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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부동산 정책의 문제와 과제
정부의 부동산 정책의 문제와 과제
[선데이뉴스신문=권오은 국장] 최근 3년간의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문제가 심각하다. 부동산 가격 상승은 정책과 제도로 완벽하게 잡은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코로나19사태로 석 달 새 100조원 넘는 돈도 풀렸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만은 내심 기대가 컸다. 그런데 최근 3년간 서울아파트 중위가격 52%나 상승했다. 문재인 정부는 실질적이고 확고부동한 부동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부풀어 오르는 풍선과도 같다. 한 쪽을 쥐어 누르면 다른 한쪽이 부풀어 오르는 풍선과도 같은 정책이 되어버렸다. 돈과 명예, 권력을 움켜쥔 정치인들의 머릿속에도 온통 개인주의적 사고로 가득 차 있어 다수 국민을 위한 안목의 지혜보다 개인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스스로 앞장서야 했다. 더구나 국민은 코로나19로 인한 경제가 심각할 정도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이들마저 시원한 사이다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작은 희망의 싹마저 잘라버리는 꼴이 되어버렸다. 최근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의 청주 아파트 매각과 강남 아파트 보유, 박병석 국회의장의 강남 아파트 보유의 언론 기사를 접한 국민의 원성과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 그뿐이 아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발표한 돈과 명예, 권력을 움켜쥔 정치인들의 부동산 재산 현황’에 따르면 ‘제21대 국회의원 다주택자는 더불어민주당 43명, 미래통합당 41명, 정의당 1명, 열린민주당 1명, 무소속 2명 등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총 88명으로 거의 1/3 수준인 것으로 파악됐다. 또, 충북 지역의 20대 국회의원 8명 가운데 7명과 이시종 충북도지사, 한범덕 청주시장 등도 서울, 수도권에 아파트나 건물을 보유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부동산 정책의 성공에 앞장을 서야 할 정치인들이 이 꼴인데 문재인 정부의 6.17 부동산대책이 강력한들 국민은 무슨 기대와 희망이 있겠는가? 문재인 정부가 최근 야심차게 내놓은 것이 6.17 대책은.‘조정대상지역 및 투기과열지구 지정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자금조달계획서 강화,’주택담보대출 및 전세자금대출 규제 강화, ‘갭투자 방지를 위한 전세자금대출보증 이용 제한 강화,’재건축 규제강화,‘법인을 활용한 투기수요 근절 등으로는 강력한 규제이다.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규제만이 능사가 아니다. 분야별 정부 정책을 감시하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회의원은 자기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부동산 정책을 입안하는 부처의 국토교통부와 기획재정부를 관할하는 국회 국토위에서 근무하는 국회의원과 공무원, 그리고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정책을 입안하는 청와대나 정부에서 일을 하는 이들은 정부 정책을 감시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분야에서는 반드시 배제해야 한다. 정책이 성공을 원한다면 국민의 이익과 국가의 장래의 이익에 앞장서는 사고를 가진 자들이 이 분야에 대거 포진하여 부동산 정책의 성공을 위해 솔선수범 하지 않는 이상 성공하지 못한다. 이제라도 실질적이고 확고부동한 부동산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 절박한 시기이다.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정부는 고집과 인기를 위한 정책은 버려야 한다. 대책의 발표의 교만은 필요 없다 내놨다. 올바른 실행과 정책은 시장과 교감하면서 실패의 원인을 하나씩 버리고 성공을 위한 시장과 맞서는 대증요법의 처방이 필요한 때이다. 대한민국에서 정치인이 돈과 명예, 권력까지 모두 움켜진 이들의 기득권부터 내려 놓지 않는 한 성공하지 못한다. 이제는"대통령의 힘으로 밀어 붙이는 자신 있다"는 말 믿지 않는다. 이제는 국민의 눈이 너무나 높아져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창작산맥, 제11회 김우종문학상·창작산맥신인문학상 시상식 성료
창작산맥, 제11회 김우종문학상·창작산맥신인문학상 시상식 성료
[선데이뉴스신문=권오은 기자]도서출판 ≪창작산맥≫과 ≪창작산맥≫문학회가 주관한 제11회 김우종문학상 시상식이 7월 4일(토) 오후 2시 30분 ‘문학의집·서울’중앙홀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제11회 김우종문학상 수상자는 대상에 정호승 시인, 본상에는 김대원 수필가와 강대선 시인이 수상하였다. 이날 창작산맥신인문학상 시상식도 있었는데 신인문학상에는 정성영, 이한나, 조성오, 김용환, 장철주, 신정희, 김가은. 민준영. 신경희가 각각 수상했다. 행사에 앞서 창작산맥 허선주 주간의 내빈소개가 있었는데 이날 참석한 내빈은 한국현대시인협회 명예이사장 김용재, 허영만 교수, 맹난자 수필가, 정호승 시인, 류양선 교수, 김외자 교수, 현대수필 회장 강산옥, 문학 수 발행인 현옥희, 스포츠 한국 부사장 나명엽, 서초문협 현옥희 회장, 에세이문학 발행인 이상규 등과 ≪창작산맥≫문학계 관계자들 그리고 한국중견문인들 150 여명 가족들의 참석을 소개했다. 김우종문학상은 김우종 평론가의 뿌리 깊은 휴먼사상에서 출발했고 궁극적 목표는 사랑과 평화에 있다. 사랑과 평화 운동은 한국문학이 지향해야 할 최고의 선이요, 정의요, 아름다움리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문학사상운동을 문학의 근원적 사회참여운동으로 승화하여 날카로운 펜으로 일궈내는 그 시대적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하였다. 시상식의 행사는 이계열 시인과 허봉희 시낭송가의 사회로 행사의 문을 열었다. 이날 김우종 교수의 인사말씀에서 창작산맥은 이 땅의 사랑과 평화를 위한 사회참여를 지향하며, 이는 오늘날 포기해서는 안 될 당당한 절대적 양심의 권리이며 의무라고 강조했다. 또한 올해의 김우종문학상의 선정이유에 관해 설명했는데 반세기 문학사의 총결산의 관점에서 선정했다고 했다. 이번 제11회 김우종문학상으로 선정된 수상자들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에서는 지난 반세기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흘러온 슬픔을 가장 아름다운 보석으로 승화시켜 온 국민시인 정호승 시인이 대상을, 분단과 실향의 아픔을 노래한 김대원 수필가와 광주의 민주 광장에 선 강대선 시인이 본상을 수상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서 김명섭 창작산맥 문학회 회장의 환영사가 있었고 허선주 시인의 <정호승 시인의 시 수선화에게>의 축시낭송은 수상식의 자리를 중엄하고 차분한 마음을 정갈하게 깔아 놓은 듯 선명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시상식 중 창작산맥문학회장의 이·취임식이 있었는데 김명섭 이임회장의 감사패와 민아리 신임회장의 임명장 수여가 있었다. 시상식이 끝난 자리에서 ≪창작산맥≫ 주간 허선주 주간은 졔11회 김우종문학상 시상식을 위하여 끝까지 자리를 빛내 주신 내빈과 문인들에게 감사를 표한다고 했다. 또한 김우종 문학사상을 보다 올곧게 이어가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문인들의 많은 협조와 관심을 부탁한다고 했다.
