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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 특별 인터뷰] 6.25 前과 後, 한반도의 살아있는 역사를 마주하다
[6.25전쟁 70주년 특별 인터뷰] 6.25 前과 後, 한반도의 살아있는 역사를 마주하다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한여름 장맛비가 거세다. 한반도는 짙은 안개와 함께 6·25전쟁 70주년을 맞았다. 최근 북한 정부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며 현 남한 정부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이에는 오랜 한반도 분단역사 속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한국전쟁 70주년, 하루가 지난 어제 25일에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국군 유해 147위가 머나먼 길을 돌아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평화를 기렸던 남북관계는, 작두 위에 선 무당의 붉은 발처럼 여전히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전쟁은 ‘전쟁’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픔의 앞과 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 온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전쟁과 식민지 시대를 겪어보지 않는 기자로선, 97세(1924년 출생) 백발 어르신의 파란만장한 삶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6.25 참전용사인 최 어르신은 무려 67년이 된 빛바랜 전역수첩을 꺼내 보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Q.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얘기를 해볼게요. 한번 들어보세요. 저는 이남 사람이 아니라, 이북 황해도 신천군 남부면에서 났어요. 안중근 의사 알지요? 그분이 우리 집에서 20리(8km) 떨어진 곳(황해도 해주)에서 살았어요. 그 텔레비전(TV)에 나오는 ‘송해’도 우리 동네서 가까운 (황해도) 대령군이 고향이에요. 대령(군)에 가면 동산이 있는데 거기는 미군(미국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어요. 거는 미국 영토나 마찬가지에요. 우리 어머님의 고향이 대령이었어요. (사진=최 어르신의 본적관련 문서) 저는 5살 때부터 어머니 등에 업혀서 교회를 다녔어요. 그때 형님과 누님이 아파서 병에 걸렸는데, 어머니께서 고향에 있는 최 집사를 찾아가 우리 자녀가 병에 걸렸으니 낳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했어요. 그때부터 교회에 나가게 됐어요. 그렇게 예수(기독교)를 믿게 됐지요. (사진=일제강점기 당시 학교 사진, 경남교육청 출처) 국민(초등)학교 때 서울에 수학여행을 왔던 것도 기억이 나요. 그때는 여비가 비쌌기 때문에 수학여행도 많은 사람이 올 수가 없었어요. 우리 집안이 엄청 잘 살았었거든요. 그래서 서울로 2번이나 여행을 올 수 있었어요. 서울 종로1가에 ‘화신상회’라고 있었어요. 그게 6층짜리 건물이었는데, 광화문에요. 그게 일본사람들이 6층짜리 건물을 쓰고 있었어요. 거기서 하모니카를 샀어요. 그때 처음 하모니카를 배웠지요. 지금도 하모니카를 들고 다니는데, 가끔 불고 그래요. Q. 뭔가 하모니카가 멋지게 느껴지네요... 그 이후엔 어떻게 되셨나요? (사진=일제강점기 당시 학교 사진, 경남교육청 출처) 일제 강점기(1910.8~1945.8) 때 국민(초등)학교를 나와 중학교에 입학하려 했는데 입학시험에 불합격이 된 거에요. 운동만 해가지고 공부할 줄을 몰랐지요. 그렇게 중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1년 동안 집에서 놀기만 했어요. 맨날 운동하고 놀기만 했지요. 학교 다닐 때 운동을 아주 잘했어요. 축구, 육상, 마라톤, 모두 학교 대표 선수였어요. 특히 달리기를 잘했어요. 학교 운동회에서 마지막 계주에서 전교생이 응원전을 하는데 ‘차이호껭(최 어르신의 일본 이름)’이라고 제 이름을 크게 외쳤었지요. 학교 이름은 ‘경신학교’였지요, 아마? 어느 날은 황해도에서 전국 도대항 육상 대회가 열렸어요. 우리 학교가 신천군의 대표였는데 내가 학교 대표로 나갔어요. 400m 계주였어요. 나는 꾀가 많아서 1번 주자로 뛰었는데 1등으로 출발했죠. 그런데 2번 선수가 넘어져 가지고 결국 1등을 못했지요. 아이고 참... 지금 생각해도 아까워요. 대회를 한다고 80리(32km)를 기차를 타고 갔지요. 그때의 기억이 많이 나요. Q. 많이 아쉬우셨을 것 같아요... 그리고 ‘차이호껭‘이라는 외침소리가 왠지 모르게 슬프게 들려요. 