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413건 ]
[청로 이용웅 칼럼] 꽃잎이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더라 & 도연명
[청로 이용웅 칼럼] 꽃잎이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더라 & 도연명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봄에 피어나는 벚꽃은 수많은 거리를 아름답게 꾸미고/ 밤이면 흰 눈처럼 환하게 밝힙니다./ 그러나 벚꽃이 피어있는 시간은 길게는 일주일,/ 이마저도 새벽에 비라도 내리면 금방 땅에/ 떨어지고 꽃은 져버립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년의 때는 우리의 삶 속에서 흰 벚꽃처럼 / 아름답고 순수한 순간입니다.// 가장 찬란하고 아름답게 보내야 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나면/ 엄청난 후회가 따릅니다./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시간은/ 아마도 20대 청춘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청춘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때 그럴걸”이라고/ 후회하곤 합니다./ 존재만으로도 찬란한 시기,/ 더 뜨겁게 사랑하고 배우며 힘쓰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어느 시인의 노래 “꽃잎이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더라” 입니다. 시인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중국 도연명의 노래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하루에 새벽은 한 번뿐이다./ 좋은 때에 부지런히 힘쓸지니/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도 함께 했습니다.// 도연명(陶淵明)/ 출생 : 365년 // 사망 : 427년! 동진, 유송 대의 시인으로 당나라 이후 남북조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습니다. 동진 시대 지방 하급 관리로 관직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일평생 은둔하며 시를 지었습니다. 술의 성인으로 불리며, 전원시인의 최고봉으로 꼽힙니다. 대표작으로는〈오류선생전〉,〈도화원기〉,〈귀거래사〉등이 있습니다. 필자가 그를 이야기하는 것은 과거 <귀거래사〉병풍과 함께 했었기 때문입니다. [도연명은 중국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은둔자, 전원시인의 최고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陶潛(도잠/365~427): 동진. 송대의 시인. 강서성 심양 출신. 자는 연명(淵明) 또는 원량(元亮).시호는 정절(靖節)/ 문집으로는 [정절선생 문집] 10권 等] 歸去來辭 [돌아가자꾸나!/ 歸去來兮 귀거래혜/ 전원이 거칠어지려 하니/ 田園長蕪 전원장무/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胡不歸 호불귀/ 이미 스스로 마음이 먹고사는 데에만 매였으니/旣自以心爲形役 기자이심위형역// 어찌 근심하며 홀로 슬퍼만 하겠는가?/ 奚惆愴而獨悲 해추창이독비/ 이미 지나간 것은 바로잡지 못함을 깨달았고/ 悟已往之不諫 오이왕지불간/ 나중에 오는 것은 고쳐 갈 수 있음을 알았도다/ 知來者之可追 지래자지가추// 실로 길을 잃었으나 그것이 아직 멀지는 않았으니/ 實迷塗其未遠 실미도기미원/ 오늘이 옳고 어제가 잘못됨을 깨달았도다/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배는 흔들흔들 가벼이 떠오르고/ 舟搖搖以輕颺 주요요이경양/ 바람은 한들들 옷자락을 날리도다/ 風飄飄而吹衣 풍표표이취의/ 길 가는 나그네에게 앞길을 물으니/ 問征夫以前路 문정부이전로/ 새벽빛 희미하게 저무는 것이 한스럽도다/ 恨晨光之熹微 한신광지희미/ 이윽고 누추한 집을 바라보고// 어찌 마음대로 가고 머무는 대로 맡기지 않겠는가?/ 曷不委心任去留 갈불위심임거류/ 무엇 때문에 서둘러 어디를 가고자 하겠는가?// 胡爲遑遑欲何之 호위황황욕하지/ 부귀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富貴非吾願 부귀비오원/ 임금 계신 서울이야 기대할 수 없어라/ 帝鄕不可期 제향불가기/ 좋은 시절이라 생각되면 외로이 가기도 하고/ 懷良晨以孤往 제량신이고왕/ 혹은 지팡이를 꽂아 두고 김매고 북돋워 주리라/ 或植杖而耘耔 혹식장이운자/ 동녘 언덕에 올라서 조용히 읊조리고/ 登東皐以舒嘯 등동고이서소/ 맑은 물에 이르러서 시를 짓노라/ 臨淸流而賦詩 임청류이부시/ 얼마간 변화에 따라 다함으로 돌아가리니/ 聊乘化以歸盡 요승화이귀진/ 저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樂夫天命復奚疑] 365년 강서성 심양(潯陽)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이 잠(潛), 자가 원량(元亮) 또는 연명(淵明)! 도연명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은거에 대한 염원을 밝혔습니다. 그는 작품 서문에서 시집간 여동생의 죽음으로 관직을 버린다고 했지만, “돌아가자! 전원이 황폐해지려고 하는데 어찌 아니 돌아갈쏘냐(歸去來兮 田園將蕪 胡不歸).”라는 문구로 은둔을 선언했습니다. 〈귀거래사〉는 모두 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장에는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 관직 생활을 그만두고 귀향하게 된 동기와 상황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장에는 집으로 돌아온 후 비록 비좁은 공간이지만 벼슬살이를 할 때처럼 마음 쓸 일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술도 마시고 정원도 산책하는 등의 생활이 그려져 있습니다. 세 번째 장은 혼탁한 관직 생활에 다시는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 친척들과 정담을 나누고 거문고와 독서를 즐기는 외에, 농사도 지으며 가끔 수레를 타고 산길을 달리거나 배를 저어 깊은 계곡을 찾아가는 등 전원생활에 대한 감흥을 담았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장은 짧은 인생의 여정에서 벼슬을 하거나 그만두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어차피 신선이 되지 못할 바에는 가끔 밭에 나가 김매고, 언덕에 올라 크게 노래 부르고, 맑은 물가에 나가 시를 읊는 등 자연에 순응하며 하늘의 뜻에 따라 소박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했습니다. 낙향(落鄕)한 도연명은 이후 20여 년간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산수와 시와 술을 벗 삼아 전원생활을 했습니다. 도연명이 은둔 생활을 시작할 무렵 동진 왕조는 멸망의 기운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동진 시대의 혼란은 훨씬 전인 4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습니다. 347년에는 명제의 사위인 환온(桓溫)이 반란을 일으켰고, 402년에는 손은이 오두미도 교단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환온의 아들 환현(桓玄)이 반란 진압을 핑계로 제위에 올랐으나 장군 유유가 이 두 난을 진압하고 420년에 남조 송나라를 세웠다. 도연명이 은둔한 지 15년이 지난 해였습니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한 도연명은 339자(字)의 “귀거래사”에서 “얼마간 변화에 따라 다함으로 돌아가리니/ 저 천명을 즐길 뿐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라고 했습니다. 필자가 폭염 속에서 삶을 되돌아보며 “귀거래사”를 다시 읽은 것은 지난 삶을 재조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필자의 삶이 ‘나그네 세상’? 우리 남은 삶은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꽃잎이 떨어져 바람인가 했더니 세월이더라!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22학년도 제1학기 終講과 방학, 교육부에 대한 斷想
[청로 이용웅 칼럼] 22학년도 제1학기 終講과 방학, 교육부에 대한 斷想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2022학년도 제1학기! 경남대학교에서 개설한 사이버강좌 [무대화술로 푸는 취업성공전략]은 경남대와 RUCK(한국지역대학연합), KCU(한국대학가상교육연합), SDU(서울디지털대학교)의 교과목으로, 2022년 1학기에 경남대를 비롯하여 경기대, 계명대, 울산대, 전주대, 한남대, 조선대, 창원대 학생들이 수강신청! 이 강좌 등 필자의 모든 과목은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한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촬영, 제작됩니다. 제작된 필자의 교과목은 모두 홈페이지가 있습니다. [이용웅교수의 동북아 역사와 문화(http://cafe.daum.net/NEAsiaLYW)-7686명/ 이용웅교수의 무대화술로 푸는 취업성공전략 (http://cafe.daum.net/knuifes)-8402명/ 이용웅교수의 이미지메이킹과 자기관리 (http://cafe.daum.net/lywimagemaking)-12,118명/ 이용웅교수의 북한의 문화예술(http://cafe.daum.net/nkcywoonglee)-5,505명(2022.8.3. 회원수)] 필자는 2022년 3월 2일, 제1학기 ‘대학교 비대면 강의’를 시작! 강의 과목은 모든 대학의 정규과목(3시간/3학점)으로, [동북아 역사와 문화/ 동북아 정세(情勢)와 문화/ 무대화술로 푸는 취업성공전략/ 이미지메이킹과 자기관리/ 클릭, 즐겨찾기·북한문화예술] 입니다. 2022학년도 제1학기 수강대학은 필자의 경남대(경남)를 비롯하여 경기대&총신대&(서울), 중부대,성결대&안양대(경기), 부경대(부산), 계명대(대구), 한남대(대전), 조선대(광주), 울산대(울산), 전주대(전북), 창원대(경남) 등등(等等)이었습니다. 경남대학교 수강학생은 교육부 덕분(?)에 많이 줄었습니다. 가령 학생 500명이 정원인 강의는 최고 250명만이 수강! 교육부의 대단한 정책의 결과입니다. 대부분의 대학에는 500명이 수강할 수 있는 대형 강의실이 거의 없습니다. 부정행위 방지 때문에 500명 정원이면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바람에 학생 수가 많이 줄었습니다. 