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김명학, 제일제과 "가업을 이어오다"...19세 시작, 46년의 시간이 지나 가

김병학 가업을 이어 받을 터, "제일제과는 소비자에게 최고의 과자"
기사입력 2017.02.18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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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제과 생산제품
[선데이뉴스=정성남 기자]맹자는 비록 사회에는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구분이 있어야 하지만, 다만 그 구분은 순전히 사회적 분업을 통한 상호부조에 목적이 있다고 여겼다. 즉, 맡은 일이 다르기는 하지만, 요점은 모두가 서로를 필요로 하며 피차간에 서로 없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역설 한 것이다. 

손으로 이어져 오던 옛 전통에 대한 것들이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아날로그 문명에서 디지털 문명으로 이어지가는 문명의 사회로 변해갔다. 이렇게 변해가는 이 사회는 책임보다는 개인적 이익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많고, 이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한편, 개인과 집단의 이익보다는 숭고한 가업을 이어받아 오늘날 까지 그 전통의 맥을 이어오며 점점 우리로부터 잊혀져 가는 문화.예술.식품.음식 등에 대하여 꾸준히 그 대를 이어 우리 곁에 안주하게 만들어 주는 장인들도 있는 것이다.

경기도 양주에 소재하고 있는 제일제과는 잊혀져 가는 전통방식의 수작업 제조방식으로 과자를 만들며 그 맥을 지금까지 이어오는 대한민국의 유일한 제과 업체다.

제일제과는 "쌀과자를 비롯해 강정과 한과류 및 우리에게 익숙한 센베이" 등 10여 가지 종류의 과자를 제조판매 한다. 

김명학 제일제과 대표는 8남매의 장손으로 본인의 나이 19세에 작고하신 아버님의 가업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동화, 기계화된 작업에서 생산되는 과자류를 마다하고 오늘까지 40년 이상을 수작업으로 제품을 생산하며 소비자의 관심을 끌고 있는 제일제과 김명학 대표를 찾아가 보았다.

기자가 찾아간 제일제과는 경기도 양주시 삼일로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반갑게 맞이해 주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작업중이던 김명학 대표에게 인터뷰 시간을 요청하였다.  김 대표는 작업복 차림 그대로 혼쾌히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제일제과 김명학 대표
- 제과업에 언제부터 종사한 것인가

돌아가신 아버님이 하신 것을 그대로 대를 이어 했습니다. "처음 제가 시작한 것이 19세였을 때 이니 아마 금년으로 46년째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자신의 나이가 65세이니 역산한다면 그렇게 나온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아마 “그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그날부터 일을 시작 했어요”라고 멀어져갔던 시간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

- 장소와 당시의 과자제품 시장은 어땠는지요

서울이며 신정동입니다. 당시 아버님이 그곳에서 공장을 하시다 돌아가시고 그 때부터 일을 맡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만 해도 대한민국의 과자는 품질이 아주 낮은 편이었어요. 그렇지만 저의 아버님은 쌀 과자를 만들어 제품을 고급화 했습니다.

아마 제가 제 기억으로는 "아버님이 만드신 그 쌀 과자의 제품이 매우 까다로운 조건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품질이 엄청 좋았으니까요.... 이렇게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버님이 일본에 건너가 오랜 시간을 그곳 일본에서 기술을 습득하고 오신 것이 원인일 것”입니다.

- 그럼 아버님은 일본은 언제 들어가 배우셨나요

정확한 년도는 제가 너무 오래되었고 어렸을 때라 기억을 할 수가 없는데 아버님께서는 젊었을 때 들어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마 해방이 후 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일을 할 때나 그 이전 이후에 가끔 아버님께서는 일본에서 배운 이야기도 들려주시고 했습니다. 물론 지금 정확하게 기억은 나고 있지는 않으나 "일본에서 제과 기술을 배우시고 귀국 후 공장을 차려 그때부터 과자를 만들어 판매 하신 것"입니다.