그때 중학교에 못가서 집에 있는 중에, 누가 하는 얘기를 주워들었어요. 중국에 가면 돈 벌기가 쉽다는 거예요. 그때 부모님 돈을 몰래 훔쳐서 중국에 갔어요. (허허허...) 중국에 어디 거처가 있을까 살폈지요. 당시 외사촌 형님의 매부가 중국에 있었어요. 참, 신기하지요? 부모님께 얘기도 하지 않고 어린놈이 혼자 갔으니까, 간다고 얘기하면 안 된다고 할 것이 뻔했으니까. (사진 = 일제강점기 당시 철로의 모습) 기차를 타고 갔는데 신의주까지 가는 열차에는 항상 일본형사들이 있었어요. 뭐 때문이냐면 아편장사, 금 장사를 잡기 위함이었지요. 그런데 나는 나이가 어려서 여행권이 없었어요. 그래서 꾀를 냈죠. 신의주에서 내려서 (국민)학교 수학여행 갔을 때 들렀던 여관에 가서 잠을 잤지요. 그리고 다음날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넘어갔어요. 당시에 신의주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신의주 사람 행세를 해서 몰래 건너갔지요. “나 신의주 사람이다”고 꾀를 냈어요. (허허허...) 그렇게 만주에 들어갔지요. 처음에는 외사촌 형님을 찾아갔어요. 형님이 중국의 길림(성)에 있었어요. 길림에 가면 한강같이 큰 강이 흘러요. 그 강이 ‘송하강’이에요. 송하강을 따라 80리(32km)를 올라가면 일본사람들이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우리 (친)형님이 그 발전 사무소에서 과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허허허... 참 기가 막히죠. 그래서 내가 찾아가니까 형님과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이 어린놈이 어떻게 여기에 왔냐고 하면서 언능 돌아가라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그랬죠. 갈 수 없다. 돈 벌러 왔다고. 밥 벌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사진= 옛날 공장 모습, imgur 출처) 그때 사무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등급이 나눠져 있었어요. 1등 국민, 2등 국민, 3등 국민이었지요. 사무소에서 일하는 일본사람들은 1등, 기술을 배워 일하는 한국 사람은 2등, 중국사람과 단순 노동자는 3등 국민으로 취급했어요. 그래서 일본 사람들 앞에서는 할 말도 제대로 못했어요. 중국 사람은 짐승취급을 당했다니까요. 그런데 일을 하다가 도망을 가게 됐어요. 형님이 내 월급을 주지 않고 본인이 다 써버린거에요. 그때 생각이 나는데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노래가 있었어요. 그 시절에는 100만원이 있으면 큰 성공으로 취급했었지요. 나는 고향에 어머님께 돈을 붙여드려야 하는데 (월급을 주지 않으니) 그럴 수가 없어 계속 있을 수 없었지요. Q. 아이고... 또 그런 일이 왜... 그렇게 나와서 매부(외사촌 누님)집에 찾아갔어요. 매부는 당시 공의(중국당국이 인정한 의사)였어요. 다짜고짜 매부의 병원을 찾아갔어요. 내가 들어가니까 병원에서 어떤 병 때문에 왔냐는 거예요. 그래서 그랬죠. 나는 병 때문이 아니고 내 매부를 만나려고 왔다고. 사실 나는 매부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어요. 얼굴도 모르고 찾으러 간 거지요. 허허허!... 매부는 나를 보더니 마차에 태워 누님을 만나게 해줬어요. 누님도 엄청 놀랬지요. 빨리 다시 돌아가라고 했어요. 여길 어떻게 왔냐고. 못 간다고 했죠. (사진=일제강점기 당시 명동거리 모습) 매부네 병원 밑에 전라도에서 온 사람이 하는 치과가 있었어요. 거기에 부탁해서 잡일을 맡아 했어요. 처음에는 물건도 정리하고 시키는 일을 전부 다 했지요. 나는 지금도 이빨(인공치아)을 만들 수 있는데, 당시에 눈치껏 옆에서 보고 배웠어요. 그리고 조선(이북 고향)에 나올 때는 그 치과주인이 같이 우리 집에도 왔었어요. 한번은 치과 재료를 사서 중국에 가다가 세관에 잡혔어요. 일본형사들이 내가 가지고 간 재료가 아편인줄 알고 붙잡았어요. 그때가 아마 17~20세쯤이었지요. 생각해보면 참 웃겨요. 우리 아버지께서(집안이) 가난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런 고생을 사서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Q. 당시에 마음에 둔 여성분은 없으셨나요? (므흣한 웃음) (사진=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여성의 사진, 'Blue ruin1'의 flickr 출처) 고향에서 18~20살 때 결혼을 했어요. 그 당시에 고향에 일본여자가 와 있다고 소문이 났었어요.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었어요, 매일 탔지요. 그래서 나도 같이 타는데, 너무 세련돼 보이고 예뻐서 마음에 들었지요. 