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413건 ]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建築 巡禮-⑥금수산·금수산기념궁전(금수산태양궁전)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建築 巡禮-⑥금수산·금수산기념궁전(금수산태양궁전)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금수산(錦繡山) : 평양시의 중부 대동강의 오른쪽 기슭에 있는 산. 평양시 중구역의 북부에서 모란봉구역의 동부, 대성지역의 남서부까지 길게 자리잡고 있다. 제일 높은 곳은 최승대(95m)이다. 최승대를 가운데에 두고 서로 마주하여 잇달려 솟아있는 둥굴둥굴한 산봉우리들이 마치 금시 피여난 모란꽃과도 같다고 하여 이곳을 따로 모란봉이라고 하였다. 오늘 인민들은 절승경개로 이름높은 금수산을 가리켜 모란봉이라고 부르고 있다.→모란봉]-(<조선대백과사전(3)>) 옛 트롯트 중에 “한많은 대동강아”가 있는데...“한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있느냐/ 모란봉아 을밀대야 네 모양이 그립구나/ 철조망이 가로막혀 다시 만날 그때까지/ 아~ 소식을 물어본다 한많은 대동강아”-최근 인기가수들이 다시 불러 메스컴에 자주 등장하고, 대중들이 직접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란봉’이 “금수산”이라는 것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수산의 나라 건물이 국가 최고지도자의 관저로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주석궁·금수산의사당으로 불렸습니다. 북한은 주석이었던 김일성이 생전에 생활하던 금수산의사당(錦繡山議事堂)을 김일성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는 목적으로 개조하였습니다. 1995년부터 2012년까지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불렸으며 2012년 김정일의 70번째 생일을 맞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개칭하였습니다. 김정일은 금수산의사당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하여 금수산 지구를 “주체의 최고성지로 가장 훌륭히 꾸릴 것을 몸소 구상하시고 발기”했습니다. 북한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은 1995년 6월 12일 금수산의사당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하고 “궁전 안에 어버이수령님을 생전의 모습 그대로 안치하며 주체사상 로작관을 새로 꾸려 이곳 금수산지구를 주체의 최고성지로 되게 할데 대한 결정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영생의 모습으로 길이 모실데 대하여》를 채택하였습니다. 이것은 김정일의 뜻입니다. <조선대백과사전(3)>은 김정일이 “수십차례에 걸쳐 친히 현지에 나오시여 금수산기념궁전의 모든 대상들과 세부들을 최상의 수준에서 완전무결하게 건립하도록 세심하고도 정력적인 지도를 주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금수산기념궁전 건설은 짧은 기간에 훌륭히 완성되게 되였다. 금수산기념궁전은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어버이수령님께 바치는 충성과 효성의 최고정화이고 우리 인민들에게 베풀어주신 은정 깊은 배려의 고귀한 결정체이며 김일성민족의 최대의 국보”라고 기술했습니다. 그리고 “금수산기념궁전 안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생전의 모습으로 계시는 홀과 어버이수령님의 립상을 모신 홀, 경애하는 수령님의 탁월한 사상리론 활동의 전모를 보여주는 주체사상로작관이 있다. 금수산기념궁전의 정면에는 우리 인민들과 세계 각지 인사들을 이곳에서 반갑게 따뜻이 맞아주시던 생전의 수령님모습 그대로 환히 웃으시는 태양의 모습 그대로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초상화가 정중히 모셔져있다. 궁전의 좌측 계단을 오르면 위대한 수령님의 립상을 모신 커다란 홀이 있다. 경애하는 수령님의 위인적 풍모에 어울리게 최상의 수준에서 꾸려진 이 홀안에는 푸른 하늘이 높이 들려있고 붉게 타오르는 태양의 노을속에 높이 서계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숭엄한 흰대리석립상이 정중히 모셔져있다.”고 했습니다. ‘대리석립상’은 김일성이 금수산의사당에서 활동할 때의 모습을 형상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조선대백과사전(3)>에 소개된 글 입니다.-“뒤짐을 지고 거룩하게 서계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영상에서는 두 차례의 반제대전을 승리에로 이끄신 강철의 령장, 두 차례의 거창한 사회혁명을 승리에로 인도하신 걸출한 령도자, 창조와 건설의 영재, 탁월하고 세련된 정치가, 조국과 인민의 안녕과 행복, 인류의 자주위업을 위한 투쟁에 불면불휴의 전생애를 바치신 절세의 애국자, 고결한 혁명가의 위인적 풍모가 뜨겁게 안겨온다.”- <조선대백과사전(3)>은 계속해서 “이 홀을 지나면 대리석으로 형성된 18m폭의 대계단이 있다. 대계단을 따라 굽이굽이 에돌아 올라가면 어버이수령님께서 영생의 모습으로 계시는 홀이 있다. 궁전의 밖은 길이 415m, 너비 216m의 넓은 광장으로 형성되여 있고 정원은 푸른 숲과 꽃밭으로 훌륭하게 꾸려졌으며 궁전으로 오가는 구간에는 주체의 최고성지를 찾는 인민들이 리용할수 있게 현대적으로 갖추어진 궤도전차가 있다. 금수산기념궁전은 주체의 태양으로 영생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생전의 모습 그대로 모심으로 하여 주체의 최고성당으로, 자주시대 지구의 심장부로 온 세상에 찬연히 빛나고있다.”고 했습니다. 김정일의 죽음은 2011년 12월 17일 오전 8시 30분,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하였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방송사들은 김정일이 희천발전소 현지 지도 방문 도중이었다고 특별 방송을 통해 밝혔습니다. 그의 사망 소식은 2일 동안 극비에 부쳐졌으며, 이틀이 지난 12월 19일 정오에 특별 방송 통하여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고, 시신은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되었습니다. 금수산태양궁전! 1995년부터 2012년까지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불렸으며, 2012년 김정일의 70번째 생일을 맞아 김정은이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개칭하였습니다. 외관은 이름에 어울릴 만큼 궁전 구조로 되어 있고 시신의 유지 및 관리는 러시아의 기관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들어간 비용은 8억 9,000만 달러 입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은 궁전 3층 중앙 홀에 안치되고 있고 입장자는 멈춰 서서 보는 것은 허가되지 않습니다. <조선중앙TV>은 2020년 2월 16일, 김정일 생일에 간부들과 함께 금수산태양궁전을 입장하는 모습’을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집권 후 2018년을 제외하고 2013년부터 2020년까지 매년 신년 첫날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습니다. 김정은은 2020년 원단(元旦)과 김정일 생일에 참배해 왔습니다. 그러면 2020년 4월 15일에는? 일본 아베도 코로나19의 진실을 감추고 꼼수를 쓰다 ‘개망신’을 했는데 포기했는데, 김정은은 아직까지 꼼수조차 쓰지 않고 있는데...제발 할아버지 앞에서 ‘북한 코로나19의 현재’를 밝히기를!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는 김정은이 될 수는 없나요? 올해만이라도 태양절 행사를 모두 취소하길! 북한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2020년 4월 3일 자(字) 논설에서 “전세계가 악성비루스 감염증의 피해로 인한 대혼란 속에 빠져 전전긍긍하고 있는 때에 우리 나라에서는 단 한 명의 감염자도 발생하지 않은 것은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우리 나라 사회주의보건제도가 있기 때문"이라며 했습니다. <조선중앙통신>도 이날 ”중앙비상방역지휘부의 통일적인 지휘에 따라 격리해제사업이 엄격히 진행되고 있는 속에 각 도(道)에서는 의학적 감시대상자들이 전부 해제되였으며 현재 전국적으로 500여명이 남아있다"고 밝혔습니다. 김정은이 지금 제 정신이 아닌 모양입니다. 제발 정신 좀 차리시요!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2020 북한 달력 ④4월과 4월의 태양절 & 김정은
