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413건 ]
[靑魯 이용웅 칼럼] 7월 27일은 전승절도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도 아니다!
[靑魯 이용웅 칼럼] 7월 27일은 전승절도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도 아니다!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이 북위 38˚선 이남으로 무력 침공함으로써 남한과 북한 간에 발생한 전쟁.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진두 지휘 하에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유엔(UN)군은 공세로 전환했다. 유엔군은 10월 20일 평양을 탈환하고 10월 26일 일부 부대가 압록강변에 도달했다. 그러나 중국 인민 지원군의 참전으로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또다시 북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1951년 4월 11일 전쟁은 전선의 이동이 없는 진지전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휴전 회담이 개시되었고, 이후 회담 장소는 판문점으로 변경되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전쟁은 종식되었다.”-다음백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019년 7월 23일 “김정은 동지께서 새로 건조한 잠수함을 돌아보시며 함의 작전전술적 제원과 무기전투체계들을 구체적으로 요해했다”면서 “잠수함은 동해 작전수역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며 작전 배치를 앞두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만의 “전승절” 나흘 전에! 북한은 7월 27일을 ‘우리 인민의 제2의 해방날’인 ‘전승절’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7월 27일! 홍보 월간지 <조선>은 과거 “위대한 령도, 승리의 7.27”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글은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인 7월 27일을 맞을 때마다....미제가 조선전쟁에 저들과 남조선괴뢰군만이 아닌 일본과 15개 추종국가의 무력까지 동원하였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는 ‘허위사실 유포’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글은 “조선전쟁을 도발한 장본인인 미국 대통령 트루맨의 신세도 달리 될수 없었고 제2차세계대전시기 련합군의 총사령관이였던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신공세> 기도도 박살났다. 결국 미제는 전쟁에서 패배를 자인하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것이다.”고 하고, “김정일령도자의 선군령도와 더불어 빛나게 계승되고 있으며 우리 군대와 인민은 앞으로도 오직 백승의 한길로만 줄기차게 전진해 나갈 것이다.”로 끝을 맺었습니다. 북한의 <로동신문>은 과거 “오늘 우리 인민은 전승절인 7. 27을 맞고 있다. 이날은 창건된 지 불과 몇 해 밖에 안 되는 우리 공화국이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미제를 타승하고 영원한 승리의 빛나는 페지를 장식한 력사적인 날이다. 반면에 이날은 미국에 있어서 력사상 가장 쓰디쓴 참패의 수치를 맛본 비극적인 날이다. 지난 조선전쟁에서 미국이 당한 참패는 결코 실수나 우연이 아니였다. 그것은 달리 될수 없는 력사의 필연이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2018년 이후에는 ‘우물쭈물’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7월 27일! 김일성이 소련군을 업고 삼팔선을 넘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에 남침한 한국전쟁! 한국전쟁(1950.6.25.~1953.7.27)에서 미군 54,246명이 목숨을 잃은 미국!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전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인 2018년 7월 27일을 “한국전쟁 참전용사 정전기념일”로 선포했습니다. 트럼프는 포고문에서 "올해는 정전협정 서명 65주년 기념일로, 잔혹했던 3년동안 우리의 군대와 동맹들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 한반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고 밝혔습니다. 북한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정전협정 체결 66주년인 2019년 7월 27일 "1950년대의 조국수호 정신을 뼛속 깊이 쪼아 박고 사회주의 강국 건설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로동신문>은 1면에 게재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전승업적을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비약적 성과로 빛내어나가자”라는 제목의 사설에서는 "전화의 용사들이 발휘한 조국수호 정신으로 경제강국 건설의 전역에서 일대 비약의 폭풍을 일으켜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설은 "오늘 우리 당이 해마다 전승절을 크게 경축하도록 하는 중요한 목적도 1950년대 조국 수호자들의 투쟁정신으로 전체 인민을 무장시켜 사회주의 건설에서 끊임없는 앙양을 일으키자는데 있다"면서 "식량증산과 전시수송, 전선원호에 모든 것을 바친 전화의 그 정신과 기백으로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 목표를 반드시 점령하며 자력갱생의 승전포성을 울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2020년 7월 26일 <로동신문>은 ‘논설’에서 ‘우리 세대가 따라 배워야 할 전승세대의 고결한 정신세계’에서는 6.25전쟁은 제국주의연합세력과의 전쟁이었지만 50년대 노병들인 전승세대의 숭고한 조국애와 결사항전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습니다. 7월 27일은 6·25전쟁이 정전된 날입니다. 또한 유엔군 참전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 기념일도 있었냐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유엔군 참전의 날은 우리나라의 법정기념일로서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국가기념일입니다. 그런데 묵한은 1973년 정전협정 체결일을 '조국해방전쟁 승리의 날'로 정했고, 1996년에는 국가 명절인 '전승절'로 제정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북한은 남침을 인정하고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 “전승절”이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7월 27일은 전승절도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도 아닙니다! 김정은 위원장!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할아버지 김일성이 정한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과 “전승절”을 없애야 합니다. 그건 과거의 부끄러운 유산입니다.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그 일은 손자인 김 위원장의 몫입니다. 한국전쟁은 ‘북한 인민군이 북위 38˚선 이남으로 무력 침공함으로써 남한과 북한 간에 발생한 전쟁’입니다. 내년부터 7월 27일을 남‧북한 모두 한국전쟁 정전일(Korean War Armistice Day)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1953년 7월 27일은 결코 남‧북한 모두 ‘승리의 날’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라도 북한이 잘못을 사죄하고 6.25 희생자를 추모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얘기하는데, 7월 27일은 전승절도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도 아닙니다! 2020년은 한국전쟁 67주년, 정전협정 64주년이 되는 해!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전면광고-2020년 7월 27일 字 중앙일보 : “7월 27일은 유엔군 참전의 날]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남한 트로트와 북한 대중가요 & 눈물 젖은 두만강