- 이 일을 하시게 된 이유가 있으시나요

그 때는 아준 단순 했습니다. 아버님이 했으니까요... "제가 19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장손인 제가 본의 아니게 그걸 하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제가 8남매의 장남이다보니 밑에 동생들 학교도 보내야하고 먹고 살아야만 했어요. 그리고 그 동안 아버님 밑에서 일을 배워 왔으니 당시 결정은 당연히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시간이 일년에서 이년 그리고 십년으로 몇 십년으로 흐르면서 가업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지금의 "이런 맛을 낼 수 있는 제과 기술자가 없으니 이 기술을 가족 중 누구에게라도 이어 주어야 하는 책무도 생기게 된 것"입니다.

- 배우시는 과정은...

특별히 아버님이 가르키시거나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옆에서 보고 배우며 모르거나 실패를 할 때면 아버님에게 야단도 맞고 "질문을 하면서 몸과 육감으로 아버님 기술을 받아드린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제가 어리고 젊었으니까 조금 쉬운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것도 있으며 그 시절 자체가 모든게 힘이 들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자를 만든 만큼 장사가 잘 되었던 것 같습니다.

김 대표는 60년대와 70년대 대한민국에서의 센베이 과자 역시 고급 과자였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때는 제과점이 많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때 제과점은 지금처럼 저가가 아닌 고급제품을 판매하였다고 전해 주었다. 이후 식품점(구멍가게)이 슈퍼로 바뀌는 과정이 있었다며 그 때부터 영업을 시작했다고 알려주었다.

- 공장을 하신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이곳에서 공장을 한 것은 아마 일년 정도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오는 6월이 되면 딱 일년이 되는데 사실은 이곳 양주로 들어와 첫 공장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때 평생일한 것을 다 태워 재로 날렸습니다.

사실 이곳으로 오기 전에는 신정동에서 공장을 운영했습니다. 1977년도에 설립하여 1997년에 이곳으로 오기 전 김포에서 하다가 다시 이곳으로 이사를 왔으니 신정동에서만 20년을 공운영을 했습니다. 그 때, 아침이면 도매업자들이 줄을 서서 순번을 기다려가면서 저희 제품을 구매해 가고는 했습니다. 결국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운영하던 공장 지역이 재개발 지역으로 묶이면서 할 수 없이 이주를 하게 된 것입니다.

김 대표는 과거 신정동에서는 수출도 했다며, 지금도 수출은 간접적으로 조금씩 수출하고 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 직접적으로 수출도 할 계획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공장을 더 확장하면 좋겠지만 화재사건 이 후 아직은 정비가 다 되지 않아 시간이 필요하다며, 공장규모가 클수록 식재료나 위생 및 규모에 맞는 규제강화 등을 넘어야 한다며 그러기에는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 매출 등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하여 시기가 맞다면 그 때 공장을 확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이 공장도 조금씩 손을 봐 가면서 정리정도도 잘하고 위생관리고 눈에 보이게 하다보면 작은 규모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 특별히 위생관리와 제품 유통 기한은

김 대표는 좋은 재료가 우선이라고 말한다. 일단 “좋은 재료가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면서 이 재료를 보관할 시에는 철저히 그 재료에 맞는 "온도, 습도, 시간, 계절 등 모든 것을 감안해서 보관 사용"을 하는데, 이 역시 그래야만 양질의 제품이 소비자에게 다가설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조건이라는 생각에 변함없이 철저한 위생관리와 함께 유통기간을 엄수 한다고 설명했다. 또, 제일제과에서 나오는 제품의 거의는 그 유통기간이 6개월 짜리라고 덧붙였다.

