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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로 이용웅 칼럼]갤러리 구하(丘下) 신정옥 초대展과 박현숙 고문
[청로 이용웅 칼럼]갤러리 구하(丘下) 신정옥 초대展과 박현숙 고문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작가노트]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고유의 리듬을 갖는다. 이렇듯 하나의 고정된 시각이 아닌 움직이는 시선으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고, 매순간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존재를 흔들리는 꽃에 비유해 표현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음악적 리듬이 가져오는 마음의 움직임을 회화적 경험으로서 공감각적으로 표현하였다. 마치 춤을 추듯 꽃의 내부로 향하는 울림과 외부로 뻗어나가는 울림을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해, 선과 색으로서 자유로운 움직임을 표현하였다. 우리의 삶도 알고 보면 리듬이고 흐름은 막힘이 없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내부의 리듬과 에너지를 마음의 눈으로 꺼내어 움직임을 만들고 그 움직임은 외부로 확장해 나간다. 결국 존재의 떨림과 보이지 않는 에너지와 생명력을 선과 색으로써 자유로움과 소통에 관해 얘기하고자 한다.[신정옥]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구하(丘下)갤러리(대표 박현숙)에서 신정옥 작가 초대전(Rhythm & Flow)이 11월 11일부터 12월 2일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前 세종대학교 겸임교수이며 현재 한국미협, 뉴런, AAA회원인 신정옥 작가는 세종대학교 대학원 회화학과를 졸업(석사)한 중견 작가입니다. 신정옥의 작품세계! 개인전 17회 (2019 루벤갤러리 초대전, 2017 Able Fine Art NY Gallery 초대전, 2016 갤러리 시선 초대전, 2015 현대백화점 H갤러리 초대전, 2014 정부서울청사 기획초대전, 2014 GS Tower The Street Gallery 초대전, 2012 가나아트 스페이스, 2011 The K Gallery 기획초대전, 2011 터치아트 갤러리 초대전, 2011 노아이 갤러리 초대전, 2008 인사아트센터 등) 신정옥을 초대한 구하 갤러리 박현숙 대표는 작가의 ‘리듬과 흐름’을 통한 작가 정신을 높이 평가해서 초대했습니다. 박 대표는 지난 8년간 많은 청년작가들에게 전시 기회를 주었으며, 국내외 저명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데 열(熱)과 성(誠)을 다해왔습니다. 서울의 최중심인 강남구에서 미술관(논현로149길 65 만나빌딩 101호)을 8년 동안 운영해왔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선데이뉴스신문>은 2007년 4월 언론이 극심한 이념, 지역, 정파, 세대 갈등의 덫에 갇혀 공정한 균형자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건전한 언론 발전의 한 축을 담담하고자 창간하였습니다. 저희 언론은 어떤 정파와 이념에도 휘둘리지 않고 사회의 균형 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제 <선데이뉴스신문>은 문화예술의 모든 분야도 심층 연구·보도할 것입니다. 아울러 유능한 인사를 찾는데도 주력할 것입니다. 이 노력의 일환으로 구하 갤러리 박현숙 대표를 본사 고문으로 위촉(2019.11.11.)했습니다. 축하합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문학예술 ⑦용어풀이로 살펴본 북한의 음악예술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문학예술 ⑦용어풀이로 살펴본 북한의 음악예술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남한의 <우리말 큰사전>(한글학회)을 보면, “음악: 소리의 높이, 길이, 세기를 조화 시켜서 어떤 느낌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의 한 형태 [音樂]”(3291쪽)라고 되어 있습니다. <국어대사전>(이희승 편저)은 ‘음악’을 “소리에 의한 예술. 박자․가락․음빛깔․화성 등을 일정한 방법으로 취사 선택하여 갖가지 형식으로 조화․결합시켜 사상과 감정을 나타내는 것. 예술 가운데 가장 그 기원이 오래 되고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음. 성악(聲樂)과 기악(器樂)의 두 가지로 크게 구분하는데, 보통 작곡자(作曲者)와 연주자(演奏者)가 별도로 분담하게 됨. 뮤직.”(2977쪽)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북한의 <조선문화어사전>(1973년)을 보면, “음악 [명] 음향의 예술적형상을 통하여 현실생활, 체험, 사상감정을 반영하는 예술의 한 형태. 성악과 기악으로 가른다. 《우리의 음악은 반드시 조선적인것이 바탕으로 되여야 하며 우리 인민의 감정에 맞아야 합니다. 조선사람의 감정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서양음악은 우리 인민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김일성저작선집》, 4권, 152페지). 《우리의 음악은 민족적이면서 언제나 혁명적인것으로 되여야 합니다.》(《김일성저작선집》, 4권, 157페지)”(1016쪽)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선말큰사전(2)>(1992년)은 ‘음악’을 “음을 기본형상수단으로 하여 현실을 반영하는 예술의 한 형태. 음들의 부단한 련속과 음률, 음조를 통하여 사상정서적 내용을 표현하며 사람들의 청각을 통하여 감수되는 예술이다. 음악은 인간의 내면세계와 체험을 깊이있게 펼쳐보여 주며 인간생활에 뜨거운 열정과 풍부한 정서와 약동하는 생기를 안겨주는 고상한 예술이다. 크게 성악과 기악으로 나눈다.”(1658쪽)라고 풀이했습니다. <백과전서(6)>(1984년)는 “음악은 사회적의식의 특수한 형태의 하나로서 현실을 인식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되고있을뿐아니라 사회생활과 계급투쟁에서 힘있는 무기로 된다. 계급사회에서의 음악은 당대 사회제도와 사회생활 및 계급적제관계를 반영하며 계급적성격을 띤다. 계급사회하에서 인민대중의 리해관계를 대변하고 그들의 지향과 념원을 진실하게 반영한 음악은 사람들에게 생활의 진리를 밝혀주고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지향을 북돋아주며 인류의 음악문화발전에 이바지한다. 그러나 시대의 선진적인 사상과 인민음악의 기초에서 리탈된 착취계급들의 퇴폐적이며 기형적인 음악들은 인민들을 염세와 타락, 악에 대한 무저항과 순종에로 이끌어가면서 반동적이며 반인민적인 작용을 한다. 오늘 자본주의나라들과 남조선에서 널리 퍼지고있는 음란하고 기괴망칙한 각종 퇴폐적이며 형식주의적인 음악들이 바로 그것을 실증하여준다.”(619~620쪽)고 했습니다. 북한은 ‘음악’을 분야로 논할 때 보통 ‘음악예술’이라고 합니다. ‘음악예술’의 뜻풀이는 “음을 기본형상수단으로 하여 현실을 반영하는 예술.” (<조선대백과사전(2)>, 1658쪽)입니다. ‘음악예술’앞에 수식어가 붙는 용어인 ‘주체적음악예술’․‘주체음악예술’(<주체적음악예술의 찬란한 개화발전>,문학예술종합출판사,1994.총323쪽)의 뜻풀이는 ‘주체적문학예술’과 ‘음악’의 뜻풀이를 합치면 됩니다. 그리고 ‘음악’과 결합된 복합명사는 ‘민족음악’과 ‘항일혁명음악’, ‘주체음악’ 등이 있습니다. <조선대백과사전(1)>은 ‘민족음악’을 “매개 민족에게 고유한 음악. 인민자신들이 창작한 민요를 비롯한 민족음악과 직업적인 창작가들에 의하여 작곡된 음악들이 있다. 계급사회의 민족음악유산에는 피착취계급의 진보적인것과 착취계급의 반동적인 것이 있다.”(1232쪽)고 했습니다. <백과전서(5)>는 ‘항일혁명음악’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현명한 령도 밑에 영광스러운 항일혁명투쟁의 준엄한 불길 속에서 창조 발전된 혁명적음악예술.”