[청로 이용웅 칼럼] 남한 트로트와 북한 대중가요 & 눈물 젖은 두만강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위키백과/ “트로트(영어: Trot), 혹은 뽕짝은 대한민국 음악 장르 중 하나로, 정형화된 반복적인 리듬과 펜타토닉 스케일 음계, 그리고 남도민요의 영향을 받은 떠는 창법이 특징인 장르이다. 미국의 춤곡인 폭스트로트(Foxtrot)가 그 어원이며, 기존의 동양 전통 음악과 미국, 유럽 국가들의 다양한 음악들이 혼합하여 탄생했다./ 일제 강점기 까지- 1922년∼1930년 사이 《사의 찬미》의 윤심덕을 비롯해 《낙화유수》(김서정 작사/작곡)의 이정숙과 《봄노래 부르자》(김서정 작사/작곡)의 채규엽 및 세 동무의 채동원, 그리고 《암로(暗路)》의 김연실등이 대표적인 가수였다. 1930년대 중후반으로 이르러서는 음반산업과 라디오 방송으로 대표되던 거대 매체가 자리잡게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30년대 중후반 트로트의 주류화를 결정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나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이래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이나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등이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트로트Trot): 일제강점기에 일본 엥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대중가요.”라고 했습니다. 최근 한반도의 남쪽은 트로트의 熱風, 아니 狂風이 불고 있습니다. 각 방송 매체들은 ‘트로트 血鬪’를 벌리고 있습니다. 시청률이 주된 원인인 것 같습니다. 밤 10시에 편성된 트로트 종편 프로그램이 시청률 20%를 넘기기도 하니...1960년대 후반 “동백 아가씨” 등의 적지 않은 곡이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었고, 1984년에는 음악전문지와 일간지를 넘나들며 트로트의 일본색에 대해 논쟁한 이른바 ‘뽕짝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던 대한민국입니다. 그런데 불과 30 여 년 사이에 트로트 왕국이 되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주된 대중음악은 K-POP(Korean Pop Music)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는 유행 음악을 말합니다. 영미권의 대중음악을 팝(pop)이라고 부르고, 영미권 이외의 국가의 대중가요도 국가 이니셜을 붙여 나타내는 데서 ‘K-POP’ 이라고 씁니다. 특히 대한민국 대중가요가 해외에서 인기를 얻게 된 이후에 K-pop이라는 명칭이 대한민국 이외 국가에서 대한민국 대중가요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남한의 대중가요는 K-POP와 트로트가 主導! 북한에는 ‘트로트’가 없습니다. 옛 首長 김정일은 <음악예술론>에서 “가요를 발전시키는 것은 우리 음악의 혁명적인 사명과 역할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대중을 동원하고 조직화하여 혁명과 건설에 떨쳐나서도록 불러일으키는데서 가요만큼 위력한 음악은 없다.”고 했습니다. 김정일의 글을 보면, 가요의 중심에 ‘대중가요’가 있습니다. <음악의 원로 김정일>에는 김정일이 “대중가요의 본보기”로 “수령님의 높은 뜻 붉게 피였네”라는 대중가요의 가사를 썼다고 기술! <조선말대사전(1)>에는 “대중가요=군중가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북한에서 ‘대중가요’라는 어휘가 처음으로 많이 쓰인 책이 1997년 8월 15일 발간되었습니다. 평양출판사에서 펴낸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의 차례를 보면, ‘3.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들을 더듬어’(75~192쪽), ‘악보를 통해 보는 민족수난기의 대중가요’(285~375쪽)라고 되어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대중가요를 소개한 것입니다. 1995년에 출판된 <민족수난기의 신민요와 대중가요들을 더듬어>의 중보판인 이 책자는 한민족 전체가 공유하는 대중가요의 위상 제고라는 측면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이 책은 남한에서도 출판되었습니다.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의 저자 최창호는 ‘일제시대’에 대중가요가 ‘친일세력들과 부유계층들’의 냉대를 받았는데, “그 리유의 하나는 돈 없는 무산자들, 일자리가 없어서 여기저기에 떠다니는 뜨내기들이 부르는 노래, 다시 말하면 비천한 서민계층들이 부르는 노래라고 하여 대중가요들을 천대시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이 노래들이 일제의 착취와 그 기반에 시달리며 살아온 눈물겨운 서민 대중의 마음을 대변한 시와 음률이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서민 대중을 천대 시하는 친일세력들과 유산자들은 이 시기의 대중가요가 자기들의 마음과 기호게 맞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89쪽)라고 했습니다.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는 “민족의 수난기에 대중가요는 사람들 속에서 가장 널리 불리워지면서 음단에서 주류를 이루어왔고 예술가요나 신민요들에 비하여 그 노래의 수가 많다. 대중가요는 비가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황성옛터》, 《눈물젖은 두만강》, 《진주라 천리길》, 《울며 헤진 부산항》, 《나그네 설음》 등 많은 작품들은 겨레의 마음속에 흐르던 눈물과 그 울분을 담고 있는가 하면 《목포의 눈물》, 《칠석날》, 《애수의 소야곡》, 《물방아사랑》, 《일자일루》 등 련정을 담은 비가들도 있다. 다음으로 《잃어진 고향》, 《타향살이》, 《연자방아》, 《고향설》 등을 비롯한 애향의 주제들도 있고 비가에서 탈피해보려고 시도한 《락화류수》, 《피리소리》, 《꽃이 핍니다》, 《망향초사랑》을 비롯한 정서적인 작품들과 겨레의 힘찬 박동을 담아보려고 시도한 《감격시대》, 《바다의 교향시》 등과 같은 작품들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 책에는 “<눈물젖은 두만강>과 그에 깃든 이야기”도 있는데, 리시우 작곡인 <눈물젖은 두만강>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떠나간 《옛님》으로 비유한 노래...“장월성은 그 시기 레코드를 취입하는 녀류가수급에는 비할바 못되는 화술배우였지만 신작된 노래가 두만강 연안에서 살고있는 조선사람들의 생활감정에 맞았기 때문에 그토록 관객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던 것이다. 그후 순회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리시우는 시인 김용호에게 부탁하여 일부 시어들을 다듬고 가수 김정구에게 이 노래를 《오케》레코드에 취입하도록 하여 레코드에는 김룡호 작사로 되였다. 그 이후부터 이 노래가 민간에 급격히 류행되였는데 사람들은 조국이 그리울 때도 이 노래를 불렀고 떠나간 옛님이 그리울 때도 이 노래를 불렀다.-1930년대중엽 극단 《예원좌》의 배우였던 장월성의 구술에서(1973년 5월 29일)”라고 기술! 이 책의 “<눈물젖은 두만강>과 그에 깃든 이야기”는 남한에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글이 아니라 북한 이야기를 옮겨 놓았다는 것입니다. 최근 대중가요인 ‘트로트’가 크게 각광을 받고 있지만, 이에 대한 연구 등은 크게 미흡한 실정입니다.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북한! 죽은 首長 김정일이 트로트를 좋아했지만, 북한 주민들이 좋아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首長도 아버지처럼 트로트를 좋아한다면...만일 ‘트로트’가 한반도의 한민족이 모두 사랑하는 ‘대중가요’로 자리 잡는다면, 트로트가 한반도 ‘平和의 象徵’이 될수도 있을텐데...妄想?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龍飛御天歌”에 나오는 국수 중 ‘평양랭면’과 그 노래
[청로 이용웅 칼럼] “龍飛御天歌”에 나오는 국수 중 ‘평양랭면’과 그 노래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남한의 <위키백과>는 “냉면(冷麵/랭면)은 한반도 고유의 찬국수 요리 중 하나로 삶은 국수를 찬 육수에 넣고 양념과 고명을 얹은 요리. 냉면은 칡, 메밀, 감자, 고구마 등의 다양한 가루를 이용하여 만든 면(麵)과 썬 오이 등의 생채소와 배 한 조각, 그리고 고기와 삶은 달걀로 이루어진 음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냉면의 기원은 고려 시대 중기의 평양에서 유래했으며, 1973년 간행된 북한 서적에 의하면, 평양냉면은 현재 평양의 대동강구역 의암동 지역에서 처음 나왔으며, 메밀 수제비 반죽을 국수로 뽑은 것이 시초라고 했고, 고려 중기의 고문헌에는 냉면은 '찬 곡수(穀水)에 면을 말아 먹는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고려 때 책인 <룡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고려사람들이 손님들을 대접할 때 국수를 많이 썼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국수가 고려는 물론 그 이전에도 식생활에 이용되었으며 그 가공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643년에 간행한 시문집 <계곡집(谿谷集)>에 냉면(冷麵)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고 했습니다. 조선 후기 풍속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에는 “겨울철 제철 음식으로 메밀국수에 무김치, 배추김치를 넣고 그 위에 돼지고기를 얹어 먹는 냉면이 있다.”고 했습니다. 분명 “냉면(冷麵)은 한반도 고유의 찬국수 요리”입니다. ‘평양랭면’도 20세기에 들어 북한에서 붙인 명칭일 뿐 북한 지방의 한반도 음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평양랭면’이 마치 북한의 전유물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하건데 ‘평양랭면’도 ‘한반도 고유의 음식입니다. 그런데...2018년 4월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남측 구역 내에 있는 평화의 집에서 열렸을 때 북한 수장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마치 평양냉면이 북한 고유의 음식이라고 자랑하면서 “평양랭면 가져왔습니다.”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한마디로 可觀(?)이었습니다. 그때 ’평양랭면은 平和의 象徵‘이라는 과장된 소리도 나왔습니다.! 때맞춰 북한 대외매체 <우리민족끼리>는 ”단연 인기가 된 평양랭면“이라는 제목으로, 김정은이 정상회담 모두 발언에서 평양냉면을 가져왔다는 말을 한 뒤에 남측 사회는 온통 평양냉면 이야기로 들끓었다고 소개했습니다. <우리 민족끼리>는 특히 “인터넷에서 <오늘 따라 평양랭면이 당긴다.>, <옥류관 요리사까지 데려왔다는데 그 사람을 붙잡아서 못가게 해야 한다.>, <4월 27일은 평양랭면의 날>, <기차 타고 평양냉면 먹으러 갈수 있는 날만을 기다린다.> 등의 글들이 폭발적으로 오르고 평양냉면이 트위터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단어로 되였다.”고 소개했습니다. 사실 그때는 남한 평양냉면집들은 門前成市! 2020년! "평양에 와서 이름난 옥류관 국수를 처먹을 때는 그 무슨 큰일이나 칠 것처럼 요사를 떨고 돌아가서는 지금까지 전혀 한 일도 없다."-옥류관 주방장의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言必稱 ’랭면‘이 ’평화의 상징’? ’전쟁의 상징’? 좌우지간 냉면은 한민족 고유의 음식입니다. 필자도 冷麪狂 입니다. 