[칼럼]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전 세계적인 위협 요소의 큰 재해로 위협하고 있다.
[칼럼]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전 세계적인 위협 요소의 큰 재해로 위협하고 있다.
[선데이뉴스신문=권오은 국장] 공상과학영화의 재난 영화에서 공포를 보듯 그 공포가 현실이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나온다. 이번에 코로나19 사태는 ‘아무것도 만지지 마라’라는 주제인데 2011년 9월 미국에서 개봉된 바이러스 재앙을 그린 영화 미국 영화 컨테이젼(contagion, 감염)의 한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코로나19를 미리 예견한 바이러스 재앙의 전염병 영화이지만 지금의 코로나19 사태와 는 너무나 비슷하여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어찌하던 우리는 언제나 재난과 함께 하며 살아간다.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어야한다. 재난의 극복은 예방부터 대응과 후속조치까지의 재난관리는 능동적인 주체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재난사태를 빌미로 변해가는 세상으로 바꿔 가려는 디지털화 세상이 도래될 것이 예견되기에 매우 걱정이 된다. 인류는 역사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긴박한 상황이 끊이지 않았다. 재난에 대응하는 체계와 재난을 예방하는 체계도 많이 변해 왔고 이레 대하여 잘 대응해 왔다. 또 다양한 정보 전달의 채널과 인터넷을 통한 정보 전달력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를 통한 정보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방송도 재난 미디어의 기능을 한층 강화될 것이 분명해졌다. 이번 코로나19 재난사태는 디지털의 세상에서 살아가야만 된다는 수동적 현실에 예견된 미래의 슬픔을 보는 것 같아 슬퍼진다. 그 슬픔의 우려는 통제된 사회, 인간미가 사라지는 사회로 가는 운명적 길을 선택해야만 하는 디지털세상이 더 두려워지는 이유이다. 그러니까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인간성, 정, 만남이 줄어들고 사가질 것이기에 슬프다. 이번 코로나19 재난의 사태에서 보듯 이젠 어쩔 수 없이 원격조정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정보 전달 채널의 원격전달과 원격수업 등은 확대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줄어들고 개인의 정보는 모두 디지털화 되어진 전산망에 걸려있게 된다는 사실에는 너무나 섬뜩해진다. 전달 채널 간의 정보의 공유는 어쩔 수 없이 기계 속에 갇혀져 있어야 한다. 이러한 개인의 정보는 독재자나 일부 2%의 권력자에게 통제되어 진다면 나머지 98%는 이들에 의한 아바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더 무서워진다, 반면 이를 이용한 장점에서 보면 그 효과는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들은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고 선이 있으니 악이 있다. 디지털의 기계와 소수의 독재가가 마음대로 인간의 인간미를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 멀지 않아 그 우려가 현실이 될까 걱정이 된다. 디지털이 인간성을 다스리는 시대 그 세상은 어떻게 될까? 복종과 맹종이 자유를 덮고 평온하고 고요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더불어 살아가는 다수가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세상이 될까? 그 미래가 우려 되고 걱정된다. 인류 질병의 역사는 새로운 전염병과 늘 함께 싸워왔다. 새로운 전염병이 생길 때마다 인류는 백신 개발로 병을 이겨냈다. 하지만 지금의 코로나19의 대응은 검사하고 격리하고 통행을 제한하고 마스크 쓰고 손을 씻는 뿐이다. 백신이 만들어질 때까지 무차별적으로 희생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이번 코로나19에서 얻는 크나큰 교훈은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인간들은 원격조정으로 되어져야만 하는 세상을 경험한 것이다. 마스크 배급, 원격수업, 화상회의, 원격업무 모임과 접촉이 통제되고 개인의 정보가 기계 속에서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정보의 유출로 불안 해지는 사회, 통재되는 사회에서의 개인의 정보가 악용되는 사회는 늘어날 것이다. 독재자나 권력계층에 의해 악용되는 사회에 대다수의 국민들이 아바타가 되는 사회는 원하지 않는다. 인간미가 넘쳐 나는 사회, 자유가 살아 있는 사회를 원한다. 이미 우리는 자유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다. “꽃은 자신을 위해 향기를 내지 않습니다. 많은 꽃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향기를 냅니다. 인간도 인간이 만나 나누는 인간미를 보이며 함께 살아갑니다. 나로 인한 남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를 도와 가면 살아가야 합니다. 삶은 자신이 행복할 때 좋습니다. 당신이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이 행복할 합니다.” 이번 코로나19사태로 인해 얻는 소중한 원격세상의 경험을 다른 의도로 이용하여 인간의 숭고한 인간미마저 이용하는 위정자나 권력자가 없는 세상이 되길 기대한다.