[청로 이용웅 칼럼]2020 북한 달력 ④4월과 4월의 태양절 & 김정은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원래 캘린더(calendar)란 말은 라틴어로 ‘금전출납부’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옛날 로마에서는 금전의 대차 관계를 매달 삭일(朔日)에 청산하는 풍속이 있어서 결국 금전출납부가 달력을 의미하는 말로 전용(轉用)케 되었던 것입니다. H.D.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숲속의 생활>에서 “캐나다 태생의 채벌군인 그가 가진 책이라곤 한 권의 달력과 한 권의 수학책 뿐 이었다. 달력은 그에게 일종의 백과사전이었다. 그는 달력 속에 인류 지식의 요약이 들어있다고 보았다.”라고 했습니다! 북한도 매년 달력을 발행합니다. 북한 조선출판물수출입사에서 발행한 북한의 2020년 달력 표지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The great Comrades Kim Il Sung and Kim Jong IL Will Always Be with Us.)”/ “주체 JUCHE 109 (2020)”/ “조선출판물수출입사 Korea Publications Export & Import Corporation”라는 글이 있습니다. 2020년 새 달력 ‘4월’에는 사진 “천지의 해빙기”가 있습니다. / 달력 4월의 1일부터 31일 사이에는 [15일(태양절)]이 인쇄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청명 4.4/ 곡우 4.19]가 있습니다. 날찌[4]는 적자(赤字)인데 ‘청명’이란 글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4월 달력에는 김일성은 물론이고, 김정일, 김정은, 그리고 강반석(康盤石/김일성 母/1892~1932)까지 등장했습니다. ‘태양절’ 사진도 있습니다. 다음은 4월 달력에 있는 문장들입니다. 4.15. 태양절.(April. 15 : Day of the Sun.) 만경대 김일성 생가 그림// 주체1(1912) 4.15.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탄생하시였다.(April 15, Juche 1(1912) : The great leader Comrade Kim IL Sung was born.)// 주체 21(1932) 4.25.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시였다./ April 25, Juche 21(1932): The great leader Comrade Kim Il Sung founded the Korean People‘s Revolutionary Army.)// 주체 81(1992) 4.13.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원수칭호를 받으시였다./ April 13, Juche 81(1992): The great leader Comrade Kim Il Sung was honoured with the title of the DPRK Generalissimo.// 주체 82(1993) 4.9. 위대한 수령 김정일동지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시였다./ April 9, Juche 82(1993): The great leader Comrade Kim Jung Il was elected Chairman of the Natiional Defence Commission of the DPRK.// 주체 101(2012) 4.11.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 조선로동당 제1비서로 추대되시였다./ April 11, Juche 101(2012): The respected Supreme Leader Comrade Kim Jong Un was elected First Secretary of the Worker's party of Korea.// 주체 101(2012) 4.13.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추대되시였다./April 13, Juche 101(2012): The respected Supreme Leader Comrade Kim Jong Un was elected First Chairman of the Natiional Defence Commission of the DPRK.// 1892. 4.21. 우리 나라 녀성 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강반석녀사께서 탄생하시였다. / April 21,1892: Kang Pan Sok, an outstanding leader of the women's movement in Korea.// 2020년 4월에도 북녘 땅에는 어김없이 ‘태양절(太陽節)’이 찾아옵니다. 북한의 태양절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즉 북한에서 1912년 4월 15일에 김일성이 출생한 것을 기념하는 날! 김일성의 생일인 4월 15일을 기념하는 북한의 최대의 명절! 북한은 1974년 4월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통해 북한 최대의 명절로 지정하였고, 1997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3주기에 이 날을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의 5개 기관이 주체연호 사용과 함께 격상시키기로 공동결의했습니다. 북한은 1992년 김일성의 생일을 ‘민족최대의 명절’로 정했고, 김일성은 대원수(大元帥)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최후의 만찬’도 없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북한의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1994년 7월 9일 정오 특별방송! “위대한 수령 김일성주석이 8일 오전 2시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김일성의 [질병과 사망원인에 대한 의학적 결론서]에는 “겹쌓이는 정신적인 과로로 하여 1994년 7월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되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였다. 즉석에 모든 치료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장쇼크가 증악되여 1994년 7월 8일 2시에 사망”했다고 적혀있었습니다. 2020년 태양절, 금년 들어 계속해서 태양절 선전을 해온 <로동신문>은 3월 19일 “공공 교통수단을 통한 전파를 막자면”이라는 글을 통해 “승무원들은 운행 시 신형코로나비루스(코로나19) 감염증 예방에 대한 선전사업을 진행해야 한다”며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승객들은 태우지 말아야 한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려객 렬차, 장거리 뻐스에서는 개찰구나 출입문 앞에서 승객들의 체온을 측정해야 한다”면서 “열이 나는 사람(37℃ 이상)은 절대로 태우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코로나19 북한 현황]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하고 있습니다. 김정은! <로동신문>(2020.2.29.)은 김정은이 2월 28일 인민군 부대의 합동 타격훈련을 지도했다고 보도했는데, 그를 제외한 모든 참모와 지휘관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인 김정일 생일(2월16일)에 금수산태양궁전 참배한 후 13일 만에 행보였습니다. 김정은은 3월에는 약 보름 동안 함경도, 강원도 등 동해안 일대 군사 훈련을 지휘했습니다. 그러다 3월 17일 평양종합병원 착공식에 참가했습니다. 3월 29일에는 올해 네 번째로 미상(未詳)의 발사체를 쏘아 올렸습니다. 김정은 위원장! 정신 좀 차리시요! 북한의 4월! 김정은이 아직 이실직고(以實直告)하지 않았지만 ‘코로나19’가 퍼진 수도(首都)! 평양 2020년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 취소 확정! ‘태양절’이라는 할아버지 생일잔치들은 모두 취소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북한 주민들이 목숨을 부지(扶支)할 수 있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라일락꽃을 죽은 땅에서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활기없는 뿌리를 일깨운다.”(엘리어트/황무지)- 이제 4월입니다! 김정은은 우선 ‘태양절’을 맞아 코로나19 백서(白書)를 내놓기 바랍니다. 김일성부자도 살아있으면 수락했을 겁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대학의 원격수업 개강과 미래에 대한 단상(斷想)
[청로 이용웅 칼럼] 대학의 원격수업 개강과 미래에 대한 단상(斷想)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2019년! 대한민국 교육부! 교육부는 국가교육회의, 국회교육희망포럼 등과 함께 2019년 2월 28일(목)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에서 “대한민국 새로운 교육 100년과 국가교육위원회”를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개최했습니다. 주제가 훌륭합니다. 그러데 필자는 이런 교육부의 지시 때문에 혼란스런 시간을 보냈습니다. 전날 29일 경남대학교 교수학습센터는 “사이버강좌 시험을 오프라인으로 실시...2019학년도 1학기부터 교육부의 새로운 기준에 따라 한 차시가 반드시 50분이 되도록 구성하여야 합니다”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 후 필자는 수긍하기 힘든 지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교육부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위치한 경남대학교의 교수학습센터 김병수 선생님은 이번 지시가 첫 학기니까 철저히 지시대로 운영한다고 했습니다. 필자는 사이버강좌의 특성이 무시된 것으로 생각했지만 교육부 지시를 따랐습니다. 사이버강의 20년 만에 처음으로 중간고사를 강의실에서 실시했습니다. 물론 교육부가 심층적으로 연구한 결과이겠지만, 일선 교육현장에서 가르쳐온 교수의 생각은 일단 모두 접어두기로 했습니다. 오프라인 시험 때문에 결과적으로 수강 정원도 50% 줄였습니다. 2019년 4월 19일 <조선일보>는 “규제 줄인다더니…교육부, 대학들 요구엔 귀 막아”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기사 내용(요약)은 “교육부, 혁신 과제 70건 심의/ 등록금 동결·온라인 강의 비율 등 대학이 폐지 요구한 핵심사항 빠져/ 최근 들어 대표적 '구시대 규제'로 꼽혀온 '온라인 강의' 지침도 포함되지 않았다. 