(640쪽)이라고 했습니다. 김정일의 <음악예술론>(1992.)의 제1장이 “주체음악”(3쪽)입니다. ‘민속음악’은 <조선말 사전>(과학원출판사,1962.), <조선문화어사전>, <조선말대사전>, <백과전서>, <조선대백과사전>에 없는 단어입니다. ‘민속음악’이란 용어는 민속학에서 주로 쓰고 있습니다. <조선의 민속전통 6>의 ‘민속음악’이 그 예입니다. 남한에서는 ‘민속음악’과 ‘민족음악’을 동일시하는 경우도 있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11>은 “민속음악: 예술음악에 대하여 사회의 기층문화에 속하는 음악의 총칭.→민족음악”, “민족음악: 세계 여러 민족의 각각 다른 특징이 명확히 표현되어 있는 음악.”이라고 했습니다. 남한의 <우리말 큰사전>에는 ‘민속음악’도 ‘민족음악’도 없습니다. <새 우리말 큰사전>(편저자: 신기철 외)엔 “민족음악: 각 민족의 민족적 특징을 지닌 음악. 특히 근대 유럽의 예술 음악에 대한 그것 이외의 여러 민족의 음악을 뜻함”(1290쪽) 뿐입니다. ‘민족음악’ 이 없는 <국어대사전>은 “민속음악: 옛날에 민간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음악의 총칭. 서민의 소박한 정서를 솔직히 표현하고 있음. 속악(俗樂)”(1382쪽)이라고 했고, 마찬가지로 ‘민족음악’이 없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8>은 “민속음악: 민중의 기층사회에서 형성되고 애호된 음악. 전통음악에서, 과거 상층사회에서 애호되었던 정악(正樂)에 대한 대칭적인 개념”(749쪽)이라고 기술했습니다. 북한의 <문학예술의 종류와 형태>를 보면, ‘4.가극예술의 형태적 특성과 그 발전’(229~258쪽), ‘5. 음악예술의 형태적특성과 그 발전’으로 명확하게 구분했습니다. 하지만 ‘음악예술의 형태구분’(287쪽)에서는 ‘음악예술’을 ‘성악․기악․극음악’으로 구분하고 ‘극음악’을 ‘가극․음악무용이야기․음악무용서사시․음악무용서사시극’으로 세분했습니다. 그러나 <조선백과사전(9)>(1999년)는 “문학예술: 문학, 영화, 연극, 음악, 가극, 미술, 무용 등 인간과 그 생활을 형상적으로 반영하는 사회적 의식의 제 형태들.”(466쪽)이라고 했습니다. 음악과 가극을 같은 위치에 올려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2001년 <조선대백과사전(18)>(488쪽)은 북한음악을 총정리하면서 음악과 가극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지구촌 음악계에서는 실력 있는 북한 음악가들이 많다고들 합니다. 특히 작곡 분야는 수준 높은 음악인들이 깨나 된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의 앞에는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이 있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1984년 12월 5일 창립된 평양의 윤이상음악연구소가 “세계적인 현대음악가 윤이상의 음악세계와 고전음악 및 현대음악을 연구하는 전문 연구기관”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 고향인 통영에서도 세계적인 작곡가 입니다. 북한음악! 남한의 책 <북한음악과 주체철학>은 “북한음악은 주체사상 실현하는 도구적 수단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북한음악은 여전히 “주체음악”! 그리고 김정은을 위한 음악, “그이 없인 못살아”와 같은 노래가 범람(?)하는 북한음악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2019년 북한 달력의 11월과 12월과 김정일
[청로 이용웅 칼럼] 2019년 북한 달력의 11월과 12월과 김정일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원래 캘린더(calendar)란 말은 라틴어로 ‘금전출납부’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옛날 로마에서는 금전의 대차 관계를 매달 삭일(朔日)에 청산하는 풍속이 있어서 결국 금전출납부가 달력을 의미하는 말로 전용(轉用)케 되었던 것입니다. H.D.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숲속의 생활>에서 “캐나다 태생의 채벌군인 그가 가진 책이라곤 한 권의 달력과 한 권의 수학책 뿐 이었다. 달력은 그에게 일종의 백과사전이었다. 그는 달력 속에 인류 지식의 요약이 들어있다고 보았다.”라고! 1년 365일을 순서대로 표시한 캘린더는 월 단위로 된 월력이 많지만 하루에 한 장씩 떼는 일력, 3개월 단위로 된 것, 1년을 한 장으로 표시한 것 등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탁상형과 벽에 매다는 것 등등...북한도 매년 달력을 발행합니다. 북한 외국문출판사에서 발행한 북한의 2019년 달력 표지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외국문출판사(foreign Languages Publishing House, DPRK)/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The great Comrades Kim Il Sung and Kim Jong IL Will Always Be with Us.)"/"새해를 축하합니다.(Happy New Year.)"/"주체(JUCHE) 108(2019)]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리고 표지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0돐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의 홍보 로고(logo)와 악단 지휘자, 장고 치는 여배우, 태권도하는 청년, 5월1일 경기장이 그려져 있습니다. / 위의 글은 필자의 <[청로 이용웅 칼럼] 2019년 북한 달력의 표지, 그리고 <1월과 2월>의 서두(序頭)와 동일합니다. 달력 11월에는 9, 10월과 마찬가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0돐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사진과 <빛나는 조국>의 홍보 로고(logo)가 있습니다. 그리고 “립동 11.8/ 소설 11.22”이라고 적혀있습니다. 11월 사진은 그 무대에 출연한 무용가들의 삼인무(3人舞) 장면입니다. 그리고 달력 11월에는 ‘김일성 3대’에 대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달력 12월에는 11월과 마찬가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0돐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사진과 <빛나는 조국>의 홍보 로고(logo)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설 12.7/ 동지 12.22”이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주체 100(2011) 12.17.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서거하시였다.(December 17, Juche 100(2011)): The great leader Comrade Kim Jung Il passed away.)/ 주체 100(2011) 12.30.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높이 모시였다.(December 30, Juche 100(2011)): The respected Supreme Leader Comrade Kim Jong Un was appointed Supreme Commander of the Korean People's Army./ 주체 6(1917) 12.24.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께서 탄생하시였다.(December 24, Juche 6(1917)): Comrade Kim Jung Suk, the anti-Japanese war heroine, was born.)/ 12.27./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절(December 27. Day of Socialist Constitution of the DPRK.)”