필자는 평양과 금강산 옥류관에서 ‘랭면’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필자는 그 맛보다 서울 종로4가 “곰보냉면” 맛이 최고였습니다. 올 여름 우린 북한 ‘평양랭면’보다 ‘서울 평양냉면’을 사랑하면서 避暑를! 三伏을 서울평양냉면과 함께! 여기서 북한이 자랑하는 ‘평양랭면’을 북한 자료를 통해 소개해 봅니다. 북한의 '조선료리협회'가 펴낸 홍보 책자를 보면,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평양의 특산음식은 산뜻하고 맛있고 영양가 높으며 약리적 가치가 큰 독특한 조선료리의 우수성을 그대로 보여줍니다."(1쪽)라고 했고, 대표적인 평양음식으로 '평양랭면'을 비롯 쟁반국수, 평양온반, 송편, 단고기국, 소고기전골, 소발통묵, 대동강숭어국, 잉어회, 녹두묵채, 감자지지개를 꼽았습니다. <이름난 평양음식>에는 "평양랭면은 촉감이 부드럽고 향기가 독특하며 입맛이 구수한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입니다. 국수 오리가 지나치게 질기지 않아서 먹기에 알맞춤하며 국수 국물과 꾸미, 국수 그릇과 국수 말기가 특별하여 예로부터 소문이 났습니다. 때식("아침, 점심, 저녁에 먹는 음식")음식으로도 좋지만 술 마신 뒤에 먹는 음식으로 더욱 어울립니다."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대백과사전(23)>에는 "<동국세시기>의 자료에 의하면 메밀국수를 무우김치와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넣은 것을 랭면이라 하는 데 관서지방의 국수가 제일 좋다는 기록이 있다. <해동죽지>에서도 평양랭면이 제일 좋다는 기록이 있다...김정일동지의 크나큰 사랑에 의하여 오늘 평양에서는 옥류관을 비롯한 수 많은 식당들에서 평양랭면을 만들어 인민들의 식생활을 더욱 풍족하게 해주고 있다."(30쪽)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평양랭면’에는 ‘김정일의 사랑’이 가득하다고? 有口無言! 다음은 <조선료리전집>1권에 있는 “만드는 법(COOKING)” 입니다. // 1.소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는 저가락이 쑥 들어갈 정도로 삶아서 건져내고 국물은 소금, 간장, 파, 후추가루로 맛을 들여 차게 식힙니다. // 2.삶은 소고기, 돼지고기는 얇게 저미고 닭고기는 적당하게 찢어서 식힌 고기국물에 담가두며 배추김치, 무우김치는 고기와 같은 크기로, 오이는 버들잎모양으로 썰어 소금, 식초, 고추가루, 다진 파와 마늘, 사탕가루에 무쳐놓습니다. 배는 껍질을 벗겨 굵게 채쳐놓습니다. // 3.메일가루를 중조물에 버무려 70℃의 물로 잘 반죽한 다음 살랑살랑 끓는 물에 국수를 누릅니다. 끊는 물속에 들어간 국수오리를 저가락으로 조심히 헤쳐주다가 국수가 떠오르면 조리로 건져 찬물에 2~3번 씻은 다음 사리를 지어 물기를 찌웁니다. // 4.식힌 고기국물에 국수사리를 담가내여 그릇에 담고 김치, 오이, 고개, 배, 삶은 닭알쪽을 보기좋게 올려놓은 다음 찬 고기국물을 부어 식초, 간장과 같이 냅니다.// 다음은 북한의 가요 “평양랭면이 제일이야”의 가사입니다.; <1절>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 내 조국의 랭면/ 육수물이 시원하니 마음도 시원해 좋고 국수면이 참말 질겨// <후렴> 아-이 참말 제일이야/ 정신없이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알 수 없게/ 그렇지 그래 그렇지 그래 / 정-말 그래 // <2절> 우리 민족 향기 넘쳐 나는/ 평양랭면 우리 자랑이야/ 한그릇을 먹고 나면 / 또 먹고 싶은 마음 / 그 누구나 하나같이/ 곱빼기를 요청하네// <3절> 우리 모두 함께 먹고 나면/ 온몸에는 새 힘 부쩍 솟네/ 내 조국과 내 민족을/ 더더욱 잘 알게 하니/ 돌아가는 마음속에/ 기쁨 가득 넘쳐나네.// ‘민족 향기 나는 평양랭면’ 자랑이라! 냉면 한 그릇에서 민족의 향기기 난다고! <조선료리전집>1권에 있는 ‘만드는 법(COOKING)’과 오늘날의 옥류관 냉면의 만드는 법이 좀 다릅니다. 이참에 북한과 남한이 함께 <조선료리전집>1권에 있는 “만드는 법”에 따라 남·북한 공동평양냉면을 만들면 어떨까요? 헛된 妄想? 어쨌든 ‘평양랭면’은 한민족·한반도의 음식!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셰익스피어가 가장 존경한 인물과 어느 名士의 죽음
[청로 이용웅 칼럼]셰익스피어가 가장 존경한 인물과 어느 名士의 죽음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사람이란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두려운 사람도 역시 받들어 모신다. 그러므로 지각 있는 사람은 백성이 자기의 동상을 세우거나 자기에게 어떤 영광을 주기로 가결하거나 그 밖에 무슨 명예를 줄 때는, 자기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가를 생각해 보고 진심으로 그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판단해야 한다. 이와같이 반성함으로써 그들이 참으로 자기를 존경하기 때문에 그러는지 무서워서 그러는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미워서 이를 갈면서도 마지못해서 존경을 표시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영국의 文豪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는 희곡을 총 38편, 14행시(소네트) 총 154편 등을 쓴 작가입니다. 셰익스피어 희곡 전집은 1623년 극단 동료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생전에 이미 최대의 찬사를 받았고, 죽은 후에도 계속 숭앙의 대상이 되어 거의 신격화되었습니다.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이 "영국은 언젠가 인도를 잃을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었습니다. 그는 '온화한 셰익스피어'라고 불리었지만, 인간에 대한 통찰력만큼은 그 누구에도 비할 수 없었으며, 근대 영어의 잠재력을 끌어내어 시극미(時劇美)의 최고를 창조하였다라고 평가받았습니다. 1590년대 초반에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 <헨리 6세>, <리처드 3세> 등이 런던의 무대에서 상연되었습니다. 특히 <헨리 6세>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악의에 찬 비난도 없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도 안 나온 작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의 유명세는 날로 높아져만 갔습니다. 1623년 벤 존슨은 그리스와 로마의 극작가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셰익스피어뿐이라고 호평하며, 그는 “어느 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이라고 극찬했습니다. 1668년 존 드라이든은 셰익스피어를 “가장 크고 포괄적인 영혼”이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명성을 짐작케 하는 말로는 엘리자베스가 남긴 어록이 꼽힙니다. "영국은 넘길 수 있어도 셰익스피어는 못 넘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영국이 낳은 국민 시인이며 현재까지 가장 뛰어난 극작가로 손꼽힙니다. 그의 희곡은 오늘날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그토록 자주 작품이 공연되는 작가는 없습니다. 동료 극작가 벤 존슨은 셰익스피어를 일컬어 "한 시대가 아닌 만세를 위한" 작가라고 말했습니다. 뛰어난 시적 상상력, 인간성의 안팎을 넓고 깊게 꿰뚫어 보는 통찰력, 놀랄 만큼 풍부한 언어의 구사, 매우 다양한 무대형상화 솜씨 등에서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 세기의 명사가 가장 존경한 사람은? ‘4대 비극’과 ‘5대 희극’을 쓴 大家 셰익스피어가 가장 존경한 사람은 바로 친구 집에서 일하는 하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셰익스피어가 오랜만에 친구 집을 방문했는데 미리 연락을 주지 못해 친구가 집에 없었습니다. 마침 집에 있던 하인이 곧 오실 거라며 집 안으로 안내했습니다. 기다리는 셰익스피어를 위해 하인은 따뜻한 홍차와 가볍게 읽을만한 책을 쟁반에 담아왔습니다. 책까지 담아다 준 하인의 배려에 셰익스피어는 감동했고 하인은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친구가 돌아오지 않자 셰익스피어는 차나 한 잔 더 마시려고 부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에 그는 매우 놀랐습니다.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그 하인이 양탄자 밑을 청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탄자 밑은 들추지 않는 이상 더러움이 보이지 않아 청소할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주인과 동료들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인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고 있던 것입니다. 너무나 큰 감동을 받은 셰익스피어는 이후로 사람들에게 성공의 비결과 영향력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혼자 있을 때도 누가 지켜볼 때와 같이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든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이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존경하는 사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반도의 경우는 ‘세종’ 임금 혹은 ‘이순신’ 장군 등을 존경한다고들 합니다. 북녘땅에서 독재자 ‘김일성’을 한 사람 정도는 ‘존경’한다고 하지 않을까요? 그럼 살아있는 사람 중에서는? 정치가 중에서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정치인 중의 하나인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이 2020년 7월 9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는 2011년부터 그날까지 수도 서울의 首長이었으니 당연히 그를 존경하는 시민은 있을 것입니다. 2020년 7월 9일 사망한 수장의 장례는 5일장으로 7월 13일에 발인이 있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제 아무 죄가 없습니다. 