그 사람이 아버지는 한국 사람이고 어머니는 일본 사람이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온 거에요. 연애를 해서 결혼을 했지요. 이름은 ‘보끄 기미꼬’ 한국말을 잘 못했어요. 그때 동네에서 그 여자가 시집갈 사람은 “최00(최 어르신)” 밖에 없다며 사람들이 놀리고는 했어요. 같이 살면서 딸을 하나 낳았어요. 이름은 ‘최0희’에요. 물론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요... Q. 아 그러셨군요... 그럼 남한에는 어떻게 오시게 됐나요? 오시고 나서 6.25 전쟁이 터진 거죠? 아, 내가 얘기할게요. 그때도 교회 다녔는데 분단이 되고 나서 이북에는 ‘목사’가 살아남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교인들이 나를 목사로 세울 작정으로 신학교에 보냈어요. 평양에 있는 감리신학교 기숙사에 살았는데 토요일이면 고향 교회에 가야만 했어요. 집까지는 200리(80km)였지요. 집에 갈 때도 올 때도 경찰서에 보고를 했어요. 보고를 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 지도 몰랐어요. 그렇게 평양과 고향(신천)을 왔다 갔다 했지요. 그렇게 신학교를 다니다가 경찰서에서 통지서 하나를 받았어요. 내일 아침 9시까지 내무소로 들어오라는 하는 거예요. 갔는데 큰 종이가 있었어요. “인민군을 뽑으려고 불렀나?” 싶어서 잘 보니까 군인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교회 다닌다는 것을 알고 데리고 가서 죽이려고 하는 거였어요. 신체검사를 하는데 신체에 이상한 부분이 있는지만 확인을 하는 거에요. 거기에 내 신학생 이력이 다 있었지요. 그때 “이제 나는 죽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살고 싶어서 장로신학교에 있는 매부를 찾아갔어요. 그런데 매부가 “너는 왜 여기 남아서 쓸데없는 짓이냐 하고 있냐”고 하면서 “그따위 짓 하지 말고 다른 젊은 사람들처럼 이남으로 언능 내려가라“고 벌컥 화를 내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살라고 그랬던 것 같아요. Q. 정말 파란만장하셨네요. 삶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셨어요... 그렇게 아는 분을 통해서 어떻게 탈북을 할 계획을 세웠어요. (최 어르신은 이전 일제징용 당시 아내였던 ‘기미꼬'와 ‘2살배기 딸’에게 고향에 가 있으라고 하고 헤어졌다고 했다. (그 이후에 탈북하면서 지금까지 보지도 만나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남으로 오게 됐어요. 7명이 모여서 산을 넘었지요. 밤새도록 걸었어요. 그런데 새벽에 인민군에게 들켜서 다시 높은 뒷산으로 도망을 갔어요. 그중에 1명은 붙잡혔고, 다른 1명은 아무리 불러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겨우 5명만 넘어왔지요. (사진=영화 '윤희' 출처) 넘어오는 중에 아기와 함께 온 여자들도 있었는데, 거기 황해도 사지원(탈북의 최전선)에서 아기가 울거나 하면 자기 아이를 죽이기도 했어요. 아 우는소리(애기 울음소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잡히면 안 되니까... Q. 어떻게 그런 일이... 그후엔 어떻게 됐나요? 그렇게 남한에 넘어와서 청단이라는 도시에 있는 경찰서까지 걸어갔어요. 대한청년단의 감시를 받았어요. 조사를 받는데, 공민증(북한의 주민등록증)에 신학교 학생이란 기록이 있다보니 대우를 잘 받았어요. 조사 후에 ‘특무부대’로 넘겨졌어요. 특무부대(당시 공산당을 잡아내는 기관)는 당시 가장 무서운 곳이었지요. 거기
다음주 ‘특별 여행주간’ 시작… 관광산업 활성화 vs 폭팔적 감염 활성화 “K방역에 달렸다"
다음주 ‘특별 여행주간’ 시작… 관광산업 활성화 vs 폭팔적 감염 활성화 “K방역에 달렸다"
(사진=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출처)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정부가 코로나19 악재와 겹친 여름휴가철을 위해 ‘특별 여행주간’을 마련했지만, 수도권을 비롯한 지역감염이 지속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4일 코로나19로 지친 국민을 위로하고 안전한 여행 문화를 만들기 위해 7월 1일부터 19일까지 방역과 안전 중심의 ‘특별 여행주간’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는 원래 이달 20일부터로 지정했던 (특별여행) 기간을 코로나19 감염 확산 추세를 감안해 10일 미룬 것이다. (사진=문화체육관광부 제공) 정부는 이번 여행주간을 위해 ▲‘방역’과 ‘안전’ 여행 문화 확산 총력 ▲생활 속 거리두기 실천하며 즐기는 ‘비대면 여행지’ 추천 ▲철도·고속버스·여객선·자동차 공유 등 특별한 교통 혜택 ▲‘나만의 비대면 일상 기념 여행’ 등 특별한 온라인 행사 경품 증정 등 다양한 대책을 준비했다. 