가 있습니다. 12월 사진은 그 무대에 출연한 소녀들의 수영춤 등의 장면입니다. 북한의 달력 11, 12월에서 가장 중요한 날은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의 사망(2011.12.17.)입니다. "독재자 김정일“-[위키백과] 김정일(金正日,1941.2.16.~2011.12.17./1942.2.16,백두산 밀영 또는 러시아-만주 국경지대에서 출생)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입니다. 본관은 전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이었으며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의 첫째입니다,.그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61년 7월 22일 조선로동당에 입당..1970년대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주목되었으며 1980년 제6차 당 대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2011년 12월 17일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면서 김정일의 후계 자리는 그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에게 승계되었습니다. 출생지(소련 땅, 백두산밀영)와 출생년도(1941년 생, 42년 2월 16일 생)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김정일, 그에 대한 미화(美化)와 ‘선전선동’이 그의 생일인 2월 16일이 되면 계속되어 왔습니다.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은 “백두산 밀영에 버들꽃이 피어”났다며 “참관자들은 자연도 절세의 위인의 탄생을 못잊어 꽃을 피웠다고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고 있다”고 했고, “백두산밀영”이 그의 생가(生家)임을 강조했습니다. “아득한 밀림은 눈에 덮이여 / 하늘 땅 저 끝까지 눈부신 광야 / 아 하얀 눈 속에 / 봄빛을 안은 고향집이여 / 아 김정일동지 / 세기를 밝힌 고향집이여” - 북한 시인 오영재가 쓴 “흰눈 덮인 고향집” 입니다. 북한 땅에서 ‘고향집’에서 살아본 사람이 어디 김정일 뿐이겠습니까? 물론 북한의 <조선말대사전>도 “고향집”을 “(나서 자란) 고향의 집. <고향의 집>을 정답게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했습니다. 하지만 <흰눈 덮인 고향집>을 보면 <고향집>은 분명 김정일과 함께 하는 수식어입니다. 김정일에 대한 이야기 중 백미(白眉)는 그의 아버지 김일성의 “광명성찬가”입니다. 살아있었던 김일성은 1992년 2월 16일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축하하며 친히 송시 <광명성찬가>”를 지었습니다. -〈詩의 전문〉“白頭山頂 正日峯 (백두산정 정일봉)/ 小白水河 碧溪流 (소백수하 벽계류)/ 光明星誕 五十週 (광명성탄 오십주)/ 皆贊文武 忠孝備 (개찬문무 충효비)/ 万民稱頌 齊同心 (만민칭송 제동심)/ 歡呼聲高 震天地 (환호성고 진천지)// 백두산 마루에 정일봉 솟아있고/ 소백산 푸른 물은 굽이쳐흐르누나/ 광명성 탄생하여 어느덧 쉰돐인가/ 문무충효 겸비하니 모두다 우러르네/ 만민이 칭송하는 그 마음 한결같아/ 우렁찬 환호소리 하늘땅을 뒤흔든다” 김정일! 1990년대에 천재지변이 계속되자 김정일은 '비공개 연설'에서 “배고파 일하러 나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을 불러 일으켜 풀 먹는 집짐승과 버섯 같은 것이라도 기르게 하면 식량보탬을 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다큐멘터리 김정일>)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불난 끝은 있어도 물난 끝은 없다"고 했던가. 계속되는 물난리와 가뭄(북한에선 보통 가물이라고 함)에 '나랏님'인들 어찌 했겠습니까. 2011년 12월 19일 정오, <조선중앙방송>은 이틀 전인 12월 17일 김정일이 현지 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김정일! 그는 “태생적(胎生的) 독재자(獨裁者)” 김정일!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안중근 의거 110주년(2019,10.26.)과 안중근(安重根)
[청로 이용웅 칼럼] 안중근 의거 110주년(2019,10.26.)과 안중근(安重根)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2019년 10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 의사 의거 110주년 기념식이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사단법인 안중근의사숭모회(사) 주관으로 열린 기념식에는 국가보훈처 처장이 아닌 차장, 안 의사의 증손자 토니 안씨, 외손녀 황은주씨,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과 회원 등 4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기념식에는 잠수함 '안중근함'의 함장과 승조원도 참석해 안 의사의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 정신을 되새겼습니다. 기념식은 안 의사 약전 봉독, 기념사, '안중근 앤솔러지(anthology)' 책자 봉정, 안중근장학금 수여, 기념공연,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날 행사에서 '안중근체'도 공개됐습니다. '안중근체'는 안 의사가 자필로 남긴 '장부가'의 원본을 토대로 한글 필적을 추출해 제작한 서체로, 안중근의사기념관과 한국저작권위원회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서 무료로 배포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안중근 관련 행사로는 25일 무명가수(?)가 이름 없는(?) TV에서 “안중근의 노래”를 부른 것과 한 여배우가 110주년을 맞아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최재형 기념관'에 한글 안내서 1만부를 기증한 일, 등등(等等) 정도! 필자가 기억하는 행사는 안중근의사 순국 105주년 추모제입니다. 2015년 중국 다렌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105주년 추모제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행사에 참석한 사람은...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서울 남산’ 기념식에 보훈처장 정도가 코빼기도 내밀지 않는데 중국의 감옥까지 오겠습니까? 내년에는 보훈처장이 그 감옥으로 ‘납시면’ 어떨까요? 이 곳을 봐야 ‘안중근’을 압니다. 필자는 수차례 안중근의 삶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여기서 간추려 봅니다. 우선 북한은? [북한 <조선대백과사전26>]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안중근! “안중근(1879.9.21.-1910.3.36).. 1907년 겨울 고향을 떠나 로씨야 원동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반일의병 투쟁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그는 반일의병대의 참모총장으로서 부대와 함께 1909년 6월 은덕에 진격하여 일제침략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의병대는 그 후 회령에서의 일제침략군과의 격전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을 타승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그는 조선침략에 앞장 선 일본의 고위급 반동정치가들을 처단할 것을 결심하고 첫 번째로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개인 테로의 길로 나가게 되였다. 