[칼럼]5월, 가정의 달에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서로 아끼는 사랑을 주고받자
[칼럼]5월, 가정의 달에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서로 아끼는 사랑을 주고받자
[선데이뉴스신문=권오은 칼럼] 5월은 근로자의 날 5월1일을 시작으로 어린이들을 더 사랑하고 아껴주고 무럭무럭 자유롭게 자라도록 하는 소중한 의미를 담은 5월 5일 어린이날에 이어 어버이날, 5월11일 입양의 날, 5월15일 스승의 날, 5월16일 성년의 날, 5월21일 부부의 날 등은 거의 가정과 관계해서 기리고자 하는 날도 많고 행사도 많은 달이다. 5월에는 주로 가족들 서로를 위한 많은 기념일이 많아서 ‘가정의 달’이라고도 부른다. 코로나 19, (일명 우한 폐렴) 확산 방지를 위해 재택근무와 온라인 개학을 했다. 반면에 올해 어린이날은 온 가족이 가정에서 즐겁게 어린이날을 함께 보낼 것으로 보인다. 어린이날 취지는 어린이에게 희망과 생명의 길을 열어주자고 밝히고 있다. 도한 소년운동의 기초 조건으로 고전적인 윤리적 압박에서 벗어나 이들에 대한 온전한 인격적 예우를 하라는 것이다. 어린이 들은 배우고 뛰어놀 수 있도록 다양시설의 제공과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 나가야 된다는 의미 깊은 방향도 제시 되어있다. 단순히 어린이에게 선물을 주자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사회의 기둥이 될 수 있는 과정의 격려가 단 하루가 아니 이었으면 한다. 함께와 우리라는 단어 속 깊은 결연의 피가 이들의 용기에 거름이기를 바라는 날이기도 하다. 어버이날은 인간 내면의 효를 되새겨 보는 하루였으면 한다. 그러나 현 세태는 너무나 많이 변했다. 예전, 어버이날에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아버지 어머니들에게 누구나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거나 꽂고 다녔다. 이 꽂을 달고 다니는 대다수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은 입가 웃음이 살아있었다. 그도 그러하듯 자식들이 달아준 효의 마음이기에 아마도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어르신들을 보면 어버이날에 카네이션 꽂을 달고 시내를 나온 부모님들을 보기 힘들어 졌다. 얼마 전 어린이날부터 임시공휴일, 어버이날까지 황금연휴가 끝난 후에 만난 동창들과 나눈 얘기다. 이렇게 변한 세상이 서글프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밉기도 했다. 한편으론 다 그렇구나 하며 현 세태를 긍정적으로 인정해아만 하는 마음이 왠지 씁쓸하기까지 하다. 과거의 어버이들은 가정에서 어떤 위상이었는가! 1950년과 60년~7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의 아버지는 정말 위대하게 여겼다. 대가족제도였던 그 시절의 가정의 중심은 당연히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식사를 할 때면 부모님 밥상에는 반찬이 많고 가끔은 계란과 김도 더 놓아져 있었다. 이것은 군말도 없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를 높이 챙겼다. 아버지는 가정의 가장이었으며 보이지 않는 근엄한 위계질서가 자연스러운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의 이러한 가정의 질서는 밥상머리문화로 정착이 되어 외국에서는 무척 부러워했었다. 30여 년의 한세대가 지난 지금은 카네이션을 달고 출근하는 부모들을 눈을 보기가 드물 정도이다. 세상이 많이도 변했다. 이러한 현실이 좋은 현상인지 나쁜 현상인지는 모르지만 나이든 어르신들의 보면 왠지 그저 허전하고 씁쓸하기만 하다. 급격하게 변한 세태를 탓하거나 인정하기도 힘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집일까? 이기적 욕심일까? 어른들이 뭘 잘하는 게 있느냐고 물으면 그에 대한 할 말은 없다. 예전 같으면 자식들은 감히 이런 말을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요즘은 자식들은 어떤가. 당당하다 못해 부모들과 의견차이가 심하면 오히려 큰소리로 부모들에게 가르치려 한다. 특히 정치적 문제의 갈등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된 현실이 두렵기까지 하다. 이런 걸 두고 자유분방하다고 인정해버리기에는 너무 억울한 시대가 되었다. 아예 포기하는 부모들도 있다고 한다. 그게 편하니까? 그래서는 안 되는데 시대는 너무나 빨리 앞서왔다. 정제될 시간의 여유가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가족이란 우리와 울타리 가장의 질서는 알게 모르게 무너져 가고 있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다.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인 밥상머리문화가 이제는 그리웁기까지 하지만 어쩔 수가 없게 되었다. 세대는 변하고 환경도 변화고 문화도 변하고 이에 순응하는 인간의 습관도 변한다. 다음세대들이 살아갈 시간과 공간 그리고 환경은 그들의 것이다, 그들의 문화에 우리 부모들은 관심과 적응을 해 나갈 수밖에 없지만 오늘날 세대 간이 버리지 말아야 될 불변의 것이 있다. ‘시대는 변해가도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서로 아끼는 사랑을 주고받는 사고의 고착,’ 이것이다. 특히,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상기해야 될 우리들의 올바른 사상이기 때문이다. 5월, 가정의 달이 지나고 있다. 이달만이라도 가장 인본주의 효(孝)사상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밥상머리문화를 재현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 또한 나쁘지는 않다. 5월, 가정의 달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효사상과 밥살머리문화가 다시 되살아나 오래도록 활기찬 가정, 대화로 화목한 복된 가정이 만들어지기를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 단 하루만이라도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주고 서로 아까는 사랑을 주고받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칼럼] 슬픈 자유가 억압과 속박으로 가는 것을 모른다
[칼럼] 슬픈 자유가 억압과 속박으로 가는 것을 모른다
[선데이뉴스신문=권오은 칼럼] 시간의 악보 위 길을 따라 계절은 노래를 하듯 어김없이 찾아온다. 나는 참으로 오래간 만에 봄을 느낀다. 세상은 온통 코로라19에 어지러운 나날을 보내는데도 들판의 개나리는 노랗게 피었다. 여의도 벚꽃길과 서부간선도로 둑방의 벚꽃길을 따라 활짝 핀 벚꽃 꽃잎이 바람에 날려 다니는 광경으로 봐서 봄은 오고 있다. 시골길을 따라 기와집 장독대 옆 하얀 목련이 화사한 것을 보면 봄은 분명히 오고 있다. 악보 위를 걷은 봄의 계절을 조용히 왔나 보다. 나는 이 봄과 함께 참으로 오랜만에 자유를 마신다. 올 봄이 와 있는데도 잊고 있는 것을 보면 계절의 소중함도 잊은 것 같아 슬프다. 인간의 자유와 자연의 자유는 존재의 주제끼리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것의 이치를 맞추는 시간이 더 무서워지는 날이다. 인간 본성의 자유는 자유의 의미를 다성적(多聲的) 울림으로 끌어낸다. 올봄은 마치 이상화 시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 의 시적 울림이 봄을 더 슬프게 만드는 것 같아 가슴이 저려 온다. 아주 큰 재앙을 몰고 온 코로나19의 봄으로 오는 어지러운 봄이다. 슬픈 봄이 국민을 묶어버리고 나라의 지도자들이 덩달아 화사한 봄을 묶어버리고 있어 온통 세상이 회색 빛으로 가려진 것 같아 속상하다. 그동안 누려온 봄은 이제 없다. 통제를 받는 인간과 외면당한 봄의 계절이 삐걱대는 사이 나태한 포기가 살기 넘쳐나니 무슨 변화의 조짐이 두려워 지기까지 한다. 사실 우리들은 가보지 못한 세계에서 살아가게 되지는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더 심각하게 느끼는데도 반응을 잃어가는 것은 이미 자유의 영역을 잃어가고 있는 사실은 잊고 있는 것, 슬픈 자유에 우리는 길들여지고 있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잠시 아파트 승강기 옆에서 내내 멍하니 서 있었다. 열손가락을 수시로 비벼가며 서 있었다. 마음은 더 어지러웠다. 의자도 옆에 있었는데 초조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유는 자유인데 나를 짓누르는 외적 억압에 굴복해가는 모습이 짙어질 때쯤 이상화 시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가 머릿속 깊이 각인되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억압이 더 두려워서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빨리 깨우쳐야 한다. 빼앗긴 들에는 아무도 없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유가 말살당한 황량한 전경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모른다. 자유의 소중한 자유를 우리는 모른다. 굴종의 극한은 없다. 그냥 동화되는 자체에 흡수되기 때문이다. 비급하게 발악하는 간신배들이 늘어나고 누리는 지도자는 속박과 억압에 흥을 돋구는 세상이 될까 두려워 진다. 당하고 난 뒤의 발버둥은 늦었다. 자유를 망가뜨리는 것은 권력의 폭력이다. 권력의 폭력이 휘둘러대는 시대가 오면 자유를 빼앗기는 슬픈 자유는 오고 슬픈 자유는 속박의 세상에 젖어들게 되는 것이 무서워진다. 잠재적 폭력은 분면 나의 자유를 말살한다. 폭력 앞에 놓인 대다수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 초조함 때문에 자신은 비겁해지고 더 나약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자유를 설자가 없게 만든 것이기에 미래가 불안해진다. 이와 같이 옆에서 조용히 오는 폭력에 길들여질까 서글퍼진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스스로 두려움과 불안과 비겁으로 몰아넣지는 말아야 한다. 자유의 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자유를 몰고 오는 양태가 머지않아 억압의 족쇄로 속박되는 체제의 사회로 가는 것이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옆으로부터 아무도 모르게 다가오는 슬픈 자유란 것이 알려주기 때문이다. 진정한 소통의 자유가 계약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다시한 번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를 한 번 더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쉽게 잊고 지냈던 ‘자유의 이상’을 새롭게 각성해야 할 시대에 있다는 자신을 들여다 볼 여유의 시간이 필요할 시점이 있다. 자유가 활기 있게 숨 쉬는 사회에 물들여 진 이 시점에서는 우리가 불행하다고 하는 사람도 없다. 스스로 우울과 슬픔을 겪는 사람도 적다. 자유란 숙성된 마음의 여유 그 이상의 무엇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온 2020년의 봄 코로나19로 봄을 빼앗겨 흥이 나질 않습니다. 하루 빨리 슬픈 자유에서 벗어나는 시간의 계절이 되길 바라는 마음의 기도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들에도 봄은 오는가?/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는 않구나/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란 구절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한다.