문체부 정책 담당자는 “현재 코로나19 상황이 엄중하지만, 곧 8월초 여름휴가 여행수요 급증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를 분산하고 어려움에 처한 국내 관광업계의 내수를 활성화하기 위해 여행주간을 실시하게 됐다”면서 “안전수칙을 지키며 여행을 즐기는 안전한 여행 문화 확산에 모두 동참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박양우 문체부 장관은 지난 10일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관광산업은 그 어느 때보다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으며, 국내여행은 코로나19로 지친 국민들이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사진=보건복지부 제공)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번 여행주간이 오히려 지난 4월말에서 5월초 있었던 황금연휴와 같은 사태를 키우는 것은 아니냐는 걱정도 나오고 있다. 지난 황금연휴 기간이 끝나고 이태원 클럽 일대 등을 통해 수도권 감염이 집중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가 여행기간을 지정한 것이 오히려 더 여행객들을 몰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네티즌은 “왠지 불안하다. 아무리 방역을 잘 한다 해도 무증상, 경증 환자들을 어떻게 하냐”고 하며 “정부의 방역망 안에서 감염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발견되지 않고 여행이 끝난 후 지역에서 다시 감염이 퍼지면 걷잡을 수 없다”고 했다. 최근 코로나19가 대전, 부산 등 수도권을 넘어 전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 특별 여행주간이 침체된 관광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을지, 아니면 또 하나의 폭팔적 감염 사태로 이어질 지는 K-방역과 국민들의 방역수칙 참여에 달려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반영구화장, '세계의 표준'로 우뚝 서다
한국의 반영구화장, '세계의 표준'로 우뚝 서다
(사진=국제뷰티인증교육기관 제공)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국내의 반영구화장 기술이 세계의 표준으로 우뚝 섰다. 이는 국제뷰티자격인증원과 국제뷰티인증교육기관 아티스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뤄낸 결과다. 24일 국제뷰티자격인증원(이하 IBQC)과 국제뷰티인증교육기관(이하 IBCEA)은 ISO17024 개인기술자격인증 세미퍼머넌트 메이크업(이하 반영구화장)의 정확한 표준정립과 진행을 위해 뷰티 본점 및 각지점 등 반영구화장 아티스트들과 워크숍을 가졌다고 밝혔다. (사진=국제뷰티인증교육기관 제공) IBQC와 IBCEA에 따르면, 반영구화장은 전 세계에서 인정받은 화장법이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합법적인 직업으로 인정받고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마스터들의 시술과 강의는 국내외,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수요가 높아지는 추세다. 이들 단체는 반영구화장에 대해 “피부에 오랫동안 남는 롱레스팅 화장”이라며 “미적 감각 및 위생, 감염 관리, 세밀한 테크닉을 요구하는 전문기술직업이기에 완벽히 훈련된 기술인이 시술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반영구화장을 잘못 시술했을 땐 피시술자에게 오랫동안 정신적, 심미적인 상처로 남을 수 있다”고 하며 “이에 표준 가이드가 중요하다. 국제표준기준을 세웠다는 것은 업계에 중요한 업적”이라고 강조했다. (사진=국제뷰티인증교육기관) IBQC는 3년 전부터 전문가들과 함께 반영구화장을 포함한 ISO17024 17개 미용기술분야의 승인을 IQCS를 통에 SCC(캐나다정부산하 ISO 인정기관)에 받았다. 현재 4개 분야 자격이 추가로 승인 심사 중에 있으며 164개국에서 이미 통용되고 있는 국제표준자격인증 제도이다. 이들 단체는 반영구화장의 국제표준화를 위해 국내의 강사, 전문가들 비롯해 국외 전문가들과도 협업을 하고 있다. 함께 콜라보 및 국제포럼, 콩그레스 등을 진행하며 선진화된 한국의 기술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통로를 구축할 예정이다. 한편 이날 워크숍에는 코로나19로 해외교류가 어려운 상황임에도 베트남과 중국 관계자가자가격리를 거친 후에라도 현장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인천 한들구역 일대 아파트 건설 한강유역청 환경영향평가 ‘부실 심의‘ 의혹 불거져