- 그때 이후 전수받은 기술자나 특별한 기술이 있는지

그 시대에 이런 기술자는 "대한민국에 3명이 있었는데 그 분들 모두 작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 기술은 다른 곳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아마 아버님으로부터 전수받은 그런 기술자는 제가 “대한민국에 유일하며 마지막일 것“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제일제과만의 독특한 기술"이 있어요. 그게 말로는 설명이 안 돼는 것인데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과자는 날씨에도 예민합니다. 가장 먼저 "재료는 무조건 좋은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기술보다는 재료가 좋아야 하지만 저희 모든 과자는 수제품입니다. "정성과 손 맛이 들어가는데 아마 이게 최고의 과자를 만들어 내는 가장 큰 기술"이라고 말 할 수가 있을 겁니다. 물론 중간이나 처음은 일부 기계도 사용하지만 공정의 거의는 수제품으로 만들러 지고 있습니다.

김 대표가 이렇게 손맛을 고집하며 수제품을 고집하는가에 대하여 그 대답은 간단한 것이었다. “기계를 사용한다는 것은 대량생산에 목적이 있다”며, 대량생산은 솔직하게 맛이 나올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쌀 과자 종류나 과자 종류가 대량으로 생산하면 제품이 고급화가 될 수가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특히 “숙성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시간이 흘러야 좋은 과자가 나올 수가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김 대표는 이어 제일제과는 누룽지와 강정을 전문으로 하고 있으며 그 나머지는 일반적으로 약 10여가지의 과자제품을 생산 판매한다고 전했다.

또한 김 대표는 제일제과는 주로 대형고급 식당에 납품을 하고 있으며 그 동안 단골 고객 및 중간 업자들에 의해 영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곳도 영업라인으로 모색을 하고 있다"면서 “수제품으로 하려니까 고급시장이 그렇게 크지가 않다”고 언급했다. 그렇지만 다양한곳을 찾을 예정이며 과자라는 식품은 "남녀노소 누가나 다 먹을 수 있는 일반 식품이기에 독특한 제일제과만의 맛과 장인정신을 이어간다"며 좁고 치열한 시장경쟁에서도 버틸 수 있다고 자신했다. 결국 이런 것들을 감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과자를 드셔본 고객들이나 취급해 본 곳에서는 무조건 다시 찾아온다며, 이것이 영업의 저변확대가 아니겠냐며 힘주어 말했다.

- 가업을 이어받고 지금까지 많은 굴곡이 있을 것인데...

가업을 이어받은 김 대표는 19세의 나이에 가장이 되었다. 그리고 "8남매의 장남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이어야 하는 것과 함께 돌아가신 아버님의 공장을 이어받아 운영해야만 하는 위치가 돼 버린 것"이다.

지금 함께 "제일제과에 종사하고 있는 가족은 8남매 중 막내와 셋째"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셋째 동생도 저와 똑같은 공장을 하고 있으며 동생은 고속도로 휴게소 영업을 하고 저는 일반시장을 공략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돌이켜 보면 굴곡도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형제가 많다보니 고생이 많았어요, 빚보증으로 인해 부도도 겪었으며 그런 시련도 있었습니다.

또한 "가장으로서 8남매를 학교에 다 보내고 결혼을 다 시켜야 했는데 제가 다 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도 많았지만 아는 것이라고는 “아버님에게 이어받은 과자 기술이고 또 하나는 사명감”입니다. “직장이 아닌 직업으로 난 이것을 선택했기에 난 이걸 해야겠다”고 늘 그런 생각을 하며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마 지금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은데 그래도 장남이 아닌 늘 “부모라는 생각을 한 번도 내 머릿속에서 지운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 지금 별도로 기술을 전수하는 분은 있는지

그렇지 않아도 막내 동생에게 물려주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야 돌아가신 아버님도 기뻐하실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단언컨데 대한민국에 제가 유일하게 남은 기술자라는 생각에 이 기술이 끊어지는 것을 보고 싶지가 않아서입니다. 그래서 제가 못 다한 것을 지금 가르쳐 주고 있는 중입니다. 결국 소비자에게 정성을 돌려드린다고 생각하며 최고의 기술을 전수해 줄려고 생각 하고 있으며 실행 중입니다. 흔히들 말하지만 지금 "고전적 트랜드로 회귀하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아마 제과시장 역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김 대표와의 인터뷰 내내 자부심. 자긍심이나 이런 것들을 엿 볼 수가 있었다.