[칼럼]위대한 침묵의 아우라 물결을 만든 대구·경북 "코로나19,  스스로 이겨내는 위대한 국민"
[칼럼]위대한 침묵의 아우라 물결을 만든 대구·경북 "코로나19, 스스로 이겨내는 위대한 국민"
[선데이뉴스신문=권오은 칼럼] 대한민국은 지난 1월 20일 코로나19 확진 환자가 처음 발생한 이래 감염병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대구경북 지역에 집중된 것이 신천지 교회에서부터라니 더 안타깝기만 했다. 어느 특정 종교 집단에 대한 뉴스는 끊이지 않았다. 환자가 폭증할 때마다 근본적인 대책에 대한 내용 보도보다도 신천지가 우선 보도 되었다. 심지어는 우한 코로나 19를 대구 코로나라고 하지를 않나. 대구 봉쇄란 말까지 방송은 쏟아냈다. 그러나 대구, 경북 시민과 도민들은 조용했고 침묵했다. 특정질병관리 위기에 대한 매뉴얼조차 없는 정부, 갈팡질팡 정부 정말 한심했다. 초기 대응력이 너무나 허술한 정부 비난 받아 마땅하다. 애초 코로나19 발생 초기부터 빠른 확산을 예측하고 중국인 입국금지 조치에 대한 초기 대응을 하지 않은 정책의 크게 잘못된 것이다. 또한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마스크가 중국 등지로 물 새듯 빠져나가도록 내버려뒀다. 또한 수급 상황을 예측 못하고 구호품으로 중국에 전해주기도 했다 “우리는 곧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국민 안심시키기에만 바빴던 우리 정부다. 마치 ‘세월호 사고’ 당시 기다리라고 한 방송을 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화재사고에서 보듯이 초기진압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잊고 있는 정부인가! 그러나 오히려 이번 코로나19를 대하는 대구, 경북 지역의 시민과 도민의 대처는 위대한 침묵의 아우라 물결이었다. 이 물결을 일으키며 극복해 나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위대하다. 마치 국민이 나라를 이끌어 가는 국민에 의한 대한민국, 국민이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이 되었다. 정치 선동가들은 국가를 잊은 듯하다. 개인을 위한 개인주의에 빠져 괴변만 늘어놓으며 떠들어 댄다. 총선 공천 당락에만 열을 올리는 정치가들, 정말 한심하다. 코로나19 확진 환자의 83%가 집중된 대구경북 지역의 상황은 안타깝기만 했다. 폭증하는 환자 수에 따라가지 못하는 병상, 격무에 시달려 탈진하는 대구, 경북 의료진들이 있었다. 이런 사회적 재난 속에서도 대구경북 시민들의 침착한 대응으로 맞섰다. 거대한 침묵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루 수백 명씩 환자가 늘어나는데도 감염병 공포에 지지 않았다. 대구의 권ㅇㅇ씨는 스스로 외출을 하지 않고 전화로 친지들에게 까지 외출을 하지 말라고 했다고 했다. 경북 문경의 최 ㅇㅇ씨 역시 마을회관까지 폐쇄하고 외출을 하지 않는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고 했다. 코로나19를 이겨내기 위한 대구, 경북 시민과 도민의 성숙한 시민의식은 자발적으로 발휘 되었다. 언론 보도 영상에서도 보았듯이 마스크 대란 속에서도 차분하게 줄을 섰고, 입원이 지연돼도 다툼이 벌어진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대다수 시민이 자발적인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있었다. 식당들이 타격을 입자 재고 소진을 위해 자진 고통 분담에 나섰다. 상가 주인들도 임대료 인하에 앞장을 섰다. 대구 시내 병·의원들은 감염 위험과 늘어나는 적자에도 “동네 최후의 의사가 필요하다”며 문을 닫지 않았다, 민간 병원인 대구동산병원은 병원을 비우고 코로나19 전담 병원을 자청까지 했다. 위대한 침묵의 물결이 넘쳐났다. 그 어떤 지역보다 침착한 침묵이 아우라의 물결을 만들었다.물결로 이어지는 우리 사회는 온 마음을 모아 대구경북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대구 코로나19가 아니라 중국의 우한 코로나19라는 것을 침묵으로 보여주었다. 이것은 차별과 배제 대신 위로와 온정을 아끼지 않는 자랑스럽고 위대한 시민의식이었다. 이어지는 침묵의 물결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접수된 코로나19 피해자를 돕기 위한 특별 성금은 열흘도 되지 않아 270억 원을 넘어섰다.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할 용기를 준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응원이 힘을 실었다.대구 의료진을 돕기 위해 각지에서 의료진이 기꺼이 달려가 환자를 돌보고 있는 간호사들도 있다. 고려대안암병원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은 각각 경북대구생활치료센터와 대구 계명대 동산병원에 의료진을 파견했다. 대구의료원과 대구동산병원에는 시민들이 보낸 마스크, 음료수, 도시락이 쌓여 있다. 코로나19, 스스로 이겨내는 위대한 국민의 정부가 되살아났다. 개인을 위한 정치꾼들 머리 숙여 대구경북 시민과 도민 나가서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머리 숙여 반성해야 한다. 우리 이제 정치만 잘 하면 이런 말 하지말자. 국민이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나라로 다시 태어나자. 탓하지 말고 보여주자. 공은 국민이지 지도자나 정부가 아니라는 것 명심해야 한다. 위대한 침묵의 아우라 물결을 만든 대구·경북,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 조금 더 힘을 내어 코로나19 이겨 냅시다. 어차피 힘이 드는 쪽은 국민이다. 우리 힘을 모아 이겨내야 한다.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극복하려는 '작은 영웅' 들의 물결 이것이 침묵의 아우라 물결이다. 나눔과 배려로 동참하는 이 물결이 더 크게 일어난다면 이보가 더 큰 위기도 극복해 낼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항상 위기에 똘똘 뭉쳐 해쳐나간 저력이 있는 국가이다. 위기를 슬기롭게 넘겼던 1997년 외환위기 때의 금모으기운동, 2007년 태안 유조선 기름유출사건, 2015년 메르스헌혈캠페인 등 우리는 국가적 위기마다 이를 헤쳐 온 저력이 있는 국민이다. 이번 코로나19에서 보여준 대구, 경북의 거대한 침묵의 아우라 물결이 또 역사를 쓰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손길이 이어져 코로나19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내는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희망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새로운 역사, 이것이다. 우리 이제부터라도 정부의 무능 탓하지 말자. 코로나 19를 극복한 날에 공은 또 정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국민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이기 때문이다.