교육부는 '온라인 강의가 전체 수업의 20%를 넘으면 안 된다'고 대학에 지침”을! ‘신문’은 서울 지역의 한 대학교수가 “교육부가 규제를 혁신할 의지가 있으면, 담당 과를 따질 게 아니라 현장에서 가장 불만 많은 규제부터 논의해야지, 지금은 위에서 하라니까 할 수 없이 자잘한 규제 몇 가지 건드리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언어도단(言語道斷)? 필자는 대한민국 대학(大學)은 ‘빛·자유·학문’ 만을 추구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20년! 교육부는 코로나 19 확산 우려가 지속되면서 초, 중, 고교도 대학처럼 개학 후 온라인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가 확산될 경우 등교하기 어려운 지역이나 학교를 대상으로 '온라인 개학'과 '온라인 수업'을 통해 개학 후 학생 확진자가 발생할 경우 벌어질 학교폐쇄 등에 대비하겠다는 복안입니다. 교육부는 2020년 3월 25일 '원격교육 지원계획'을 발표하고 온라인 수업을 위한 수업기준 등 구체적인 방안 마련에 착수했습니다. 2020년 1학기 전국의 대학들은 온라인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경남대학교 학사운영대책본부는 2월 26일 [개강 2주 원격수업 시행 안내]를 통해 “3월 16일 개강부터 2주간 전체 강좌에 대한 원격수업”을 결정하고, [원격수업 수강 방법]을 공지했습니다. <경남신문>(2020.3.16.字)은 “경상대, 온라인 강의 첫 날 서버 다운/ 수강 신청·정정 접속자 몰려/ 학교 "순차적 강의 접속" 당부/ 창원대·경남대는 정상 진행”되었다고 전했습니다. <경남신문>에 따르면, 경상대가 3월 16일부터 ’부산 울산 경남권역 대학 이러닝지원센터‘를 통해 온라인 강의를 시작했으나 오전 접속자가 몰리면서 서버 접속이 지연되더니 마침내 접속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접속자가 몰려 수강 페이지에 접근 자체가 안 되면서 수업을 못 들은 학생들은 “실시간 강의를 듣고 있는 친구들이 서버가 터졌다는 얘기를 했다”며 “서버 오류인데 결석 처리가 되면 어떻게 하냐”며 불안해 했습니다. 일부 학생들은 “교육부가 온라인수업을 결정한 지 2주가 넘었는데 학교가 지금까지 뭘 준비했는지 모르겠다”고 했으며, 일부 수업의 경우 영상 없이 수업자료만 올린 채 과제 제출을 요구해 “방문 학습만도 못한 게 아니냐”는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이에 대해 경상대 관계자는 “수강신청·변경을 하는 메인서버와 비대면 강좌를 하는 e캠퍼스 서버가 학생들 접속 폭주와 맞물리면서 서버가 다운되거나 불안정한 상태가 됐다”면서 “불편을 겪은 학생들에게 사과드린다”고 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대학 당국이 몰매를 맞았지만, 사실은 교육부가 맞아야 했을 ‘매’ 였습니다. 경남대는 이날 아무런 장애가 발생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상적인 온라인 강의가 진행됐다고 밝혔습니다. 교수학습센터 김민영 씨는 “개학이 연기되는 시점부터 인터넷 강의를 위해 시스템을 도입하고 교수진들도 수업에 대해 많은 준비를 한 만큼 잘 진행되고 있다”며 “장기화 될 경우에 대비해 또 다른 대책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20년간 필자와 함께 동행해온 경남대학교 교수학습센터가 꾸준히 노력해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창원대학교도 이날부터 홈페이지, e클래스(가상강좌)사이트, 수업커뮤니티 사이트 등을 통해 온라인 강의를 진행했는데 서버 과부하 없이 강의가 진행됐다고 밝혔습니다. 창원대 학생들은 한국대학가상교육연합(KCU)을 통해 필자의 사이버 강의 [무대화술로 푸는 취업성공전략]을 수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원대는 “가상강좌(온라인[원격]수업”라고 했습니다. 이제 모든 대학이 ‘사이버 강의’든, 온라인수업‘이든, '원격수업‘이든, 통일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때마침 <조선일보>(2020.3.23.字)는 “코로나19가 앞당긴 미래 대학가 온라인 강의 자리 잡을까”라는 기획기사를 냈습니다. 기자는 3월 16일에 ”국내 4년제 대학 193곳 중 175곳은 '온라인'으로 개강! 영상제작업체를 서둘러 섭외해 온라인 강의를 찍은 대학도 있고, 교수가 직접 화상회의 프로그램을 활용해 실시간 온라인 강의에 나선 경우도 있는 등, 대학마다, 교수마다 방식은 천차만별! 그러나 첫 주 성적표는 신통치 못했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한 대학교수는 “온라인 강의 하나를 만들기 위해 교수는 스토리 보드를 대학과 논의해서 짜고, 수업과 관련한 각종 참고자료를 학생과 공유하며 준비해야 한다”며 “실시간 강의나 동영상 녹화도 교수의 선호가 아니라 전공과 과목의 특성에 맞는 방식을 택해야 함을 인식하고 차근히 준비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별도의 연구도 필요합니다. 교육부가 온라인 강의를 전체 수업의 20% 이하로만 진행할 수 있도록 한 규제와 동영상 강의 재생시간이 25분을 넘어야 한다는 규제를 하는 것은 교육부의 무능(無能)의 소치(所致)입니다. 한 대학 당국자는 교육부가 우선 올해 1학기에 한해 한시적으로 온라인 강의 관련 규제를 해제했지만, 앞으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대학의 경계가 무너지고 온라인 강의가 중점을 이루는 방식으로 점차 나아갈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런데 방금 공문이 왔습니다“-코로나 19로 인해 온라인 전용 강좌 중간고사 방식 및 일정이 변경/ 오프라인 시험→온라인 시험으로 변경 (중간고사)”- 앞으로 코로나 19가 끝나도 사이버강의 시험은 반드시 온라인 시험이어야 합니다. 필자는 대한민국 대학(大學)은 ‘빛·자유·학문’ 을 추구하는 전당이 되길 소망합니다, 앞으로 대한민국 교육부가 온라인 강의의 시험을 오프라인으로 보라고 협박(?)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19]NOM! 물러가라!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北韓藝術 巡禮-⑤북한의 교향악단과 [우리식 교향곡]
[청로 이용웅 칼럼]北韓藝術 巡禮-⑤북한의 교향악단과 [우리식 교향곡]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립교향악단(State Symphony Orchestra of DPRK) - ‘조선국립교향악단’은 북한의 대표적인 교향악단으로, 북한에서는 '평양 국립 교향악단' 또는 '국립교향악단' 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1946년 8월 8일에 '중앙교향악단' 이라는 명칭으로 첫 공연을 가졌고, 1947년 1월에 단원을 보강해 ‘2관 편성’으로 확대했습니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국립예술극장 산하의 연주 단체로 편입되었고,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본격 오페라인 김순남의 “인민유격대”를 비롯한 여러 무대 작품의 공연에 참가했습니다. 1956년에 독자적인 단체로 독립했지만, 1969년에 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 관현악단과 통합되어 영화음악의 녹음을 위주로 활동했습니다. 1971년에는 피바다가극단 산하 연주 단체가 되었고, ‘북조선’에서 대표적인 관현악 작품으로 손꼽는 “아리랑”, “내 고향의 정든 집”,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그네 뛰는 처녀”, 피아노 협주곡 “조선은 하나다”, 바이올린 협주곡 “사향가”, 교향곡 “피바다” 등의 작품을 초연했습니다. 1980년에 다시 독립해 현재의 명칭으로 고쳤고, 1982년에는 윤이상의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연주했습니다. 1986년 폴란드 순회공연 중 '바르샤바의 가을' 음악제에 참가했고, 윤이상의 클라리넷 협주곡과 교향곡 제 1번을 연주해 호평을 받았습니다. 2000년 8월에는 북한 예술단체 최초로 서울을 방문해 각각 두 차례씩의 단독 공연과 KBS 교향악단과의 합동 공연을 가졌습니다. 여기서 북한과 ‘윤이상’을 살펴봅니다. 북한은 1992년 평양에 윤이상음악당(재독음악인 윤이상의 이름을 딴 음악연주와 연구시설을 갖춘 음악전용시설)을 설립했습니다. 독일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의 북한 내 음악활동을 지원하고,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것입니다. 이곳은 윤이상의 북한 내 음악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음악연주 전용극장으로 윤이상음악회를 비롯하여 윤이상 관련 행사가 진행되는 곳입니다. 그의 음악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시설로 연주홀과 전속관현악단의 연습실과 연구시설이 들어서 있으며, 윤이상음악회와 음악연구토론회, 사진전시회 등을 개최해 왔습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1991년 3월에 착공되어 1992년 10월에 개관하였으며, 평양시 중구역 영광거리 연화2동에 위치해 있습니다. 연건평 17,000㎡의 300석 규모의 2개의 연주홀과 200여 개의 방이 있고, 200여 개의 방중에서 60여개가 윤이상음악연구소 전속 관현악단의 단원 연습실, 연구실, 국제회의실과 강의실, 음악감상실, 녹음실, 문헌자료실, 민족악기 전시장 등이 있습니다. 참고! 대한민국 통영시 도천동에 윤이상기념관(2010년 개관)이 있습니다.