이 무렵 그는 울라지보스또크의 <대중공보사>에서 독립운동자 리강, 우덕순 등과 손을 잡았으며 그 후 류동하, 조도선과도 알게 되어 뜻을 같이하게 되였다. 그해 10월 이또가 로씨야 재무대신 꼬꼬브쪼브와 만주침략문제를 둘러싸고 회담하기 위하여 할빈으로 온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이 절호의 기회에 이또를 처단할 결심 밑에 면밀한 계획을 짰다. 조도선, 우덕순이 책임진 조가 채가구역에서 이또를 처단할 계획을 실패하자 혼자서 할빈을 담당한 안중근”(518쪽) 안중근 의사에 대한 남한의 기록의 하나를 봅니다. 안중근의사! 그는 1909년 우덕순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 역, 지야이지스고 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습니다.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붙잡혔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뤼순 감옥(뤼순형무소)에서 사형 집행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맞아 우리가 그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남산 기념식으로 끝낼 일이 아닙니다. 가령 2019년 8월에 국내에서 한국조폐공사, 풍산화동양행이 “안중근 하얼빈 의거 110주년 기념메달”를 제작했고, 중국 하얼빈에서 하얼빈 의거 110주년 기념 특별전이 2019년 9월 2일부터 11월까지 열리고 있고...중국 다렌 뤼순 감옥에서는 안중근 의사 순국 추모제를 개최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 보훈기관의 자세입니다. 엉뚱한 일(?)에는 열성적이고,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뤼순 감옥에 투옥되어 일제의 심문과 재판을 받는 중에도 의연한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던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했습니다. 기념식도 정성을 다해 치러야 하지만, 순국일을 추모하는 날에도 관계기관이 애정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중국 하얼빈역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도 물론 정부가 챙겨야 할 것입니다. 중국 정부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을 비밀리에 진행해온 끝에 2014년 1월 19일 첫 공개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식에는 흑룡강성 부성장과 하얼빈시 시장 등 중국 인사들이 참석했습니다. 중국 <신화통신>은 사설을 통해 '안중근 기념관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후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소식을 접한 누리꾼들은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일본이 역사를 반성하는 날은 언제일까". "하얼빈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 중국 가면 꼭 가봐야겠다" 등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의 관련기관은 어떻게 했나요? 2019년 정초(正初)에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의군-푸른 영웅의 시대'가 하반기 KBS에서 방송된다고 했었습니다. 하얼빈시를 비롯 상해, 북경의 메이저급 미디어회사들과 한중 공동투자 및 중국 내 촬영에 참여...북미지역의 글로벌플랫폼회사까지 동참한다고 난리굿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도로 아미타불(阿彌陀彿)’이라! 그런데 아주 중요한 ‘유해 발굴’은? 안 의사가 "내가 죽은 뒤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라고 했는데...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고문도 두렵지 않다. 나의 이성과 심장은 너희들에 의해 병들었다. 죽으면서 나는 기쁘다. 나는 조국 해방의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2018년 7월 3일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100주년을 준비하기 위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그동안 무슨 일을 했나요? 뤼순의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간양록(2019.3.25.)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중근 의거 110주년(2019,10.26.)을 맞아 정부나 국민들이 모두 자성(自省)해야 하지 않을까요?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트럼프와 김정은, 금강산과 김정은, 북한 수령(首領)
[청로 이용웅 칼럼] 트럼프와 김정은, 금강산과 김정은, 북한 수령(首領)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Trump believes Obama was 'stupid' to avoid talks with North Korea's Kim, according to new book”(By Dave Boyer-The Washington Times-Tuesday, October 22, 2019) / 위는 미국의 일간신문 <워싱턴 타임스(The Washington Times)>의 2019년 10월 22일 字 기사 제목입니다. 신문은 역사가(Historian)인 더그 위드(Historian Doug Wead)가 11월 26일에 발간하는 신간(新刊) “트럼프 백악관의 내막(Inside Trump’s White House”의 요약문을 입수해 보도했습니다. 신문에 따르면 트럼프의 사위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는 위드에게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보낸 친서를 보여주면서 "이 편지를 보면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과 친해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절대 핵무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핵은 그의 유일한 안전 보장 수단"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김정은 위원장이 공식 발언에서 "비핵화가 김일성과 김정일의 유훈"이라고 말해온 것과는 배치되는 내용입니다. 다만 김정일의 핵 포기 불가 방침이 트럼프에 보낸 친서에 있는 내용인지, 아니면 쿠슈너가 따로 얻은 정보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쿠슈너는 또 ‘핵을 포기시키는 것’은 김정일, 즉 "아버지의 일"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새로운 아버지 같은 존재"이라고 말했습니다. 북한 비핵화를 위해선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으로 하여금 김정일의 유훈까지 포기시킬 수 있는 새 아버지 같은 존재가 돼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트럼프나 그의 사위나 허언(虛言)의 명수(名手)인지 아닌지는... 쿠슈너는 김정은이 트럼프를 단둘이 만났을 때 "인질이란 단어는 제발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는 내용도 공개했습니다. 