[칼럼]보다 효율적인 공공근로 절실하다
[칼럼]보다 효율적인 공공근로 절실하다
[선데이뉴스신문=권오은 칼럼] 공공근로는 소득이 없는 저소득층을 위해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 주기 위해 정부에서 실시하는 서민지원 프로그램이다. 공공근로 하는 일은 생활환경 정비 사업을 비롯해서 사무보조, 안내 업무, 학교 급식보조 등 다양한 업무가 있다. 당초의 목적대로라면 관리역시 철저해야 하며 실효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실제 시행하고 있는 일자리 정책의 실행은 그렇지가 않다. 역효과만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정부가 예산을 확보하여 실행하는 것은 목적이 있다. 실직자들의 생계지원, 작게는 잠재적 사회적 불안을 줄이자는데 있다. 공공근로 사업을 시행하는데 있어서의 관리자의 완장 하나 더 만들어 준 격 밖에 좋아진 것은 없다. 근로기준법상으로는 일용직 근로자로 고용계약기간은 대체로 3개월이다. 공공근로 급여는 보통 최저임금 시급으로 제공한다. 부대경비, 주월차수당, 4대보험 가입을 해준다. 65세 미만은 주5일 25시간 근무를 65세 이상은 주 5일 15시간 근무를 할 수 있으며 4분기 연속 참여는 대체로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신청자격요건은 지역마다 다르지만 근로능력을 갖춘 만 18세 이상의 저소득층의 시민이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젊은 사람들의 신청은 저조한 반면에 주로 중장년, 노인층이 많다는 것이다. 꼭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당초취지대로 일을 만들어 전공인이 필요하다면 개인의 이력을 참작하여 일을 시키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행하지 않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난다. 아침 출근 시간에 도로 옆에 정비를 하는 모양인데 청소를 하다가 죽 늘어앉아 있지 일을 하지 않는 모습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너무 오랫동안 일을 하지 않는다. 시간이 되면 귀가 할 모양이다. 노동은 제대로 하고 급여를 받아야 된다는 인식과 사고가 없다. 오히려 이들을 상부상조 협조란 의미는 없어진지 오래다. 이젠 일을 조금만 해도 돈을 우선 요구하는 이상한 풍토로 바뀌어 지고 있다. 세상이 냉정해 지는 것 같아 더 안타깝다. 예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공공을 위한 일이라면 솔선수범하였고 공공부역을 하면서 서로 이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세상, 너무 각박해져가는 미래의 세상이 더 두렵다. 도한 정부와 지자체에서의 공공근로는 매년 일자리 창출목표를 정해놓고 실적을 따진다. 우선 실업률을 줄여 보자는 쇼(show)적 계산된 정부의 실적의 효과를 노리기 위한 꼼수인가? 게다가 공공근로 일자리 역시 중구난방이다. 더 심각한 것은 선의의 일자리 사업의 생산력을 저하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우러러 몰려다는 철새 노동이다. 3개월을 마치면 실업수당을 받아 생활하다가 또 다른 직장을 구해 일을 하면 된다는 식이다. 열심히 일을 하려고 하는 의욕은 본인도 모르게 피폐해가는 줄도 모른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지금 시행하는 일자리 정책을 전면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초 저소득층과 중·노년 실업자 등의 생계에 도움을 주고자 공공부문의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것이 되레 중소기업 인력난에 악영향도 끼치고 있다. 중소기업 생산직과 농축산업 일꾼들이 공공근로 사업으로 몰려드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정부는 실직자 지원차원에서 공공근로사업을 시행해 왔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들의 준비가 부족했다. 취업대상자 선발 과정서 부터 관리·사업장 선정에 이르기까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 실행에 있어 보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어 왔다. 비판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자치단체들은 공공근로사업의 항목들을 보면 주로 풀뽑기나 휴지줍기, 뒷골목청소 등 단순노동형 작업이다. 얼굴만 비쳐도 하루 2만5천~3만원의 일당을 준다는 것이다. 강원도 00면 공공근로자 한 할머니는 유모차에 의지하며 공공근로사업 현장에 와서 시간만 보내고 돌아가는 모습은 누가 보드라도 잘못된 것이다. 자기 몸도 의지하기 힘든 사람에게 공공근로를 시키다니? 이런 식의 공공근로사업의 시행은 안 된다. 이것이야 말로 정부 예산이 밑 빠진 독에 예산만 들어붓는 꼴이다. 이런 식의 지원은 안 된다. 취업대상자들의 공정한 선발과 작업 내용에 걸맞게 일을 시켜야 한다. 작업 장소에 가서 시간만 보내면 돈을 준다는 식은 절대 안 된다. 정부와 지자체는 단순하게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꼼수는 더 더욱 안 된다. 진정한 공공근로가 되게 사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소득이 없는 저소득층을 위해 최소한의 소득과 생계를 보장해 주기 위한 제도, 젊은 층에서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안정된 생계를 유지 차원에서의 일자리를 제공해야한다. 그리고 최소 1년은 지속적이어야 한다. 부산지역 지자체의 000구의 공공근로사업은 일자리 창출의 수범사례도 있다. 1년 6개월 사3천여 명이 재취업했을 정도다. 구의 공공근로사업을 보면 단순노무직이나 업무보조직 일자리 창출은 배제 했다. 또한 자격증을 갖춘 전문직종의 일자리를 대거 만들었다는 것이다. 00구는 경력 단절 주부 등으로 구성된 18명의 구인개척단의 활동을 활용하였다. 이들은 부산·경남 기업체를 직접 찾아다니며 구인정보를 수집했다. 직접 구직자와 연결하여 구직자들에게 면접 교육은 물론 메이크업과 옷차림 요령에까지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은 노력으로 공공근로 사업에서 칭찬을 받았다. 어는 누가 보더라도 떳떳하다. 단순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편법의 소리도 듣지 않는다. 오히려 칭찬이다. oo구의 구인개척단의 활약상은 구청 공공근로사업의 성공은 일자리 지원 기관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류보다는 현장을 중심의 실속형이다. 수집한 맞춤형 일자리 정보야말로 구인·구직에 실질적 공공근로이기 때문이다. 경력 단절 여성, 베이비붐세대의 은퇴자, 고령자 등 재취업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반면 중소기업들은 인력 확보에 애로를 겪고 있다. 이 같은 문제에 대한 해소책은 기업체와 구직자가 충분한 정보공유를 통해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면 된다. oo구의 공공근로정책은 눈여겨 볼만한 한 사례이다. 이처럼 현장중심 행정이야말로 구인·구직난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공공근로가 아무리 소득이 없는 저소득층을 위해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 주기 위해 정부에서 실시하는 서민지원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눈살 찌푸려지는 근로는 안 되며 단지 실업률을 낮추기 위사 일시적 꼼수 역시 안 된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떳떳한 공공근로라는 자부심이 있어야 하고 공공근로기간도 더 늘여서 소득이 없는 저소득층을 위한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줘야 한다. 단지 출석만 하고 일 같지 않은 일로 급여를 지불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정부에서 조그마한 도움을 요구해도, 자원봉사를 부탁해도, 돈 안주면 안 간다는 식의 국민의식이 바꿔질까 두렵다. 우리 국민들은 옛날부처 이웃과 나라를 위한 품앗이 봉사가 있었다. 동네 청소를 위한 조기청소라든지 포장이 안 된 도로 정비를 위한 관공서 지원사업의 봉사 등이 옛날에는 많았다. 이런 전통적인 자발적 봉사활동이 얄팍한 돈 꾀에 넘어지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돈을 안 주면 일을 안 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 공공을 위한 봉사를 덮어버리는 심리적 사고가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실직자를 돕기 위해서는 공공근로사업의 일자리 개발과 관리강화를 위한 대책이 시급하다. 보다 실효성 있는 공공근로로 일하는 국민이나 일을 시키는 공무원들의 의식전환사고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또한 정부는 제대로 된 공공근로 사업이 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칼럼]완장시대와 준 자발적 줄서기의 슬픔에서 벗어나자