김 대표는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자신감과 준비됨이 있다고 밝혔다. 또 품질은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것들을 직업으로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고 개탄해 했다.  그러면서 "업자들이나 고객들로부터 맛에 대한 칭송을 받을 경우 더 맛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렇게 "제품에 대한 자신감으로 인하여 확장안을 늘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수작업으로 누릉지 강정인데 만약에 영업이 활성화 되면 기계로 돌려야 된다고 이같이 밝혔다. 그러나 "전체를 기계 시스템에 의한 생산에 의존한다면 그 제품은 졸좋 과자가 될 수가 없다"는 지론 속에 반 기계화 작업을 기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론은 "전체를 기계화 속에서 만들어 진 과자의 완제품은 원하는 만큼의 과자제품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과자의 형태나 문양 등이 만약 기계로 잘라 나온다며 정형화된 과자에 대한 소비자의 눈높이를 맞출 수가 없다고 역설했다.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과자시장의 저변확대를 꾀하고 누구보다 자신 있는 고전적인 과자를 상품화 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최 고급품질의 누룽지 과자와 함께 한과 종류의 제품으로 승부 할 예정입니다. 물론 고급화 전략에 따라 소비자와의 작은 갈등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맛과 퀄리트로 승부할 예정입니다. 물론 타사 제품과의 가격경쟁력 등에 대해 신경을 써야겠지만 "독자적인 제일제과 브랜드의 값어치를 소비자에게 전달할 것"입니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한, "제일제과 제품은 처음 소비자인 고객과 업자와의 첫 만남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이 비싸다는 말이 있지만",. 그러나 드신 후에는 그만한 값어치에 대해 손을 치켜들며 저희 제품을 지속적으로 꾸준히 애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제일제과만의 캐릭터가 안주한다는 증거이며 이를 토대로 좀 더 소비자에게 다가설 수 있는 별도의 전략을 수립할 계획"입니다. 더불어 "한국을 알릴 수 있도록 해외시장에 눈을 돌려 볼 것"이라며 해외시장 개척을 말해주었다.

김 대표는 이어 한과나 과자 시장에 대해서 제품이 고급화만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정도 수준에 맞먹는 제품과 이를 뒷 받침 할 수 있는 작은 공장도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제일제과 김병학 영업이사
한편, 김명학 대표의 막내 동생인 "김병학씨는 제일제과는 소비자에게 최고의 제품이 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형(김명학 대표)으로부터 물려 받아야 하는 것에 대하여 이같이 평가했다. 김병학씨는 이것은 “무형의 자산인데 돈 주고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르쳐줄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형님이 말씀 하시 듯이 선친의 가업이 끊기면 안 된다며 “저는 무조건 할 것”입니다. 이 일은 진짜 비전이 보이는 일이에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김 대표의 셋째 동생인 김병학씨는 이어 "일단 공장을 한다는 게 보통의 인내와 끈기로는 할 수 없는 것이라며 부지런해야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말했다. 이른 새벽부터 모든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제품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보면 "과자 하나하나가 그렇게 소중하고 값진것인지 최근에서야 알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사를 왔다고 전했다. 이사를 온 이유는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공장운영과 기술을 전수 받기위해서 라며 이같이 밝혔다. 일단 형인 "김명학 대표의 제조와 김병학씨의 운영을 결합 하다보면 보다 좋은 제품이 나 올수 시간이 절약 될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병학씨는 어렸을 때 작고하신 아버님이 만든 과자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며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그 맛을 모를 거라고 평가했다. 저희는 “아버님이 하시니까 맛있는 과자를 먹었는데 지금 과자를 드시는 분들은 이 과자를 권해드리면 ‘이게 무슨 맛이지’ 의문점을 먼저 남긴다”며 제일제과의 과자 전부는 거의 설탕을 쓰지 않는 것이기에 질리지가 않는 맛입니다“라며 이같이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이 가업을 이어 받은 후 시간이 흘러 다시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일단은 제 아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줄 겁니다”, “아들이든 딸이든 사위든. 제가 형님에게 기술을 전수받는다면 선택의 기회를 주고 만약에 그마저 거절한다면 사실은 맥이 끊기는거이지요”라며 아쉬움과 기대의 말을 전했다. 또한 이 기술이 사장되어서는 절대로 않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기자는 김병학씨에세 제일제과 제품에 대한 질문해 보았다.