두 사람의 독대 시점은 나와 있지 않지만, 지난해 2018년 6월 싱가포르 1차 미·북 정상회담일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북한은 1차 회담을 앞두고 미국인 인질 3명을 풀어줬고,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를 돌려보냈다는데, 트럼프는 대북 외교 성과로 "인질을 돌려받았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21일 각료회의에서 ‘오바마 전 대통령이 김정은과 11차례 전화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김정은이 내 전화는 받았다’고!!! 아무래도 청문회를 해야... 트럼프가 ‘아버지’(?) 운운(云云)하는데, 김정은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을까요?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 등은 2019년 10월 23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금강산 일대 관광시설을 현지지도하고 고성항과 해금강호텔, 문화회관, 금강산호텔 금강산 옥류관 등 남측에서 건설한 시설들을 돌아보았다고 보도했습니다. <로동신문>은 김정은 위원장이 현지지도를 하면서 “선임자들의 의존정책이 매우 잘못됐다”고 비판했다고 보도하고, 금강산 남측 시설의 철거와 금강산 일대 관광지구의 단계별 개발을 지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문에 따르면, 김정은은 금강산관광 사업에 대해 남측을 배제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우리 땅에 건설하는 건축물은 마땅히 민족성이 짙은 우리 식의 건축이어야 하며 우리의 정서와 미감에 맞게 창조돼야 한다”며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시설들을 남측의 관계부문과 합의해 싹 들어내도록 하고 금강산의 자연경관에 어울리는 현대적인 봉사시설들을 우리 식으로 새로 건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금강산이 마치 북과 남의 공유물처럼, 북남관계의 상징, 축도처럼 돼 있고 북남관계가 발전하지 않으면 금강산관광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고 잘못된 인식”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가막힌 ‘말말말’들입니다. 금강산이 어떻게 개발되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김정일이 후원 아래, 1998년 11월 18일 시작된 금강산관광은 남북 분단사에서 가장 희망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사업이었습니다. 이 사업은 1989년 1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방북하여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하면서 물꼬가 트였고, 마침내 11월 18일에 금강호가 첫 출항을 했습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면 천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김정일 정권’을 비판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백두산을 들락거리지 말아야지... <조선중앙TV>는 2019년 10월 16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올랐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날 <조선중앙TV>가 공개한 사진 중에는 김정은 위원장이 김여정(왼쪽)·조용원(오른쪽) 노동당 제1부부장과 함께 말을 타고 있습니다. <로동신문>은 그날 1·2면에 김 위원장이 백두산 입구에 자리한 양강도 삼지연 건설현장을 찾아 “미국을 위수로 하는 반공화국 적대세력들이 우리 인민 앞에 강요해온 고통은 이제 더는 고통이 아니라 그것이 그대로 우리 인민의 분노로 변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백두산은 김정은이 수장(首長)이라고 아직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성역입니다. 백두산을 포함하고 있는 삼지연군은 김일성 주석이 항일 무장투쟁을 했던 장소이자 김정일 위원장이 태어난 백두산 밀영이 있는 곳이라고 북한 정권이 선전하는 지역입니다. 아직도 백두산은 수령(首領)의 땅입니다. 아니 앞으로는 한민족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조선로동당’은 “1967년 5월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전원회의를 계기로 전당과 온 사회를 유일사상화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렸으며, 당원들과 근로자들의 머리 속에는 당과 수령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이 꽉 들어차게 되였으며 온 사회는 일심단결의 대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정은도 “수령형상창조‘를 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아직도 그는 "당의 유일사상, 주체사상을 줄기차게 관통"시켜야 하는 지도자일 뿐입니다. 앞으로 ’선임자‘ 운운하면 큰 코 다칠 것입니다. 금강산과 백두산은 김일성의, 김정일의, 김정은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독재 3대의 것이 아닙니다. 한민족 모두의 것입니다. “수령(首領) [명]《수령은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요구와 리해관계를 분석 종합하여 하나로 통일시키는 중심인 동시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창조적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중심입니다.》(《김정일선집》8권,4348페지) /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요구와 리해관계를 분석 종합하여 하나로 통일시키는 중심인 동시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창조적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중심으로 되는 분으로서 전당과 전체 인민의 끝없는 존경과 흠모를 받고 있는 가장 위대한 령도자”(북한 <조선말대사전(2)>,833쪽)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시월의 기도문과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기억(記憶)
[청로 이용웅 칼럼] 시월의 기도문과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기억(記憶)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시월에는 무신(無神)이게 하소서/ 천고마비(天高馬肥)보다 시고시인비(詩高詩人肥)이게 하소서/ 서정성으로 둔갑하는/ 누이의 가을 사랑 속에서도/ 번번이 결별의 비수는 빛나고/ 안경을 벗은 안맹의 여린 내 시선으로도/ 반도를 움켜쥐는 바람의 손길이며/ 한반도의 툭툭 불거진/ 슬픔의 힘살들이 환희 보입니다/ 하여 시월 속으로 떠나간 사람들의 길을 따라/ 이제는 당당하게 걸어가게 하소서/ 시월에는 유신(有神)이게 하소서/ 가을이 주는 넉넉한 풍요로움으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즐거이 일하고 놀이 합니다/ 하느님 당신은 늘 그대로 하늘에서 쉬시고/ 시월에는 무신(無神)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월의 공산 같은 달밤이 오면/ 아이들, 낙엽, 대통령, 바보, 눈물, 풀꽃 모두 모여/ 고운 시를 읽게 하소서/ 높은 더욱 높은 목소리로/ 당신의 고운 시를 읽게 하소서”(정일근/ 시월의 기도문) “시월의 기도문에서”을 쓴 정(鄭) 시인(詩人)은 이 기도문이 “대통령, 바보는 그 시절 제가 할 수 있었던 박정희에 대한, 사소한 ‘욕’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시월유신이 언젠가는 무너질 줄 알았습니다”라고 하고, “시월이 유신독재의 계절이 아니라, 시인의 계절이길 바랬습니다”라고! 1979년 10월 18일, 그는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학 중이면서 시위를 이끌었고, 시인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이후 (사)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이사, 부회장으로 활동했으며, 경남대학교에서 최초로 개최된 부마민주항쟁 35주년 기념식의 사회를 봤습니다. 