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법관, 언론인의 역할과 정의로운 국가로 가는 길

기사입력 2022.02.0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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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뉴스신문/권오은 국장

 

[선데이뉴스신문=권오은 국장]  “좋은 법관, 좋은 법원”에 평온이 넘쳐나는 사회. 정의와 진리의 판결에 의한 국민을 위한 법원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강한 국력의 국가가 될 수 없는가! 언론은 보도를 위해 사실의 전모를 객관적이고 정확한 근거를 기초로 공정하게 보도하는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 또한 폭넓은 사회 의견을 수용하여 올바르게 평론해야 하는 역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설 때 국민이 국민으로부터 존경받게 되면 평온한 국가가 유지된다. 국가란 국민과 국민이 하나가 될 때 거대한 사회공동체가 되며 이것이 국가이다. 정의로운 국가란 국가와 국민이 하나가 될 때 이것이 강한 국민의 힘이며 강력한 국력을 만들기 때문이다. 


판사의 타인의 운명을 재단하는 하나의 인간이다. 때문에 판사의 판결은 엄중하고도 신중해야 한다. 재판은 판사의 법적인 공평의 진리와 공정의 저울에서 판단하는 판사 개인의 전인격에서 만들어 낸 하나의 작품과도 같다. 하나의 재판이라도 치밀하게 준비하여 법정에서는 신중하게 결정해야하는 어려운 고뇌를 국민은 잘 알고 있다. 그러한 고뇌는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국민이 보는 훌륭한 판사는 때로는 보다 낮은 자세로 때로는 날카로운 칼날 위에 선 사람이 되어 동료 판사들의 의견을 구하기도 하며 치열한 토론을 통해 결론을 끌어내어 목숨을 걸고 판결하는 것으로 안다. 반면 그렇지 않은 판결은 국민의 불신을 가져오게 되는데 이러한 판결이 만연한 사회가 되어감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법관을 불신하게 되는 사회가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정치법관들의 작태는 눈을 뜨고 보기에도 민망하다. 법이란 도덕적 윤리의 기반에서 출발한다. 공평하고 정의로움에 기반을 둬야 한다. 개인의 승진과 보직에 눈치 보는 판결, 그것에 연연하다 보면 사법의 관료화에 아편을 맞고 영원히 정치적 손아귀에 끌려다녀야 한다. 소신과 독립을 지켜야 할 판사가 눈치를 보는 외풍이 스며든 판사가 된다. 좋은 판사는 승진이나 보직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진정한 판사의 생명을 이어가는 법관이다. 좋은 재판은 경륜과 인품을 지닌 좋은 법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좋은 법관들이 있을 때 사법부 역시 ‘정권의 시녀’로 지탄받지 않게 된다.


반면 언론의 역할과 영향력은 그 기준으로 본다면 사회 각 분야에서 엄청나다. 반복되는 여론의 영상은 뇌리에 세뇌를 시키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익성을 외면하고 언론의 사회적 책임도 무시하고 일방적 정치적 언론에만 적극적이고 간신적인 자기 살아가기식의 편향적 보도의 언론에는 미래가 없으며 국가도 없다. 그런데 다수의 국민은 우리 언론의 상황은 언론의 역할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윤리강령도 윤리헌장과도 거리가 멀다. 정치적 거래가 있다고 여기고 있다. 그것은 ‘기레기’라는 신조어가 이런 여론을 반영한다. 또한 여론조사 결과 언론개혁 필요성에 대해 ‘공감’한다는 것이 과반을 훨씬 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언론인은 자유국민의 알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으뜸의 가치를 내세우지만 속내는 그러하지 않다. 언론이 사회의 공기로서 막중한 책임도지지 않고 있다. 다양한 여론의 형성과 국민의 기본권보호, 신장을 위해 공평하고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또한 공공의 복지증진과 국민의 화합, 전통문화의 창달을 위해서도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오직 언론사가 살아가기 위한 수단에서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만 놀아나고 있다. 이들에게는 국가와 국력은 없다. 나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미래가 없는 바보국민을 만들어 영구통치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소수 권력자들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허구적인 낙원의 정치에 물들어가고 있는 듯하여 가슴 아프다.

 

진정한 국가란 개인이나 사집단보다는 사회 공동체에 우선 되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과 국가가 하나 되며, 국가와 국민이 하나가 될 때만이 강력한 국민의 힘이 모여 강력한 국가의 힘이 만들어지는 것이 국력인 것이다. 정의로운 국가와 행복한 삶의 조건이 우선해야한다  충분한 숙고 없이 휩쓸려 잘못된 정치가에게 권력을 준 대가는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다는 플라톤의 날카로운 비판은 너무나 현실적이라 동 시대에 지혜로운 교훈을 준다. 그러기에 국가는 지혜로운 정치가만이 나라를 다스려 한다.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 또한 각자의 위치에서 욕망과 사욕을 절제하고 전체를 위해 조화를 만들어 내야한다. 결국 정의로운 국가란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때만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현실은 역사 이래 너무나 혼란스럽다. 정의와 진실, 평등과 평화가 없다. 거짓과 거짓말. 궤변과 수변(말은 물 흐름 같으나 뼈가 없다)의 언론과 방송에서 판을 친다. 이들에게는 국가가 없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뿐이다. 가슴의 기개와 용기도 머리의 지혜도 배의 절제도 없다. 법관과 언론은 어느 누구에게도 자유로와야 한다. 비법하게 굴하지 않아야 한다. 판사의 판결은 법관 각자의 양심과 내적인 가치관 등에 맡겨져야 한다. 사법권의 독립’과 ‘법관의 명예’, 그리고 ‘공정성’과 ‘청렴성’을 기본 요소로 한 법관의 정당한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 법관은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정치적 중립은 필수이다. 자신의 책임 아래 홀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외로움을 견뎌야 함도 안다. 하지만 정치적 권력에 움직이는 판결은 절대 안 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언론은 왜 변화되지 않고 있는가? 권력의 눈치만 보는 것은 아닌가! 개탄스럽다. 국민이 보는 눈은 높다. ‘기레기’란 소리 더 이상은 듣지 않은 언론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결국 정의로운 나라란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때만 가능하다. 소피스트의 언별술과 궤변이 알키바아데스나 크리티아스 젊은이를 타락시켰다. 정의로운 정치가란 평화와 행복, 정의와 절제의 진정한 리더(Reader)이어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듣기 좋은 말보다 때로는 듣기 싫어하는 말이라도 해아 한다. 소크라테스는 정치는 진정 올바른 삶을 이끌어서 사람들이 잘 살게 하는 정치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독재 권력자는 깨어 있는 국민을 좋아 하지 않는다. 국민이 똑똑해지고 경제와 정치, 세금에 관해 깊어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부려먹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부려먹기 좋은 국민을 50%만 유지하면 독재 정권을 유지해 가기가 쉽게 때문이다. 정의로운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국민의 조직의 힘이 탄탄해야 한다. 

오늘날의 혼란스러운 대한민국을 탄탄한 국가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법관의 올바른 판결, 진실 된 보도를 정의롭게 하는 언론만이 정의로운 국가를 지탱해가는 최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권오은 기자 kwon787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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