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뉴스=윤석문 기자]올림픽은 각 대륙에서 모인 수천 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하계 및 동계 스포츠 경기를 하는 국제적인 대회이다.
올림픽은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국제 스포츠 경기 대회인데,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한데 모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겨루는 대회로 건강한 신체의 기쁨과 정정당당히 싸우는 운동 정신 그리고 온 인류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여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각 국가를 대표하는 많은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메달 획득을 통해 국가의 명예를 높이고 개인의 영광을 만들기 위해 고된 훈련을 소화하며 땀을 흘린다.
조민선 교수(한국체육대학교)는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국민에게 희망과 기쁨을 안겨주며 스포츠 영웅으로 스타가 되었던 인물이다.
1972년 전남 영암 출신으로 서울에서 생활했는데, 서울체육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유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조 교수는 당시 다른 선수에 비해 기량이 월등하여 88년 서울체육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었고, 그 해 시리아 다마스타쿠스에서 연린 아시아 유도선수권 대회에서 최연소 동메달을 획득하는 영광을 안았다고 한다.
“당시 우리는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잊고 열심히 운동에만 집중했습니다”라는 조민선 교수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하며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89년 10월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베오그라드 세계유도선수권 대회에서 52Kg으로 체급을 올려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90년 2월에는 프랑스 파리 오픈 대회와 4월 파리 세 청소년유도선수권 대회에서는 당당히 금메달을 획득하는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조민선 교수가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은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인 올림픽 출전을 위해 열심히 흘렸던 땀방울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올림픽선발전에서 패해 올림픽 진출에 실패했던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었다.
91년 전국대회에서 5체급을 달성하며 누구도 넘보지 못할 기량을 선보였던 조 교수의 올림픽선발전 패배는 본인은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아쉬운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1993년에 66kg급으로 체급을 올려 독일 오픈 대회에서 금메달 획득을 시작으로 10월에는 캐나다 해밀턴에서 열린 세계유도선수권 대회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올림픽 금메달을 향한 꿈도 더욱 현실적으로 키워나갔다.
1995년에 프랑스 파리 오픈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3연패를 달성했으며, 10월에는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유도선수권 대회에서 다시 금메달을 차지해 2연패를 달성하였고, 8월에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우리나라 여자 유도계의 대표 선수로 부상하게 되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하면서 조 교수는 꿈을 현실로 만들었는데, 대회에서 한판승 승리를 거두며 올림픽 유도 경기를 보는 국민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선물했다. 그는 1회전부터 브라질의 캄포스를 한판승으로 이겼고 2회전 역시 중국의 왕시아보에 한판승을 거두었으며 3회전에서는 도미니카 선수를 누르고 준결승에 진출하였는데, 준결승에서는 네덜란드 선수에게 한판승 그리고 결승에서는 폴란드의 슈체판스카를 누르고 여자 유도선수 두 번째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여자 유도계의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가던 조 교수는 1997년 2월 독일 오픈에서 우승해 5연패를 달성은 물론 10월에 열린 프랑스 파리 세계유도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 획득을 끝으로 1998년 은퇴를 하게 된다. 하지만 99년 다시 국가대표로 복귀하여 70kg급으로 체급을 올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출천했고 동메달을 획득하는 대기록을 남기고 은퇴를 선언하였다.
“국제심판 자격증을 취득하였습니다. 유도 국제심판 자격증은 A, B로 구분되는데 A는 권위 있는 세계대회 심판을 볼 수 있는 자격증이며, B는 일반 국제대회 심판을 볼 수 있는 자격증입니다. 국제대회 심판을 통해 학교와 국가의 명예를 높일 수 있다면 이것도 저에게는 큰 보람이자 영광입니다”라는 조 교수는 국가대표 선수로 국가의 명예를 위해 뛰었던 선수시절을 회상하며 당시 고된 훈련을 견뎌냈던 에너지의 원천을 생각하는 듯 했다.
“저의 인생관은 ‘매순간 최선을 다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에는 선수시절 흘렸던 땀방울과 당시 캠퍼스를 거닐며 느꼈던 교정의 정겨움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는 기쁨과 행복이 묻어있는 듯 했다.
조민선 교수는 선수로서 이룰 수 있는 모든 꿈은 이루었다. 그리고 지금은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한국체육대학교에서 우수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조 교수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분야에서 직업을 갖고 후배를 양성하고 있음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모교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는 조 교수는 학교와 더불어 재학생들에게도 정이 많이 간다고 한다. “제자들과 상담하다보면 생각보다 안타까운 순간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요즘은 운동과 더불어 학업 및 다재다능한 기능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때문에 많이 힘들어 하거나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들도 있습니다”라며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며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 후배 제자들이 겪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전달했다,
청년실업의 문제는 체육 특기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거에는 학업보다 운동을 중시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취업의 문도 좁습니다. 때문에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진정으로 학생을 돕는 것인지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청년실업 문제와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국가적 과제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었다.
조 교수는 학생들의 취업문제와 미래 진로에 대해 많은 고민이 앞선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은 물론 상담을 통해 발전적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고 했다.
“교수로서 또한 팀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로서 정보에 뒤지면 안됩니다. 때문에 쉬지 않고 자기계발은 물론 변화하는 규칙과 규정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도태되는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는 말은 교수로서의 제자 양성과 팀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의 길 그리고 행정적 업무처리와 자기계발을 통한 능력 향상에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아울러 훈련 및 자격증 취득을 위한 노력에는 선수시절 못지않게 많은 시간이 요구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쟁사회의 현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직시할 수 있었다.
“10년 교수 활동을 하며 많은 제자를 사회로 보냈습니다. 지난 올림픽에서 멋진 기량으로 유도선수의 꿈을 펼쳤던 김민정 선수(한국마사회소속)가 가장 많이 생각나며, 아쉽게 메달획득에 실패했던 순간이 너무 안타깝습니다”는 말로 제자 사랑을 표현했던 조민선 교수는 유도라는 스포츠는 기술적 측면보다 체력적 측면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체력이 바탕이 되어야 정신력과 기술이 결합되어 멋진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설명도 하였다.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삶의 연속을 살고 있습니다. 3월부터 11월까지는 각종 대회가 있으며, 방학에는 학생들과 함께 전지훈련을 다녀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연구와 자기계발에 전념해야 합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빠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회적 변화도 빠르기에 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라는 조 교수의 표현에서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던 자신의 모습과 지난날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선수로서 성공을 이루고 교수와 지도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조 교수는 국제심판으로 올림픽에 참가하여 자신이 지도한 제자와 함께 올림픽 무대에 서는 새로운 꿈을 키워가고 있다.
역사는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체육계의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조민선 교수는 학생들에 대한 애증도 남달랐다.
자신이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들을 이겨내며 선수로서 성장하였던 과거를 회상하며, 제자들도 힘들고 어렵더라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가졌던 미래의 희망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청년실업 문제가 빠르게 해결되어 제자들이 운동에 전념하여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스포츠 대회에서 좋은 성적으로 입상하고 이를 바탕으로 멋진 미래가 이어지길 바란다는 속내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