그때 “국회의원 문재인”의 기념사를 썼습니다. 시인! “시인이란 먹구름 타고/ 비바람을 쫓으며/ 사수(射手)를 비웃는 황제라 할까/ 땅 위에 귀양 오면 뭇사람의 비웃음을 온몸에 받고/ 큰 날개에 걸리어 걸음도 못 걷는데”도 시인은 여전히 시(詩)를 쓰면서 모교에서 후학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필자는 이 제자가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필자는 오늘 그와 ‘톡’하면서 부마민주항쟁을 기억 속에서 찾아보았습니다. 1979년 10월 18일, 필자는 경남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필자의 집은 마산경찰서와 마주하고 있었는데, 갇힌 시민들의 절규(絶叫)를 들었습니다. 1979년 10월 18일, 박정희 유신 정권은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해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습니다. 그날 해질 무렵 1,000여 명의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마산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 일부시민들이 가담한 가운데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다음 날, 마산 지역에서 경남대학교와 마산대학 학생들이 시위를 하면서 민주공화당 당사·파출소·방송국 등을 타격했습니다. 20일에는 근로자·고등학생들이 시위에 합세했고, 마산에 위수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6일 뒤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10·26 사태)했습니다.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대한민국의 부산직할시(현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항쟁이 일어난 것을 말합니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날인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습니다 19일에는 더욱 치열해져 마산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날 저녁 8시경, 시위대는 경남대학과 마산산업전문대학, 그리고 일부 고교생까지 합세하여 약 8,000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부마민주항쟁에서 특징적인 것은 먼저 시위대의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은 공화당사와 경찰·파출소였다는 점, 다음으로 ‘부유층’에 대한 시위대의 공공연한 공격, 세 번째로 “부가가치세를 철폐하라”, “부가세를 없애라”, “잘 먹고 잘 살아라”라는 외침에서 드러나듯이 세무서에 대한 공격, 그리고 신문사·방송국에 대한 공격을 들 수 있습니다. 현 정부는 9월 17일 국무회의에서 항쟁 시작일인 10월 16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습니다.올해로 40주년이 된 부마민주항쟁을 기리는 국제학술대회가 10월 17일 발생지인 경남대학교에서 열렸습니다. '1979 부마민주항쟁을 기억하다'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는 국내외 다양한 민주화 운동 사례를 고찰하고 항쟁의 역사적 위상 등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이 학술대회는 경남대학교에 이어 항쟁이 시작된 부산에서도 18∼19일 진행되었습니다. 2019년 10월 16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후 처음 열리는 정부 주관 기념식에 문재인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과 2016년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민주항쟁의 위대한 역사가 있는 한 어떤 권력도 국민 위에 군림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국민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좋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끝으로 그는 “100년 전,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선조들이 꿈꿨던 진정한 민주공화국, 평범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적 성취가 국민의 생활로 완성되는 민주주의를 향해 국민과 함께 나아가겠습니다. 오늘 마침내 모두의 역사로 되살아나 우리 곁에 와있는 부마민주항쟁의 정신이 국민 모두에게 굳건한 힘과 용기가 되어 주리라 믿습니다.”라는 말로 기념사를 가름했습니다. 1979년의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기억(記憶)! 시인은 독재자에게 “사소한 욕(辱)을 하고 정권(政權)의 붕괴(崩壞)”을 예견했지만, 이 항쟁은 악몽(惡夢), 저주(詛呪), 절규(絶叫), 비극(悲劇)’, 그 자체였습니다. 당시 경찰서 유치장에서 들려오는 시민들의 비명(悲鳴)은 단말마(斷末魔)의 절정(切釘)었습니다. 필자에게 그 기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잘한 일이 별로 있다는 현 정부가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대통령 님! ”국민의 입 막기는 내(川) 막기보다 힘들다.“고 했고, ”민심(民心)이 곧 천심(天心)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J.Q.애덤즈(Adams)는 “4년 동안의 대통령 임기는 나의 평생에 가장 비참한 시절”이었다고 했으며, A.잭슨(Jackson)은 “솔직히 나의 대통령 시절은 고급 노예 생애라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대통령 님! 임기 동안이 “평생에 가장 비참한 시절”이 되지 않게 잘 하시기 바랍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축구와 김일성경기장, 2007~8년&2019년 축구예선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축구와 김일성경기장, 2007~8년&2019년 축구예선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 김일성경기장은 평양직할시 모란봉구역 개선동의 모란봉 아래 있는 야외 종합체육경기장으로 1926년 평양부청 주도로 건설되었습니다. 초기 기림리공설운동장, 평양공설운동장 등으로 불리었고, 광복 이전에는 야구장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1945년 김일성이 평양으로 처음 들어와 연설을 한 곳이기도 합니다. 1969년부터 관람석과 기본시설을 갖추고 모란봉경기장으로 불렸습니다. 당시 모란봉경기장의 수용능력은 5만 명이었으나, 1982년 김일성의 7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1년 10월 20일에 착공하여 1982년 4월 10일 규모를 대폭 확장하여 개축하면서 경기장 명칭도 김일성경기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현재 경기장 연건축면적은 146,000㎡이고 운동장 면적은 20,300㎡으로 총수용 인원은 10만 명입니다.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의 집단체조>에는 “김일성경기장은 풍치 수려한 평양의 모란봉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이전에는 모란봉경기장이라고 하였다. 