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 2022년 希望에 斷想과 인류의 희망 인물

기사입력 2022.04.22 18:59
댓글 0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넬슨 만델라 Nelson Mandela-1918_2013.jpg
넬슨 만델라 Nelson Mandela-1918~2013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희망(希望)! “희(希)-점괘를 가리키는 육효(六爻)의 효(爻)와 수건 건(巾)이 합쳐진 글자” 입니다. 미래의 운수를 알려줄 점괘를 수건이 가리고 있는 형국이므로 점괘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앞날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란다’는 의미를 담게 되었습니다. “망(望)-바깥에 나가고 없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달을 바라보며 기원한다는 의미”가 있어 ‘바란다’는 의미를 담게 되었습니다.


희망! ‘코로나19’는 지구촌 곳곳에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절망(絶望)’을 심었습니다. 물론 끝없는 절망은 아닙니다. 누군가 아름다운 행복 속에도 절망은 둥지를 틀고, 모든 노력의 배후에는 정신적인 절망에의 짐이 더해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우리 민족은 숱한 절망을 겪으면서 ‘희망가’를 불렀습니다. 최근 젊은 트롯가수들이 옛 “희망가‘를 불러 코로나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보통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있습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니/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 같도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니/ 희망이 족할까/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리/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1964년, 종신형(終身刑)을 선고 받고 절해(絶海)의 고도(孤島) 루벤섬 감옥(監獄)으로 투옥(投獄)된 사람! 간수(看守)들은 걸핏하면 그를 끌어다가 고문(拷問)하고 짓밟고 폭력을 가(加)했습니다. 이미 사람으로서의 품격과 지위는 상실되었고, 견딜 수 없는 모욕과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세계 언론은 그를 가리켜 인간의 품격을 한 계단 올려놓은 사람이라고 존경(尊敬)을 표했습니다. 그가 바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1918~2013)입니다. 


만델라는 1964년부터 1990년까지 무려 27년간이나 감옥살이를 했는데, 44세에 억울한 감옥살이를 시작해서 71세에 풀려난 것입니다. 그는 남아공( 南阿共) 흑백(黑白) 분리정책(分離 政策)을 철폐하고, 남아공 최초의 흑인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당선된 뒤, 그는 자기를 박해(迫害)하고 고통과 치욕을 주었던 정적(政敵)들을 다 용서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삶을 ‘절망(絶望)과 희망의 교과서’라고 했습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1769_1821-의 희망.jpg
보나파르트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1769~1821-의 희망

 

보나파르트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1769~1821)의 희망! 대영제국 육군원수였던 아서 웰즐리(Arthur Wellesley)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공작님은 나폴레옹을 워털루에서 이겼는데, 공작님의 군사적 재능이 나폴레옹보다 훨씬 낫지 않나요?". 웰즐리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현재에도, 과거에도, 언제라도, 최고의 전략가는 나폴레옹일 뿐이오."("In this age, in past ages, in any age, Napoleon." 라고 / 그는 “종교는 영혼의 지배력이다. 그것은 삶의 희망이고 안전의 닻이며 영혼의 구제”라고 했고, “지도자란 희망을 파는 상인” 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단어가 없다”고도 했습니다. 


취임 연설하는 존 F. 케네디-1961년 1월 20일. 국회의사당.jpg
취임 연설하는 존 F. 케네디-1961년 1월 20일. 국회의사당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1917~1963)는 1961년 1월 20일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취임을 선서하며 취임 연설을 시작하였습니다. 이 연설은 가장 유려한 연설로 사람들의 입에 두고두고 오르내리게 됩니다. 케네디는 이미 두 달 전부터 지인과 조언자들에게 의견과 자문을 구하며 연설문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서 빌려온 두 구절 "무거운 짐을 내려주고... 억압받은 자들을 자유롭게 하라" (이사야서 58장 6절), "희망 속에서 환호하고 고난 속에서 인내하라"(로마서 12장 12절)을 제외하면 나머지 연설문은 모두 케네디가 직접 썼습니다. 그는 “우리들은 공포를 내포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들의, 희망을 추구하는 것을 억제할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최근 지인이 보내준 글 중의 일부입니다. / [그 오랜 세월(歲月) 어떻게 절망(絶望)의 세월(歲月)을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요? 그는 이렇게 대답(對答)하였습니다. "나는 위대(偉大)한 변화(變化)가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아즈위(Azwie), 희망(希望)을 한 순간(瞬間)도 포기(抛棄)한 적이 없습니다." / 사람이 죽는 것은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희망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백성(百姓)들에게 희망(希望)을 주는 사람이 위대한 지도자(指導者)입니다. 보스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지만 리더는 사람에게 희망을 줍니다.] 


희망이란 말의 이미지.png
희망이란 말의 이미지

 

희망!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희망은 선한 것, 미래에 있는 것, 희망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것과 관련될 뿐입니다. 희망이 그 목적을 성취하고 나면, 희망은 더이상 희망으로 존재하지 않고 소유가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사랑은 끝이 없지만, 희망은 이 세상에서 유한한 인생살이에 국한됩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호하고 끝이 열린 미래와 관련시켜 희망(elpis)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그리스도교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 용어에 적극적인 대망(待望)과 도덕적인 특성을 부여했다고 봅니다. 


끝으로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1807~1882)의 “인생찬가”를 읊어봅니다. / “슬픈 노래로 내게 말하지 마라/ 인생은 단지 헛된 꿈이라고!/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고/ 사물은 외양과는 다르기에./ 인생은 현실이고, 진지하다! 그러기에 무덤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란 말은/ 영혼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나 가는 길은/ 기쁨만도 아니요 슬픔만도 아니다./ 그러니 행동하라/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을 수 있도록.../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키케로 / ”희망은 사람을 성공으로 이끄는 신앙이다. 희망이 없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가 없으며 희망 없이는 인간생활이 영위될 수 없다.“-헬렌 켈러 / 희망은 잠자고 있지 않는 인간의 꿈이다. 인간의 꿈이 있는 한 이 세상은 도전해볼 만하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꿈을 잃지 말자. 꿈을 꾸자. 꿈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진다."-아리스토텔레스 // 1922년의 ‘희망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요?

20211130144628_d4cd1207fc3ece1d3b1a304cc1acc9af_hocx.jpg

靑魯 李龍雄/명예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저작권자ⓒ선데이뉴스신문 & www.newssunday.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신문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보호위원회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top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