교육부 수장(首長)님! 고맙습니다! 필자는 온라인 강의를 20 여년 해왔습니다. 교육부에 인터넷 교육을 해본 공무원은 얼마나 되나요? 유구무언(有口無言)입니다. 필자는 평생 ‘교육(敎育)’과 함께 해왔습니다. 교육부 수장은 대학에서 비대면 강의를 해본 적이 있나요? 교육부(敎育部)! 모체는 8·15해방 이후 설치된 문교부와, 1962년 6월 경제기획원 내 기술관리국에서 1967년 독립한 과학기술처입니다. 문교부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인 1948년 11월 4일 조직개편을 시작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거쳐 1990년 교육부로, 2001년 교육인적자원부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한편 과학기술처는 1998년 2월 과학기술부로 개편되었습니다. 2008년 2월 정부조직법 개정에 따라 교육인적자원부와 과학기술부 일부가 통합하여 교육과학기술부로 개편되었습니다. 2013년 다시 교육부로 개편되어, 부총리급으로 격상되었고, 과학기술 관련 업무는 신설된 미래창조과학부로 이관되었습니다. 교육부는 교육에 관한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중앙행정기관. 인적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여, 학교교육과 평생교육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학술을 진흥하는 등 교육·사회·문화 분야의 정책을 총괄하고 조정합니다. 윤석열 정부의 첫 박순애 교육부 장관 후보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무·사법·행정분과 인수위원을 맡았던 행정·정책 전문가! 여성 최초 행정학회 회장, 여성 최초 기획재정부 공공기관 평가단장, 두번째 한국인 유엔 공공행정전문가위원회(CEPA) 위원 등의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1965년생으로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숭실대 행정학과 조교수를 역임했고, 서울대 행정학과 교수를 맡고 있습니다. 훌륭한 대학교수입니다. 하지만 교육부 장관 적임자?? 윤석열 정부의 인사청문회 패싱, 박 교수의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 패싱은 인사청문회 제도를 무력화시켰습니다. 이는 우리 민주 헌정의 중요한 성과에 대한 무시이며, 대통령 인사 전횡이라는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대통령, 국무총리, 경제부총리 다음으로 서열이 높고, 또 대한민국의 지성과 덕성을 대표하여야 하는 교육부장관에 대한 졸속 임명은 스스로 우리 정부의 수준을 격하시키는 일이 아닌가 하는게 중론(衆論)! 음주운전 등 박 부총리는 각종 의혹이 불거졌음에도 국회 원 구성이 지연됨에 따라 인사청문회를 거치지 않은 채 임명됐습니다. 과연 그럴만한 인물인가? 장관 취임 후 하는 일을 보면 엉망? 박순애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취임(2022.7.5.)! 그런데 장관 취임 직후부터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최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만 5세로 낮추는 학제 개편안을 발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도! 학제 개편은 교육법이 제정된 이후 76년만에 처음 바뀌게 되는 중요한 사안인데도 교육계나 학부모는 물론 시도교육청과도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이력서에 “교육‘이라는 단어가 전혀 없는 교육부 장관! 한 신문은 [국민의힘도 절레절레…'논란의 스타 장관' 박순애]라고! 교육자 같지 않은 장관이라는 것이 중론(衆論)! 영국 교육부는 7월 7일(현지시각) 제임스 클레벌리 외무부 차관이 신임 장관으로 임명됐다고 밝혔습니다. 전 고등교육 차관의 교육부 장관 취임을 공지한 지 이틀 만이었습니다. 미셸 도닐런 전 장관은 나딤 자하위 전 장관이 재무부 장관을 맡게 되면서 후임자로 임명됐습니다. 도닐런 전 장관은 존슨 전 총리의 측근으로 알려졌으나 연이은 추문으로 지지를 잃은 보리스 존슨 전 총리의 사퇴를 압박하기 위해 취임 35시간 만에 사임했습니다. 2022년 1학기에는 1,736명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습니다! 여름계절학기에는 경기대, 울산대, 부경대 학생들과 무더위를 이겨냈습니다. 여름방학 지나면 곧 제2학기! 벌써 경남대(필자: 극동문제연구소 초빙석좌교수 소속)는 8월 9일~11일 수강 신청! 서울디지털대는 이미 [동북아의 역사와 문화], [무대화술로 푸는 취업성공전략]을 이미 채택 했고, 한국대학가상교육연합(KCU)은 경기대, 창원대 등이 채택을 시작했습니다. // ★국가의 운명(運命)은 청년의 교육(敎育)에 달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BC 384)// ★대학(大學)은 빛과, 자유(自由)와 학문(學問)만을 하는 장소이어야 한다.-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1804~1881) 靑魯 李龍雄/ 명예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22년 8월 북한 달력-금수강산의 8월 & 낙동강(洛東江)
[청로 이용웅 칼럼] 22년 8월 북한 달력-금수강산의 8월 & 낙동강(洛東江)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북한도 매년 달력을 발행합니다. 북한에서 발행한 북한의 2022년 달력 표지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주체 111 (2022)” / “조선 · 평양” 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리고 평양의 고층 빌딩 사진과 아름다운 장미꽃 등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022년 새 달력 ‘8월’에는 [해빛 넘치는 문수물놀이장]이 전면을 장식했습니다. 숫자가 赤色인 날은 15일과 25일입니다. 8월 15일[조국해방의 달], 주체49(1960) 8.25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혁명무력에 대한 령도의 첫 자욱을 새기시였다]가 1면에 쓰여 있습니다. 25일이 무슨 빨간 날? 유구무언(有口無言)! 그리고 그 아래에는 [말복 8.15], [립추 8.7/ 처서 8.23]도 있습니다. 또 달력 8월에는 28일 ‘해군절’과 ‘청년절’이 있습니다. 금수강산(錦繡江山)의 8월! 영원히 잊지 못할 1950년 8월의 ‘낙동강방어선전투(洛東江防禦線戰鬪)’! 국군과 유엔군이 1950년 8월, 낙동강 부근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한 전투! 국군은 북한군 기습공격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엔군의 참전 지원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전력의 열세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지 못하여 1950년 8월 1일에는 낙동강 선까지 후퇴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부산 점령을 목표로 한 그들의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낙동강 방어선에서 격퇴하게 되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저지선이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탱하지 못하면 우리 정부는 제주도로 이전하여 제2의 대만이 되거나 아니면 해외에 망명정부를 수립해야 될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또 당시 맥아더 원수가 구상하고 있는 인천상륙작전도 낙동강 방어선이 유지될 때에야 성립될 수 있는 것! 국토의 약 10%에 불과한 부산교두보를 간신히 확보한 선(線)에서 북한군의 전쟁목표를 분쇄했으니, 전범(戰犯) 김일성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영원한 전범 김일성! 낙동강(洛東江)!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咸白山/1,573m)에서 발원하여 영남지방의 중앙저지(中央低地)를 통하여 남해로 흘러드는 강! 낙동강은 <동국여지승>에 ‘낙수(洛水)’로 표기되어 있으며 <택리지>에는 ‘낙동강’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래 ‘낙동’이란 가락의 동쪽이라는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영남지방의 거의 전역을 휘돌아 남해로 들어가는 낙동강은 가야와 신라 천년 간의 민족의 애환과 정서가 서려 있고, 임진왜란과 6·25전쟁의 비극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영남인들의 삶의 젖줄이 되어왔습니다. “8월의 강이 손뼉친다./ 8월의 강이 몸부림친다./ 8월의 강이 고민한다./ 8월의 강이 침잠한다./ 강은 어제의 한숨을, 눈물을, 피흘림을, 죽음들을 기억한다.// 어제의 분노와, 비원과, 배반을 가슴 지닌/ 배암과 이리의/ 갈라진 혓바닥과 피묻은 이빨들을 기억한다.// 강은 저 은하계 찬란한 태양계의/ 아득한 이데아를/ 황금빛 승화를 기억한다.// 그 승리를, 도달을, 모두의 성취를 위하여/ 어제를 오늘에게, 오늘을 내일에게 위탁한다.// 강은 8월의 강은 유유하고 왕성하다./ 늠름하게 의지한다. 손뼉을 치며 깃발을 날리며, 오직/ 망망한 바다를 향해 전진한다”(박두진/ 8월의 강) 박두진의 “8월의 강”에서 필자는 ‘낙동강’을 봅니다. 1976년 마산에 보름자리를 마련한 뒤 자주 만난 낙동강입니다. 다음은 가수 최백호가 작사·작곡한 “낙동강”입니다.-“낙동강 짙은 물/위에 구슬픈/비 내리는데/ 미움도 정이련가 울고있는 물새야/ 찬바람에 흔들리는 저 갈대처럼/ 떠나는 사람들을 원망을 마라/ 처음부터 알고 있던 이별인 것을/ 너 만은 죽지마라 변하지마라”- 강(江) 노래도 좋지만 살면서 만났던 ‘낙동강 7백리’는 ‘아름다운 추억’! 누군가는 ‘낙동강’을 ‘7백리 생명의 강’이라고 하고 “낙동강 7백리 흘러 흘러/ 하얀 모랫벌 이루고/ 뭇 생명들 뛰놀던/ 아릿따운 옛 풍경들은/ 다 어디 가고 녹조라떼냐/ 물고기도 더는/ 살 수 없이 된 강이여/ 22조원 혈세를/ 쏟아부은 4대강 사업/ 삶터에도 재앙을/ 부르고야 말았구나/ 하굿둑 보가 흘러야 할 낙동강물을/ 멈춰 썩게 하였네/ 인간마저 못 살게 된오늘이 뉘 탓이랴”라고 슬퍼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아파 신음하는 낙동강! 