조선식집단체조의 원형작품인《로동당시대》의 공연이 있은 곳도 이곳이였다. 이 경기장은 1960년, 1977년, 1982년 세 차례에 걸쳐 개건확장공사를 통하여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변모되였다. 조선에서는 주요 국가적 명절 때 마다 집단체조를 하는 것이 관례화되였는데 그 무대는 대체로 김일성경기장”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 등이 ‘릉라도 5월1일경기장’에서 열립니다. 지금의 김일성경기장은 2006년 10월 9일 개건, 준공되었습니다. 이날 최룡해는 준공사를 통해 "로동당의 체육강국 건설 구상에 따라 개건된 김일성경기장은 김정은 동지의 직접적인 발기와 정력적인 령도에 의해 로동당 시대의 기념비적 건축물로 훌륭히 세워진 인민의 체육전당"이라고 했습니다. 김정일 시대에 이미 ‘김정은 우상화’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 축구는 김정일에 의해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닙니다. 1989년 6월 2일 김정일은 “체육을 발전시킬데 대하여(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에서 “당에서는 우리 나라를 <체육의 왕국>으로 만들어 우리 선수들이 세계체육무대에서 패권을 쥐게 할 결심을 하고 체육을 발전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였습니다...오늘 우리 선수들이 새로 건설한 양각도축구경기장에서 첫 경기를 잘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훌륭한 경기장들을 건설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우리는 체육사업에 큰 힘을 넣어 나라의 체육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겠습니다. 체육에서는 축구가 기본입니다. 축구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체질에도 맞습니다.”라고 했습니다. 2017년 4월 7일, 윤덕여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여자축구대표팀은 오후 3시 30분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킥오프한 북한과의 2018 여자아시안컵 예선 B조 2차전에서 후반 31분 장슬기의 동점골로 북한과 극적인 1:1 무승부를 거뒀습니다. 여자대표팀은 5만 명의 관중이 가득찬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북한 팬들이 홈팀을 일방적으로 응원하는 상황에서 경기를 치렀습니다. 이날 김일성경기장에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애국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런데, 남북은 지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무려 두 번이나 같은 조에 편성되었습니다. 2007년 3차 예선과 2008년 최종예선에서 연달아 만난 것입니다. 하지만 북한은 평양 홈경기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당시 김일성경기장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울리게 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북한에선 두 번의 홈 경기 장소로 평안남도에서 가까운 중국 선양을 제시했으나 결국 중국의 상하이로 낙점됐습니다. 두 번의 남북대결 모두 북한의 홈 경기가 상하이 홍커우 경기장에서 치러졌습니다. 남북대결 국내 경기는 모두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졌습니다. 북한 축구협회는 2008년 서울 경기에 대해 성명을 발표했는데, “명백한 것은 리명박 패당이 벌리고 있는 반통일적이고 반민족적인 반공화국대결책동이 고상한 스포츠의 리념을 우롱하는 무법무도한 행위로까지 번져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민족도 그리고 스포츠의 리념도 모르고 온갖 못된 짓을 다하고 있는 리명박 패당의 처사를 반통일적이며 반민족적인 반공화국대결책동으로 엄중히 단죄하며 남조선당국이 이번 비상사건을 발생시킨데 대하여 전적인 책임을 지고 즉시 사죄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축구협회는 언제나 친선과 평화를 사명으로 하는 국제축구련맹과 스포츠의 이념에 충실할 것이며 이번 사건을 발생시킨 남조선당국과 불순세력들을 다시 한번 준렬히 단죄하며 그들의 차후행동을 주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얘기지만 후안무치(厚顔無恥)! 아니 인면수심(人面獸心)이었다는 기억! 2019년 10월 15일 오후 5시 30분! 199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통일축구’ 친선경기 이후 29년 만에 남북 축구 대결이 벌어젔습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남자축구 대표팀은 북한 평양의 김일성경기장에서 북한과 2022년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H조 3차전을 치뤘는데, 북한의 비협조로 중계·응원단·취재진이 없는 3무(無)로 상태로 ‘외로운 방북 원정’을 했습니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경기 소식은 대한축구협회가 출입 언론사와 자체 SNS를 통해 전했고, 아시아축구연맹, AFC 경기감독관을 통해 말레이시아의 AFC 본부를 거쳐 경기 내용을 전달받는 등 꽤 복잡한 방법으로 소식을 전했습니다. 국가대표팀 경기를 TV중계 없이 인터넷 문자중계로! 경기 결과는 대한한국, 29년만의 북한 원정서 득점 없이 무승부 기록!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한반도의 축구는 남북분단 이전에도 서울과 평양을 잇는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지난 1929년부터 1946년까지 열린 경평전(京平戰), 즉 경성·평양축구대항전이 있었습니다. 당시 경기가 있는 날이면 1만~2만 명에 이르는 관중이 축구장으로 몰려들고, 경성과 평양을 오가는 기차는 응원 인파로 만석을 이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열기가 지나친 나머지 승부에 불복하며 양측이 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1946년 이후 대회가 중단된 경평전의 총 전적은 10승7무6패로 평양이 우위! 2018년 남북 정상들이 처음으로 판문점 남측 평화의집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했는데...축구 한 경기도 평화롭게 열리지 않는 한반도는? 남북 위정자(爲政者)들은 지금 뭐하시나요?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문학예술 ⑥용어풀이로 살펴본 북한의 미술(美術)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문학예술 ⑥용어풀이로 살펴본 북한의 미술(美術)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1920년에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朝鮮語辭典>에는 ‘美術’이 존재하지 않는다. 1946년의 <조선어사전>(문세영)에는 “미술(美術): 미를 표현하는 예술”(597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북한에서 간행된 사전류에 수록된 ‘미술’ 에 대한 풀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1)<조선어 소사전>(과학원,1956): “미술(美術): 사회의식 형태의 하나. 현실을 미적(美的)감정을 통하여 조형적(造型的)으로 형상화하는 수단. 주로 회화, 조각, 건축 등이다.”(229쪽)/ ★2)<조선말사전>(과학원출판사,1973): “미술(美術): 현실을 미적 감정을 통하여 조형적으로 형상화하는 예술. 