인천 한들구역 일대 아파트 건설 한강유역청 환경영향평가 ‘부실 심의‘ 의혹 불거져
(사진=촛불계승연대천만행동 제공)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한강유역환경청의 인천 한들구역 아파트(1만 세대) 건설 관련 환경영향평가가 입맛대로 이뤄진 게 아니냐는 '부실심의'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시민환경사회단체들은 24일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 환경부 한강유역환경청(이하 한강유역청)의 환경영향평가 부실심의 의혹을 제기하며 재심의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사진=촛불계승연대천만행동 제공)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50명은 이번 한강유역청의 심의에 대해 “고무줄 평가”라고 비판하며 “눈 감고, 귀 막고, 입맛대로 봐주기 등 부실한 심의로 제 2의 사월마을 참사가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셈이다. 한강유역청이 허가한 1만 세대 아파트 건설지역은 일명 ‘쓰레기 산’이라 부르는 건설폐기물 불법적치장은 물론 일명‘쇳가루 마을’이라 부르는 사월마을과 엎드리면 코가 닿을 정도로 각각 인접한 곳이다. 미세먼지, 분진, 악취 등이 발생할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다. 이들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주된 요인 중 하나인 건설폐기물은 톤당 처리단가를 4만원 씩 추정할 경우 그 총 비용은 5~6천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에 달한다. 건설사업자가 자발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영향평가를 부실하게 심의하고 허가를 내주었던 한강유역청이말로 신환경적폐 몸통”이라고 규탄하면서 “한강유역청장은 해임을 당하기 이전에 자진사퇴해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사진=촛불계승연대천만행동 제공) 김선홍 글로벌에코넷 상임회장은 “지난 20여 년간 환경부 한강유역청이 실시한 환경영향평가에서 ‘불법적치 1,500만 톤 건설 폐기물산 통과’ ‘4,700세대 검단 3구역 598m 통과’ ‘4,805세대 한들구역 1.45Km 통과’ ‘ 앙공원 개발사업 1.24Km 부동의’ 등이 이뤄졌다”고 하며 “한강유역청이 입맛대로 고무줄 심의, 봐주기 심의, 면죄부 부여 심의를 하고 있다”고 부실심의와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또한 그는 “최근 인천 서구지역 1만여 세대 도시개발 환경영향평가에서 3군데 도시개발 사업 중 비슷한 여건에 있음에도 검단 3구역과 한들 구역은 통과되고, 검단 중앙공원개발은 부동의 된 사유를 전혀 이해 할 수 없다”고 했다. (사진=촛불계승연대천만행동 제공) 이어 “한들 구역 당초 환경영향평가 세부검토의견에서 지자체가 입주민들의 피해방지를 위해 수도권매립지, 산업단지, 폐기물처리업체 인접 등을 정확하게 판단하도록 지적하고 적시했다”며 “이에 분양업체가 얼마나 이 부분을 고려했는가에 대한 여부는 조만간 정확한 자료를 통해 밝혀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승호 검단신도시 생계대책위원회 회장은 “사월마을 인접 1천 5백만 톤 불법적치 건설폐기물은 인천 서구 대기환경 오염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발생되는 미세먼지, 분진, 악취와 성분을 알 수 없는 오염원이 사월마을 주거 부적합 판정으로 환경문제가 크게 문제가 되고 있다. 불과 500미터 지점 검단3구역, 한들구역 환경영향평가가 통과되고 일부지역은 부동의되는 등 입맛대로 부실하게 심의한 것에 격분을 참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환경영향평가 재심의를 촉구했다. 김진관 한국환경시민단체협의회 회장은 “전국 최초 주거부적합 판정 사월마을 주변에 1만 세대 아파트 신축허가로 제2 사월마을 환경참사가 우려된다”며 “직접 아파트 허가지역 주변을 돌아보고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했다면 이런 황당한 환경영향평가는 통과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 단체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환경부 공개사과 및 한강유역환경청 각성 및 한강유역청장 해임 ▲분양계약자들에게 수도권매립지, 검단산단, 대형순환골재처리장, 건설폐기물처리장 등 환경오염시설 고지 및 환경오염물질 개별안내 ▲오염시설 고지 및 환경오염물질 개별안내 등을 요구했다.