[칼럼]완장시대와 준 자발적 줄서기의 슬픔에서 벗어나자
[선데이뉴스신문=권오은 칼럼] 요즘 세태(世態)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갑자기 예전 MBC 베스트극장에서 윤흥길의 소설 "완장"의 주인공인 종술의 역을 맡은 조형기와 노란 완장이 생각난다. 동네 저수지의 관리를 맡은 동네 건달 종술(조형기) 팔에 두른 노란비닐 완장에 파란 글씨가 새겨진 감시원 완장의 위력은 어느 시대에나 유효한가 보다. 고작 동네 저수지 관리인의 완장을 차면서부터 가지는 그 작은 완장의 권력을 가지고 오만방자 함이 극을 달할 때 선한 사람들은 당하는 환경에 숙달이 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환경이 살벌한 세상이 되면 수동적인 대다수 사람들은 본인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버리게 되고 순식간에 수동형 인간이 되고 만다. 이러한 환경의 ‘완장문화’ ‘군림문화’에 기죽은 국민들의 슬픔에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로 생겨난 줄서기의 슬픔이다. 언제 우리가 마스크를 사기 위해 약국에서 신분증을 보여주며 줄서기를 해야 된다는 사실에 생각이나 해 본적이 있는가! 언제나 가계나 마트에 가면 무슨 물건이든 구매할 수 있는 자유민주국가에서 어쩌다가 사회주의적 배급형 줄서기를 시험하는 국가가 되는듯하여 더 슬프다. 내가 원해서 공공의 패행를 주지않기 위해 자발적 줄서기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마스크를 사기 위해 직접 자신이 약국에 나가 나의 신분을 밝히고 그것도 한정된 개수만 구매할 수 있는 준자뱔적 줄서기를 해야 하다니 정말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한다, 여기도 완장이 하나 늘어났다. 정말 갑자기 변한 대한민국! 대다수의 국민들은 머리라 혼돈에 가득 차 있다. 인정 많던 민족이 점점 각박해지고, 하나의 민족이라 자부하던 민족이 이젠 좌와 우로 갈라지고 이젠 남을 믿을 수 없어 경계하는 눈초리, 신고와 고소, 고발이 쉽게 입에서 나오는 세상에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문화를 접하고 있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말 세상이, 사람이 무섭다. 길거리에서 만나 사람들은 정말 편안하지가 않다. 뿐만 아니라 길거리를 걷다 보면 주위에는 온통 완장을 찬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본다. 무슨 시민단체(NGO)는 왜 그리도 많은가! 원래의 시민단체의 정의는 사회 공공의 이익과 보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인 모임을 갖고 그 목적에 따라 활동하는 모임이면 실제로는. 사회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수반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시민들이 스스로 만든 모임이다. 우리나라 시민단체들의 활동영역에 따른 분류로 보면 정말 다양하다. 이들 단체에도 장이 있고 완장이 있다. 이들의 완장은 실제고 알고 보면 공공의 목적, 자발적인 모임, 비정부, 비영리가 아니다. 다들 완장문화에 편성한 군림문화로 변해 있다는 것에 대해 가슴 아프다. 대다수의 단체들은 활동하기 위해 정부의 지원금, 혹은 보조금을 원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관변단체화 되길 원한다. 그래야 완장에 급여를 받고 생활해 간다는 사실은 얼마나 좋은 직업인가! 우리나라 시민단체들의 단순하게 분야별만 보면 환경 NGO, 인권 NGO, 여성 NGO, 복지 NGO, 소비자권리 NGO, 교육/연구 NGO, 청소년 NGO, 의료/보건 NGO, 주택 NGO, 개발 NGO, 노동 NGO, 국제원조 NGO, 빈곤구제 NGO, 교통 NGO, 평화 NGO, 문화/예술/체육 NGO, 권력감시/부정부패방지 NGO, 모금 NGO, 경제정의 NGO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정말 많다. 또한 거버넌스(협치)는 정부와 시민단체 또는 민간기업 등이 서로 협력함으로서 국가 및 사회 발전을 도모하는 협치의 기구라고 하지만 이들은 정부의 꼭두각시화 되어 이들이 더 큰 완장이 되었다. 하지만 진정 이들은 무슨 목적 때문인가! 정말 사회 정의를 위해, 남을 위한 희생은 진심인가! 이들의 활동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완장을 버리고 원 취지대로 활동했으면 하는 적극적인 요구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정부의 눈치를 보지 말고 인권이면 북한의 인권에 대해 최우선적인 활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완장을 벗어 던지고 말이다. 이제부터라도 바꿔가야 한다. 원래의 취지대로 되돌아가야 한다. 준자발적, 수동적인 활동으로 완장을 찰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어야 아름답다. 공공을 위한 줄서기 얼마나 아름다운가! 차를 기다리는 자발적인 줄서기, 표를 사기 위한 줄서기,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는 줄서기는 자발적이다. 공공을 위한 자발적, 본인의 정보도 없이 기다리는 아름다운 모습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식 줄서기이다, 마스크 하나를 구매하기 위해 본인의 신분(정보)까지 밝혀야 하는 사회주의적 준줄서기의 시험은 아름답지 못하다, 정말 이것은 국민을 바보형, 수동적 준자발적 줄서기라서 더 서글프다. 작든 크든 권력을 쥐면 업무를 벗어난 부분까지 사용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속물적 근성을 만키우는 사회는 결코 성공하지 못하고 망한다. 진정한 완장은 그 자리에 맞는 역할을 성실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 자리자체를 자기 개인의 것으로 착각하여 개인이 즐기고 사용하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제 완장문화에서 깨어나야 한다, 군림문화 안 된다. 완장을 찬 세력들이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통치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한 수단을 장기적으로 만들어가려는 수작일 수밖에 없다. MBCTV에서 미니시리즈 완장에서와 같이 완장시대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는 때늦은 후회는 하지 말아야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민의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가 필요함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권오은 칼럼] 자기착각의 정당화가 만든 단체몰이 나비효과 폐해 심각하다.