낙동강의 역사와 문화유적! 낙동강 유역에는 역사시대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유적이 곳곳에 산재하여 있습니다. 경상북도 칠곡군 석적면 중동(中東) 일대는 특히 영남지방의 대표적인 구석기시대 유적에 해당되는 지역입니다. 낙동강 동편의 중동 일대에서 구석기인들이 사용하였던 돌망치 등 석기가 발굴되었습니다. 낙동강 유역의 선사문화는 신석기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체로 한반도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를 거쳐 두만강으로부터 들어왔다면 영남지방의 신석기문화는 낙동강 유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한반도의 신석기문화로 대표되는 빗살무늬토기는 압록강·대동강·한강·낙동강·서남도서(西南島嶼)·두만강 등의 여섯 군으로 나누어집니다. 역사시대로 접어들면서 낙동강 유역의 영남지방은 특히 청동기와 초기 철기문화의 꽃을 피운 곳입니다. “팔월이라 한가을 되니 백로 추분 절기로다/ 북두칠성 자루돌아 서쪽 하늘 가리키니/ 선선한 아침 저녁 가을이 완연하다/ 귀뚜라미 맑은 소리 벽 사이에 들리누나/ 아침에 안개 끼고 밤이면 이슬 내려/ 온갖 곡식 열매 맺고 결실을 재촉하니/ 들에 나가 돌아보니 힘들인 보람 나타난다/ 온갖 곡식 이삭 패고 무르익어 고개 숙여/ 서쪽 바람에 익는 빛은 누런 구름처럼 일어난다/ 흰눈 같은 면화송이 산호 같은 고추송이/ 처마에 널었으니 가을 볕에 맑고 밝다”(농가월령가 8월령) / “農家月令歌 八月令”은 금수강산·한민족의 8월 노래입니다. 2022년 8월! 금수강산의 8월! 아직도 콜로나가 지구촌을 덮고 있습니다. 미구(未久)에 박멸(撲滅)될 거라는 말도 있지만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북한은 상황이 아주 나쁩니다. 김정은 위원장! 남한에서 콜로나 백신으로 도움을 준다면 찍소리 말고 ‘고맙습니다’하고 받으시오. 또, 남한 정부를 향해 “위험한 시도는 즉시 강력한 힘에 의해 응징될 것이며 윤석열 '정권'과 그의 군대는 전멸될 것”이라고 협박하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시오, 김 위원장! ‘낙동강방어선전투’를 듣도 보도 못했을 위원장! ‘낙동강 7백리’의 아름다움을 사진으로라도 구경하고, 한민족의 “농가월령가”를 배워보길 권합니다.! 우리 모두 8월을 슬기롭게 보내요! 靑魯 李龍雄/ 명예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의 7월 27일과 세계 각국의 전승절(戰勝節)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의 7월 27일과 세계 각국의 전승절(戰勝節)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북한의 홍보 월간지 <조선>은 “위대한 령도, 승리의 7.27”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기사는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인 7월 27일을 맞을 때마다....미제가 조선전쟁에 저들과 남조선괴뢰군만이 아닌 일본과 15개 추종국가의 무력까지 동원하였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는 ‘허위사실 유포’로 시작됩니다. 이 글은 “나라가 해방되여 5년, 공화국이 창건되고 인민군대가 정규군으로 된지 겨우 2년밖에 안 되는 청소한 조선과 100여 차례의 전쟁에서 패전을 몰랐다는 미제와의 대결은 우리 군대와 인민에게 엄혹한 시련이 아닐수가 없었다.”로 이어졌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전쟁을 일으키다니... 그리고 “조선전쟁을 도발한 장본인인 미국대통령 트루맨의 신세도 달리 될수 없었고 제2차세계대전시기 련합군의 총사령관이였던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신공세> 기도도 박살났다. 결국 미제는 전쟁에서 패배를 자인하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것이다. 제국주의 련합세력에게 심대한 군사 정치적 패배를 안겨준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는 오늘 김정일령도자의 선군령도와 더불어 빛나게 계승되고 있으며 우리 군대와 인민은 앞으로도 오직 백승의 한길로만 줄기차게 전진해 나갈 것이다.”로 끝을 맺었습니다. 한국전쟁(1950.6.25-1953.7.27)에서 미군 54,246명이 목숨을 잃었고, 8,176명이 여전히 실종처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009년, 미국 상·하 양원 의회가 7월 21,24일 한 법안을 통과시킨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한국전쟁 참전용사 인정법안'입니다. 그때 2009년 7월 27일 오전에 오바마 대통령이 "조기게양"을 임시조치로 지시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모든 연방정부 기관들은 모두 7월27일에 조기를 게양했습니다. 미국의 국가 기념일이 1년 365일 중에 총 19일이 되는데, 미국에선 5월 마지막 주 월요일의 참전용사 추모일(Veterans Memorial Day)과 7월 27일 (한국전쟁 정전일: Korean War Armistice Day)에 조기게양을 했습니다. 북한은 이때가 되면, 다채로운 행사를 펼칩니다. 그런데 2022년에 새로운 소식! 한 현지 소식통은 북한은 [6.25-7.27 반미공동투쟁월간]을 선포하고 청년들에게 반미교양과 전쟁의식 고취에 주력하고 있지만 청년들의 반응은 냉담하다고 밝혔습니다. 함경북도 무산군의 한 소식통은 7월 24일, 소식통은 “올해도 6.25전쟁 72주년을 맞으며 공장 기업소 문화회관과 정문 앞에는 미제가 또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면 청년들이 앞장 서 전쟁도발자들을 무찌르고 최고존엄을 지켜내자는 선전화와 반미구호들이 나붙어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소식통은 이어서 “그러나 요즘 청년들은 외국방송을 몰래 들으며 6.25전쟁 도발은 미국과 남조선이 아니라 우리가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다 미국은 세계적으로 강대국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 반미교양과 계급교양이 먹혀들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매년 열린 행사는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가령 직총중앙노동자 예술선전대와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 기동예술선동대 합동공연 '영원할 우리의 7.27'이 지난 22일 남흥청년화학연합기업소 문화회관에서 진행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7월 23일 보도했습니다. 사전은 “침략(侵略.侵略)”을 “남의 나라에 처들어가 자주권을 짓밟으며 략탈을 하는 것. 무력침략, 경제적 침략, 사상문화적 침략과 같은 것이 있다. 침략과 략탈은 제국주의의 본성이며 제국주의의 침략적 본성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침략군대”를 “=침략군/ 제국주의 침략군대는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과 략탈을 일삼고 인민을 살육하는 것을 본능으로 삼으며 소수의 착취계급을 위하여 복무하는 반인민적 군대이다.”라고 했습니다. 놀랍게도 이렇게 어휘를 설명한 사전은 북한이 자랑하는 <조선말대사전 3>입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반대로 설명을 했는지 놀라울 뿐 입니다. 북한은 자신들이 위 설명의 주인공임을 스스로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북한은 남침을 인정하고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내년부터 남‧북한 모두 한국전쟁 정전일(Korean War Armistice Day)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1953년 7월 27일는 결코 남‧북한 모두의 ‘승리의 날’이 아닙니다. 이제라도 북한이 잘못을 사죄하고 6.25로 목숨을 잃은 모든 이들을 추모해야 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2022년 7월 18일 “우리의 자위적 핵억제력은 믿음직하고 효과적”이라며 국방력을 과시하고 나섰습니다. 신문은 1면에 실은 “무적의 힘을 천백 배로 다지자”는 정론에서 국방력 강화 행보의 정당성과 의미를 부각하며 이같이 밝혔습니다. 신문은 6·25전쟁 당시 '미제 침략자들' 때문에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고 전하며 “다시는 이 땅을 그 어떤 원수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무적의 힘을 비축한 불패의 강국으로 안아 올리는 게 우리 인민의 신념이고 의지”라고 강조했습니다. 전승절! 승전국들이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날! 전승절(戰勝節)이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날! 대개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이 승리를 기리는 날로 나라마다 날짜는 조금씩 다릅니다. 중국과 타이완은 일본의 항복 문서가 접수된 9월 3일을 전승절로 기념합니다. 타이완의 경우 전승절 기념일에 3일 연휴를 가지며, 중국은 2014년부터 9월 3일을 전승절로 기념하고 2015년 법정 휴일로 지정했습니다. 중국은 특히 2015년 전승절을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 반파시즘 전쟁 승리 70주년(抗日战争暨世界反法西斯战争胜利70周年)’으로 정하고 열병식(閱兵式) 등 여러 행사를 진행합니다. 북한은 7월 27일을 “우리 인민의 제2의 해방날”인 “전승절(戰勝節)”이라고 합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한 날인 9월 2일을 ‘대일 전승 기념일(Victory over Japan Day)’로 정했습니다. 유럽의 경우 5월 8일을 ‘유럽 전승 기념일(Victory in Europe Day)’로 정해 기념하는데, 5월 8일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독일이 항복을 선언한 날입니다. 러시아를 비롯한 옛 소련 소속의 나라들은 모스크바 시간을 기준으로 5월 9일을 전승 기념일로 정해 관련 행사를 진행합니다. 7월 27일은 한반도의 ‘정전협정일’이지 전승절도 아니고, 전패절(戰敗節)도 결코 아닙니다. 북한의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은 사기꾼들의 망언(妄言)이며 헛소리입니다. 靑魯 李龍雄/ 명예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한반도의 랭면과 냉면 - 평양랭면과 진주냉면
