션을 만들었습니다.  제 프로덕션 사무실에는 한국 가수가 지금 현재 활동하고 있고요, 그러다 보니 제가 완전히 정리를 하고 한국행 결심을 하고 온 해가 2019년 12월 정도가 됐던 겁니다.

 

■ 1975년 TBC 동양방송 오디션 프로 ‘당신을 스타로’에서 우수상을 받고 데뷔를 하셨습니다. 꽤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그 당시 오디션 상황좀 설명해주시죠.

▶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좀 특이하게 민요뿐만 아니라, 북춤도 좋아하고 하여튼, 그 당시에도 제가 국악적인 냄새가 풍겼나 봐요. 그렇지 않아도 학교에서는 늘 뽑혀 노래를 했던 저였기에 ‘국악 한번 해 봐야 되겠다’ 하고 맘먹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주위에서 TBC 동양방송에서 ‘당신을 스타로’라는 오디션 프로가 있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제가 “장난 반, 또 진심도 반” 어린나이에 가수도 한번 해보고 싶었고...  공부를 하면서 우연히 장난스럽게 도전 한번 한 것이 주말, 월말, 연말 우수상을 다 받은 거예요. 그리고 78년도에 “춤을추어요”로 정식 데뷔를 하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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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콘서트2019.3

 

■ 그 이후 국내에서 인기가도를 달리셨다는데 어느 정도였나요?

 

 

▶운이 좋게도 “춤을추어요”를 발매 하자마자, 바로 여러분들의 폭발적인 인기가 있었습니다. 78년도부터 80년도 까지 그렇게 정신없이 히트곡이 나왔어요. 왜 그것을 느꼈냐 하면, 어디를 가든 제 노래가 흘러나왔고, 그때 ‘내 노래가 정말 히트가 되고 있구나’ 라고 생각도 했고, ‘이렇게 빨리 될 수 있을까’라는 의아한 기쁨도 있었고요...

 

하여튼, 제 노래 ‘춤을추어요’가 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B면에 있던 김소월의 시 “못잊어” 히트했고, 그리고 또 몇 개월 지나 “당신의 첫사랑”이 TV 톱텐 1위를 하게 되는 등, 이렇게 연달아 히트가 되니까 ‘정말 히트 곡을 가진 가수가 되고 있구나’라고, 어린 마음에도 정말 기쁜 마음 이었습니다.

 

■ 당시 생각나는 ‘에피소드’ 한 대목 소개해주시죠?

▶에피소드는 어떤 거를 얘기 해 드릴까요?  저는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에피소드라라고 하기에는 조금 슬픈 그런 추억이...

명동에 엘칸토라는 소극장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제가 모델도 좀 했었어요. 1년 반 정도 모델을 했는데, 어느 날 연출했던 선생님과 명동 거리를 걷는데 비가 막 퍼부었어요. 그런데 그 선생님이 비닐우산을 사서 저를 쉬워 주면서, 아무래도 어깨로 손이 오잖아요. 그런데 기자가 있는 줄을 몰랐어요. 지금 와서 파파라치라고 얘기를 할 수가 있는데, 그 이튿날에 신문, 잡지 등 여기저기에 제가 막 나오는 거예요. 그 일로 제가 기자 분들하고 말다 틈도 하고...

하나 더 소개 하자면,  톱텐 1위하는 날 이였어요. 요즘에는 활동을 안 하지만 굉장히 좋아하는 후배가 있었어요.  어느 날 분장실 같은곳에서 서로 인사를 하는데 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좀 이상하다 싶어, 화장을 하던중 ‘너 오늘 무슨 일 있니(?)’ 하면서 아이쉐도우 같은 것을 손에 쥔 체로 손짓을 하는순간, 어느 잡지 기자가 문을 딱 열면서 그 장면을 본 거예요. 그런데 그 기자는 제가 후배 가수를 때렸다는 기사를 실었어요. 그것도 그냥 때린 게 아니라, 머리를 붙들고 때린 것처럼 기사가 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에피소드라고 하셨지만 정말 에피소드 아닌,  뭐라고 표현을 해야 되나요?  좀 억울한 일들을 당했습니다. 그 이미지가 사람들한테 굉장히 크게 각인이 됐나 봐요. 얼마 전에 음식점에 갔는데 “왜 그 후배가수를 때렸어요” 라고 하시는데, 지금도 나쁜 가수로 기억이 남아 계시나 봐요. 그래서 제가 “동생하고 말다툼이었어요” 라고, 매듭을 지은 적이 있었답니다.