[권오은 칼럼] 자기착각의 정당화가 만든 단체몰이 나비효과 폐해 심각하다.
[선데이뉴스신문=권오은 칼럼]우리는 일생동안 살아가면서 대부분 착각으로 살아가는 것을 잊고 있다. 매스미디어가 발달 되면서 뇌는 영상의 착각에 지배당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사실이 왜곡되어 엉뚱한 행동의 착각의 늪에 빠져 자신의 삶마저 버리기고 한다. 이런 치명적인 결과의 심각한 착각의 폐해는 자기착각의 정당화가 왜곡되는 단체몰이 영상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자기착각의 정당화가 만든 단체몰이 검은 나비효과가 아닐 수 없다. 사건사실의 전 과정이 아닌 부분적 사실만을 위주로, 극히 자기에게만 유리한 주관적인 입장만을 정당화의 착각으로 가두어 넣고 여론에 유리한 호소로 단체몰이 경향에 여론은 거짓에 속아 움직인다. 일부 편집된 내용의 거짓이 정당화 되는 즉, 검은 나비효과를 얻어내고는 쾌락을 즐기는 족속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반대편 폐해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오히려 쾌락을 느낀다. 이러한 여론몰이에 참여한 대다수 사람들은 사실 아닌 착각이 진실인 양 착각에 순간을 인식한다. 시간이 지나 진실이 아님을 알아도 일순간으로 지나가면 그만이다. 당초 여론몰이를 호소한 사람이나 여론몰이에 참여한 사람들은 오직 착각의 늪에서 혼자 즐기거나 순간이 지나가면 되는 이상한 풍토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한 상대편의 고통과 괴로움에 대하여서는 상관이 없다고 착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 한 예로 oo경찰관의 정당한 근무가 왜곡된 집단적 여론몰이에 극단의 선택한 것과 oo경찰서 경찰관의 공무집행방해죄를 남용한 강제연행의 과잉대응의 공권력에 대한 한 시민의 억울한 호소에 대한 행동의 영상들은 정말 처절하다. 누가 잘못이고 누가 그런가? 유투브 영상을 통해 갑론을박하며 여론을 일방으로 몰아가는 시대의 혼탁함에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조직적인 댓글과 영상의 여론몰이는 심각하다. 트랜드들을 만들어가며 재미있게 즐기고 있는 무리들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대다수가 여론몰이의 일부분인 영상들이 대다수이다. 일부분의 영상과 문자를 근거로 하는 여론몰이를 믿고 있다는 것에 소름이 돋는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초기의 영상이 뇌의 착각을 지배하여 초기의 영상에서 고착되면 그만이다. 사실이 왜곡되어도 진실이 진실인데도 뇌의 판단은 순간의 판단에 더 머물 수밖에 없다. 조금의 죄 의식도 없다. 오히려 순간을 즐기는 경향이 지배적인 것에 우리는 사회적 문제가 현실이 되기 때문에 걱정이 된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그리고 힘이 있는 사람 그리고 여론의 부등호가 무조건 다수인 쪽이면 진실의 따위는 없다. 사람들의 뇌는 이들에 지배당하고 이들에 의지하면 모든 것이 자기만족의 판단으로 이룰 수 있다는 교만과 오만의 무서운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치명적인 결과는 결국 자기착각의 정당화가 만든 단체몰이 나비효과의 폐해이다. 우리는 이러한 착각의 폐해에서 하루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왜곡된 현실을 자기들의 이익에 맞춰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 착각의 늪에서 빠지면 빠질수록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 앞에는 수많은 문제들의 영상들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뇌를 오직 한쪽으로 고착시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뇌는 오직 즐기기만 하면 되니까.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다가 중독이 되어 자기파멸의 길을 자초하게 된다. 착각의 폐해에서 벗어나는 정답은 결국 자신만의 올바른 판단력을 키워가는 것 밖에 없다. 즉 전체적인 폭 넓은 시각을 다듬어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인 시각을 찾는 것, 비판적인 사고로 가짜가 아닌 진실을 찾아내는 능력, 이것을 키워낼 줄 아는 성숙한 인간이 되는 길을 선택해야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선전선동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뇌가 영상에 지배당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자기선택의 결의에 달려있다.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볼 줄도 아는 성숙한 여유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부족한 정보는 데이터를 근거로 판단의 능력을 키워가는 자세가 더더욱 필요한 세대에 살고 있지만 인간이 왜 만물의 영장인가? 인간만이 가진 생각의 힘이 있다는 것이다. 생각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오만한 착각 때문에 자기 자신의 성장에 방해를 받기도 하지만 어떤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어 자신만이 극복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착각의 정당화가 만든 단체몰이 나비효과 폐해의 늪에서 손해 보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가끔씩 우리들이 착각하고 살아왔던 것들이 무엇인가 한 번씩 되새겨 보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 종이에 쓴 사람의 글씨가 마치 사람인 양 받아들이는 착각. 어려운 것은 불가능이라고 판단하는 착각, 생각만으로 경쟁에서 이기는 것에 대한 착각. 영화의 한 장면이 사실이라고 착각하는 감성의 착각, 단 몇 분 몇 초에 스쳐지나가는 영상이, 주관적 자기주장을 편집한 영상이 진실인양 인식되는 뇌의 착각은 한번쯤 체크하며 살아가야 할 세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자기착각의 정당화가 만든 단체몰이 검은 나비효과 폐해의 늪에서 벗어날 때 더 많은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명심해야 한다. 평생직장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오다가 직장에서 해고되면 충격을 받아 삶의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는 뇌의 충격적인 회복의 영상으로 한반쯤은 되새겨 볼만 하다.