[청로 이용웅 칼럼] 한반도의 랭면과 냉면 - 평양랭면과 진주냉면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남한의 <위키백과>는 “냉면(冷麵/랭면)은 한반도 고유의 찬국수 요리 중 하나로 삶은 국수를 찬 육수에 넣고 양념과 고명을 얹은 요리. 냉면은 칡, 메밀, 감자, 고구마 등의 다양한 가루를 이용하여 만든 면(麵)과 썬 오이 등의 생채소와 배 한 조각, 그리고 고기와 삶은 달걀로 이루어진 음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냉면의 기원은 고려 시대 중기의 평양에서 유래했으며, 1973년 간행된 북한 서적에 의하면, 평양냉면은 현재 평양의 대동강구역 의암동 지역에서 처음 나왔으며, 메밀 수제비 반죽을 국수로 뽑은 것이 시초라고 했고, 고려 중기의 고문헌에는 냉면은 '찬 곡수(穀水)에 면을 말아 먹는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고려 때 책인 <룡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고려사람들이 손님들을 대접할 때 국수를 많이 썼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국수가 고려는 물론 그 이전에도 식생활에 이용되었으며 그 가공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643년에 간행한 시문집 <계곡집(谿谷集)>에 냉면(冷麵)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고 했습니다. 조선 후기 풍속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에는 “겨울철 제철 음식으로 메밀국수에 무김치, 배추김치를 넣고 그 위에 돼지고기를 얹어 먹는 냉면이 있다.”고 했습니다. 분명 “냉면(冷麵)은 한반도 고유의 찬국수 요리”입니다. 그뿐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평양랭면’이 마치 북한의 전유물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하건데 ‘평양랭면’도 ‘한반도 고유의 음식입니다. 그런데...2018년 4월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남측 구역 내에 있는 평화의 집에서 열렸을 때 북한 수장 김정은은 평양냉면이 북한 고유의 음식이라고 자랑하면서 “평양랭면 가져왔습니다.”라고 자랑!. 한마디로 가관(可觀)(?) 그때 못난(?) 남북인사들은 “平和의 象徵’이라고 합창! 유구무언(有口無言) 2022년! "평양에 와서 이름난 옥류관 국수를 처먹을 때는 그 무슨 큰일이나 칠 것처럼 요사를 떨고 돌아가서는 지금까지 전혀 한 일도 없다."-옥류관 주방장의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언필칭(言必稱) ’랭면‘이 ’평화의 상징’? ’좌우지간 냉면은 한민족 고유의 음식! 필자도 冷麪狂 입니다. 필자는 평양과 금강산 옥류관에서 ‘랭면’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필자는 그 맛보다 서울 종로4가 “곰보냉면” 맛이 최고였습니다. 올 여름 우린 북한 ‘평양랭면’보다 ‘서울 평양냉면’을 사랑하면서 避暑를! 三伏을 서울평양냉면과 함께! 여기서 북한이 자랑하는 ‘평양랭면’을 북한 자료를 통해 소개해 봅니다. [냉면은 만드는 법은 지방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메밀가루에 녹말을 약간 섞어 국수를 만든 다음에 편육·오이채·배채·쇠고기볶음·삶은달걀 등의 고명을 얹고 국물을 부어 만든다. 냉면국물로는 쇠고기를 고아 만든 육수, 꿩이나 닭고기를 고아 만든 국물, 또는 시원하게 익은 배추김치국물이나 동치미국물, 동치미국물과 육수를 섞어 만든 국물이 쓰인다. 식초·겨자·설탕 등은 먹을 때 넣도록 한다. 냉면은 지방마다 특징이 있어 평양냉면·함흥냉면, 그리고 진주냉면이 유명] 북한의 '조선료리협회'가 펴낸 홍보 책자를 보면,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평양의 특산음식은 산뜻하고 맛있고 영양가 높으며 약리적 가치가 큰 독특한 조선료리의 우수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1쪽)라고 했고, 대표적인 평양음식으로 '평양랭면'을 비롯 쟁반국수, 평양온반, 송편, 단고기국, 소고기전골, 소발통묵, 대동강숭어국, 잉어회, 녹두묵채, 감자지지개를 꼽았습니다. <이름난 평양음식>에는 "평양랭면은 촉감이 부드럽고 향기가 독특하며 입맛이 구수한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 때식("아침, 점심, 저녁에 먹는 음식")음식으로도 좋지만 술 마신 뒤에 먹는 음식으로 더욱 어울립니다."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북한의 가요 “평양랭면이 제일이야”의 가사입니다.; <1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 내 조국의 랭면/ 육수물이 시원하니 마음도 시원해 좋고 국수면이 참말 질겨// <후렴> 아-이 참말 제일이야/ 정신없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알 수 없게/ 그렇지 그래 그렇지 그래 / 정-말 그래 // <2절> 우리 민족 향기 넘쳐 나는/ 평양랭면 우리 자랑이야/ 한그릇을 먹고 나면 / 또 먹고 싶은 마음 / 그 누구나 하나같이/ 곱빼기를 요청하네// <3절> 우리 모두 함께 먹고 나면/ 온몸에는 새 힘 부쩍 솟네/ 내 조국과 내 민족을/ 더더욱 잘 알게 하니/ 돌아가는 마음속에/ 기쁨 가득 넘쳐나네.// 민족 향기 나는 평양랭면’ 자랑이라! 냉면 한 그릇에서 민족의 향기기 난다고! <조선료리전집>1권에 있는 ‘만드는 법(COOKING)’과 오늘날의 옥류관 냉면의 만드는 법이 좀 다릅니다. 이참에 북한과 남한이 함께 <조선료리전집>1권에 있는 “만드는 법”에 따라 남·북한 공동평양냉면을 만들면 어떨까요? 헛된 망상(妄想)? 어쨌든 ‘평양랭면’은 한민족·한반도의 음식 중 하나! 헌데 냉면 식재료는 남한 것이 최고 그래서 남한 냉면 최고! 남한 최고 냉면집은 서울 종로와 을지로 일대에도 있습니다. 필자는 이곳의 냉면을 평양 것 보다 더 좋아합니다. 식재료가 훨씬 좋습니다. 그리고 필자의 보금자리와 가까웠던 진주의 냉면이 늘 그립습니다. 진주냉면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유래 또는 발전된 냉면! 조선의 권번가에서 야참으로 즐겨먹던 음식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1960년대 이후로 사라졌다가 199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발행된 <조선의 민속전통> 식생활풍습 부분에 “랭면 중 제일로 여기는 것은 평양랭면과 진주랭면이다”라는 기록이 남북간 교류가 시작된 이후 대한민국에 전해져서 2000년대 재탄생한 음식! 진주냉면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쇠고기 육수에 멸치와 바지락, 마른 홍합, 마른 명태, 문어, 표고버섯 등으로 해물 육수를 만들어 뜨겁게 달군 무쇠를 육수에 반복해서 담가 육수의 비린 맛을 제거한 후 보름 정도 숙성시킨 것을 섞었으나 현재는 이 방법을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주냉면은 잘 익은 배추김치를 다져 넣고 쇠고기 육전과 지단 등 여러가지 고명이 얹어져 모양새가 매우 화려하다는 데에도 차이점이 있습니다. 진주시에서 개최한 '참진주 참음식 페스티벌'에서 진주 고유의 음식으로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는 체인점이 많이 등장해 진주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이제 ‘평양냉면’ 타령은 그만! 靑魯 李龍雄/ 명예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프랑스文學作品選(1)-싸르트르(Sartre)와 [存在와 無]
[청로 이용웅 칼럼] 프랑스文學作品選(1)-싸르트르(Sartre)와 [存在와 無]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인문학(人文學/humanities)은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경험적인 접근을 주로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며 사변적인 방법을 폭넓게 사용합니다. 서양에서 인문학에 대한 연구는 시민들에 대한 광범위한 교육의 기준으로서,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로마 시대 동안에, 4과(음악, 기하, 산술, 천문)와 함께, 3학(문법, 수사 그리고 논리)을 포함하여, 7가지의 자유 인문 학문의 개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들 과목들은 인문학에서 기술들 또는 “행위의 방법들”로써 강조되어, 중세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하나의 중요한 전환이 발생했으며, 그때 인문과학은 전통적인 분야로부터 문학 및 역사와 같은 분야로의 전환에 상응하는, 실용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학문적인 과목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습니다. 20세기에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에 의해 재차 논의되었습니다.] 필자(筆者)는 1963년 대학에서 불문학 공부를 시작한 이래, 문학과 관련된 사람들을 수없이 접했습니다. 