그가 사망함에 따라 그에 대한 성추행 고소 사건은 피의자의 사망에 따라 검찰사건사무규칙 제69조에 의해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되었습니다. 7월 8일 그의 전직 여비서가 “박원순으로부터 2016년부터 최근까지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며 고소장을 접수했는데, 그는 아무 말 없이 저승으로 떠났습니다. 조문객 중에는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시민도 있을 겁니다. ‘존경(尊敬)’의 뜻은 “우러러 받듦”입니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늘 배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가장 훌륭한 정치가는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이 되면 하던 일 후배에게 맡기고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이며, 가장 겸손한 사람은 개구리 되어서도 올챙이 시절을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박원순’은? 가장 훌륭한 삶을 산 사람은 살아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 이름이 빛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마음을 비우고 보는 세상! 조금만 마음을 비우면 새털구름 만큼이나 포근하고 매미 울음소리 만큼이나 시원할 터,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욕심을 비워내면 살아 볼만한 세상입니다. 투명한 햇살을 가슴에 퍼 담으면 세상이 환해 보이고, 잔잔한 작은 미소 얼굴에 피우면 오늘 하루도 즐거워지는 것을! 마음을 비우면 자연이 우리에게 전하는 속삭임들이 들릴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는 세상! ‘존경받는 사람’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면 세상이 훨씬 넓어 보이고 편하고 아름답게 보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人文學 特講★ (1)싸르트르(Sartre)와 [存在와 無]
[청로 이용웅 칼럼]★人文學 特講★ (1)싸르트르(Sartre)와 [存在와 無]
[선데이뉴스산문=이용웅 칼럼] [인문학(人文學/humanities)은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경험적인 접근을 주로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며 사변적인 방법을 폭넓게 사용합니다. 서양에서 인문학에 대한 연구는 시민들에 대한 광범위한 교육의 기준으로서,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로마 시대 동안에, 4과(음악, 기하, 산술, 천문)와 함께, 3학(문법, 수사 그리고 논리)을 포함하여, 7가지의 자유 인문 학문의 개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들 과목들은 인문학에서 기술들 또는 “행위의 방법들”로써 강조되어, 중세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하나의 중요한 전환이 발생했으며, 그때 인문과학은 전통적인 분야로부터 문학 및 역사와 같은 분야로의 전환에 상응하는, 실용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학문적인 과목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습니다. 20세기에는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에 의해 재차 논의되었습니다.] 筆者는 1963년 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시작한 이래, 문학과 관련된 사람들을 수없이 접했습니다. 비록 책 속에서지만 진실을 찾아 헤매는 많은 문호들을 만났고, 인간성 회복을 위해 勞心焦思하는 작가들도 직접 보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인물은 프랑스의 장-뽈 싸르트르 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이고 국제적인 스타”였으며 “고갈된 프랑스가 아직도 세계에 제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출 상품”인 실존주의의 주역이었던 싸르트르의 삶과 죽음, 특히 인간해방과 인간혁명을 외치며 공산당원 ․ 노동자 등과 인간의 자유 실현을 생각했던 그가 전후(戰後) 공산당 비판에 몰두했던 사실은 큰 충격이었습니다.‘삼팔선’의 위쪽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라는 극단적인 흑백논리와 민주․공산주의라는 양극 논리 속에서 성장한 필자에겐 싸르트르의 실존주의와 그의 공산주의적 사고(思考)가 거대한 파도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쓴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해일(海溢)도 글짓기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장-뽈 싸르트르(Jean-Paul Sartre/1905~1980)는 아내인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1908~1986)와의 계약결혼으로도 유명하며 보부아르와는 부부적인 관계 이외에도 학문적인 동반자로서 서로의 원고를 검토해주는 평생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실존주의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철학을 실존주의로 명명한 최초의 철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1913~1960)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자이자, 메를로-퐁티(Merleau-Ponty/1908~1961)와 함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 및 현상학을 대표하는 文豪! 그의 별명은‘실존주의의 敎皇’입니다. 1964년에 자전적 소설〈말/Les Mots/1963)>을 써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그는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데올로기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나는 자본주의가 준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그런데 당시의 노벨상위원이었던 라르스 일렌스텐(Lars Gyllensten)의 회고록에 따르면 노벨상을 거절했던 싸르트르는 정작 몇 년 후 생활이 곤궁해지자 변호사를 통해 노벨상위원회에 뒤늦게라도 상금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지만 위원회 측의 대답은 “나가라.”였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실존주의적 인간이었다고나 할까요? 혹자는 싸르트르가 1945년에는 실존주의자였으나, 후일 구조주의자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그의 대표작은 소설들 <구토(La nausée/1938)>, <벽(Le mur/1939)>, <자유의 길(Les Chemins de la liberté/1949)>, 철학서들 <상상력(L'Imagination/1936)>, <상상계(L'Imaginaire)/1940)>, <존재와 무(L'Etre et le néant)/1943)>,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1946)>, <변증법적 이성 비판(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1960)>, <문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littérature?/1948)>, 희곡들 <파리떼 Les Mouches/1943)>, <닫힌 방(Huis-clos/1944)>, <더러운 손/Les Mains sales/1948)>, <악마와 善神/Le Diable et le bon/1951)> 등. 그의 대표자 중에서 <존재와 무>를 소개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작가 싸르트르는 이 책에서 卽自存在(存在)와 對自存在(無)의 관계를 해명함으로써 현상을 성립시키는 존재의 구조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原題 <L'Être et le néant : Essai d'ontologie phénoménologique>는 싸르트르의 주된 목적은 개인의 존재에 앞서 개인의 실존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책을 작성하면서 최우선적으로 염두에 둔 것은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싸르트르의 주장에서 인간은 그가 ‘ens causa suid’라고 부르고 많은 종교와 철학자가 신과 동일시한 "완결"의 환상에 시달리는 피조물입니다. 그의 의식은 존재를 무화(無化)하는 것으로서, 어떠한 대상을 의식하는 것은 암묵리에 그 대상이 아닌 다른 것으로서의 자기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자기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 곧 대자존재(對自存在)라고 불리며, 사물처럼 의식을 갖지 않은 것은 그 자체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 곧 즉자존재(卽自存在)라고 불립니다. 대자(對自)가 자유롭다는 것은 즉자(卽自)를 무(無)에 의해 침식하는 것이며, 대자는 즉자로부터 무에 의해 단절되어 있으므로 지탱이 없는 불안으로서 자기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싸르트르는 반성이 자기 기만적으로 즉자와의 일치를 구하는 불순한 그것이 아닌 순수하게 대자에 철저하여 자유로운 자기에의 전적 현전(全的現前)을 수행할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으며, 이렇게 해서 근본적 회심(回心)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순수반성 또는 정화적(淨化的) 반성의 동기부여에 대한 연구를 과제로 남겼습니다. 그런데 반성은 스스로 타자가 되려는 의식이며 다른 의식의 존재를 예상하지만, 의식은 대자존재인 동시에 대타존재(對他存在)이므로,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는 주체이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객체에 불과한 신체를 갖는 존재이며, 타인의 시선 밑에서는 그 주체성은 부정되고 자기에 속하는 세계가 상실되어 가는 것을 경험합니다...