양재도서관, 무더위 속 '한밤중 인문학 산책' 참가자 모집
양재도서관, 무더위 속 '한밤중 인문학 산책' 참가자 모집
(사진=양재도서관 제공)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코로나19 장기화로 시민들의 심신이 지쳐가는 가운데, 양재도서관이 시민을 위한 '인문학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서초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서초구립양재도서관은 내달 7일부터 ‘한밤중, 산책하는 철학’이라는 주제로‘2020년 인문독서아카데미’를 개강한다고 24일 밝혔다. 이번 프로그램은 생활 속 거리두기를 위해 비대면(온라인)으로 운영된다. 인문독서아카데미는 지난 4월 ‘양재천’과 ‘양재시민의숲’이 근처에 있다는 특성을 살려 '한밤중, 산책하는 철학'는 이름으로 정부 공모 사업에 최종 선정됐다. 이에 7월 7일부터 10월 13일까지 매주 화요일 총 15회에 걸쳐 산책과 사색을 통해 진리를 탐색하고 인생을 반추했던 문학가, 철학가, 고고학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여정을 시작한다. 이번 프로그램은 ▲1부 : 산책하는 문학가(7.7.~8.4.) ▲ 2부 : 산책하는 철학가(8.11.~9.8.) ▲ 3부 : 산책하는 고고학자(9.15.~10.13.)로 구성됐으며 윤지관(영어영문학 박사), 강대진(철학 박사), 강인욱(고고학 박사) 교수 등 각 분야의 전문가를 강사로 초빙했다. 또한 매회 프로그램 전후로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하는‘인문독서동아리’를 결성·운영해 독서, 토론, 모임 등 자발적인 인문 활동을 지원한다. 김하야나 양재도서관장은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이번 프로그램이 인문학적 성찰과 사색을 통해 지친 심신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앞으로도 다양한 주제와 방식의 프로그램을 마련해 구민의 문화 향유 증진에 기여하는 지역도서관으로서 역할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참가 신청은 양재도서관 홈페이지 및 전화(02-3486-4063)를 통해 선착순으로 가능하다.
"돈에 쫒겨 살지 않으려면, 돈을 알아야 한다" 청년 재무법인 컨설턴트를 만나다
"돈에 쫒겨 살지 않으려면, 돈을 알아야 한다" 청년 재무법인 컨설턴트를 만나다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청년 재무 컨설턴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도움의 본질’에서 시작하다 -자산,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몰라도 알려고 하지 않아서 없는 것” -선진국 비해 ‘재무와 보험에 대한 교육’ 부족해… 막연히 부정적 인식 바꾸는 게 목표 *인터뷰 내용은 본인의 요청으로 가명으로 기재했습니다. (재무법인 컨설턴트, 김영우[가명]씨) Q.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영우(가명, 남, 26, 서울 염창동)라고 해요. 서울 토박이에요. 도림동에서 태어났고 장남이에요. 어릴 땐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죠. 부모님은 두 분 다 회사를 다니셨는데, 제가 생기고 어머니는 주부로 전향하셨죠. 그래서 어릴 땐 늦둥이인 이모와 남매처럼 놀았던 기억이 나요. 옛날을 떠올리면,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이 많이 생각나요. 놀이동산을 자주 데리고 가셨어요. 당시 아버지께서는 1t(톤) 트럭을 타고 다니셨는데 언젠가 동생이 태어나는 날에도 그 트럭을 타고 응급실에 갔던 기억이 나네요. 7~8살 때 (서울) 염창동으로 이사를 왔어요. 당시 그 동네는 모두 공장촌이었어요. 새로운 건물은 이마트가 하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초등학교 중학교 2학년 때쯤 아버지께서 다니던 대기업을 정리하시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셨어요. 자판기 관련 사업이었죠. 사업이 좀 잘 돼서 출장도 자주 다니셨어요. 저는 당시 남중 남고를 다녔는데 성격이 조용했어요. 그러다 보니 돋보이고 싶어서 (소위) 못된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했어요. 방황을 한 거죠. 어떤 날 학교 자율 활동 시간에 한 상담사님이 오셔서 강의를 해주셨는데, 그때 집중해서 들었던 기억이 나요. 강의 주제가 “내가 하지 않으면 바꿀 수 없다”라는 주제였어요. 그때 꿈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고민을 했었죠.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잘 할 수 있는 건 뭘까” 고민했어요. 학교 방송실에서 활동을 했는데 그때부터 방송, 사진 쪽에 관심을 가졌었어요. 카메라가 너무 신기했었죠. 예쁜 것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게 좋았어요. 그렇게 해서 예고(예술 전문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됐죠. 고등학교에 가서는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됐어요. 전에 사귀었던 친구들이 아니라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져야 하는 게 어려웠어요. 