비록 책 속에서지만 진실을 찾아 헤매는 많은 문호들을 만났고,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작가들도 직접 보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인물은 프랑스의 장-뽈 싸르트르 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이고 국제적인 스타”였으며 “고갈된 프랑스가 아직도 세계에 제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출 상품”인 실존주의의 주역이었던 싸르트르의 삶과 죽음, 특히 인간해방과 인간혁명을 외치며 공산당원 ․ 노동자 등과 인간의 자유 실현을 생각했던 그가 전후(戰後) 공산당 비판에 몰두했던 사실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삼팔선’의 위쪽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라는 극단적인 흑백논리와 민주․공산주의라는 양극 논리 속에서 성장한 필자에겐 싸르트르의 실존주의와 그의 공산주의적 사고(思考)가 거대한 파도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쓴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해일(海溢)도 글짓기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장-뽈 싸르트르(Jean-Paul Sartre/1905~1980)는 아내인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1908~1986)와의 계약결혼으로도 유명하며 보부아르와는 부부적인 관계 이외에도 학문적인 동반자로서 서로의 원고를 검토해주는 평생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실존주의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철학을 실존주의로 명명한 최초의 철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1913~1960)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자이자, 메를로-퐁티(Merleau-Ponty/1908~1961)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 및 현상학을 대표하는 문호(文豪)! 그의 별명은 ‘실존주의의 교황(敎皇)’! 1964년에 자전적 소설〈말/Les Mots/1963)>을 써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그는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데올로기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나는 자본주의가 준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그런데 당시의 노벨상위원이었던 라르스 일렌스텐(Lars Gyllensten)의 회고록에 따르면 노벨상을 거절했던 싸르트르는 정작 몇 년 후 생활이 곤궁해지자 변호사를 통해 노벨상위원회에 뒤늦게라도 상금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지만 위원회 측의 대답은 “나가라.”였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실존주의적 인간이었다고나 할까요? 혹자는 싸르트르가 1945년에는 실존주의자였으나, 후일 구조주의자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그의 대표작은 [소설] <구토(La nausée/1938)>, <벽(Le mur/1939)>, <자유의 길(Les Chemins de la liberté/1949)>, [철학서] <상상력(L'Imagination/1936)>, <상상계(L'Imaginaire)/1940)>, <존재와 무(L'Etre et le néant)/1943)>,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1946)>, <변증법적 이성 비판(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1960)>, <문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littérature?/1948)>, [희곡] <파리떼 Les Mouches/1943)>, <닫힌 방(Huis-clos/1944)>, <더러운 손/Les Mains sales/1948)>, <악마와 선신(善神)/Le Diable et le bon/1951)> 등. 그의 대표자 중에서 <존재와 무>를 소개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작가 싸르트르는 이 책에서 卽自存在(存在)와 對自存在(無)의 관계를 해명함으로써 현상을 성립시키는 존재의 구조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원제(原題) <L'Être et le néant : Essai d'ontologie phénoménologique>는 싸르트르의 주된 목적은 개인의 존재에 앞서 개인의 실존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책을 작성하면서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둔 것은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싸르트르의 주장에서 인간은 그가 ‘ens causa suid’라고 부르고 많은 종교와 철학자가 신과 동일시한 "완결"의 환상에 시달리는 피조물입니다. 그의 의식은 존재를 무화(無化)하는 것으로서, 어떠한 대상을 의식하는 것은 암묵리에 그 대상이 아닌 다른 것으로서의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자기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 곧 대자존재(對自存在)라고 불리며, 사물처럼 의식을 갖지 않은 것은 그 자체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 곧 즉자존재(卽自存在)라고 불립니다. 대자(對自)가 자유롭다는 것은 즉자(卽自)를 무(無)에 의해 침식하는 것이며, 대자는 즉자로부터 무에 의해 단절되어 있으므로 지탱이 없는 불안으로서 자기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싸르트르는 반성이 자기 기만적으로 즉자와의 일치를 구하는 불순한 그것이 아닌 순수하게 대자에 철저하여 자유로운 자기에의 전적 현전(全的現前)을 수행할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으며, 이렇게 해서 근본적 회심(回心)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순수반성 또는 정화적(淨化的) 반성의 동기 부여에 대한 연구를 과제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반성은 스스로 타자가 되려는 의식이며 다른 의식의 존재를 예상하지만, 의식은 대자존재인 동시에 대타존재(對他存在)이므로,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는 주체이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객체에 불과한 신체를 갖는 존재이며, 타인의 시선 밑에서는 그 주체성은 부정되고 자기에 속하는 세계가 상실되어 가는 것을 경험합니다...싸르트르는 이 책에서 즉자 존재(존재)와 대자 존재(무)의 관계를 해명함으로써 현상을 성립시키는 존재의 구조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끝으로 싸르트르의 소설 <구토(嘔吐)>와 함께 해봅니다. “긴요한 것은 그것이 우연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는 것을 정의한다면 존재라고 하는 것은 필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다만 단순히 거기에 있다고 하는 말이다. 존재하는 것은 나타나며 만나고 그냥 그대로이다. 허나 결코 존재하는 것은 연역(演繹)할 수는 없다. 이것을 이해한 사람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靑魯 李龍雄/ 명예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2022 북한달력 7월- 김일성과 여름에 대하여
[청로 이용웅 칼럼] 2022 북한달력 7월- 김일성과 여름에 대하여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원래 캘린더(calendar)란 말은 라틴어로 ‘금전출납부’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옛날 로마에서는 금전의 대차 관계를 매달 삭일(朔日)에 청산하는 풍속이 있어서 결국 금전출납부가 달력을 의미하는 말로 전용(轉用)케 되었던 것입니다. H.D.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숲속의 생활>에서 “캐나다 태생의 채벌군인 그가 가진 책이라곤 한 권의 달력과 한 권의 수학책 뿐 이었다. 달력은 그에게 일종의 백과사전이었다. 그는 달력 속에 인류 지식의 요약이 들어있다고 보았다.”라고 했습니다! 북한도 매년 달력을 발행합니다. 북한에서 발행한 북한의 2022년 달력 표지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주체 111 (2022)” / “조선 · 평양” 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리고 평양의 고층 빌딩 사진과 아름다운 장미꽃 등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022년 새 달력 ‘7월’에는 [북한 최대의 종합체육경기장인 능라도 경기장 등이 있는 대동강]이 전면을 장식했습니다. 숫자가 赤色인 날은 27일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초복 7.16/ 중복 7.26], [소서 7.7/ 대서 7.23]도 있습니다. 또 달력 7월에는 3일 ‘전략군절과 12일 ‘해양의 날’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지구촌 어디에도 없는 달력 속 문장들만 없으면 대한민국의 달력이라고 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문장은 [주체83(1994) 7. 8.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서거하시였다. / 주체 101(2012) 7.17.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칭호를 받으시였다. / 1894. 7. 10.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김형직 성생님께서 탄생하시였다. / 주체21(1932) 7. 31. 우리나라 녀성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강반섯녀사께서 서거하시였다. / 7.27.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 북한의 7월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아마도 ‘김일성 사망일(死亡日)’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최후의 만찬’도 없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북한의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1994년 7월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이 8일 오전 2시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신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질병과 사망원인에 대한 의학적 결론서”에는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심장혈판의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시였다. 