싸르트르는 이 책에서 즉자 존재(존재)와 대자 존재(무)의 관계를 해명함으로써 현상을 성립시키는 존재의 구조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끝으로 싸르트르의 소설 <구토(嘔吐)>와 함께 해봅니다. “긴요한 것은 그것이 우연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는 것을 정의한다면 존재라고 하는 것은 필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다만 단순히 거기에 있다고 하는 말이다. 존재하는 것은 나타나며 만나고 그냥 그대로이다. 허나 결코 존재하는 것은 연역(演繹)할 수는 없다. 이것을 이해한 사람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2020 북한달력 ⑦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청로 이용웅 칼럼]2020 북한달력 ⑦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원래 캘린더(calendar)란 말은 라틴어로 ‘금전출납부’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옛날 로마에서는 금전의 대차 관계를 매달 삭일(朔日)에 청산하는 풍속이 있어서 결국 금전출납부가 달력을 의미하는 말로 전용(轉用)케 되었던 것입니다. H.D.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숲속의 생활>에서 “캐나다 태생의 채벌군인 그가 가진 책이라곤 한 권의 달력과 한 권의 수학책 뿐 이었다. 달력은 그에게 일종의 백과사전이었다. 그는 달력 속에 인류 지식의 요약이 들어있다고 보았다.”라고 했습니다! 북한도 매년 달력을 발행합니다. 북한 조선출판물수출입사에서 발행한 북한의 2020년 달력 표지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The great Comrades Kim Il Sung and Kim Jong IL Will Always Be with Us.)”/ “주체 JUCHE 109 (2020)”/ “조선출판물수출입사 Korea Publications Export & Import Corporation”라는 글이 있습니다. 2020년 새 달력 ‘7월’에는 사진 “백두산 등판의 꽃계절”이 있습니다. / 달력 7월의 1일부터 31일 사이에는 [27일]이 붉게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초복 7.16/ 중복 7.26], [소서 7.7/ 대서 7.22]가 있습니다. 또 7월 달력에는 다음 글들이 있습니다. : 주체 83(1994).7.8.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서거하시였다./ July 8, Juche 83(1994): The great leader Comrade Kim Il Sung passed away. // 주체 101(2012).7.17.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칭호를 받으시였다./ July 17, Juche 101(2012): The respected Supreme Leader Comrade Kim Jong Un was honoured with the title of the DPRK Marchal.// 1894.7.10.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김형직선생님께서 탄생하시였다./ July 10, 1894: Kim Hyong Jik, an outstanding leader of the anti-Japanese national liberation movement in Korea, was born.// 주체 21(1932).7.31. 우리 나라 녀성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강반석녀사께서 서거하시였다./ July 31, Juche 21(1932): Kang Pan Sok, an outstanding leader of the women's movement in Korea, passed away.// 7.27.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 July 27: Day of victory in the Fatherland Liberation War. 북한의 7월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아마도 ‘김일성 사망일(死亡日)’입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최후의 만찬’도 없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북한의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1994년 7월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이 8일 오전 2시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신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질병과 사망원인에 대한 의학적 결론서”에는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심장혈판의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시였다. 겹쌓이는 정신적인 과로로 하여 19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였다. 즉석에 모든 치료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쇼크가 증악되여 1994년 7월 8일 2시에 사망하시였다. 1994년 7월 9일에 진행한 병리해부검사에서는 질병의 진단이 완전히 확정되였다”고 적혀있습니다 “죽음은 위대하다/ 우리는 웃고 있는/ 그의 입이다/ 우리가 생명의 복판에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우리의 한복판에서 감히 울기를 시작한다”는 시인의 생각에는 죽음이 곱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슬픈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우는 것입니다. 더욱이 위대한 사람들의 죽음은 모두를 슬프게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고기 값보다도 못한 시신 앞에서도 울고, “단불에 나비 죽듯‘해도 슬픔에 잠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을 노예로 만든 독재자들의 죽음 앞에서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권력으로 죽음을 거부해보지만 시왕(屍王)은 그들에게 십왕차사(十王差使)를 어김없이 보냅니다. 그래도 죽음을 예감한 히틀러는 조금은 인간적이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알았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한 독재자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전범(戰犯)이면서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한 김일성은 죽을 때도 비인간적이었습니다.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초토화시킨 독재자의 말로는 분명한 悲劇!! 그가 죽자, 많은 북한주민들은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요된 슬픔이었습니다. 강요된 통곡이었습니다. 반세기 가까이 백성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독재자의 죽음은 결코 슬픈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래 전에 ‘포악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았어야 할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용케도 목숨을 부지해왔습니다. 그의 죽음이 자연사(自然死)든 아니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은 당연한 죄값이었습니다. “음악 명상을 즐겼고, ‘산삼꽃’에서 나는 산삼향기를 들이마시면서 보양하고, 각종 한약재가 들어있는 베개를 베고 자면서 장수를 꽤했다.”는 김일성의 죽음에 대한 글과 말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슬픈 만가(挽歌)를 부른 사람도 있었겠지만, 죽음의 찬가(讚歌)를 부른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시(詩)로 표현되고 논문으로 발표되었으며, 공식적인 말과 뒷공론, 유언비어까지 다양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영결식’은 이틀 연기되었습니다. 이유는 끝없는 조문행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장의위원회는 7월 15일 “조의참가자들은 날을 따라 늘어나고 있다”고 하고 “인민들의 절실한 심정과 요구를 반영하여” 영결식은 19일, 추도대회는 20일 거행된다고 발표했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영결하는 의식’은 예정대로 거행되었고, 그의 시신은 “자애로운 어버이를 잃은 크나큰 슬픔에 가슴치며 목메어 흐느끼는 수백만 평양시민들과 인민군장병들의 눈물의 바래움을 받으며” 금수산의사당(현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되었습니다. 다음날 열린 추모대회도 아들 김정일 연출 속에서 행해졌습니다. 그런데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가 발표한 추모시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령전에”를 보면 기이한 점이 발견됩니다. 사자(死者)의 이름은 단 한번 불리우고, 김정일의 이름은 무려 6번이나 나옵니다. 다음 독재자 김정일에 대한 阿父(?)치고는 너무 빠른... 북한 7월 달력의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 북한의 홍보 월간지 <조선>은 2011년 7월호에서 “위대한 령도, 승리의 7.27”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기사는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인 7월 27일을 맞을 때마다....미제가 조선전쟁에 저들과 남조선괴뢰군만이 아닌 일본과 15개 추종국가의 무력까지 동원하였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는 ‘허위사실 유포’로 시작됩니다. 有口無言! 天人共怒할 일! “천인공노”는 “누구라도 분노를 참을 수 없을 만큼 증오스럽거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天人共怒할 人面獸心!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1950·6·25 한국전쟁에 대한 記憶- 수필 [사진 한 장]