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성장한 윤이상은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배웠으며, 귀국 후 교사로 재직하면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59년 독일 베를린음악대학을 졸업한 이후 그는 쇤베르크 12음계 기법과 우리나라 궁중음악을 결합시킨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며 세계 음악계에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서독으로 추방된 윤이상은 1971년 독일에 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도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으로 활동했고, 1995년 독일 베를린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추후하기로 합니다. 겉으로 보면 남한의 국립교향악단의 역사와 크게 다른 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교향곡발전의 갈피마다에는 위대한 김정일동지의 현명한 령도의 손길이 뜨겁게 어려있다. 우리 식 교향곡의 발전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세심한 지도 밑에 수행된 교향악 혁명과 잇닿아 있다.”고 합니다. 북한 월간 <조선예술>에는 “20세기에 이르러 교향악은 온갖 잡다한 형식주의 음악조류들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감정과 동떨어진 퇴폐적인 음악으로 전락되였다. 우리 나라와 세계 교향악발전의 이러한 상황은 음악예술부문 앞에 우리 인민이 사랑하며 즐겨 듣는 우리 식의 진정한 교향악을 창조할 것을 제기”했다고 기술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이 “우리 나라 교향곡을 하는 경우에 다른 나라의 교향곡을 본따서 누구의 교향곡 1번이요, 2번이요 하면서 우리의 것인지 다른 나라의 것인지 알수 없게...우리 식의 교향악을 창조하기 위한 방도를 구체적으로 밝혀”주었다고! 북한 교향악은 기본적으로 3관 편성의 서양 관현악단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4관 편성으로도 확대가 가능하며 저대나 단소, 장새납 등 북한에서 개량한 민족관악기 연주자들도 정식으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이를 북한은 ‘주체적 배합관현악’ 이라고 합니다. 북한 <로동신문>은 2020년 1월 26일 “3관 편성 관현악단 조직 50돌 기념 국립교향악단 음악회가 모란봉극장에서 진행되였다"고 보도했는데, ”공연 무대에는 협주곡, 관현악, 현악합주 등이 올랐다“고 하고, 특히 피아노 협주곡 ”김정일 동지께 드리는 노래“는 ”3관 편성 관현악단을 꾸려주시고 조선의 넋과 정서가 흐르는 우리식 교향악 발전의 새로운 장을 펼쳐주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에 대한 회억으로 관람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적셔주었다"라고 했습니다. <로동신문>은 ‘3관 편성 관현악단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1970년 1월 26일 조직’됐다고 하고, “당시 우리나라에서 교향악은 사대와 교조에 오염되어 인민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극장 무대에서 점차 사라져 가는 형편에 놓여있었다”면서 김정일이 "교향악을 우리식으로 하여야 한다고 명철하게 밝혀주시였다"라고 했습니다. 김정은 시대의 북한 교향악단! <로동신문>은 김정은 2019년 7월 27일 “전승절에 즈음하여 국립교향악단의 7.27기념음악회를 관람했다”고 전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북한 교향악단은 평창 동계올림픽 때 강릉·서울에서 공연한 북한예술단 삼지연 관현악단과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 안에 존재합니다. 김정은의 작품(?)입니다. 그는 물론 ‘주체적 배합관현악’을 잘 알겠죠? 북한의 진짜 ‘교향악단’은 퇴조(退潮)하고, [우리식 교향곡] 조차도! 김정은이 김정일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실천하려면, 북한의 교향악단과 [우리식 교향곡]을 더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北韓藝術 巡禮-④北韓演劇과 “분노의 화산은 터졌다”
[청로 이용웅 칼럼]北韓藝術 巡禮-④北韓演劇과 “분노의 화산은 터졌다”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거짓을 사실인 것처럼 짜 맞추어 꾸며 내는 일’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연극(演劇)’이라는 예술용어를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朝鮮語辭典>은 “俳優の 演技”(605쪽), 즉 ‘배우의 연기’라고 풀었습니다. 해방 후 첫 우리말 사전인 <조선어사전>(문세영, 1946년)에는 “연극(演劇): 배우가 극본에 의하여 여러가지 치장을 하고 여러가지로 행동하는 예술”(1109쪽)이라고 풀이 했습니다. 이후 남한에서 발간된 우리말 사전들은 대부분 문세영의 뜻풀이와 유사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우리말 큰사전>(지은이․한글학회/어문각/1992.)에는 “연극 ①배우가 각본에 의하여 분장하고 음악, 배경, 조명, 그밖의 여러 가지 장치의 힘을 빌어서 어떤 사건과 인물을 구체적으로 연출하는 예술”(2937쪽)이라고 기술했습니다. 북한의 사전들을 살펴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에서 1962년에 펴낸 <조선말 사전>에 “연극(演劇): ①무대 예술의 한 형태. 극작품에 의거하여 배우들이 해당된 인물로 분장하고 무대 우에서 극작품에 묘사된 현실 생활을 재현하는 예술”(4599쪽), <조선문화어사전>(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1973.)에 “연극: ①인간생활을 극적형식으로 반영하며 배우의 말과 행동을 기본형상수단으로 하는 무대예술의 한 형태”(974쪽), <조선말대사전(1)>(사회과학출판사/1992.)에 “연극: ①배우의 말과 행동을 기본형상수단으로 하여 극작품에 묘사된 생활을 관객을 상대로 무대 우에 재현하는 무대예술의 한 형태. 희곡, 연출, 연기, 무대미술, 연극음악 등은 연극예술을 이루는 중요한 형상요소.”(1484쪽)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말대사전(1)>에는 “연극예술: 연극작품이나 연극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예술”(1484쪽)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학생문예소사전>은 김일성의 ‘교시’, “《우리가 그전에 항일무장투쟁을 할때에는 작가가 따로 없었지만 연극 각본 같은 것을 훌륭히 써서 연극을 만들었습니다.”(327쪽)를 인용하면서, 김일성이 “항일혁명투쟁의 전 기간에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인 혁명연극 《성황당》,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피바다》, 《3인 1당》 등을 몸소 집필”하고 “창조공연사업을 지도”함으로써 “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을 조국광복의 성전에로 힘있게 불러일으켰으며 혁명연극의 빛나는 전통을 마련”(327쪽)했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우리 나라에서는 영광스러운 당중앙의 현명한 지도밑에 《성황당》식 혁명연극을 새롭게 창조하여 20세기 혁명연극의 일대 전성기를 열어놓았다.”(327쪽)고 했습니다. 이런 역사는 대부분 조작된 것인데, 김일성 치하(治下)에서 북한의 문학평론가·작가였던 ‘한효’가 <조선 연극사 개요>에서 사실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김일성은 끝까지 ‘불후의 고전적명작’의 작가로 행세했습니다. 김정일의 <연극예술에 대하여>가 북한연극의 지침서인데, 위의 <성황당>은 김정일이 북한연극을 전면 수정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작품입니다. 이것이 북한이 말하는 ‘우리 식의 새 연극을 창조하기 위한 투쟁’이며, ‘《성황당》식연극은 새형의 연극’ 입니다. 이 같은 새로운 정책과 이론을 구체적으로 밝힌 자료가 김정일의 <연극예술에 대하여> 입니다 <연극예술에 대하여>는 김정일이 1988년 4월 20일 ‘문학예술부문 일군들과 한 담화’입니다. 김정일은 서양연극에 대한 사대주의가 심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연극예술인들이 연극이라고 하면 의례히 서양식으로 되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다른 나라 연극을 숭상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연극예술부문작가, 예술인들의 머리 속에 남아있는 부르죠아사상, 봉건사상, 수정주의, 사대주의, 교조주의와 같은 낡은 사상 잔재를 뿌리 뽑지 않고서는 좋은 연극을 창조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김정일은 많은 연극인들을 숙청해 버렸습니다. 이때부터 북한에서의 ‘진정한 연극’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김정일의 <연극예술에 대하여>의 “우리 식의 새 연극을 창조하기 위한 투쟁”을 보면, ‘우리 식의 새 연극을 창조하기 위한 연극혁명’을 실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연극혁명은 연극예술부문에서 부르죠아사상, 봉건사상, 수정주의, 사대주의, 교조주의를 비롯한 온갖 반동적이며 이색적인 사상을 쓸어버리고 주체를 세우기 위한 투쟁 속에서 수행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혁명의 결실은 ‘<성황당>식 혁명연극’이 ‘5대 혁명가극’을 탄생시켰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경희극’이라는 극(劇)을 만들었는데, 출연자들은 유명 영화배우들로 채워 본래의 연극을 서서히 퇴출시켰습니다. 김정일은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인 혁명연극 <성황당>, <혈분만국회>, <딸에게서 온 편지>, <3인 1당>, <경축대회>를 ‘성황당 식 연극’이라고 하고, ‘5대 혁명연극’이라고 했습니다. 