또 이때부터 입시에 대한 욕구도 강해져서 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00대 사진학과를 희망했는데, ‘종군기자(전쟁이나 재난 지역에 가서 현장 사진을 찍고 전하는 전문 사진 기자)’가 되고 싶어서였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쉽지 않았기에 그쪽으로 진학을 하진 못했어요. 당시 그 학교에 이슈가 있었어요. 저널리즘 강의를 맡은 교수님이 성추행 사건이 휘말렸죠. 그래서 해당 강의가 사라졌어요. 충격도 컸고, 고민도 늘어났죠. “이제 나는 뭐를 해야 할까”무언가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녀서 그런 점도 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다시 교회에 부지런히 나가기도 했고요. 종교가 가치관에 영향을 많은 영향을 줬어요. 그렇게 사람을 돕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의사, 간호사 등 의학 쪽을 생각하게 됐어요. 아버지께서도 허리가 아프셨고요. 그래서 예고에서 혼자 이과 공부를 시작한 거죠. 수에 대한 개념도 없었는데 친구들에게 물어봐서 겨우겨우 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보건과 관련된 여러 학교의 학과에 원서를 넣었어요. 당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는데 저는 몰랐어요. 어느 날 부모님이 대학 등록금에 대해 대화하시는 것을 우연히 듣고 현실을 알게 됐죠. 그리고 간호학과에 진학을 했죠.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어요. 부모님이 힘들게 지원해 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죠. 학자금 대출도 스스로 받았고, 장학금도 받아야 했기에 죽자 사자 공부했어요.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차석으로 졸업을 했어요. 머리가 좋지는 않아요. 반복학습을 미친 듯이 했죠. 노력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첫 직장은 신촌 세브란스 병원이었어요. 간호사로 근무를 했죠. 그런데 지금은 재무 설계사를 하고 있어요. Q. (보험 설계 기반의) 재무 컨설턴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병원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머니께 전화가 왔어요. “외할머니가 쓰러지셨다"라는 거예요. 교통사고였죠. 새벽 청소를 하고 퇴근하시다가 사고를 당한 거였어요. 수술은 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 명의로 대출을 받았어요. 알고 보니 ‘보험’이 제대로 들어있지 않았고 어머니도 모르셨더라고요. 그때 보험의 필요성에 대해 크게 느꼈어요. 그때를 계기로 아는 형을 통해 지금의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생각해보면, “살면서 항상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뭘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언젠가 ‘미생‘이란 드라마를 보면서 “저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주어진 현실에만 갖춰서 버티기만 하기보단, 내 스스로 삶을 계획하고 그대로 꾸려 나가고 싶었어요. 저는 머리가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더 많이 경험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어봐야겠다고 다짐했죠. 쉽게 말하면, 이 일은 ‘보험 변호사’ 로 생각하면 돼요. ‘보험’ 또한 ‘금융’이거든요. 내가 어떻게 관리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삶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지는 거예요. Q. 일을 하면서 내가 얻었거나 변화된 부분이 있다면? 음...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사람 대하는 법’을 제대로 배운 것 같아요. 예전에 간호사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손 씻기’였어요. 손 씻기는 위생의 가장 기초, 예방단계예요. 저는 이 보험도 재무의 가장 기본이 되는 ‘손 씻기’라고 생각해요. 혹시 모를 일을 예방하기 위해 삶에서 최소한의 보장을 채우는 거죠. 간호는 그다음 단계, 실제 치료죠. 보험은 그 사람이 재무적으로 피해를 보지 않게 예방해 주는 단계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부분이에요. 원래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기도 했고, 지금도 이 일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고요. 도움을 통해 사람을 얻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죠. Q. 국내에서는 ‘보험설계’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도 있는데, 일을 하면서 오해를 받은 적은 없었는지? 정확하게는 재무 법인 개인 사업자이지만, '보험 설계 기반'의 재무 컨설팅이다 보니까 오해를 받았을 때도 있죠. 감수하고 인식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보험’에 대해서는 국내는 아직까지도 인식이 좋지 않아요. 