[청로 이용웅 칼럼]1950·6·25 한국전쟁에 대한 記憶- 수필 [사진 한 장]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유년시절에 겪은 6.25! 한국전쟁에 대한 記憶은 예나 지금이나 생생합니다. 한국군의 “창군요원 29%를 포함한 257,000여명의 희생”(국방군사연구소,<전사(戰史)> 제1호, 1999, p.142.)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간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의 주인공, 그 ‘전쟁광’의 손자가 악몽의 1950년을 또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그 때 그 시절’에 대한 회상, 그것은 한민족 누구에게나 존재하며 그 회상 속에는 크고 작은 악몽들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평상시 같으면 이 잡듯 뒤지는 조간신문을 숙취 때문에 건성으로 넘기는데 천연색 사진 한 장이 눈앞에 선명히 나타났다. 뚫어진 철모에 담긴 이름 모를 꽃 세 송이가 전쟁의 잔해들과 묘한 조화를 이룬 이 사진이 준 충격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오늘 25일은 물론 해마다 유월이 되면 온 겨레의 가슴 속에 결코 망각될 수 없는 상흔이 되살아나 아픔을 주는데 이 정경이 한없는 비애를 더해 주었을 것이다. 지금 시간은 육이오를 마감하는 자정이다. 방금 전에 시청한 <백마고지>라는 특집극의 영상 위에 노랑 꽃송이가 겹쳐 떠올라 뭔가 써야겠다는 생각을 확실히 하고 펜을 들었는데 막상 시작하려니 이어지지를 않는다. 어제 새벽에는 산사(山寺)의 오솔길을 걸었다. 장마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몰려왔지만 거룩한 희생의 음덕에 감사하며 걸었다. 외국차를 즐겨 마시는 명찰(名刹)의 노승도 혼백들을 위해 기원할 거라고 생각하니 밉지가 않았고, 기왓장에 이름 새겨주고 돈을 받아 챙기는 스님들의 모습도 얄밉지가 않았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벽을 가며 유년 시절을 회상할 수 있었다. 충청도 두메에서 농군으로 사시던 할아버지는 개 콧구멍만한 전답을 팔아 서울 근교로 이사를 하고 돈만을 위해 사셨다. 아무리 추운 겨울날에도 방고래에 불을 넣는 일은 결코 없었다고 했다. 그 덕분에 나는 넓은 대지 위에 세워진 대궐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자랐다. 갖가지의 과실수가 울창하였고, 계절 따라 피는 꽃들이 온 집안에 가득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느 날 당황해하시는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올라간 산등성이에서 본 서울 쪽 하늘이 붉은 노을보다 더욱 붉었다. 놈들이 꽃밭에 불을 지른 것을 어린 나이에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늘에서 새우 젖 독 같은 것이 떨어지는가 하면 큰아버지 공장의 고무신이 지하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계속해서 걸은 생각이 난다. 안양 근처에서 배가 고파 토마토 밭에 들어가 허겁지겁 훔쳐 먹다가 가족들을 잃고 헤맨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말 기적적으로 어머니 품에 다시 돌아와 실컷 울었지만 개미떼를 실어 나르는 것 같은 기차를 탔을 때는 재미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가 철도노조 간부로 재직하셨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편안하게 탈 수 있었던 것이다. 힘이 우리를 살린 모양이다. 헌데 두메의 고향, 충남 청양군 비봉면 청수리에는 불행히도 기찻길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 찾아간 곳이 외갓집이 있는 대천이었다. 거기서 외할아버지 따라 꼴 베러 다니며 쇠파리를 알았고 논 고동을 잡는 재미에 거머리를 우습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천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책보자기 메고 신나게 논길을 달렸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장독대에 정한수 떠놓고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빌어주었던 외삼촌이 부상을 당하고 돌아오셨다. 그 때 외할머니께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장소는 다름 아닌 부엌이었다. 덕분에 누룽지를 훔쳐 먹을 기회가 없어져 버렸다. 뒤 이어 일가들만이 모여 사는 이 마을에 군복을 입은 사람이 왔다만 가면 동네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모든 일이 재미가 없었다. 메뚜기 잡아서 구워먹는 일도, 감이나 밤을 따는 일도 모두가 따분하기만 했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 덕분인지 전세(戰勢)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리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있을까. 땅 속에 묻어 두었던 값진 물건들은 고사하고, 숟가락 한 개, 사진 한 장,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유년시절의 사진이 없다. 초상의 일부를 이미 그 때 상실하고 말았다. 살았던 세월의 한 조각으로 되돌아 본 산사의 새벽길은 유난히도 조용했지만 빗속의 산딸기는 선혈처럼 붉었고 계곡물 속에는 속세의 때가 가득했다. 나는 그 흙탕물 속에 빠져버렸다. 아니 내 모습을 담은 사진기가 물에 잠겨버린 것이다. 유월의 사진은 나와 인연이 없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신문사진이 뇌리 속을 스쳐 다시 자세히 보았다. <평화를 부르는 “자연대합창” 155마일>이라는 제목 아래 괴뢰군파리가 아름답게 피어있고 어린 멧돼지 형제가 정겹다. ‘용(龍)늪’의 끈끈이주걱이 ‘우아’하고, 아카시아 나무에 둥지를 튼 백로들의 찬란한 삶이 인상적이다. 비무장지대의 유월의 모습은 너무도 서정적이다. 정처 없는 피난의 여정이 시작되면서 남으로 향한 무수한 발길이 스쳐간 역사의 현장이다. 지금 우리의 자연에도 신록이 파도처럼 출렁거린다. 북녘 땅도 마찬가지일 게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는 황야에서 한 많은 종명을 고한 호국영령들을 생각하면 자연 사진에 심취할 수가 없다. 조국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다 이슬처럼 사라진 그분들의 명복을 빌 뿐이다.“.(이용웅,”사진 한 장“,<한국수필> 1987년 봄호, 101~103쪽) 2020년 6월 25일 字 <중앙일보>는 [6·25 전쟁 일어난 해는 1950년" 10대 7명중 1명만 맞췄다]라는 題下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기사는 “6ㆍ25 전쟁에 대한 이해와 인식 수준은 세대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나이가 어릴수록 상대적으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표적집단심층면접(FGI)에만 참가한 10대(7명)중 1명만이 6ㆍ25 전쟁이 ‘1950년에 일어났다’고 정확하게 답했고, 나머지 6명은 틀리거나 아예 몰랐다.”고 했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이 ‘진실이 忘却되어서는 안 되는 幼年期’를 記憶해야 합니다. 새로 태어나는 어린이의 세계는 그의 직접적 환경에 제한되는 조그만 세계라고 합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라고 하는 壁 속에 갇힌다고 합니다. 그리고 점점 지식이 성장함네 따라서 이 벽이 물러간다고 합니다. 어린이 모두에게 ‘진실이 존재하는 유년시절’을!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김여정 제1부부장의 두 談話와 한반도의 미래.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김여정 제1부부장의 두 談話와 한반도의 미래.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2020년 6월 4일 字/ 북한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에 실린 김여정 담화 전문] "지난 5월 31일 《탈북자》라는것들이 전연일대에 기여나와 수십만 장의 반공화국삐라를 우리 측 지역으로 날려보내는 망나니짓을 벌려놓은데 대한 보도를 보았다. 문제는 사람값에도 들지 못하는 쓰레기들이 함부로 우리의 최고 존엄까지 건드리며 《핵문제》를 걸고 무엄하게 놀아댄 것이다. 그 바보들,《탈북자》라는 것들이 뭘 하던 것들인지나 세상은 아는지 모르겠다. 정말 가관이라 해야 할 것이다. 글자나 겨우 뜯어 볼가 말가하는 그 바보들이 개념없이 《핵문제》를 론하자고 접어드니 서당개가 풍월을 짖었다는 격이라 해야 할 것이다. 태묻은 조국을 배반한 들짐승보다 못한 인간추물들이 사람흉내를 내보자고 기껏 해본다는 짓이 저런짓이니 구린내 나는 입 건사를 못하고 짖어대는 것들을 두고 똥개라 하지 않을수 없다. 똥개들은 똥개들이고 그것들이 기여다니며 몹쓸 짓만 하니 이제는 그 주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때이다. 가장 부적절한 시기를 골라 가장 비렬한 방식으로 《핵문제》를 걸고들면서 우리에 대한 비방 중상을 꺼리낌없이 해댄 똥개, 쓰레기들의 짓거리에 대한 뒤감당을 할 준비가 되여있는지 남조선당국자들에게 묻고 싶다. 나는 원래 못된 짓을 하는 놈보다 그것을 못 본척 하거나 부추기는 놈이 더 밉더라... 남조선당국자들이 북남합의를 진정으로 귀중히 여기고 철저히 리행할 의지가 있다면 우리에게 객적은 《호응》나발을 불어대기 전에 제 집안 오물들부터 똑바로 줴버리고 청소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구차하게 변명할 생각에 앞서 그 쓰레기들의 광대놀음을 저지시킬 법이라도 만들고 애초부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못하게 잡도리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또 무슨 변명이나 늘어놓으며 이대로 그냥 간다면 그 대가를 남조선당국이 혹독하게 치르는 수밖에 없다. 