김일성 부자 우상화의 ‘본보기’들인 혁명연극, <연풍호>, <승리의 기치따라>, <편지>, <한드레벌의 새전설>, 미국과 남한을 비판한 <승냥이>, <분노의 화산은 터졌다> 등이 집필되었습니다. 여기서 <분노의 화산은 터졌다>를 소개합니다. <분노의 화산은 터졌다> : 1960년 자유당 정권이 전례 없는 사전 부정행위를 자행했던 정․부통령선거를 3월 15일로 앞당겨 실시한다고 공고하자, 남한은 규탄 데모의 물결로 넘쳤습니다. 그 진원지가 마산이었습니다. 북한은 이 사건을 대남 비방의 호재로 삼아 문학예술작품들을 내놓았습니다. 그 중 희곡 <분노의 화산은 터졌다>는 1960년 6월에 발행된 <조선문학> 6월호에 실렸으며, 12장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북한의 대표적인 극작가인 송영이 1960년 5월 14일에 탈고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이 이승만의 하야 성명 발표(1960년 4월 26일) 18일 뒤에 탈고되었다는 것은 북한문학예술의 정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음은 <분노의 화산은 터졌다>의 ‘사람들 ․ 제7장(발췌)’ 입니다. [때 ; 1960년 4월 19일 전후/ 곳 ; 남조선/ 사람들- 최승원(고려 대학생)·최승진(그의 아우, 마산 고등 학교 학생)·최재춘(그의 아버지)·리씨(그의 어머니)·김주렬(그의 이종 사촌 동생)·기타] // [김 주옥 (주렬의 사진을 산 사람 같이 어루만지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오빠, 나 여기 왔소, 나 주옥이요, 왜 말이 없소, 오빠 오빠(느낀다.) (적은 사이) 오빠 지금도 눈에 선하구료. 어머니께서 입학금을 마련하여 주실 때 오빤 그것을 받아 들고 춤까지 추었었지―그 때 오빠는 《엄마 나 이번에 마산 가면 꼭 붙을 테야 정말 공부 잘 할테야, 졸업하고 나면 엄마 호강시켜 드릴테야, 정말이야 엄마!》(목이 멘다.) 그리고 오빠, 오빠는 내 손을 붙잡고 《주옥아 미안하다, 나 공부시키기 위하여 넌 공장 가지 정말 고생하겠다. 그러나 조금만 참아라 나 졸업하고 나면 너 공장 안 다녀도 된다》(적은 사이) 오빠 나 그 때 얼마나 울었는지 아우, 오빠 몰래 말이요,..] (<조선문학> 1960년 6월호, 22~38쪽)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北韓藝術 巡禮-③봉산탈놀이와 국가무형문화재 봉산탈춤
[청로 이용웅 칼럼]北韓藝術 巡禮-③봉산탈놀이와 국가무형문화재 봉산탈춤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봉산탈놀이 《민속》 황해북도 봉산지방에서 성행한 탈놀이. 재치있는 대사와 춤과 노래가 결합된 탈놀이의 하나로서 다채롭고 개성적이다. 미신적 요소와 시정인적인 기분이 적지 않게 반영되여 있으나 춤동작은 약동적이며 활달한 것으로서 인민적인데가 있다. =봉산탈춤.”// “봉산탈춤[명]=봉산탈놀이”(<조선말대사전(2)>,280쪽) / 이미 揭載된 <[청로 이용웅 칼럼]北韓藝術 巡禮-②황해북도 봉산탈놀이와 평양 봉산탈춤>을 다음에서 요약합니다. “[봉산탈놀이] 지난날 황해북도 봉산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탈놀이. 무용, 노래, 재담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놀이는 여러가지 형태로 진행되였는데 그 가운데서 12개 장면으로 구성된 것이 많이 알려지고 있고, 사용되는 가면은 상좌, 목중, 사당, 로장, 사자, 량반, 소무, 신장수, 취발이, 말뚝이, 미얄, 덜머리, 원숭이 등”입니다. 윗 글은 북한이 ‘봉산탈놀이’를 소개하고 정의(定義)를 내린 용어 해석입니다. 황해북도 봉산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탈놀이로 북한 민속예술의 하나입니다. 북한에서는 “12개 장면”의 ‘탈놀이’가 많이 알려져 있다고 했지만, <조선의 민속전통(민속음악과 무용)>에는 “11과장”이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북한 봉산탈춤의 명맥(命脈)을 잇는 황해북도예술단은 “민속가무극”이라고 하면서 원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로동신문>은 1910년 봉산읍이 사리원으로 옮겨간 후에는 경암루 앞마당에서 진행되었고, 이전의 봉산탈춤대본은 ‘7과장, 11과장, 12과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나라 민속무용>은 봉산탈춤놀이가 “11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화보 <조선>(주체90(2001)년 3호)에는 “12개 장면으로 구성된 것이 많이 알려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북한이 야외에서 연희되는 봉산탈춤놀이(<조선>, 35쪽, “봉산탈놀이”)가 무대에서 공연되는 “민속무용 <봉산탈춤>”으로 탈바꿈하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북한에서는 야외의 ‘봉산탈놀이’, ‘봉산탈춤놀이’ 그리고 무대의 ‘봉산탈춤’입니다. <로동신문>은 북한 사회과학원 민속학연구소 류만혁 박사의 글을 실었습니다. 그는 김일성이 “해방 후 건국사업의 바쁘신 속에서도 친히 봉산탈춤을 예술공연종목의 하나로 지정해주시고...봉산탈춤을 계승발전시키는데서 나서는 문제들에 대하여서도 환히 밝혀주시였다. 그리고 봉산탈군들로 <봉산탈춤보존회>를 결성하여 봉산탈춤을 보존하도록 국가적인 조치”도 취해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에 ‘봉산탈춤보존회’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김일성의 ‘령도’ 때문에 ”지난날 야외에서만 진행되던 봉산탈춤이 무대에 오르고 봉산탈춤의 원형에 기초하여 탈춤의 다양한 형상이 창조되여 여러 극장들에서 공연“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북한의 봉산탈춤은 실내 무대에서만 공연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봉산탈춤’이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봉산탈춤의 대표적 연회본은 1936년 8월 백중날 사리원읍 경암산 아래에서 공연된 봉산탈춤을 오청, 임석재, 송석하 등이 연희자 이동벽, 김경석, 나문석, 이윤화, 임덕준, 한상건 등의 구술에 의해 채록한 연회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수정 보완을 통해 각자의 채록본을 발표했습니다. 또한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이동벽 구슬본, 김수정 구슬본( 김일출<조선민속탈놀이>), 권택무 수록본(조선의 민간극)이 채록되어 있고, 남한에서는 월남한 김진옥, 민천식 등의 구술을 바탕으로 1965년 8월에 이두현이 대본을 채록했습니다. 황해도에서 성행했던 봉산탈춤은 뜻밖에 남한 땅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제 ‘봉산탈춤보존회’의 ‘봉산탈춤’ 입니다. 남한에 ‘봉산탈춤보존회’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국가무형문화제 봉산탈춤보존회] 홈페이지 메뉴-봉산탈춤 소개]입니다. "봉산탈춤은 오래전부터 황해도 여러 고장에서 추어오던탈춤의 하나로서 '해서탈춤'의 대표격이 되는 탈춤이다. 봉산탈춤은 원래봉산구읍 경수대에서 연희되었으나 1915년경 군청 기타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옮기고 경의선도 개통하게 되어 이 놀이도 그후 사리원 경암산 아래에서 놀아왔다. 해방 후 월남한 몇 분의 연희자들에 의해 1958년 이래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여러 차례 수상"하였다고 했습니다. 봉산탈춤은 1967년 6월 16일 ‘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었고, 김진옥(1894~1969,첫목중·노장역), 이근성(1895~1978, 목중·취발이·사자역), 김용익(1902~79, 목중·마부·거사역), 양소운(1924~2008, 사당,미얄할멈역), 최경명(1912~85, 말뚝이·취발이역), 김선봉(1922~97, 상좌·소무역), 윤옥(1925~2004, 상좌·덜머리집·무당역), 오명옥(1906~87, 피리·해금·악사)등 8명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나 현재 모두 타계하였고, 김애선(1937년생, 소무·상좌·목중역)은 1989년에 보유자로 추가 지정되었습니다. 김기수(1936년생, 노장·목중역)는 1987년에 보유자로 추가 지정되었는데, 2020년 2월 6일(목) 별세했습니다. [국가무형문화제 봉산탈춤보존회] ‘봉산탈춤 전승 교육’, ‘봉산탈춤 강습회’ 등이 중요 사업입니다. 그리고 정기공연, 미국 전 지역 순회공연, 유럽, 벨기에 외 6개국 순회공연, 미주 카나다 지역 순회공연, 인도 뭄바이 등 해외공연, 단오제 등 국내 초청공연, 기획공연 “고3 수험생과 함께하는 봉산탈춤”, 등을 계속해 왔고, 미국 뉴욕 국제훼스티발 · 중국 남풍현 가면축제 ·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등에 참가했습니다. 남한의 봉산탈춤보존회는 북한의 탈춤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대한민국 대표 민속예술의 위치를 확고히 했습니다. [국가무형문화제 봉산탈춤보존회]의 [보존회 연혁]에는 "2020.01.18. (가칭)국가무형문화재 봉산탈춤보존회 창립 총회"라고 했습니다. 확실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남한에서는 ‘봉산탈춤보존회’가 ‘봉산탈춤’을 주도합니다. 북한에는 분명 ‘봉산탈춤보존회’가 존재합니다. ‘봉산탈춤’의 고향은 분명 황해북도이고, 남한의 ‘봉산탈춤’은 한민족의 훌륭한 문화유산입니다. 앞으로 남과 북이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 왕래하며 해법을 찾기 바랍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大邱의 봄봄봄! 이라다 보면 봄이 안 오겠습니꺼?
