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 2022년 2월에 생각나는 의사 안중근과 시인 윤동주

기사입력 2022.02.16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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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대한민국의 한 시민단체는 “2월 14일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비통하고 슬픈 날이다”며, 코로나 확진자가 5만여 명에 이르는 엄혹한 시기이니 만큼 자제하자"고 청소년 신세대층에 발렌타인 데이라는 국적 불명 기념일을 즐기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이 단체는 연인에게 주는 초코렛 선물이 팔리는 '발렌타인 데이'는 일본 초코렛 기업이 민족의 영웅 안 의사 흔적을 국민 기억 속에서 지우려는 술수인데도 "청년층이 모르고 있으니 안타깝고 한심하고 또 착잡하다"고 서운함을 토로했습니다. 안 의사의 사형선고일에 무심한 한국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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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국가보훈처 제공

 

본 칼럼은 여기서 ‘의사 안중근’을 돌아봅니다./ 안중근(安重根/1879~1910)은 1909년 중국 하얼빈에서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여 처단한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1906년부터 계몽운동을 벌였고, 1907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1909년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해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가 회담을 마친 뒤 환영 군중 쪽으로 갈 때 권총 3발을 쏘아 사살, '대한만세'를 외친 뒤 현장에서 체포! 사형을 언도받아 1910년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여기서 안중근 모자(母子)를 만나봅니다. 옥중에 있는 아들에게 조마리아 여사가 보낸 편지!-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어미는 살아서 너와 상봉하기를 기망하지 않노라./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본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망설이지 말고 죽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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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다렌 뤼순감옥 안중근 의사를 구금했던 감방 앞에서 필자

 

의사 안중근! 그가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한 바로 그 자리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습니다. 지금은 하얼빈 역 확장 공사로 기념관이 기차역에서 3km 떨어진 곳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이토는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으로 지목된 인물입니다. 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결행하기까지 하얼빈에서 보낸 11일 동안의 행적이 한국어와 중국어로 일목요연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유필, 흉상, 그리고 뤼순 감옥에서 사형 집행 전 남긴 유언이 인상 깊습니다. 기념관은 서울 중구 소월로 91번지에도 있습니다. 이곳은 ‘안중근’의 모든 것이 있습니다. 최소한 사형선고를 받은 2월, 순국(殉國)한 3월만이라도 기념관을 찾는 우리가 되었으며 합니다.


이 하얼빈과 함께 안 의사를 영원히 기억하게 하는 곳은 중국 다롄! 시내에서 45km 떨어진 뤼순(旅顺) 지역은 랴오둥 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습니다. 중국의 주요군항으로 해군 기지와 잠수함이 떠 있어 불과 몇년 전까지 외국인은 출입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롄을 찾은 한국인들이 잊지 않고 방문하는 도시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항일 지사들이 갇혀 있던 뤼순 감옥을 방문하기 위해서입니다. 감옥은 총 275개의 감방에 2,000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졌습니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항일 지사를 사상범이라는 명목으로 닥치는 대로 잡아 이곳에 수감했고, 1906~1936년 사이에는 수감자가 연간 2만여 명에 달했다고 하며, 그중 700여 명이 이곳에서 처형되었습니다. 특히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독방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뤼순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습니다. 가까운 이곳을 찾는 우리가 되었으며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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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우리가 사랑했던 독립운동가! 윤동주(尹東柱/1917~1945년)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으로 시인이자 작가입니다. 필자가 그를 사랑하게 해준 곳은...망덕포구는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의 망덕산 아래에 자리한 강어귀로, 경상남도 하동군 금성면 고포리와 갈사리를 끼고 흘러온 섬진강(蟾津江)이 끝나는 곳입니다. 강(江)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에 있는 팔공산 북쪽 천상데미로 불리는 봉우리 기슭에 있는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550리를 흘러 이곳 포구에서 여정을 마칩니다. 이곳에는 윤동주 시인의 작품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보존한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등록문화재 제341호)이 있습니다. 광양의 향토시인들과의 만남이 이어준 인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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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문학관

 

윤(尹) 시인의 기일(忌日)이 2월 16일입니다. 필자는 그의 “서시”를 애송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를 쓰기 반년 전쯤 윤동주는 시 “십자가”에서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고 읊었습니다. 그가 피를 흘렸다면 무얼 바라고 그랬을까요? 시인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노래했습니다.


시인은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습니다. 시신은 화장된 뒤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른 후 중국 지린성 룽징시에 유해가 묻혔습니다. 향년 28세! 그의 조부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그의 비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가지러 오라”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습니다. 부친과 당숙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습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은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윤동주문학관(尹東柱文學館)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습니다. 조용하지만 문학의 감동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문학관입니다. 종로구 청운동에 자리한 문학관! 청와대 옆길을 지나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한양 도성 4소문(小門) 중 하나인 창의문이 있습니다. 한양 도성 4소문이란 동북쪽 홍화문(弘化門), 동남쪽 광희문(光熙門), 서남쪽 소덕문(昭德門), 서북쪽 창의문(彰義門)을 가리키는데, 창의문 바로 건너편에 있는 흰색 건물이 윤동주 문학관입니다.// 2022년 2월에 생각나는 독립운동가들! 영원히 기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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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靑魯 李龍雄/ 초빙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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