만약 남조선당국이 이번에 자기 동네에서 동족을 향한 악의에 찬 잡음이 나온데 대하여 응분의 조처를 따라세우지 못한다면 그것이 금강산관광페지에 이어 쓸모없이 버림받고 있는 개성공업지구의 완전철거가 될지, 있어야 시끄럽기 밖에 더하지 않은 북남공동련락사무소 페쇄가 될지, 있으나 마나한 북남군사합의 파기가 될지 하여튼 단단히 각오는 해두어야 할 것이다. 선의와 적의는 융합될수 없으며 화합과 대결은 량립될수 없다. 기대가 절망으로, 희망이 물거품으로 바뀌는 세상을 한두번만 보지 않았을 터이니 최악의 사태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면 제 할일을 똑바로 해야 할 것이다." [2020년 6월 13일 字/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김여정 담화 전문] “나는 어제 우리 통일전선부장이 낸 담화에 전적인 공감을 표한다. 2년 동안 하지 못한 일을 당장에 해낼 능력과 배짱이 있는 것들이라면 북남(남북)관계가 여적 이 모양이겠는가. 언제 봐야 늘 뒤늦게 설레발을 치는 그것들의 상습적인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형식에 불과한 상투적인 언동을 결코 믿어서는 안 되며 배신자들과 쓰레기들의 죄행을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 조국의 상징이시고 위대한 존엄의 대표자이신 위원장 동지의 절대적 권위를 감히 건드리고 신성한 우리측 지역에 오물들을 들이민 쓰레기들과 그런 망동 짓을 묵인한 자들에 대해서는 세상이 깨여지는 한이 있더라도 끝장을 보자고 들고 일어난 전체 인민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는 지금 날로 더욱 거세지고 있다. 배신자들과 쓰레기들이 저지른 죗값을 깨깨 받아내야 한다는 판단과 그에 따라 세운 보복계획들은 대적 부문 사업의 일환이 아니라 우리 내부의 국론으로 확고히 굳어졌다. 그것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 절대로 다쳐서는 안 될 무엇을 잘못 다쳐놓았는지를 뼈아프게 알게 만들어야 한다. 말귀가 무딘 것들이 혹여 '협박용'이라고 오산하거나 나름대로 우리의 의중을 평하며 횡설수설해댈 수 있는 이런 담화를 발표하기보다는 이제는 연속적인 행동으로 보복해야 한다. 확실하게 남조선 것들과 결별할 때가 된 듯하다. 우리는 곧 다음 단계의 행동을 취할 것이다. 나는 위원장 동지와 당과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나의 권한을 행사하여 대적 사업연관부서들에 다음 단계 행동을 결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멀지 않아 쓸모없는 북남 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남조선당국이 궁금해 할 그 다음의 우리의 계획에 대해서도 이 기회에 암시한다면 다음번 대적 행동의 행사권은 우리 군대 총참모부에 넘겨주려고 한다. 우리 군대 역시 인민들의 분노를 다소나마 식혀줄 그 무엇인가를 결심하고 단행할 것이라고 믿는다. 쓰레기는 오물통에 가져다 버려야 한다.” [2020년 6월 17일字/ 로동신문/ 북남관계총파산의 불길한 전주곡] 북한 로동신문은 해당 사진들을 6월 17일자 2면에 ‘북남 관계 총 파산의 불길한 전주곡 북남공동연락사무소 완전 파괴’라는 제목과 함께 실었습니다. 동시에 남한을 비난한 김여정 조선로동당 제1부부장의 담화와 장금철 통일전선부장 담화,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발표 등이 같은 면에 실렸습니다. 김여정의 담화! 김여정은 “철면피한 감언이설을 듣자니 역스럽다”는 제목의 17일 담화에서 문 대통령의 6·15 공동선언 20주년 연설 및 15일 수석·보좌관 회의 발언을 두고 “맹물 먹고 속이 얹힌 소리 같은 철면피하고 뻔뻔스러운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상전 눈치나 보며 국제사회에 구걸질하러 다닌 것을 끊임없는 노력으로 포장하는 건 여우도 낯을 붉힐 비열하고 간특한 발상”이라고도 했습니다. 또 그는 담화에서 스스로 ‘말폭탄’을 터뜨린다며 ‘멋쟁이 시늉’ ‘특사 파견 불허’ 등의 표현으로 문 대통령을 사실상 조롱했습니다. 위의 김여정 두 담화를 먼저 인용한 것은...‘어불성설(語不成說), 언어도단(言語道斷), 후안무치(厚顔無恥), 안하무인(眼下無人), 정신분열(精神分裂)’이라는 말이 언뜻 떠올라서..김여정(金與正(1988.9.26生)은 사망한 북한의 옛 首長 김정일의 3남 4녀 중 4녀일 뿐인데, 한반도, 특히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가 사실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4대 국무위원장급으로 부상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그는 32세의 북한 관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김정은은 김여정을 내세워 DMZ에 군(軍)을 투입하고도 沈黙, 덩달아(?) 미국 트럼프도 벙어리(?)/ “분노를 참을 수 있는 者는 큰 지식이 있는 者”라고 했습니다. 큰 지식이 없다고 생각하면 憤怒하시길! ‘韓半島의 未來’를 위해 憤怒해야 합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2000년 6월 15일의 平壤과 2020년 6월 15일의 韓半島
[청로 이용웅 칼럼] 2000년 6월 15일의 平壤과 2020년 6월 15일의 韓半島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로동신문/ 2000년 6월 14일字]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6월 13일 평양비행장에 나가시여 평양을 방문하는 김대중대통령을 따뜻이 영접하시였다. 이날 평양비행장과 수도의 거리들은 뜨거운 환영분위기에 휘싸여 있었다. 반만년의 유구한 민족사에 특기할 4.8 북남합의서에 따라 민족분렬사상 처음으로 개최되는 이번 상봉과 회담은 7.4북남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민족의 화해와 단합, 교류와 협력, 평화와 통일을 앞당겨 나가는데서 전환적국면을 열어 놓는 력사적인 계기로, 민족주체적노력으로 통일성업을 기어이 이룩해 나갈 겨레의 확고한 의지를 과시하는 중대한 사변으로 된다... 오전 10시 30분, 남측대표단을 태운 비행기가 비행장에 내리였다. 환영곡이 울리는 가운데 군중들은 꽃다발을 흔들면서 남측대표단을 환영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김대중대통령과 악수하시고 인사를 나누시였다. 김대중대통령과 함께 통일부 장관 박재규, 재정경제부 장관 리헌재, 문화관광부 장관 박지원, 대통령특별보좌역 림동원을 비롯한 남측대표단수원들과 기자들이 왔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와 함께 김대중 대통령은 조선인민군 륙해공군명예위병대를 사열하였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평양에서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2박 3일 동안 진행한 회담입니다. 6월 13일, 김정일 위원장은 북한 인민군 육.해.공군으로 구성된 의장대를 준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사열식, 분열식 등 의장행사를 해주었습니다. 6월 14일, 목란관 연회에서 김대중 당시 대통령 부부가 서로 다른 테이블에 앉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흩어진 가족 친지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면서 왜 대통령 자신부터 흩어진 가족을 만듭니까"라고 농담을 던지며 이희호 여사를 김 전 대통령 옆에 앉도록 한 일화가 널리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6월 15일! 아래 <남북(북남) 공동선언>! [로동신문/ 2000년 6월 15일字] “조국의 평화적 통일(평화적통일)을 염(념)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국방위원장)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대한민국 김대중대통령)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력)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최고위급회담)을 가졌다.(가지였다.) / 남북 정상(북남수뇌)들은 분단 역사상(분단력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리)해를 증진시키고 남북(북남)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데(하는데서) 중대한(사변적인)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1.남(북)과 북(남)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 2.남(북)과 북(남)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북측의 낮은 단계의 련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남측의 련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 3.남(북)과 북(남)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흩어 진) 가족, 친척 방문단(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비전향장기수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인도적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 4.남(북)과 북(남)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 5.남(북)과 북(남)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당국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께서) 서울을 방문하도록(하시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김정일국방위원장께서는)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 2000년 6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 김정일 / 위 선언문은 <이제 첫걸음입니다>(대한민국 국정홍보처)와 북한<로동신문>(2000년 6월 15일자)에 게재된 선언문을 하나로 합친 것입니다. 선언문에는 ‘분단의 아픔’도 내재되어 있습니다. 가령 북한은 “중대한”을 “사변적인”이라고 했습니다. 