 

■ 어느 날 갑자기 일본행 기사가 떳습니다. 그 배경좀 말씀해주시죠.

▶제가 히트곡이 단 몇 년 동안 연달아 나왔잖아요. 그런데 80년대 후반부터 기대했던 곡들이 내 마음대로 안됐어요. 여러분들 마음에는 ‘춤을추어요’ 이미지만 있는 거 같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제 자신이 슬럼프가 왔나봐요. 그런데 마침, 그 시기에 그룹들이 많이 나오게 되고 가요계에 변화가 일어났어요.  후배들도 많이 나오고 그러면서, ‘나의 시대는 이제 끝난 거 같다’라고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90년도 초반까지 계속 앨범을 냈답니다. 그때는 LP판 있었지만...

 

그러던 중 일본에서 94년 10월에 여섯 번째 스카우트 제안이 왔어요. 사실은 79년도부터 일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많이 왔었거든요. 제 생각은 자꾸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와서 데뷔를 하자고 하니, 일본에서 ‘뭔가 대박이 나겠구나’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1, 2년 정도 일본에서 활동할 계획으로 OK를 했죠...

 

그런데 최근 황당한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 당시 갑자기 제가 한국무대에서 안보이니까 많은 루머가 있었나봐요. 제가 얼마 전에 종편 TV에 출연 했는데 갑자기 질문을 하더군요. “그때 갑자기 없어졌다는데,  야반도주 한 것 아니냐(?)” 참으로 황당했습니다. 제가 그 당시 일본 진출에 대한 일을 누구하고도 상의를 안 했어요. 혼자서 4개월 동안 고민을 하다가 ‘금의환향’을 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NHK에서 유명한 홍백전이 매년 12월 말일 진행 합니다. 나를 스카우트한 레코드사에서 말하기를 “내가 데뷔만 하면, 張さん 그 프로에 꼭 나올 거다. 우리가 꼭 그렇게 하겠다”라고 제안을 해서 기대 또한 많이 했어요.  그래서 4개월 딱 고민 하고 95년 2월 4일 잠시 다녀온다는 생각으로 트렁크 3개만 갖고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도착해서 보니 상황이 안 좋았어요. 그때는 일본 상황이 우리나라 현재 상황과 같았어요. 그때가 부동산 거품이 빠지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방송 프로도 많이 없어질 상황이었고, 그렇게 저는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황당한 일을 당했습니다.

 

 

■ 일본에서 많은 고생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나요?

▶제가 일본에 도착하자 레코드 회사에서 일본 학교를 보내줬어요. 일본어를 알아야 되잖아요. 그 나라 언어를 알아야 노래를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일본 학교를 데뷔하기 전 까지 7개월 동안 공부를 했어요. 6시 반에 1시간 반을 걸어서 공부하러 갔습니다. 그 공부가 굉장히 좀 힘들었고요. 또 제가 서른여덞, 아홉 살에 일본을 갔잖아요. 그때 교실에 10대 대학생들도 많았고, 제가 연령이 많았기 때문에 더 많이 노력을 해야 했고 학교에서 돌아와서 복습, 예습, 숙제도 있으면 정말 열심히 해서 데뷔를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일본에는 캠페인이라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중지가 돼 있겠지만, 신곡이 나오면 전국을 순회하는 거예요.  "신인가수인데 신곡이 나왔다" 하면서, CD도 팔고, 홍보도 하고 하는...

