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산 낭가파르밧”, 독일인들에게 낭가파르밧은 왜 운명의 산이 되었나

기사입력 2013.12.05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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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동안 독일정부와 독일인들에게 희망이자 염원, 그리고 자존심이 되어 주었던 히말라야의 산 낭가파르밧을 배경으로 한 영화 <운명의 산 낭가 파르밧>이 오는 12월 12일, 개봉을 앞두고 독일과 낭가파르밧 사이의 각별한 인연을 공개했다.

1860년대, 140개에 달하는 알프스의 고봉들이 수많은 등반가들의 목숨을 건 도전을 통해 전세계에 그 신비한 모습이 모두 공개된 이후 알프스는 더 이상 매력적인 등반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1895년, 앨버트 머메리가 히말라야의 8,000미터급 고봉인 낭가파르밧에 처음 도전한 후 인류는 히말라야에 위치한 눈 덮인 미지의 14개 봉우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는 마치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치열한 도전의 무대와도 같은 것이었는데, 그 중심에는 낭가파르밧이 있었다.

최초 도전자였던 영국의 앨버트 머메리가 낭가파르밧에서 사망한지로부터 37년이 흐른 1932년, 독일인 빌리 메르크는 독일 정부의 든든한 지원을 배경을 등에 엎고 낭가파르밧 정상 정복을 목표로 산에 올랐으나 해발 6,960미터 지점에서 한 달간 이어진 상상할 수도 없었던 눈보라에 결국 등반을 포기하고 만다. 이렇게 시작된 독일 원정대의 낭가파르밧 도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9년까지 5차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게다가 기상악화로 인한 눈사태로 대원 20명이 목숨을 잃게 되는 참극까지 발생하게 된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과 전쟁에 따른 피해복구 등으로 잊혀졌던 독일의 낭가파르밧 정복의 꿈은 1953년 의사 헤를리히코퍼 박사가 이끄는 6차 원정대에 의해 이루어진다. 모두 게르만혈통으로 구성된 원정대원들 중 오스트리아인 헤르만 불은 16시간 30분만에 정상에 오르며 독일 정부의 국가적 염원을 성취하기에 이른다. 이후 낭가파르밧은 전후 독일 재건의 상징적인 모델이 되었고, 독일 국민들의 단합된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 헤를리히코퍼 박사와 그의 원정대에 의한 도전이 이어졌지만 헤르만 불 이후 단 한 차례도 정상 등반에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독일인들 사이에 점점 잊혀져 가던 낭가파르밧은 1970년 헤를리히코퍼 박사가 다시 원정대를 모집해 당시 무명에 가깝던 라인홀트와 건터 메스너 형제를 원정대에 포함시키면서 독일의 낭가파르밧 도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 <운명의 산 낭가파르밧>은 헤를리히코퍼 박사와 라인홀트 메스너의 만남과 대립 등의 관계를 통해 독일인들에게 낭가파르밧이라는 곳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는지에 대한 부분까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관심을 더한다.  

[김종권 기자 kjk2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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