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뉴스 나경택 칼럼>사라지는 근대문화유산
1967년 준공된 한국최초의 공단 구로공단은 국가경제에 큰 역할을 했다. 그 주역은 우리의 어린 누이들이였다.
그들은 부모와 오빠,동생 뒷바라지를 위해 봉제, 섬유,가발 공장 등지에서 땀을 흘렸다.
1985년 필자는 구로공단 봉제공장에서 야근중인 여성 노동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한 소녀한테서 “2년 만기 10만원짜리 적금을 붓고 있다”는 말을 듣고 “100만원이라고요? 라고 되물었다가 무안해진 일이 기억난다.
구로공단은 노동자들이 치열한 삶을 꾸린 터전이었지만 대학생활의 의식화 현장이기도 했다. 진보정의당 심상정의원은 이 공단에 미싱사로 취업해 동맹파업을 주도했다.
1978년 출간된 조세회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단쏘공)」에 나오는 ‘은강공단’도 구로공단에서 영감을 얻은 듯하다. 자가는 2004년 구로동에서 노동문학 강연을 하며 “나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구로공단에 처음 왔었다. 난쏘공의 시작지점이 바로여기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의 구로공단은 상전벽해다. 2000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을 바꾸면서 정보통신,벤처기업들 중심으로 업종 업종전환이 됐다. 공단 중심지엔 고층 패션타운이 들어섰고 공장들 도 아파트형으로 모습을 바꿨다. 옛날 여성노동자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가리봉동 쪽방촌은 중국 동포와 외국인 밀집지역이 됐다.
서울 금천구가 옛날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을 디지털단지안에 지어 개관했다. 이들이 쓰던 쪽방을 재연한 ‘순이의 방’ 여럿이 찬물에 ‘희망의 방’, 몰래 소리통으로 대화를 나누던 ‘비밀의 방’ 등이 조성됐다. 금천구는 대부분 사라진 벌집 형태의 쪽방 건물을 구입해 사진자료 등을 통해 원형을 되살렸다. 취지는 여공으로 불린 이들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어쩌면 인간에 역사를 쓰는 이유는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체험관도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곧 ‘역사의식’의 소산이다. 김수영은 ‘거대한 뿌리’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그래 그 시절 우리누이들은 잊지 않는 건 아주 중요하다. 조선시대 창신동은 풍광이 좋아 양반들의 별장이 많았다.
조선조 이수광은 이곳에서 ‘자봉유설’을 썼다.
일제강점기에는 채광장으로 사용되어 조선총독부 건물 등에 들어간 석재들을 공급했다. 6.25전쟁이 끝나자 대규모 인구 유입이 이뤄졌다. 1957년 기록을 보면 한 평에 거주인구가 .6명이나 됐다. 1960년, 70년대 서울의 봉제공장들은 청계천 주변에 몰려있었으나 수요가 늘면서 창신동에까지 들어서게 됐다.
청계천 쪽 공장들은 사라졌지만 창신동 쪽은 그대로 남아 오늘날 동대문의 배후 기지가 됐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창신동의 역사를 다룬‘메이드 인 창신동’ 전시회를 열고 있다. 옛 사진과 자료를 전시하고 봉제공장과 ‘쪽방’ 도 재현해 놓았다. 과거 봉제공장에는 10대 소녀들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없다. 그 대신 50대 이상으로 머리가 희끗해진 중장년들이 일하고 있다. 청계천에서 10대 때 일을 배운 뒤 여태껏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다.
주문을 받으면 하루 안에 제품으로 만들어 낸다. 이들은 성실하고 억척스럽게 살며 ‘한가의 기적’을 이뤄낸 주역이다. 서울시는 창신동 봉제공장을 근대화유산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일부를 서울시가 사들여 원형대로 보존하면 한국의 20세기를 전해주는 훌륭한 전시물이 될 것이다.
우리후손들이 혹시 곤경에 처했을 때 이곳을 보며 새롭게 투지를 불태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억의 곳간이 점점 비어가는 것, 아쉽고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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