 

일본은 스텝들이 많이 있습니다. 레코드사에서 저를 담당하는 스텝들.  또 제 프로덕션에서 한 10여 명이 항상 따라가서 캠페인을 합니다.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게 요코하마라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요코하마를 많이 좋아 하시는데,  어느 날 요코하마 길거리에서 라면박스 같은 곳에 올라가 노래를 하는데, 한국분이 깜짝 놀라서 장은숙씨 왜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고생 하느냐며, 눈물을 훔치면서 가셨어요.  그날 저도 집에 돌아와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8개월을 후에 데뷔를 하고, 조그마한 원룸에서 좋은 곳으로 이사를 하고 그런 변화가 있었죠.

 

그런데 그후, 하필이면 제가 활동하려는 시기에 생방 라이브 음악프로 하나 딱 남겨 놓고, 프로가 없어진 거예요. 그나마 남아있는 프로를 출연 하려면 음반 판매량 차트가 좋아야 되고, 또 캠페인이나 이벤트를 많이 해야 되고, 전국을 발로 뛰어야 된다는게 정말 힘들었습니다. 한국에서 내가 생활했던, 그리고 나의 삶의 일부분이었던 그런 것들을 일본에서는 360도로 바꿔서 생활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러던 중 마침, 제가 일본에서 데뷔 하자마자 신인상을 타게 되었고 일본에서 방송활동을 한다는 것이 한국에 알려지게 됐어요. 그래서 한국방송에서도 취재를 나오고 제가 생활하는 모습, 제가 힘들어서 누워있던 표정, 그리고 감기 걸리고 몸이많이 아프더라도 약속이기 때문에 해야 된다는 그런 모습들이 방송에 비춰지고 하면서, 주변분들이 모두 알아버렸죠. 저의 어머니도 딸이 고생하는 그 모습을 보고 통곡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어요. 그런데 일본의 시스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각오가 없으면, 일본에서는 노래를 할 수가 없고, 지금도 저는 그걸 고생이라고 생각 안 하고 있습니다.

 

■ 일본에서도 히트곡이 많던데요.

▶저를 스카우트 했던 일본 회사가 저를 유선대상 신인상을 받게 해주고 2년여 있다가 문을 닫았어요. 그래서 1999년도 한국에 막 들어오려고 했는데, 일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큰 레코드 회사에서 저를 함께 일하자고 제안을 해왔어요. 그 레코드회사에서 “기왕 왔으니 좋은 결과를 갖고 한국에 가라”고 하면서, 이름까지 바꿔 주더군요.  장수라는 이름인데,  찬스라는 뉘앙스를 가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2000년도에 ‘운메이노슈징코(うんめい の しゅじんこう)’ 라는 곡을 받았고, 3개월여 동안 오리콘차트 유선방송 1위를 했습니다.

 

이렇게 제 노래가 ‘노래자랑 이라든가, 가라오케에 가면 항상 부르는 노래’가 되었죠. 한국에서  ‘춤을추어요’ 같은 곡입니다.  ‘운메이노슈징코’는 우리나라말로 하자면 ‘운명의 주인공’ 이라는 내용의 곡이죠. 그 노래가 저의 대표 곡으로 지금도 많이 불리고 있습니다. 이곡은 ‘장수’라는 이름으로 해서 오리콘차트 1위 했었고 그리고 제 노래 중 유선 차트에 14곡이나 1위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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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무대녹화

 

■ 노래만 하신 줄 알았는데 영화출연도 하셨더군요...

 

 