저희는 그런 인식을 바꾸는 직업이에요.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보험설계사가 굉장히 되기 어렵고,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직업이에요. 국내와 인식이 다른 거죠. 예전에 국내에 처음 보험이 보급됐을 당시, 설계사분들 중에 전문성보다 지인과 눈대중으로 일을 했던 것이 업계에 독이 된 거죠. 잘못된 방법이 전통으로 이어지다 보니 인식이 나빠진 거죠. 미국이나 유럽 지역에서는 보험·재무 설계사가 아주 인정받는 직업이고, 아무나 될 수도 없어요. 그리고 어릴 때부터 금융·보험에 대한 교육을 꼭 해요. ‘돈을 관리하고 쓰는 법’에 대해 일찍부터 가르치는 거죠. 돈을 쓸 때 먼저 보험(보장자산)을 준비해 자산의 안정성을 갖추고, 그다음으로 저축을 하고, 그 뒤에 남는 돈으로 생활을 해야 하는 거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실용적인 부분에 대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아요. 그래서 부모님에게 배울 수밖에 없어요. 부모님이 아는 선에서 밖에 알려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 부모님이 모르면 올바른 경제관념을 가질수도 없고, 돈을 모으는 법도 모를 수밖에 없죠. 그래서 부자가 부자를 낳고 가난이 가난을 낳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돈도 내가 관리할 줄을 알아야 돈에 끌려다니며 살지 않게 돼요. 돈이 나를 따라오게 해야지, 내가 돈을 따라가다 보면 삶을 허비하게 될 테니까요. 금융을 알아가다 보면 더 알아갈수록 신기해요. 보험을 아까워하는 분들도 많은데 이는 보장 자산에 대한 관념이 없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 거죠. 재무에 대한 정의가 없이 당장 나에게 '돈이 있느냐 없느냐'에만 끌려다니는 거예요. 그러니 돈에 쫓겨서 살게 되죠. 어떤 분들은 재무 얘기를 하면 무조건 싫다는 식으로 회피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건 돈과 재무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회피하지 말고 관심을 가지고 알아봐야 내 스스로 계획하고 준비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재무 설계, 교육, 보험 등에 대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교육이 정말 중요한 거죠.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모르면 전문가에게라도 배워서 알아야 하는데 알려고 조차하지 않는 거죠. (김영우씨의 개인 사진) Q. 삶의 목표가 있다면? 영업을 통해 결국은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사업을 하고 싶어요. 관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팀을 꾸려야 하거든요, 간호 관련 사업에 관심이 있어요. 초고령화 시대가 왔기에 점점 아픈 분들이 늘어날 거예요, 노인분들은 건강에 대한 욕구가 아주 큰데, 이를 국가에서 받쳐주지 못하면 안 되니까요. 전문 간호 기업을 만들고 보험도 연계해서 그분들이 안정적이고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돕는 게 지금의 목표예요. Q. 힘들 때마다 되새기는 좌우명이나 문장이 있나요? "기어가든, 걸어가든, 뛰어가든, 날아가든, 도착지가 있다면 문제없다. 절대 포기하지 말자. 무조건 도착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친환경 분리수거의 혁신 ‘일체형 병뚜껑’ 출시
친환경 분리수거의 혁신 ‘일체형 병뚜껑’ 출시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병뚜껑 활용이 쉬워 재활용이 편리한 친환경 페트병이 출시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병뚜껑 개발 전문 기업 하은캡(대표 이규환)은 22일 ‘친환경 일체형 병뚜껑’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하은캡은 “이번에 개발한 일체형 병뚜껑이 기존 페트병 재활용 시 페트병에서 병뚜껑 표시링이 분리되지 않아 재활용 효율을 떨어뜨렸던 단점을 해결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 병뚜껑은 마개가 분리되지 않고 병에 붙어 있어 소비자가 음료수를 먹고 난 후 뚜껑을 분실할 염려가 없다”며 “휴대도 간편해 반복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병뚜껑 위쪽을 잡아당기면 절취부를 따라 병뚜껑 표시링을 손쉽다”고 했다. 이어 “이번 제품은 국내 특허(제10-1880107)와 미국과 중국 EU에서도 특허 등록이 완료됐다”며 “160개국에 특허도 출원 중이다”고 말했다. 하은캡 관계자는 “이번 (병뚜껑)제품은 정부가 추진하는 페트병 등 9개 포장재 재활용 용이성 등급 기준을 따랐다”며 “이번 시도가 플라스틱의 남용으로 파괴된 환경 문제에 대해 많은 기업들에게 경각심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플라스틱이 지구환경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우려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 국가들이 플라스틱 관련 환경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