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협회 뉴욕지회 오성균 회장...“지두화(指頭畵)의 대가로 정평”

기사입력 2017.11.1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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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마포구 소재 한국언론사협회 연합취재본부 사무실에서 오성균 화백(오른쪽)이 연합취재본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선데이뉴스신문=장순배 기자]“제가 미국에 1981년도 왔으니 이제 38년 정도 왔겠군요. 지금은 1만 몇 천 점 해놓았습니다. 인생을 마칠 때까지 2만 점이 목표로 계속 정진해나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한국미술협회 뉴욕지회 오성균 회장은 원래는 동양화로 시작했었으나, 애쉬랜드 칼리지 로버트 레트니 교수의 제안으로 서양화도 접하며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1996년 그는 미국의 건국이념(자유, 평등, 평화, 사랑)을 표현한 ‘아메리칸 드림’은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이 소장하고 있으며, 닉슨 도서관 및 유엔본부 프레스 센터 등 여러 미술관과 공공 기관에 소장돼있다. 또한 9.11 테러 가운데 희생된 3,500여명의 원혼을 위해, 108번뇌를 상징한 108점의 지두화를 월드 트레이드 센터 자리에 전시해 화제를 모았다. 붓 대신 손끝에 먹물을 찍어서 그림을 그리는 지두화(指頭畵)의 대가로 정평이 나있는 오성균 화백의 작품세계를 한국언론사협회 연합취재본부에서 만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 내보았다.


지두화는?
핑거페인팅으로 해서 지문과 손톱을 이용해서 그리는 그림이다. 붓값이 없어서 그린 것인데 살다보면 잘 안 되던 것이 될 때가 있다. 지메일에 들어가서 쳐보면 유튜브 작업 다 해놓았다. 제가 처음 했다. 그러니까 지두화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글씨도 손가락을 쓰고 전부 손가락으로 쓴다. 윤곽도 손톱으로 한다. 유엔본부에서도 한 바 있다.

뉴욕에서 현존하시는 작가로서는 활동을 왕성히 한다. 백남준씨가 비디오 아트로 해서 명성을 날렸다. 김기환 화백도 오 화백님 같은 코스를 거쳤다. 오 화백의 뒤를 거친다. 교포 사회에서는 저명하다. 지두화보다는 요 작품이 뭐냐면 911 테러 때 맨하탄 소호에서 작품 전시 활동을 했다. 무너지는 것을 봤다. 작가의 예민한 감성으로 트라우마를 겪었다. 수많은 희생자들을 점으로 표현해서 108번뇌 그라운드 제로 제역에 한국인 최초로 헌정했다. 350명의 모습을 점 하나로 표현한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자유 평등 평화 사랑 미국 건국이념 이런 것을 표현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1996년 요청해서 작품을 기부했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주제로 한 4개다.

소호에서 활동했다고 하는데?
94년부터 있으면서 전속 작가로 2002년까지 작품하면서 활동하고 귀가를 했다. 교민 상대 뿐 아니라 아트 작가로서 활동했다.

대표적인 케이스는?
전시를 하는데 96년도에 아메리칸 드림 플랜카드를 전시하고 진행했다. 7월에 전주에서 전시를 했다. 미국에서 전화가 왔다. 클린턴 전 대통령 관계자 큐레이터가 아메리칸 드림 작품을 보고 “이 작가는 미국의 건국이념을 표현했다” 하니까 백악관 초청 전화가 왔다. 큐레이터 스탠달이 이야기해서 된 것이다. 제위 기간 동안 계속 걸려있었다.

아크릴과 모래를 소재로 한다. 그래서 판화를 찍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못 찍고 가나화랑에서 97년 찍으려고 기법을 배우려고 왔다. 15번을 실크스크린으로 찍고 모래를 뿌리고 나서 잘 붙게 하는 풀을 한 번 또 한다. 그 다음 칼라를 쭉 찍는 것이다. 이효재가 와서 2번을 사갔다. 다 못 찍겠다고 한다. 96, 97, 98년 100개를 사갔다.

왜 모래를 뿌렸나?
원본에 모래가 들어 가 있다. 입체감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선이나 면이 깔끔하게 나온다.
워홀이나 라센버그 같은 작가들이 들르는 곳으로 간다. 3개월 이상 살아야 찍을 수 있다. 3개월 붙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작업할 공방 자체가 없다. 그때는 못 찍어서 사갔다.

어렸을 때부터 배웠다.
그 다음 제가 동양화 스스로 했다.

한국에서의 전시회 계획은?
3번 했다. 96년 강남 갤러리에서 했다.

왜 서양화로 바꿨나?
칼리지에 입학했다. 거기서 선생이 너 서양화 한 번 해보라고 권유했다. 동양화만 가지고 학교에서 영주권 나왔다. 학교에서 농장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6개월 하며 영주권 나왔다. 양수겹장으로 하게됐다. 옛날 사람들은 동양화를 좋아하기에 밥 벌어 먹는다.

멀티 아티스트시다.
백남준씨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백악관 들어갔다 오고 나서 요청이 많이 왔다.

국내 전시계획은?
하던 일이니 꾸준히 하는 건데, 한국에서 굳이 하고 싶지는 않다. 20년 전에는 한국에서 하고 싶었는데 나이가 72세다. 조지아에서도 전시하고 하는데 전시회하겠다 이런 것은 없다. 2만 점 그리고 죽고 싶다. 돈을 벌면 시니어 아파트에서 쫓겨나고 의료보험 부담도 크기에 굳이 벌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돈이 필요가 없다. 사회보장이 돼있다.

상설전시장은 뉴욕에 있다. 소호에서 15년 계약이 됐는데 911 터지니 시에서 나가라고 했다. 그 뒤로부터 전시만 했다. 뉴저지 필라델피아 시카고 워싱턴 쭉 돌면 1년이 금방 간다.

작품활동에 전념하는 시간은?
하루에 의무적으로 8시간 일하는 게 목표다. 미국은 의무적으로 8시간 일하는만큼 나도 그렇게 일하고 싶다. 9시에 해서 8시간 하고 퇴근하고 하는 주의다.

특별한 작품 계획은?
젊을 때는 어두웠는데 갈수록 피카소처럼 밝아진다. 안정되고 하니 밝아진다. 색도 그런 색을 쓰게 된다. 밝은 색으로 해서 톤을 바꾸기 시작하면서 바뀌었다. 그렇게 해서 3년 간 그린 것이 1,000여점이 있다.
상의를 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크게 그리고 하면서 작품이 만들어졌다. 여자는 발이 넓다. 그림을 많이 판다. 뉴욕 예술 쪽에서 유명하다. 12년 하다가 쉬고 있다.

작품 중에서 인기가 많은 작품은?
외국인은 서양화, 한국인은 동양화를 선호한다.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미리 사놓는다.

미국에서 활동하신지가?
81년도 왔으니 38년 정도 왔다. 지금은 1만 몇 천 점 해놓았다. 2만 점이 목표다.
저는 전시를 한다고 따로 준비를 하지 않는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 작품은 준비돼있다. 평소에 하는 것으로 제출할 뿐이다.

삶의 바탕 위에 그는 피카소를 떠올린다. 처음 우울했던 ‘파랑’의 시기를 벗어나 ‘분홍’의 시기를 맞이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듯 오성균 화백의 인생의 후반전을 그렇게 마무리하기 원한다.

[장순배 기자 b11p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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