▶그게 80年度입니다. 이주일氏, 그때가 이주일씨 전성기였습니다. 저도 그때가 전성기였고요. 그 당시에는 저도 모든 것을 다 하고 싶었어요. 노래 外, MBC에서 그림자라는 성우도 6개월여 했었고, CF광고 모델도 하고, 이때쯤에 영화 제의가 들어와서 제가 쾌히 승낙을 했지요. 제가 하고 싶었던 역할이었고, 그래서 이주일씨 하고 ‘리빠똥 사장’이라는 영화를 촬영 했습니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그 영화를 부분 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제목이 ‘리빠똥 사장’, 똥파리라는 그런 거였어요. 제가 그때 22살 때 였나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제가 그때 역할을 너무 잘 했던 거 같아요. 영화 촬영이 끝나고 감독님께서 ‘너는 나이도 어린데 어떻게 그런 슬픈 표정을 잘 표현 하느냐’며, 멜로물은 아니지만, 코믹 멜로물도 잘한다고 칭찬하기도 했어요. 이주일씨 자체가 조금 코믹 하기도 했구요, 그때 제 배역이 “노래하는 호스티스”역 이었는데, 이주일氏를 사기 치려는 음모단이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마담이 신인가수인 저를 이용해 일주일氏 돈을 빼앗으려고 하는 그런 역할을 제가 했어요. 정말 묘한 그리고, 진심어린 표정도 나오고, 제가 눈물도 주룩 흘리고, 뭐 여러 가지 장은숙을 볼 수 있는데, 이 영화가 끝나고 계속해서 영화 제의가 왔습니다. 사실은 그때 저희 오빠가 KBS 탤런트였는데, 오빠가 더 이상 하지말라고 해서 아쉽게 됐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속 하고 싶었거든요. 그때 당시 정말 평도 좋았고, 지금 생각하면 제가 이주일씨 하고 재미있게 작품 촬영을 했고, 추억을 담은 유일한 한편의 영화였던 거 같습니다.

 

■ 영화에 출연하게 된  동기는?

▶제가 그때 TV에 항상 잘 나오고 또 제가 ‘춤을추어요’를 부를때 부터 당시 유행하던 미니스커트, 또 나팔바지, 우주복이라는 옷을 입곤 했는데, ‘영화 속 역할에 딱 맞겠다’라고 감독 분들이 생각을 하셨나봐요. 영화 콘셉트에 ‘장은숙이면 어떻겠느냐’ 라고 해서 제안이 왔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끼가 있게 본 거지요. 뭐 그때 당시 예능프로인 버라이어티 방송에 제가 많이 나와서 자주 보이는 얼굴이었고, 또 어린나이 이기는 하지만 스타일도 좋잖아요. 끼도 줄줄 흐르고,  이상벽 선생님이 하신 얘기가 있습니다. ‘장은숙 눈에는 사계절이 있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때 그 얘기가 한참 유행이 되기도 했어요.

 

■ 가족 소개좀 해주시죠.

▶ KBS 탤런트였던 오빠가 계시고, 두 번째, 세 번째 언니, 그리고 제가 네 번째, 막내男동생 해서 2男3女 입니다.

 

■ 신곡은 준비하고 계신가요.

▶제가 2017년도에 곡을 받았는데, 요즘에는 4년 5년까지는 최근 曲 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제가 3년 전에 취입한 곡이 ‘내 마지막 사랑’ 그리고 세미트롯으로 ‘외로움은나는싫어요’두곡이 있는데 특히, ‘내 마지막 사랑’은 후배가수들이 많이 불러주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좋은 소식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 향후 활동 계획은?

▶ 2, 3년 전에 장은숙 밴드를 결성했습니다. 일본에서도 제가 재즈밴드와 함께 라이브 콘서트를 했듯이, 한국에 오면서도 밴드를 갖고 싶어 밴드를 편성 했습니다. 그래서 여섯 명 편성에 코러스 3명해서 모두 10명의 밴드식구가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전국을 다니며 여러분들과 일일이 만나고 소통을 하고 싶습니다. 저희는 그게 소망이자 꿈입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 人生 一幕二場(인생 1막 2장)...

연극에서 한 장르의 막이 내려오고 다시 막이 오를 때 우리는 一幕 二場이라고 칭한다.  누구나 일생을 살면서 오르내림이 있다. 오르는 사람은 또 내려올 수밖에 없고 내려온 사람은 다시 희망을 갖고 오르려 한다. 그리고 그 삶속에 희망의 두 번째 인생의 나래가 펼쳐진다.  지금 그 一幕二場의 주인공을 우리는 만나 보았다. 언제보아도 앳된 그 모습이다.

 
세상의 풍파를 겪고 왔다는 그녀. 그러나 옛 모습 그대로 우리 곁으로 살포시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 무대. 농익은 그녀의 공연 모습을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

[이정엽 기자 sisayonha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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