[청로 이용웅 칼럼]大邱의 봄봄봄! 이라다 보면 봄이 안 오겠습니꺼?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우얍니꺼, 봄은 오겠지예" 할머니는 팬지꽃을 심었다] / 2020년 3월 7일 字<조선일보>의 1면 제목입니다. [사투 속에 피어나는 희망...문화부장 대구 르포]입니다. 문화부장은 “칠십은 족히 돼 보이는 인부 예닐곱이 코를 땅에 박고 호미로 작은 꽃모종을 심었다. 흰색, 분홍색, 파란색...꽃말이 '나를 기억해주세요'라는 팬지꽃 수천 송이. "이렇게 나와서 일해도 괜찮으세요?"라고 묻자 마스크 위로 눈만 내놓은 할머니가 흙을 고르며 말했다. "집에만 있으려니 숨통이 멕혀서. 자슥들한텐 운동 간다 거짓말하고 나왔지. 꽃을 이래 심으니 싱싱한 흙냄새도 맡고. 우얍니꺼. 버티야지. 이라다 보면 봄이 안 오겠습니꺼?" 그는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현장 “대구에도 봄은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보통사람들을 만나고 비극의 현장을 찾았습니다. 그가 만난 택시기사는 "우린 지금 3차 세계대전 중이라예.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한다 아입니꺼"라며 씁쓸히 웃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데 나와야지예. 전시(戰時)엔 목숨 걸고 싸운다 안합니꺼. 정부요? 포기한 지 오랩니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임금님은 백성이 등 따숩고 배불러서 임금이 누군지도 잊고 살게 하는 사람이라카데예."라고 했습니다. 대구(大邱)! 바이러스와 사투(死鬪)는 곳곳에서 벌어지고, 그곳에서 정부와 정치인들은 비난의 화살을 맞고 있었고...하지만 여기저기서 미담(美談)도 꽃 피고 있었습니다, 문화부장은 "페스트균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울 것이다."는 프랑스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유족의 숨죽인 흐느낌은 우리 모두의 고통이자 흐느낌이었다. 화장터 너머 붉게 물든 저녁 하늘로 새들이 날아올랐다.”고 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대한민국 작가의 말을 인용해 주었으면’ 했습니다. 그때 필자는 우연히 북한의 <조선문학개관1>의 “리상화와 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조선문학개관1>를 읽고 있었습니다. 대구(大邱)! ‘리상화’는 바로 대구 출신의 ‘이상화’입니다. 필자는 잠시 바이러스 이야기를 멈추고 대구의 시인을 북한에서 만나봅니다. 시인 이상화(李相和/1901~1943), 일제강점기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을 발표한 시인! <조선문학개관1>에는 ‘리상화’는 3.1운동 이후, 모색과 방황의 세계에서 벗어나 건전한 창작의 길로 걸었는데, 《백조》파에서 뛰쳐나왔으며 《파스큐라》를 거쳐 《카프》에 망라되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시문학은 1925년경부터 새로운 질적 내용을 가지고 현저한 발전을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그런 ‘리상화’의 시문학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의 하나는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 입니다. 이 시는 아름다운 언어와 풍부한 정서를 가지고 빼앗긴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의 서두에서 시인은 이러한 수사학적 질문을 제기하고 결구에서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겼네.”라고 노래함으로써 조국을 빼앗긴 백성에게는 자연의 봄, 생활의 봄이 찾아올 수 없다는 절통한 심정, 조국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리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마음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해라 말을 해다오”- 시는 가리마 같은 논길,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가웁다 웃는 종조리, 고맙게 자란 보리밭, 살진 젖가슴같은 부드러운 흙, 마른 논을 안고 적시며 흐르는 물...조국의 대지 위에 존재하는 그 모든 정답고 소중한 것을 매혹적인 화폭으로 펼쳐 보입니다. <조선문학개관1>은 “서정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풍부한 예술적 형상수법과 세련된 시어, 아름다운 운률을 다양하고 적중하게 구사하여 땅을 빼앗겨 봄마저 빼앗긴 조선 농민들의 비통한 심정과 애국적 지향을 시적으로 일반화한 우수한 작품의 하나이다. 리상화의 시문학은 당대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과 항거정신으로 일관된 주제사상적 내용과 세련되고 완미한 형식이 조화롭게 결합된 높은 사상예술성으로 하여 조선시문학의 발전 풍부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고 했습니다. 북한이 칭찬하는 일제강점기 작가는 드뭅니다. 이당시 ‘불후의 고전적 명작’을 쓴 작가는 김성주(金成柱), 훗날 주석이 된 김일성(金日成) 뿐이기 때문입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 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大邱의 봄봄봄! 이제 대구에 봄이 안 오겠습니꺼?- 졸속(拙速) 행정을 자랑(?)하는 정부와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아직 우왕좌왕(右往左往)하고 있고, 총선을 앞두고 일부 정치인들은 탐욕(貪慾)에 눈이 멀어가고 있지만...대다수 국민들은 대구를 열렬히 돕고 있고, 사랑과 봉사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필자도 학생들과 함께 응원하고 있습니다. 대구 계명대학교 학생들은 아주 오랫동안 필자의 사이버강좌와 함께 해왔습니다. 계명대와 경남대 등 8개 대학은 ‘한국지역대학연합(RUCK)’의 한 가족입니다. 분명 봄은 오고 있습니다! 大邱의 봄봄봄! 곧 대구에 봄이 안 오겠습니꺼?- 틀림없이 봄은 오고 있습니다. 봄! 봄! 봄! 봄은 확실하게 오고 있습니다. 곧 대구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종식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빠른 시일 안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전 국민의 올 봄 나들이는 대구로! 이 참에 “민족 저항시인 이상화 고택‘, 두류공원에 있는 동상, 여러 시비(詩碑)들도 보고, 발전한 대구의 자랑스런 면면(面面)도 보고 또 보고! 이제 곧 대구에 봄이 올 것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2020학년도 제1학기 ‘온라인 강의’를 시작하며!
[청로 이용웅 칼럼] 2020학년도 제1학기 ‘온라인 강의’를 시작하며!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COVID-19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코로나-19// 2019년 12월 중국 우한(牛漢)시에서 발생한 바이러스성 호흡기 질환으로 '우한 폐렴',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코로나19'라고도 합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한 유행성 질환으로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며, 증상이 거의 없는 감염 초기에 전염성이 강한 특징을 보입니다. 감염 후에는 인후통, 고열, 기침, 호흡곤란 등의 증상을 거쳐 폐렴으로 발전합니다. 이렇게 인용해 봐도 필자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코로나-19’가 2020년 제1학기 대학교 개강(開講)을 막았습니다. 필자가 1976년 3월 교단(敎壇)에 선 이래 처음입니다. 대한민국 교육부 홈페이지(www.moe.go.kr)는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2020학년도 신학기 교육분야 학사 운영 및 지원 방안 브리핑”(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유은혜)을 실었습니다. 유 장관은 “현재 전국의 대다수 대학들은 개강 일자를 2주간 연기하였습니다. 교육부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전문대학교육협의회와 협의하여 '2020학년도 1학기 대학 학사운영방안'을 마련, 우선, 대학에서 주신 의견에 따라 코로나19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등교수업, 집합수업을 하지 않고 원격수업, 과제물 활용 수업 등의 재택수업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겠습니다. 재택수업의 구체적인 방식은 각 대학의 여건에 맞게 교원 및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자율적으로 정하여 실시”하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라고 그는 “교육부는 '원격교육운영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원격교육지원센터'를 지정 운영하여 대학에서 수업이 원활하게 운영 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또한 원격수업 개설 교과목 제한을 없애고, 콘텐츠 재생 시간 기준을 삭제하는 한편, 원격수업 콘텐츠 구성을 대학이 자체적으로 할 수 있도록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예! 훌륭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장관님은 원격교육에 대하여 얼마나 아시나요? 필자는 20년 동안 사이버강의를 하고 있지만 잘 모릅니다! 쉽게 말한 수업은 결코 아닙니다. 