[권오은 칼럼]정부의 뒷북·갈팡질팡·우왕좌왕·눈치보기가 속 깊이 엉켜버린
[권오은 칼럼]정부의 뒷북·갈팡질팡·우왕좌왕·눈치보기가 속 깊이 엉켜버린
[선데이뉴스신문=권오은 칼럼]중국 우한에서 발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대한민국에 건너와 확산의 도를 넘었다. 국민들은 그 어느 정부보다 이렇게 불안해 한 적은 없다. 정부당국 의료기관의 행동지침이 구체적이지 않아 진료에 혼선을 빚고 있는 동안 국민들은 갈팡지팡 ·우왕좌왕 하다가 내가 확진자가 되기도 하고 내 주위에는 확진자가 늘어나는 소식만 들린다. 급기야는 대구시가 온통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도시로 쑥대밭이 되기까지 했다. 몰지각한 정부관계자는 대구코로라바리러스 감염증 내지는 봉쇄란 단어까지 하며 대책 없는 행동으로 세상을 온통 뒤엎어 놓았다. 그 많던 마스크는 다 어디로 갔는지 마스크를 사기 위해 줄을 선 시민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도대체 정부는 무엇을 하는 정부인가? 도저히 상식을 벗어난 안이한 태도에 국민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혹시라도 내 주위에 확진자가 발생한다면 확진자가 돌아다닌 동선의 역학조사에 가슴을 조여 가며 살아가야 한다. 주위에 생활하는 사람과 확진자의 동선과 일치하거나 접촉했던 모든 사람들은 감염의 공포에 떨어야 한다. 만약 확진자와 접촉한 해당 의료기관은 일정 기간 영업을 중지해야 하고 접촉한 사람은 모든 일을 접고 감금되다시피 해야 하는 참담한 사태에까지 이르는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 한다. 국민들은 중국에서 건너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이젠 대한민국에서 극성을 하고 있다. 지금은 감염증이 의심된 사람이라도 쉽게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 더 난감한 시간으로까지 흘러왔다. 확진자가 확진자인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과정이 너무 많아 실정이라 더 심각한 실정이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사스,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 이르기까지 초국가적 재난 사태가 반복해서 일어났었다. 문제가 발생될 때마다 잘 된 매뉴얼 하나 없다! 날마다 매뉴얼 타령이다. 이것은 이 정부의 콘트롤타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번 행동에서만 보아서도 알만하다. 특히, 남의 탓을 하는 데는 도를 넘었다. 이번 정부는 또 언론을 통해서도 연인 남의 탓으로만 돌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발병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중국이지 대한민국 대구도 아니요, 신천지고 아니다. 한 지역, 한 지역, 한 국가에서 발생한 감염성 질환은 전 세계로 확산하는 데의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는다.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빨리 전파되고, 더 강력한 질병들이 자주 발생할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이 정부는 초기진압에 실패했다. 너무 안이했고 아직도 확산의 그 원인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먼저 중국인 입국을 봉쇄해야 한다. 중국 우한에서 발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지 대구코로나바이러스 감영증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 근본원인부터 막아야 한다. 초기진압이 늦었다면 지금이라도 추가적인 불은 꺼놓고부터 차근차근 그 근본원인을 잡아나가야 한다. 대구의 신천지가 아니라 신천지로 건너온 중국의 우한에서 발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주범이고 가해자이다. 어떻게 하여 지금은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뀌게 되는 꼴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발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핵심적 주범은 정부이다. 초기진압에 대한 실패의 책임과 아직도 중국인들을 봉쇄하지 않고 있는 정부에 그 책임이 있다. 대구의 경우는 마치 대구지하철 대형화재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초지진압을 실패한 대형사고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당장 더 큰 희생이 나기 전에 방역의 기본인 유입 차단에 나서야 한다. 중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중국인과 외국인의 입국을 전면 금지해야 한다. 정권의 이익이 국민 생명보다도 소중한가! 중국에서 들어오는 외국인에 대한 전면 입국금지는 더 이상 늦출 일이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사회적 대재난으로 국민을 불안에 떨게 만든 것은 정부의 초기 대응책임 실패에 대한 것은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에게 호소해야 한다. 본인에게 이상 징후가 발생되면 스스로 외출을 삼가고 병원에 연락하는 국민의 협조를 호소해야한다. 지금 정부의 컨트롤타워 혼선과 안이한 대응 그리고 중국 눈치보기로 갈팡지팡하는 사이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사태를 더 심화시킨 것은 시실이다. 정부의 뒷북은 심각하다. 우한 교민을 전세기로 수송해 오는 것과 우한 바리러스 발원지 방문 외국인의 입국 제한 조치역시 미국·일본 등 주요국보다는 한참 늦었다. 그 결과 우한 교민은 격리 중인데 우한에서 관광 온 중국인은 자유롭게 다니는 모순된 상황까지 벌어졌다. 23번 확진자도 2주나 먼저 입국한 중국인 관광객이었다. 정말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면 국민에 의한 정치를 해야 한다. 고집은 서로를 망하게 만든다. 지금 중국 우한에서 발병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가해자는 오직 중국이다. 대구도 신천지도 아니다. 제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지 마라! 엉클어진 실타래를 풀어가듯 해결해 가야 한다. 엉클어진 실을 잘라버린다고 실이 잘 풀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근본적으로 엉킨 부분의 핵을 그 근본을 찾아 천천히 풀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 근본에서 다시 출발하여 하나씩 하나씩 풀어야 한다. 먼저 중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중국인과 외국인의 입국을 전면 금지부터하고 신천지 교인들의 자발적인 신고 및 외출의 자제와 협조의 호소부터 해애 한다. 가해자로 몰아가면 안 된다. 그들은 오히려 피해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에 기여한 가장 큰 주범은 정부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부당국은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대처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해외에서 입국하는 입국과정에서부터 철저한 방역사워 시스템을 그리고 감염증이 발생한 나라의 입국자들의 동선의 강제적 그리고 자발적인 감시시스템과 그리고 이상 징후가 발생된 경우의 감염관리가 잘 되어있는 보건소와 지정병원으로 감염증이 의심되는 내원환자들을 의뢰할 수 있는 비상 의료자발적인 전달체계의 신고 시스템을 개발해야한다. 그리고 해외 국가 방문력이 확인된 고위험군 환자에 대해 이를 관리하는 격리 치료 시스템이 융합되는 종합적인 질병관리 콘트롤타워의 망을 일관화해야 한다. 앞으로는 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보다도 더 강력한 바이러스가 생화학무기 이상으로 이용될 확률도 있는 이상 이번을 계기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