겹쌓이는 정신적인 과로로 하여 19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였다. 즉석에 모든 치료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쇼크가 증악되여 1994년 7월 8일 2시에 사망하시였다. 1994년 7월 9일에 진행한 병리해부검사에서는 질병의 진단이 완전히 확정되였다”고 적혀있습니다. “죽음은 위대하다/ 우리는 웃고 있는/ 그의 입이다/ 우리가 생명의 복판에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우리의 한복판에서 감히 울기를 시작한다”는 시인의 생각에는 죽음이 곱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우는 것입니다. 더욱이 위대한 사람들의 죽음은 모두를 슬프게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고기값보다도 못한 시신 앞에서도 울고, “단불에 나비 죽듯‘해도 슬픔에 잠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을 노예로 만든 독재자들의 죽음 앞에서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권력으로 죽음을 거부해 보지만 시왕(屍王)은 그들에게 십왕차사(十王差使)를 어김없이 보냅니다. 그래도 죽음을 예감한 히틀러는 조금은 인간적이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알았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한 독재자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전범(戰犯)이면서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한 김일성은 죽을 때도 비인간적이었습니다. 한반도를 초토화시킨 독재자의 말로는 분명한 비극(悲劇!)! 그가 죽자, 많은 북한주민들은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요된 슬픔이었습니다. 강요된 통곡이었습니다. 반세기 가까이 백성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독재자의 죽음은 결코 슬픈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래전에 ‘포악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았어야 할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용케도 목숨을 부지해왔습니다. 그의 죽음이 자연사(自然死)든 아니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은 당연한 죄값이었습니다. “음악 명상을 즐겼고, ‘산삼꽃’에서 나는 산삼 향기를 들이마시면서 보양하고, 각종 한약재가 들어있는 베개를 베고 자면서 장수를 꽤했다.”는 김일성의 죽음에 대한 글과 말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슬픈 만가(挽歌)를 부른 사람도 있었겠지만, 죽음의 찬가(讚歌)를 부른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시(詩)로 표현되고 논문으로 발표되었으며, 공식적인 말과 뒷공론, 유언비어까지 다양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영결식’은 이틀 연기되었습니다. 이유는 끝없는 조문행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장의위원회는 7월 15일 “조의참가자들은 날을 따라 늘어나고 있다”고 하고 “인민들의 절실한 심정과 요구를 반영하여” 영결식은 19일, 추도대회는 20일 거행된다고 발표했습니다. 김일성의 ‘영결하는 의식’은 예정대로 거행되었고, 그의 시신은 “자애로운 어버이를 잃은 크나큰 슬픔에 가슴치며 목메어 흐느끼는 수백만 평양시민들과 인민군장병들의 눈물의 바래움을 받으며” 금수산의사당(현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되었습니다. 다음날 열린 추모대회도 아들 김정일 연출 속에서 행해졌습니다. 그런데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가 발표한 추모시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령전에”를 보면 기이한 점이 발견됩니다. 사자(死者)의 이름은 단 한번 불리우고, 김정일의 이름은 무려 6번이나 나옵니다. 다음 독재자 김정일에 대한 아부(阿附)(?)치고는 너무 빠른... 2022년 7월! 김일성이 죽은 초여름! 여름에 대한 설레임도 독재자 때문에 잊혀질 것! 하지만 여름은 우리에게 소중한 계절! 만일 ‘봄·가을·겨울’만 존재한다면 살 맛나지 않을 것입니다. 풍요(豐饒)의 계절! 녹음방초(綠陰芳草)의 여름! 코로나가 있어도, 여름은 개방적입니다. 마음으로 닫혀진 창(窓)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밖으로 열려진 여름 풍경은 외향적이고 양성적입니다. 여름의 숲은 푸른 생명의 색조(色調)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숲속에는 벌레들의 음향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은폐가 없고 침묵이 없는 여름의 자연은 나신(裸身)처럼 싱싱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른 7월 8일 저승에 간 독재자가 빨리 잘 죽었군요! 김일성 없는 여름! // “사람들은 모두 더위에 괴로워 하는데/ 나는 여름 해가 긴 것을 좋아하노라”(소동파/蘇東坡)// 폭염(暴炎)·화염(火焰)은 여름을 즐기다 보면 순간에 사라질 겁니다! 靑魯 李龍雄/ 명예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한국전쟁의 원흉 김일성, 강원도 화진포의 성(城)
[청로 이용웅 칼럼] 한국전쟁의 원흉 김일성, 강원도 화진포의 성(城)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누군가 “전쟁은 활발하고 훌륭한 역사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래선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비참한 전쟁으로 기록된 ‘6․25’가 발발한 지 72주년이 되는 지금도 우리 국민들은 여느 때처럼 잘 먹고 잘 자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한 일간지가 한국전쟁 발발 72주년, 남북한 화해 무드에 종전선언 가능성이 타진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헛된 꿈이지만! 그래서 더욱 ‘6. 25’라는 날을 가볍게 넘기는 것은 아닌지...우리 국민들은 삼백육십오일 내내 ‘분단의 아픔’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물론 분단의 현장에서 고난의 역사를 반복하며 ‘활발하고 훌륭한 역사’를 추구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괴상한(?) 주먹밥을 먹어보고 내뱉은 어린이들도 있고, ‘끊어져 버린 철도, 그리고 그 상처를 덮어주려는 듯 철길을 뒤덮고 있는 무성한 수풀’ 속에서 갈라진 비극의 땅을 혼(魂)으로 체험한 예술가들도 있습니다. 또 한국판 <안네의 일기>를 낳지 못한 한국문학의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전쟁문학에 대한 재조명도 있었습니다. 지구상에서 끝없는 전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끝없는 전쟁’이란 영화는 있겠지만, 전쟁은 영화처럼 시작과 끝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병법의 손자(孫子)는 “전쟁이란 국가의 중대사로 사생(死生)의 분기점이며, 흥망의 경계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어찌해서 ‘고스톱’도 아닌 전쟁판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만용(蠻勇)과 피의 살육(殺戮)을 일삼는 아레스신(神) 때문도 아니고, 미친 듯 도륙(屠戮)을 한 황폐의 여신 때문도 아닙니다. 전쟁은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의 소산일 뿐입니다. 그러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누구인가요. 한마디로 전쟁광(戰爭狂)들입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래 역사에 등장한 인물들 중에서 광적인 자(者)는 무수합니다. 현대사만 보더라도 히틀러, 무솔리니, 그리고 김일성 등이 있습니다. 1950년 평양의 군사신문인 <조선인민군>은 “남한이 6월 25일 이른 새벽에 38선 이북의 영토에 불의의 침공을 가해왔다”는 내각의 성명을 기사화했습니다. 그리고 사설에서 “조국통일의 날이 왔다! 모든 조선인들은 조국과 인민과 그리고 경애하는 김일성수령에 대한 사랑을 과시하며 독립과 통일을 위해 궐기해야 한다. 남조선인민들을 해방하기 위해 어서 전선으로 나가자”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기원은 분명히 밝혀졌습니다. “북한공산군은 아무런 정당성도 갖추지 않은 채 예고 없이 도발적으로 대한민국을 공격했다”고 딘 에치슨(Dean G. Acheson)의 단언이 아니더라도 증거가 명명백백(明明白白)합니다. 정부가 러시아로부터 6․25관련 외교문서목록을 받아내면서 모든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김일성의 남침’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김일성은 전쟁광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상당수 북한사람들은 오늘까지도 김일성을 ‘태양’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물론 총칼에 의한 폭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학자들까지도 김일성 찬양에 급급하다니...북한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지난 88년에 발행한 <문예론문집 4>에는 대부분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김일성이고, 그 작품들에 대한 평론의 기준은 아들 김정일의 권한으로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학자들은 김정일을 ‘시가문학’의 뛰어난 문학의 대가(大家)라고 했습니다. 