교육부 홈페이지(www.moe.go.kr)→[우리 교육부는 “사람중심 미래교육”이라는 가치를 바탕으로 협력과 공존이 살아 숨 쉬는 교육, 학생의 성장이 중심이 되는 교육, 생애주기 전체를 고려한 맞춤형 교육, 개인의 소질과 적성이 존중받는 교육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람 중심의 미래교육계획을 구체화하여 사회변화를 선도할 수 있는 인재양성 시스템을 구축해 나가겠습니다. 항상 국민의 눈높이와 현장의 목소리를 존중하며 겸허하게 교육정책을 추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ㅡ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유은혜 장관] 이상은 [교육부] 홈페이지의 [열린장관실]에 있는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유은혜 장관-[장관소개]→[인사말]입니다. ”현장의 목소리를 존중“! ”현장의 목소리를 존중“? 다음은 필자가 2019년 9월 5일 인터넷에서 검색했던 <“[교육부] 홈페이지의 [K-MOOC]에 있는 [K-MOOC?]→[소개]>입니다 : “무크(MOOC)란 Massive, Open, Online, Course의 줄임말로 오픈형 온라인 학습 과정을 뜻합니다. 이 것은 강의실에 수용된 학생만이 강의를 들을 수 있었던 것에서 청강만 가능한 온라인 학습동영상으로 변화하고 현재는 질의응답, 토론, 퀴즈, 과제 제출 등 양방향 학습을 할 수 있는 모습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고등교육의 개방이라는 세계적 흐름에 발맞춰 시작된K-MOOC는 최고 수준의 강의 공개를 통한 대학 수업의 혁신과 고등교육의 실질적 기회 균형 실현, 그리고 고등교육에 대한 평생학습 기반 조성을 목표로 합니다. 또한 국내 우수한 명품 강의 콘텐츠를 개발하여 글로벌한 브랜드로써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다음은 필자가 2020년 3월 4일 인터넷에서 검색한 [교육부] 홈페이지입니다. 위의 [K-MOOC]가 없어졌습니다. 자세히 검색해 보니, “2020년 한국형 온라인 공개강좌(K-MOOC) 기본계획 발표”, “2020년 한국형 온라인 공개강좌(K-MOOC)”, “무크선도대학 신규 15개교 선정으로 명품강좌 개발”, “인공지능(AI) 강좌 집중 개발 및 학습 길잡이 제공” 등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K-MOOC’를 모르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교육부 민원콜센터(02-6222-6060)로 문의했더니,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라고! 유구무언(有口無言)! 과거! 문재인 대통령이 2019학년도 제2학기 개강 전날인 9월 1일 ‘대학입시 제도 전반에 관한 재검토를 지시’, 그러자 당장 교육부는 9월 2일 차관 주재 회의를 열어 대입 제도 개편 작업 논의에 들어갔었습니다. 유은혜 장관이 문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에 동행중이라 차관이 회의를 소집한 것입니다. 2019년 4월 26일, 한국조직학회와 한국행정개혁학회가 학술세미나(주제:위기의 한국 대학, 그 해법은)를 개최했습니다. 언론은 [과잉 교육규제 지적 쏟아져…“온라인 강의 시간까지 간섭”]라고! 엄명(嚴命)! 시험은 반드시 강의실에서 볼 것!!!! 필자는 2020년 3월 2일, 제1학기 ‘온라인 강의’를 시작! 강의 과목은 모든 대학의 정규과목(3시가/3학점)으로, [동북아 역사와 문화/ 동북아 정세(情勢)와 문화/ 무대화술로 푸는 취업성공전략/ 이미지메이킹과 자기관리/ 북한의 문화예술/ 클릭, 즐겨찾기·북한문화예술] 입니다. 2020학년도 제1학기 수강대학은 필자의 경남대를 비롯하여 경기대&총신대&서울여대(서울), 한국해양대&부경대&신라대(부산), 계명대(대구), 한남대(대전), 조선대(광주), 울산대(울산), 차의과대&성결대&안양대(경기도), 한림성심대(강원), 유원대(충북), 전주대(전북), 동신대(전남), 인제대&창원대(경남) 등등(等等)입니다. 수강 학생은 경남대학교의 경우 개학 날짜가 3월 16일(월)로 연기되어 아직 최종 학생수가 미지수이고, 3월 2일 개학한 서울디지털대학교(SDU)도 아직 최종 집계가 되지 않았습니다. 3월 2일 개학한 한국대학가상교육연합(KCU)은 동북아 정세(情勢)와 문화(516명), 무대화술로 푸는 취업성공전략(851명), 이미지메이킹과 자기관리(463명), 클릭, 즐겨찾기·북한문화예술(324명), 총 2,154명입니다. 이번 학기 전체 총 3 천명 가량 넘을 것 같습니다. 2019학년도 경남대학교 수강학생은 교육부 덕분(?)에 많이 줄었습니다. 가령 학생 500명 이 정원인 강의는 최고 250명이 되었습니다. 교육부의 대단한 정책의 결과입니다. 대부분의 대학에는 500명이 수강할 수 있는 대형 강의실이 거의 없습니다. 부정행위 방지 때문에 500명 정원이면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의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바람에 학생 수가 많이 줄었습니다. 장관 님! 고맙습니다! 필자는 온라인 강의를 20 여년 해왔습니다. 교육부에 인터넷 교육을 해본 공무원은 얼마나 되나요? 유구무언(有口無言)입니다. 필자는 평생 ‘교육(敎育)’과 함께 해왔습니다. 장관 님은 대학에서 사이버강의를 해본 적이 있나요? ★국가의 운명(運命)은 청년의 교육(敎育)에 달려 있다.-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BC 384)// ★대학(大學)은 빛과, 자유(自由)와 학문(學問)만을 하는 장소이어야 한다.-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1804~1881)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2020 북한 달력 ③3월과 3월의 3.1인민봉기(蜂起)
[청로 이용웅 칼럼]2020 북한 달력 ③3월과 3월의 3.1인민봉기(蜂起)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원래 캘린더(calendar)란 말은 라틴어로 ‘금전출납부’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옛날 로마에서는 금전의 대차 관계를 매달 삭일(朔日)에 청산하는 풍속이 있어서 결국 금전출납부가 달력을 의미하는 말로 전용(轉用)케 되었던 것입니다. H.D.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숲속의 생활>에서 “캐나다 태생의 채벌군인 그가 가진 책이라곤 한 권의 달력과 한 권의 수학책 뿐 이었다. 달력은 그에게 일종의 백과사전이었다. 그는 달력 속에 인류 지식의 요약이 들어있다고 보았다.”라고! 북한도 매년 달력을 발행합니다. 북한 조선출판물수출입사에서 발행한 북한의 2020년 달력 표지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The great Comrades Kim Il Sung and Kim Jong IL Will Always Be with Us.)”/ “주체 JUCHE 109 (2020)”/ “조선출판물수출입사 Korea Publications Export & Import Corporation”라는 글이 있습니다. 2020년 새 달력 ‘3월’에는 사진 “백두산의 향도봉”이 있습니다. / 달력 3월의 1일부터 31일 사이에는 [2일(식수절], [8일(국제부녀절)]이 인쇄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경칩 3.5/ 춘분 3.20]이 있습니다. 그 외에는 어떤 어휘도 없습니다./ [2일(식수절]“식수절(植樹節) [명] 나무를 심는 것으로 뜻 깊게 기념하는 명절.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와 함께 모란봉에 오르시여 산림조성의 새 력사를 펼쳐주신 주체35(1946년) 3월 2일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이날을 식수절로 정하고 해마다 온 나라의 근로자들이 나무를 심고 있다.”(<조선말대사전(2)>) / 북한의 식수절은 식목 장려를 위해 지정한 공휴일! 현재 3월 2일로 지정되어 있음. 1946년 4월 6일 김일성이 문수봉에서 나무를 심은 이후, 1971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4월 6일이 식수절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1999년, 1946년 3월 2일 김일성이 김정숙, 김정일과 함께 모란봉에 올라 산에 나무를 대대적으로 심도록 교시를 내린 것을 토대로 식수절이 3월 2일로 변경되었습니다. ‘김일성’도 좋지만. 3월 초에는 북한 땅이 동토(凍土)인데...백성들 고생시키지 말고, 대한민국의 ‘4월 5일 식목일(植木日)’을 ‘식수절’로 하면? [8일(국제부녀절)]“평화와 민주주의, 녀성의 사회적 권리, 반제자주를 위한 투쟁에서 전세계 근로녀성들의 단결을 강화하며 그 위력을 시위하는 국제적 명절. 1910년 단마르크의 수도 쾨뻰하븐에서 열린 제2차 국제사회주의자녀성대회에서 3월 8일을 명절로 기념할 것을 결정하였는데 오늘까지 그에 따라 이날을 녀성들의 국제적 명절로 하고있다. 1909년 3월 8일에 미국의 시카고 녀성로동자들이 평등과 자유를 요구하여 파업을 일으킨데로부터 유래되였다.=3.8국제부녀절. 3.8부녀절. 3.8절.”(<조선말대사전(1)>) → 우리의 “세계여성의 날”!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날’은 1920년 일제 강점기에 나혜석, 김활란 등 자유주의 진영과 허정숙, 정칠성 등 사회주의 진영이 각각 여성의 날 기념행사를 하면서 정착되었습니다. 이후 2018년 2월 20일, 여성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는 내용이 수록된 <양성평등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면서 한국에서는 3월 8일을 여성의 날이자 법정기념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존중해야 할 ‘기념일’입니다. 달력 3월에는 “봉기(蜂起)”라는 낱말이 없습니다. 북한 <조선말대사전(2)>은 ‘봉기’를 “①벌떼같이 세차게 일어나는 것. ②낡은 사회에서,《외래침략자나 반동적인 통치계급을 반대하여 인민대중이 들고일어나는 대중적 투쟁.》을 비겨 이르는 말. ∥ 무장~. 4.19인민~. 광주인민~. 봉기하다[동](자). 봉기되다[동](자).” 라고 했습니다.