김병학씨는 이 제품은 “건강식품으로써 권해드리고 싶다”면서 요즘 웰빙을 찾는데 저는 웰빙이란 개념을 자연이라 그러지 않고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그런 개념으로 말하고 싶어요. 옛날 자체는 다 자연이었으니까 옛날로 돌아가는 그런 웹빙의 개념으로 이 과자를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김병학씨의 부인인 홍씨는 아무런 사회 경험도 없었는데 갑자기 이 일에 뛰어들다보니 아직은 모든 것이 다 낮 설고 공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가업을 이어 간다는 그 자부심 하나만 갖고 있으며 그것이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일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러면서 그냥 남편(김병학)을 따라왔기 때문에 아직 생각없이 열심히 일을 하면서 평소 자신이 먹어 보았을 때와 틀린 것을 느낄 때 더 관심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장시간의 만남은 이같이 마무리 되었다. 오늘의 인터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이같이 우리것을 지키고 보존하기위해 국가는 인간문화재를 양성 운영하고, 국가의 전통문화와 보물을 보존.전파하고 있다.

막걸리 만드는 것에 대를 이어가고 있고 전통문화와 음악과 음식에 대해 대를 끊기지 않게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는 과정속에 한국의 음식은 세계로 뻗어 나가고 한류라는 테두리속에 국위를 선양하며 경제적 효과를 유발함과 함께 국가 브랜드 제고에 그 역량을 떨치고 있다.

제일제과는 이런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자 끊임없이 연구 개발하며 우리의 일상 속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아울러 가업을 이어 받은지 46년 동안 하루도 쉼 없이 오늘까지 굴곡많은 인생을 내 달려 온 김 대표는 하루 15~16시간을 일하며 보낸다고 말한다. 제품을 만드는 이외에 연구나 재료 배합 등은 일과를 마친 후 별도로 밤에 혼자 한다고 말했다. 또, 새롭게 시작되는 고급과자를 위해 일반 기호식품화 하기위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가업을 이어갈 막내 에게도 차근차근 시간을 주며 가르쳐 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천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이 직업은 시작 자체가 운명이었다고 말한 뒤, 직업으로써 어린나이에 시작해 그런지 불만은 없다고 말했다. 늘 나는 하면 될 수 있단 생각 속에 일을 했으니까 지금까지 거부한 적도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김 대표는 65세이며 서울 마포가 고향이다. 슬하에는 1남1녀를 두고 있으며 부인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일을 평생 해 온 김 대표에게 투자 의뢰도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번도 가족 이외에 누구와도 일을 한 적이 없었으며 투자 자체가 본인 이상과는 맞지 않는 것이기에 늘 혼자 이곳까지 온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어려서 엄한 아버지의 밑에서 일을 배우며 이 자리에 온 김 대표는 누구보다 직원의 고달픔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인지 스스로 빗자루를 들고 바닥청소를 한다는 직원이 전해주는 말속에 가업을 이어 온 제일제과 김 대표의 장인정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정성남 기자 csn8013@nave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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