김정일은 “위대한 수령님 높이 모시고/ 주체의 한길로 억세게 나아가리/ 사나운 풍랑도 폭풍도 헤쳐/ 조선을 이끌고 미래로 가리/ 아, 조선아 너를 떨치고”라고 썼는가 하면,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수령형상문학’을 탄생시켜 김일성을 영생(永生)하는 태양(太陽)으로 조작했습니다. 이런 ‘6․25’의 원흉(元兇)이 화진포에 존재(?)합니다.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은 외국인 선교사 셔우드 홀이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던 건물입니다. 김일성은 1948년부터 50년까지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 등 가족과 함께 하계휴양지로 화진포의 성을 찾았습니다. 1948년 8월 당시 6살이던 김정일이 소련군 정치사령관 레베제프 소장의 아들과 별장 입구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화진포의 성은 지상 2층 석조 건물로 지어져 당시 건축물로는 제법 화려함이 엿보입니다. 그러나 이 별장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훼손돼 방치되다가 2005년 3월 옛 모습으로 복원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강원도 고성군 홈페이지) 필자는 과거에 가끔 그곳을 찾았습니다. 수차례 방문했었던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은 여전했고, 보수한 흔적도 보였습니다. 강원도 고성군이 “2018년 2억 900여 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화진포 등 관광지의 시설개선. 화진포 관광지의 경우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이기붕 부통령 별장 구간의 화진포 관광지 걷기길(해변로) 보수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 주차장 주차선 정비(도색) △화진포 해변로(금구도 포토존) 정비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 진입로 노후 휀스 교체, 편의시설(쉼터) 조성 등이 추진.”했습니다. 시행했습니다! 그런데 계속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화진포의 성, 일명 ‘김일성 별장’은 원래 선교사 셔우드 혼의 예배당! 화진포의 성은 지상 2층, 지하 1층의 석조 건물로 당시 건축물로서는 화려한 모습이었습니다. 현재의 모습은 6.25 전쟁 당시 훼손되어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2005년 3월 복원한 것입니다. 내부에는 6.25 전쟁과 북한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진포의 성’은 ‘김일성별장’이라고 할 것이 아닙니다. 고성군이 ‘화진포의 성’을 달리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화진포길 280!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만든 셔우드 홀의 예배당은 유산입니다.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년~1991년)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캐나다의 의료 선교사였습니다. 고성군이 “화진포의 성(6.25전쟁이 담긴 예배당)”으로 명칭 변경하면 어떨는지요? 아무리 ‘김일성’에서라도 ‘6․25’ 원흉(元兇)의 이름은 한반도에서 지워져야 마땅합니다. 전쟁(戰爭)! "포탄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조그맣게 갈비 조각이 나요. 사람이 분해돼 버리고 아무것도 없어요. 펑 하고 터지고 나서 가 보면 (손바닥을 반절쯤 붙잡아 보이며) 나무에 창자 조각 요만큼 걸려 있고 살 토막 요만큼 걸려 있고 그래요. 포탄 맞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버린 게 아니라 (시체를) 찾을 수가 있어야 버리죠. (영화 고지전을 보았느냐는 질문에) ...그런데 그건 애들 장난이지."-김달육 육군 소령(퇴역), 6사단 7연대 2대대 6중대장, 8사단 16연대 1대대 2중대장으로 6.25 전쟁에 참전.//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백선엽 장군// 靑魯 李龍雄/ 초빙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1950년 유월 &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記憶)-[사진 한 장]
[청로 이용웅 칼럼] 1950년 유월 &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記憶)-[사진 한 장]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유년시절에 겪은 6.25! 한국전쟁에 대한 記憶은 예나 지금이나 생생합니다. 한국군의 창군요원 29%를 포함한 257,000여명의 희생”(국방군사연구소,<전사(戰史)> 제1호, 1999, p.142.)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간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의 주인공, 그 ‘전쟁광’의 후손들이 악몽의 1950년을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그 때 그 시절’에 대한 회상, 그것은 한민족 누구에게나 존재하며 그 회상 속에는 크고 작은 악몽들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수필 [사진 한 장 ]- “평상시 같으면 이 잡듯 뒤지는 조간신문을 숙취 때문에 건성으로 넘기는데 천연색 사진 한 장이 눈앞에 선명히 나타났다. 뚫어진 철모에 담긴 이름 모를 꽃 세 송이가 전쟁의 잔해들과 묘한 조화를 이룬 이 사진이 준 충격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6월 25일은 물론 해마다 유월이 되면 온 겨레의 가슴 속에 결코 망각될 수 없는 상흔이 되살아나 아픔을 주는데 이 정경이 한없는 비애를 더해 주었을 것입니다. 지금 시간은 육이오를 마감하는 자정! 방금 전에 시청한 <백마고지>라는 특집극의 영상 위에 노랑 꽃송이가 겹쳐 떠올라 뭔가 써야겠다는 생각을 확실히 하고 펜을 들었는데 막상 시작하려니 이어지지를 않는다.⇒ ⇒어제 새벽에는 산사(山寺)의 오솔길을 걸었다. 장맛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몰려왔지만 거룩한 희생의 음덕에 감사하며 걸었다. 외국차를 즐겨 마시는 명찰(名刹)의 노승도 혼백들을 위해 기원할 거라고 생각하니 밉지가 않았고, 기왓장에 이름 새겨주고 돈을 받아 챙기는 스님들의 모습도 얄밉지가 않았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벽을 가며 유년 시절을 회상할 수 있었다.⇒ ⇒충청도 두메에서 농군으로 사시던 할아버지는 개 콧구멍 만한 전답을 팔아 서울 근교로 이사를 하고 돈만을 위해 사셨다. 아무리 추운 겨울날에도 방고래에 불을 넣는 일은 결코 없었다고 했다. 그 덕분에 나는 넓은 대지 위에 세워진 대궐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자랐다. 갖가지의 과실수가 울창하였고, 계절 따라 피는 꽃들이 온 집안에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느 날 당황해하시는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올라간 산등성이에서 본 서울 쪽 하늘이 붉은 노을보다 더욱 붉었다. 놈들이 꽃밭에 불을 지른 것을 어린 나이에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늘에서 새우 젖 독 같은 것이 떨어지는가 하면 큰아버지 공장의 고무신이 지하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계속해서 걸은 생각이 난다. 안양 근처에서 배가 고파 토마토 밭에 들어가 허겁지겁 훔쳐 먹다가 가족들을 잃고 헤맨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말 기적적으로 어머니 품에 다시 돌아와 실컷 울었지만 개미 떼를 실어 나르는 것 같은 기차를 탔을 때는 재미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가 철도노조 간부로 재직하셨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편안하게 탈 수 있었던 것이다. 힘이 우리를 살린 모양이다. 헌데 두메의 고향, 충남 청양군 비봉면 청수리에는 불행히도 기찻길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 찾아간 곳이 외갓집이 있는 대천이었다. 거기서 외할아버지 따라 꼴 베러 다니며 쇠파리를 알았고 논고동을 잡는 재미에 거머리를 우습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천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책보자기 메고 신나게 논길을 달렸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장독대에 정한수 떠놓고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빌어주었던 외삼촌이 부상을 당하고 돌아오셨다. 그 때 외할머니께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장소는 다름 아닌 부엌이었다. 덕분에 누룽지를 훔쳐 먹을 기회가 없어져 버렸다.⇒ ⇒뒤 이어 일가들만이 모여 사는 이 마을에 군복을 입은 사람이 왔다만 가면 동네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모든 일이 재미가 없었다. 메뚜기 잡아서 구워먹는 일도, 감이나 밤을 따는 일도 모두가 따분하기만 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 덕분인지 전세(戰勢)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리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있을까. 땅 속에 묻어 두었던 값진 물건들은 고사하고, 숟가락 한 개 등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유년시절의 사진이 없다. 단 ‘사진 한 장’ 뿐! 사진들을 그 때 상실했다.⇒ ⇒살았던 세월의 한 조각으로 되돌아 본 산사의 새벽길은 유난히도 조용했지만 빗속의 산딸기는 선혈처럼 붉었고 계곡물 속에는 속세의 때가 가득했다. 나는 그 흙탕물 속에 빠져버렸다. 아니 내 모습을 담은 사진기가 물에 잠겨버린 것이다. 