//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은 ‘3.1운동’을 “<3.1인민봉기>를 거족적인 사회운동으로 이르는 말. /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반일애국정신을 온 누리에 자랑스럽게 시위한 거족적인 전민반일항쟁이였습니다. (장편소설 <력사의 새벽길>하)”로 풀이했고, ‘3.1인민봉기’는 “주체8(1919)년 3월 1일에 폭발한 전민족적반일봉기. 일제의 10년간의 야만적인 <무단통치>하에서 모진 수모와 학대를 받으며 사아온 조선민족의 쌓이고쌓인 울분과 원한의 폭발이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아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 ‘3.1절’ 노래입니다. 오늘이 3.1절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선 남한의 ‘3.1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3.1 인민봉기’의 날이라고 합니다. 북한에선 3.1 운동을 남한과는 상반되는 계급혁명의 성격을 띤 인민봉기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3.1 운동을 ‘기념일’로 보지도 않으며, 3.1 운동 자체도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3.1 인민봉기’에 대해 김일성 주석이 “처음으로 반제민족해방투쟁에 참가하신 뜻깊은 사변”이라고 주장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은 “3.1인민봉기를 통하여 찾은 철의 진리”라는 제목의 글에서 “3.1인민봉기를 통하여 조선인민은 반제민족해방투쟁에서 승리를 이룩하자면 반드시 위대한 수령을 모시고 혁명적당의 령도 밑에 옳바른 전략전술에 기초한 조직적인 투쟁을 벌려나가야 한다는 철의 진리를 깨닫게 되였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1919년 3월 1일 “전 민족적인 대중봉기”가 일어나자 당시 어리던 김 주석이 시위 대열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고 선전했습니다. 2019년은 한국인이 자주독립을 선언한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회가 생겨 ‘좌우지간 뭔가’를 했습니다. 북한도 ‘3.1인민봉기 90돐기념 평양시보고회‘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봉기”가 핵심입니다. [3월의 3.1인민봉기(蜂起)]를 ‘3.1운동’으로 바꾸면? 2020년은 한반도의 ‘3.1인민봉기 주요 구역’에 대해 공동연구를 하는 해가 되길! 북한 달력 3월에도 ‘3.1운동’이 인쇄되길 빕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北韓藝術 巡禮-②황해북도 봉산탈놀이와 평양 봉산탈춤
[청로 이용웅 칼럼]北韓藝術 巡禮-②황해북도 봉산탈놀이와 평양 봉산탈춤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봉산탈놀이]지난날 황해북도 봉산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탈놀이. 무용, 노래, 재담 등으로 이루어졌다. 옛날부터 해서(황해도 일대)지방의 장터들에서 1년에 한번씩 탈춤놀이가 벌어졌는데 그중에서도 봉산은 유리한 자연지리적 조건으로 탈놀이가 더욱 성행! 그리하여 봉산탈놀이는 19세기말부터는 해서탈놀이의 대표적 놀이로 발전하였다. 놀이는 주로 농한기와 명절날에 많이 하였다. 이 놀이는 여러가지 형태로 진행되였는데 그 가운데서 12개 장면으로 구성된 것이 많이 알려지고 있다. 사용되는 가면은 상좌, 목중, 사당, 로장, 사자, 량반, 소무, 신장수, 취발이, 말뚝이, 미얄, 덜머리, 원숭이 등”(<조선대백과사전<11>)→ →“여기서 쓰이는 악기는 피리, 대금, 해금, 장고, 북 등이고 음악은 굿거리, 타령곡, 념불곡 등을 연주한다. 봉산탈놀이는 극적 줄거리의 전개가 없는 탈춤으로 구성된 부분과 가면극 부분으로 나뉘여진다. 탈춤에는 상좌춤, 팔목중춤, 사당춤, 로장춤, 사자춤, 량반춤, 무동춤 등이 속하고 가면극 부분에는 로승, 량반, 미얄의 생활 등 독립적인 의의를 가지는 장면들이 있다. 봉산탈놀이는《길놀이》로부터 시작되는데 악사들을 선두로 사자, 말뚝이, 취발이, 소무, 량반, 상좌, 로장 등이 줄을 지어 읍내를 일주한다. 해가 지면 무동춤, 줄타기, 땅재주 등과 풍물놀이로 흥을 돋구다가 탈춤놀이를 시작한다.”(<조선대백과사전<11>) / →“처음 4장까지는 봉건시기 중들의 타락한 생활을 보여주며 5장부터 10장까지는 중들의 부패상과 추악성에 대한 폭로, 량반관료의 타락상에 대한 풍자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마감장면에서는 봉건시기의 썩어빠진 사회현실에서 불행과 고통을 겪는 하층인민들의 생활처지를 보여주고 있다. 봉산탈놀이는 대사와 춤 그리고 노래가 결합된 놀이로서 매 장면마다에서의 춤종목들과 재담들은 다채롭고 개성적이다. 특히 타령장단에 맞추어 한삼을 뿌리치거나 휘저으면서 추는 춤동작은 약동적이며 활달하다. 봉산탈놀이는 인민들의 행복에 대한 지향과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항거의 정신을 반영한 진보적인 내용과 인민적인 춤동작이 들어있음으로 하여 민족무용유산의 하나로 되고 있다.”(<조선대백과사전<11>) / 위의 글은 북한이 ‘봉산탈놀이’를 소개하고 정의(定義)를 내린 자료인데, 황해북도 봉산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탈놀이입니다. [北韓藝術 巡禮]의 첫 번째로 선정한 것은 이 탈춤이 ‘북한예술’인데, ‘남한예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1954년 10월 30일 ‘황해도’를 동서로 양분(황해남·북도)해, 내륙인 동부지역이 황해북도가 되었습니다. 도청소재지는 사리원시(沙里院市)입니다. 그 바람에 ‘황해도 봉산’도 ‘황해북도 봉산’이 되었습니다. 봉산탈춤의 내용은 다른 탈춤과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채록본을 대상으로 보면, 1936년 8월 백중날 사리원읍 경암산 아래에서 공연된 봉산탈춤을 오청, 임석재, 송석하 등이 연희자 이동벽, 김경석, 나문석, 이윤화, 임덕준, 한상건 등의 구술에 의해 채록한 연회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수정 보완을 통해 각자의 채록본을 발표했습니다. 또한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이동벽 구슬본, 김수정 구슬본(김일출<조선민속탈놀이>), 권택무 수록본(<조선의 민간극>)이 채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 봉산탈춤’은 다음 <청로 이용웅 칼럼:北韓藝術 巡禮-③봉산탈놀이와 국가무형문화재 봉산탈춤>에서 연구, 분석합니다. 북한의 ‘봉산탈놀이’·‘봉산탈춤’에 대한 글이나 자료는 거의 없습니다. 이 칼럼의 첫 자료 “봉산탈놀이”, “슬기로운 우리 민족의 자랑 봉산탈춤”<로동신문>(2009.2.22.), <조선의 민속전통(6)>(민속 음악과 무용-봉산탈춤/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1995), 그리고 <우리 나라 민속무용>(이수정 집필/ 예술교육출판사-1991) 등 극소수(極少數)입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봉산탈놀이’과 ‘봉산탈춤’을 비교 설명하는 자료가 없다는 것입니다. 북한 언론 매체의 글도 아주 드뭅니다. 1998년 7월 2일 북한 <조선중앙방송>은 평안남도 남포시 황해남도 황해북도 등 4개 도(시)립예술단의 창립 50주년 기념 보고회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가 보낸 축하문에서 이들 예술단체가 "당의 주체적 문예방침을 구현한 음악무용 화술작품들을 창작, 공연해서 주체예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방송’은 “민속가무극 봉산탈춤” 등을 "혁명교양 계급교양 공산주의교양에 적극 이바지한 작품"들이라고 찬양했습니다. 이 뉴스를 보면, 황해북도예술단이 ‘봉산탈춤’의 명맥(命脈)을 잇고 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로동신문>(2009.2.22.)의 “슬기로운 우리 민족의 자랑 봉산탈춤”(발췌)-“봉산탈춤은 황해북도 봉산지방에서 전해져오는 민속무용유산의 하나이다. 고려말엽부터 보급되여오는 봉산탈춤은 황해도일대에서 가장 오랜 력사를 가지고 있고 그 주제사상과 예술적 측면에 있어서도 진보적일 뿐아니라 우수하고 인민적인 것으로 하여 우리 나라의 탈춤을 대표하는 것으로 되어왔다. 지난날 봉산탈춤은 년중 한번 추어졌는데 처음에는 음력 4월초에 춤판이 벌어지다가 점차 5월초에 많이 진행되였다...1910년 봉산읍이 사리원으로 옮겨간 후에는 《경암루》앞마당에서 진행되였다. 지난 시기에 진행된 봉산탈춤은 극성이 짙은 춤과 노래, 재담 등으로 구성되여있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봉산탈춤대본에는 7과장, 11과장, 12과장으로 구성된것이 있다.” / <우리 나라 민속무용>(이수정/발췌)-“우리 나라 탈춤의 3대기둥”(59쪽)은 ‘황해도의 탈춤, 경기도 산대놀이춤, 남해안지방의 오광대놀이’이며 황해도 탈춤은 봉산탈춤, 강령탈춤, 해주탈춤, 사리원탈춤, 재령탈춤, 기린탈춤, 서흥탈춤 등, 그리고 봉산탈춤은 ‘황해도 봉산지방’을 중심으로 연희되었던 민속무용으로, “황해도의 장수산, 정방산, 경암산과 기름진 재령벌이 펼쳐진 넓은 땅에 오랜 뿌리를 내리고 추어온 것으로서 19세기말 20세기초 이래로는 황해도의 탈춤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 <로동신문>의 조선로동당(기관지), <조선의 민속전통(6)>의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우리 나라 민속무용>의 예술교육출판사 등은 모두 평양(平壤)에 있습니다. <로동신문>에는 “봉산탈춤”, <우리 나라 민속무용>에는 “봉산탈춤”, “봉산탈춤놀이”, “봉산탈놀이”가 있고, <조선의 민속전통(6)>에는 “봉산탈춤”, “황해도탈놀이”가 있습니다. 제목에서 “평양 봉산탈춤‘이라고 한 것은 봉산에서는 드문 연희, 모든 자료 등은 평양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서울 봉산탈춤’도 연구되어야 합니다. 1967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7과장)! 1958년에 처음 연희된 ‘서울 봉산탈춤’은 <청로 이용웅 칼럼:北韓藝術 巡禮-③봉산탈놀이와 국가무형문화재 봉산탈춤>에서 연구, 분석합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