남한의 ‘사변’은 “①천재나 그 밖의 큰 변고 ②나라의 중대한 변사. 경찰력으로 막을 수 없는 난리”이고, 북한의 ‘사변’은 “①변스러운 사건 ②비상한 사건”입니다. [로동신문/ 2000년 6월 16일字]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워장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6월 15일 평양비행장에 나가시여 평양방문을 성과적으로 끝마치고 돌아가는 김대중대통령을 뜨겁게 환송하시였다...” 2020년 6월 15일 대한민국! 통일부・서울시・경기도・‘김대중 평화센터’는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6월 15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기념식을 공동으로 개최했습니다. 이 행사에는 정・관계 인사, 이산가족 등 150여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행사장인 통일전망대로 향하는 진입로가 통제되었고, 정부는 이번 기념식을 축소, 비공개로 진행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6월 15일 청와대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 기념식 축사를 영상을 통해 전했습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6.15 남북공동선언 당시 착용한 넥타이를 맨 문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은 "반목과 오해가 평화와 공존을 향한 우리의 노력을 가로막게 두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북한을 향해서는 “대화의 창을 닫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한반도는 아직은 남과 북의 의지만으로 마음껏 달려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더디더라도 국제사회의 동의를 얻으며 나아가야 한다"면서도 "그러나 남과 북이 자주적으로 할 수 있는 사업도 분명히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북 간의 신뢰다. 끊임없는 대화로 남북간의 신뢰를 키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2020년 6월 15일 平壤! <남북(북남) 공동선언>에 서명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아들 김정은은 목이 아픈지 말이 없었습니다. -孟子 曰 “효자의 至高는 어버이를 존경하는 것 이상으로 큰 것이 없다.”- 韓半島의 평화를 위해 부친 김정일의 偉勳(?)을 더럽히지 말기를!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靑魯 李龍雄 칼럼] 한국지역대학연합(RUCK)과 온라인 강의에 대한 斷想
[靑魯 李龍雄 칼럼] 한국지역대학연합(RUCK)과 온라인 강의에 대한 斷想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한국지역대학연합(RUCK)! 한국지역대학연합(The Regional University Consoritium of Korea)은 대학교육의 국제화와 개방화에 대비하여 중남부지역 대학 간의 상호 호혜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각 대학의 지리적 위치로 인한 인적, 물적 자원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교육의 질 향상과 대학운영의 효율성을 모색코자 설립된 대학연합체입니다. / 1995년 2월 14일-경남대학교, 계명대학교, 울산대학교, 전주대학교, 한남대학교, 호남대학교 총장들이 울산대학교에서 가칭 “중남부대학연합”을 결성. / 1995년 10월 12일-관동대학교와 아주대학교가 회원대학으로 가입. / 1995년 11월 30일-명칭을 “한국지역대학연합”으로 변경했습니다. 한국지역대학연합은 총장협의회 산하에 다음의 9개 위원회를 두고 있다. /교육협력위원회/교육개혁협력위원회/ 관리행정협력위원회/ 국제협력위원회/ 도서관협력위원회/ 사회교육협력위원회/ 산학협력위원회/ 학생복지협력위원회/ 학술협력위원회// [학점교류] 강의 회원교 소속 학생들은, 매 학기마다 학점교류 온라인 강의를 수강할 수 있습니다. 본교 학생들 뿐 만 아니라 다른 회원교 소속 학생들도 수강 가능하기 때문에, 한 수업에 여러 학교 학생들이 함께 수업을 듣습니다. 수업의 진행, 과제 제출, 시험은 온라인에서 진행됩니다. 한국지역대학연합은? 매년 전체 회의를 개최합니다. 2019년에는 11월 7일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제46차 한국지역대학연합회의(RUCK)를 열었습니다. 아주대 주관으로 진행된 이 회의에는 한국지역대학연합회의 회원교인 한남대와 경남대, 가톨릭관동대, 계명대, 아주대, 울산대, 전주대, 호남대 등 전국 8개 대학의 총장 및 보직교수, 교직원 등 16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이날 회의는 기조강연에 이어 “환경변화에 대응한 효율적인 학사운영 방안”에 대한 각 대학별 주제발표가 진행됐습니다. 이처럼 한국지역대학연합은 계속 새로운 교육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필자와 한국지역대학연합! 첫 사이버강좌는 [북한문예산책] 이었습니다. [북한문예산책]은 ‘한국지역대학연합’의 모든 대학, 모든 학과, 전(全) 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택 교양과목이었습니다. [북한문예산책]은 Cyber 강좌로 인터넷을 통해 북한 문화예술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필요하거나 접하기 힘든 자료들을 제공해 주고 더 나아가서 수강을 원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그들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수강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개설되었습니다. 그 다음, 필자는 [무대화술로 푸는 취업성공전략]을 개설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本 강좌의 ‘강의목표’는 곧 도래하게 될 ‘융합학문의 인지과학’의 실체를 파헤치고, 이 인지과학의 밑거름인 문화예술과 묶어 취업성공전략을 세워 미래의 역군들에게 취업의 성공 방법을 교수하기 위함 입니다. [무대화술로 푸는 취업성공전략]은 다른 ‘취업성공전략’ 강좌와 완전히 차별화 된 강좌입니다. 21세기의 미래 인지과학과 융합학문의 이해와 연구, 그 인지과학의 밑거름과 같은 문화예술의 이해와 연구가 선행되는 과목입니다. 이 강좌는 [한국대학가상교육연합]을 통해 ‘경기대·성결대·창원대·부경대·동신대·유원대·한림성심대’학생들이 2020학년도 제1학기에도 수강하고 있습니다. 한국지역대학연합은 1995년 첫 걸음을 시작한 이래 대한민국 사이버교육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경남대학교 박재규 총장 등 8개 대학 총장들이 심혈을 기울였고, 8개 대학 교직원들이 많은 연구와 노력을 했습니다. 비록 한 지역의 대학연합이지만 내적 발전은 어떤 대학이나 컨소시엄보다 컸으며, 기술적인 면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대학 사이버교육의 함정인 부정행위만은 한국지역대학연합도 근절시키지 못했습니다. 일부 학생들은 여러 명이 하나가 되어 부정행위를 하는 등...각가지 방법을 동원해 ‘점수 도둑질’을 했으며, 아직도 근절되지 않고 있습니다. 2019학녀도 제1학기에 교육부는 온라인강좌의 중간고사를 강의실에서 치르도록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 이유 중에는‘부정행위’도 있을 겁니다. 강의실에서 ‘거리 간격’을 두고 시험믈 보다 보니 100명 수용 강의실에서는 50명만 응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건 교육부의 ‘블랙 코미니’가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희한한 일이 생겼습니다. 강의실에서 시험문제를 사진 찍어 인터넷에서 팔아먹은 학생이 붙잡혔습니다. 필자의 [무대화술로푸는취업성공전략]가 2019년 4월 20일 10시 10시 부터 11:시 까지 시행되었는데, 그 시간에 시험문제를 휴대폰으로 찍어 인터넷에서 판 것입니다. 4월 20일 11시 19분, 某 대학 H 학생(네이버 카페)이 [2019 무대화술로 푸는 취업성공전략 족보]라는 제목으로 시험문제 판매를 홍보했습니다. 앞으로 큰 문제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1학기 중간고사를 '온라인 시험'으로 치른 국내 주요 대학에서 집단 부정행위가 잇달아 터져 나왔습니다. A대학은 1·2학년 학생 109명 중 91명이 온라인 시험 도중 부정행위를 했습니다. B대학은 온라인으로 치러진 2개 과목 중간고사에서 부정행위 의심 신고가 접수돼 해당 시험 성적을 무효 처리했습니다. B대학 담당 교수는 중간고사를 무효화하고 사과문을 올렸습니다. 사과문에서 교수는 “같이 시험을 본 학생의 명단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 중에 있다”고 했습니다. 현재로써는 妙案도 對策도 없습니다. 국내의 사이버교육은 국가 차원의 정보화 전략과 맞물려 1990년대 후반 이후 급격한 성장을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첨단의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사이버교육은 전통적인 교실 교육의 시공간 제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수많은 교육적 요구와 잠재 가능성에 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이버대학 등, 사회 전반에 걸쳐서 최근 10년 사이에 사이버교육은 확대일로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강의실에서 해왔던 대학의 교육에서 사이버교육은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부의 德分? 교육부는 이제라도 한국지역대학연합 등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야 되지 않을까요? 교육부 안에 사이버강의를 직접 해본 직원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물론 연구한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고위층의 탁상공론(卓上空論)만 가지고 정책을 다루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 속담에 “독서당 개가 맹자왈 한다”고 했습니다. 배우세요! 그리고 나서 ‘교육“ 云云 하시길!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