유월의 사진은 나와 인연이 없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신문 사진이 뇌리 속을 스쳐 다시 자세히 보았다. <평화를 부르는 “자연대합창” 155마일>이라는 제목 아래 괴뢰군파리가 아름답게 피어있고 어린 멧돼지 형제가 정겹다.⇒ ⇒‘용(龍)늪’의 끈끈이주걱이 ‘우아’하고, 아카시아 나무에 둥지를 튼 백로들의 찬란한 삶이 인상적이다. 비무장지대의 유월의 모습은 너무도 서정적이다. 정처 없는 피난의 여정이 시작되면서 남으로 향한 무수한 발길이 스쳐간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 우리의 자연에도 신록이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북녘 땅도 마찬가지일 게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황야에서 한 많은 종명을 고한 호국영령들을 생각하면 자연 사진에 심취할 수가 없다. 조국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다 이슬처럼 사라진 그분들의 명복을 빌 뿐이다.“.(이용웅,”사진 한 장“ // <한국수필> 1987년 봄호, 101~103쪽)] 언제가 한 일간지에 [6·25 전쟁 일어난 해는 1950년" 10대 7명중 1명만 맞췄다]라는 제하(題下)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기사는 “6ㆍ25 전쟁에 대한 이해와 인식 수준은 세대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나이가 어릴수록 상대적으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표적집단심층면접(FGI)에만 참가한 10대(7명)중 1명만이 6ㆍ25 전쟁이 ‘1950년에 일어났다’고 정확하게 답했고, 나머지 6명은 틀리거나 아예 몰랐다.”고 했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이 ‘진실이 망각(忘却)되어서는 안 되는 유년기(幼年期)’를 기억(記憶)해야 합니다. 새로 태어나는 어린이의 세계는 그의 직접적 환경에 제한되는 조그만 세계라고 합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라고 하는 壁 속에 갇힌다고 합니다. 그리고 점점 지식이 성장함에 따라서 이 벽이 물러간다고 합니다. 어린이 모두에게 ‘진실이 존재하는 유년시절’을! 靑魯 李龍雄/ 명예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2000년 6월 15일의 平壤과 22년 6월 15일의 한반도
[청로 이용웅 칼럼] 2000년 6월 15일의 平壤과 22년 6월 15일의 한반도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로동신문/ 2000년 6월 14일字]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6월 13일 평양비행장에 나가시여 평양을 방문하는 김대중대통령을 따뜻이 영접하시였다. 이날 평양비행장과 수도의 거리들은 뜨거운 환영분위기에 휘싸여 있었다. 반만년의 유구한 민족사에 특기할 4.8 북남합의서에 따라 민족분렬사상 처음으로 개최되는 이번 상봉과 회담은 7.4북남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민족의 화해와 단합, 교류와 협력, 평화와 통일을 앞당겨 나가는데서 전환적국면을 열어 놓는 력사적인 계기로, 민족주체적노력으로 통일성업을 기어이 이룩해 나갈 겨레의 확고한 의지를 과시하는 중대한 사변으로 된다..⇒ ⇒오전 10시 30분, 남측대표단을 태운 비행기가 비행장에 내리였다. 환영곡이 울리는 가운데 군중들은 꽃다발을 흔들면서 남측대표단을 환영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김대중대통령과 악수하시고 인사를 나누시였다. 김대중대통령과 함께 통일부 장관 박재규, 재정경제부 장관 리헌재, 문화관광부 장관 박지원, 대통령특별보좌역 림동원을 비롯한 남측대표단수원들과 기자들이 왔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와 함께 김대중 대통령은 조선인민군 륙해공군명예위병대를 사열하였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평양에서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2박 3일 동안 진행한 회담입니다. 6월 13일, 김정일 위원장은 북한 인민군 육.해.공군으로 구성된 의장대를 준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사열식, 분열식 등 의장행사를 해주었습니다. 6월 14일, 목란관 연회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 부부가 서로 다른 테이블에 앉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흩어진 가족 친지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면서 왜 대통령 자신부터 흩어진 가족을 만듭니까"라고 농담을 던지며 이희호 여사를 김 전 대통령 옆에 앉도록 한 일화가 널리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6월 15일! 아래 <남북(북남) 공동선언>! [로동신문/ 2000년 6월 15일字] “조국의 평화적 통일(평화적통일)을 염(념)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국방위원장)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대한민국 김대중대통령)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력)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최고위급회담)을 가졌다.(가지였다.) / 남북 정상(북남수뇌)들은 분단 역사상(분단력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리)해를 증진시키고 남북(북남)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하는데서) 중대한(사변적인)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1.남(북)과 북(남)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 2.남(북)과 북(남)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북측의 낮은 단계의 련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남측의 련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 3.남(북)과 북(남)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흩어 진) 가족, 친척 방문단(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비전향장기수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인도적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 4.남(북)과 북(남)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 5.남(북)과 북(남)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당국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께서) 서울을 방문하도록(하시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김정일국방위원장께서는)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 2000년 6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 김정일 / 위 선언문은 <이제 첫걸음입니다>(대한민국 국정홍보처)와 북한<로동신문>(2000년 6월 15일자)에 게재된 선언문을 하나로 합친 것입니다. 선언문에는 ‘분단의 아픔’도 내재되어 있습니다. 가령 북한은 “중대한”을 “사변적인”이라고 했습니다. 남한의 ‘사변’은 “①천재나 그 밖의 큰 변고 ②나라의 중대한 변사. 경찰력으로 막을 수 없는 난리”이고, 북한의 ‘사변’은 “①변스러운 사건 ②비상한 사건”입니다. 2022년 6월 15일 서울! 6·15 남북공동선언 22주년에 맞춰 '김대중 정치학교'가 문을 연다고 합니다. 김대중기념사업회는 2022년 6월 15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상과 정치, 리더십 등을 연구하고 교육하기 위한 김대중 정치학교를 개설한다고 밝혔습니다. 책임자는 김 전 대통령의 가치와 정신을 일깨우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치학교 1기 정규과정은 오는 17일 문 의장의 강의를 시작으로 모두 합해 12차례의 특강을 진행한 뒤 오는 9월 30일 종료! 강의 과정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정책들은 물론 민주주의와 인권, IT산업과 미래 먹거리 등 폭넓은 주제가 다뤄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2022년 6월 15일 平壤! <남북(북남) 공동선언>에 서명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 김정은은 목이 아픈지 말이 없었습니다. -孟子 曰 “효자의 至高는 어버이를 존경하는 것 이상으로 큰 것이 없다.”- 韓半島의 평화를 위해 부친 김정일의 偉勳(?)을 더럽히지 말기를! 그런데 아버지의 위훈을 모르는지... 북한 매체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5차 전원회의가 지난 6월 8일부터 사흘 동안 열렸다고 보도했습니다. 회의를 주재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주변 정세가 더 격화할 수 있다며 국방력 강화를 위한 목표 달성을 앞당겨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 위원장이 줄곧 강조한 자위권과 '강대강' 원칙은 이번에도 등장했습니다. [조선중앙TV]에 따르면 김정은은 ‘자위권은 곧 국권 수호 문제이며 우리 국권을 수호하는 데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을 우리 당의 강대강, 정면승부의 투쟁원칙을 재천명’했습니다. 하지만 7차 핵실험에 관한 언급은 아직 없습니다. 우리와 미국을 향한 메시지도 없었습니다. 이는 '주적' 개념을 꺼내든 윤석열 정부를 겨냥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정은 위원장! 정신 차리셔! 핵실험 꿈 깨고 아버지의 ’김정일 정치학교‘라도 차려 한반도 평화를! 靑魯 李龍雄/ 초빙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