즉 조각, 그림, 건축, 공예 따위.”(1540쪽) ★3)<조선문화어사전>(사회과학출판사,1973): “미술: 선, 색갈, 형태 등을 통하여 현실을 보여주는 예술. 회화, 영화미술, 무대미술, 조각, 공예, 산업미술, 건축 등을 통털어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 미술의 민족적형식을 더욱 발전시키고 완성하기 위하여 힘쓸 뿐 아니라 우리 미술을 사회주의적 내용을 가진 철저하게 혁명적인 미술로 만들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여야 하겠습니다.》(김일성《사회과학의 임무에 대하여》, 394페지)”(368쪽)/ ★4)<조선말대사전(1)>(사회과학출판사,1992) :“미술: 선, 색갈, 모양과 같은 것을 통하여 현실을 그리는 예술의 한 종류. 그림, 조각, 공예, 건축, 산업미술 같은 것.”(1219쪽) 북한의 백과사전류에는 ‘미술’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백과전서(2)>(과학백과사전출판사,1983)는 “미술”: 선, 색채, 명암, 덩어리(립체적 용적) 등을 표현수단으로 하여 직접 눈으로 볼수 있는 예술적 형상을 창조하는 예술. 회화, 조각, 공예, 영화미술, 무대미술, 산업미술, 건축미술 등이 이에 포함된다. 미술은 다른 예술형식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형상적 형식으로 반영하며 인식 교양적 기능을 수행한다.”(866쪽)고 하고, ‘일반적 특성․갈래․조선미술의 유산․항일혁명미술․해방후 미술’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조선대백과사전(9)>(백과사전출판사,주체88(1999).)은 “미술: 조형적 형상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생활 수단과 환경을 아름답게 꾸리는 예술. 미술은 회화, 조각, 출판미술, 공예, 서예, 건축미술, 산업미술, 영화미술, 무대미술 등을 포괄하는 예술의 한 분야이다. 미술은 사회적의식의 한 형태로서의 예술의 일반적 특성을 가지면서도 다른 예술들과 구별되는 자기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638쪽)고 했습니다. 또한 <조선대백과사전(9)>은 김정일의 ‘지적’ “《미술의 본질적 특성은 공간 속에서 조형적형상을 창조한다는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미술을 직관예술이라고도 하며 조형예술, 공간예술이라고도 한다.》(《김정일선집》12권, 35페지)”(638쪽)를 인용하면서, “미술이 직관예술로 되는 것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형상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미술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현상의 겉모양을 그리거나 형태를 구성하는 방법으로 조형적 형상을 창조한다. 미술이 공간예술로 되는 것은 물질적 재료로 고착된 조형적 형상이 반드시 일정한 공간 속에서 창조되기 때문이다. 문학이나 음악 형상은 모양새도 없고 공간도 차지하지 않는다.”(638쪽)고 했습니다. ‘복합어(합친말)’는 ‘항일혁명미술’, ‘사회주의미술’, ‘주체미술’ 등이 있습니다. <백과전서(2)>는 ‘항일혁명미술’에 대해 김일성의 “령도 밑에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진행된 혁명미술활동에 의하여 우리 나라 미술 발전 력사에서는 주체미술의 새시기가 시작되였다. 조선화 《무기탈취》, 만화 《구렁이》, 포스터 《원쑤 일제놈을 처단하자!》, 《로농 대중은 단결하여 항일에 떨쳐나서라!》등을 비롯한 항일혁명미술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주체적인 혁 명로선과 전략 전술적 방침들을 해설 선전하고 항일유격대원들과 인민들을 항일혁명투쟁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는데 훌륭히 복무한 선전선동의 무기였다. 항일혁명미술은 우리 나라 미술 력사에서 처음으로 당성, 로동계급성, 인민성의 원칙을 철저히 구현한 혁명미술로, 민족적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 주체적이며 혁명적인 미술로 되였으며 사회주의민족미술발전을 위한 유일한 혁명전통으로 되였다.”(867쪽)라고 했습니다. ‘사회주의미술’은 “수령의 혁명업적을 칭송하며 수령의 절대적 권위와 위신을 옹호하는데서 다른 예술이 대신할수 없는 가장 위력한 수단의 하나로 된다.”(<주체미술건설>,저자․김교련, 문학예술종합출판사,1995)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체미술건설>은 ‘사회주의미술’을 설명하면서 김정일의 ‘지적’, “《수령을 형상하는 것은 사회주의미술의 내용에서 핵을 이루고있다.》”(79쪽), “《사회주의미술은 수령의 혁명사상으로 인민대중을 교양하는데서 다른 예술이 대신할 수 없는 특수한 역할을 수행한다.》”(81~82쪽)를 인용했습니다. <주체미술건설>의 저자 김교련은 ‘머리말’에서 ‘주체미술’은 “인민대중의 자주위업수행에 참답게 이바지하며 주체성, 당성, 로동계급성, 인민성의 원칙을 생명으로 하여 건설되는 혁명적인 미술이다. 주체미술은 또한 인민대중을 가장 힘있고 아름다운 존재로 내세우며 그들의 지향과 요구, 미감과 정서에 맞게 그리고 민족미술형식을 기본으로 하여 건설되는 가장 인민적인 미술이다. 또한 주체미술은 로동계급의 수령의 사상과 당의 령도밑에 인민대중의 무궁무진한 창조적 힘과 지혜에 의거하여 건설되고 발전하며 근로하는 인민들이 향유하는 인민대중의 미술이다. 뿐 만 아니라 주체미술은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으며 사상성과 예술성을 완벽하게 통일시킬 것을 요구하는 주체사실주의에 튼튼히 의거함으로써 가장 높은 사상예술적 경지를 개척하여 나가는 새형의 미술이다.”(3쪽)라고 했습니다. 북한 미술 작품들은 이미 대한민국에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가령 ‘2018 광주비엔날레’는 북한미술전(사회주의 사실주의의 패러독스)을 열어, 대형 집체화 등 22점을 전시했습니다. 출품작 중 평양 만수대창작사에서 제작한 대형 집체화들은 최초로 공개된 작품! 그리고 인터넷에서 ‘북한 미술’을 검색하면 쉽게 북한 작품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 당국이 외화벌이 위해 위작(僞作)을 대량 생산, 남한 내 유통되는 북한 작품들의 80% 정도가 모작(模作)이라고 합니다. 本 칼럼의 북한 미술 작품들은 남한 인터넷에 소개된 것이 없습니다. [참조] 북한미술에 관한 문헌과 자료들에는 ‘미술’속에 ‘건축예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술의 종류에서도 ‘미술→건축미술→건축 ․ 건축장식’(<문학예술의 종류와 형태>저자․안희열,문학예술종합출판사,1996)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001년에 북한의 백과사전출판사가 펴낸 <조선대백과사전(18)>을 보면 ‘건축’이 ‘미술’에서 독립되어 있습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나의 노래는 멀리멀리
[청로 이용웅 칼럼]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나의 노래는 멀리멀리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My Love, Don't Cross That River)는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진모영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대명문화공장과 CGV아트하우스의 공동배급으로 2014년 11월 27일 개봉되었습니다. 480만 명 관객 수를 기록하였고, 영화사상 독립예술영화 전 부문 흥행 1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개봉된 지 한 달 만인 2014년 12월 20일을 기준으로 개봉 24일 만에 관객 수 200만 명을 넘어 <워낭소리>를 제치고 다큐멘터리 영화 역사상 가장 빨리 관객 수 200만 명에 도달한 흥행 기록도 세웠습니다. 제6회 DMZ국제다큐영화제-관객상 수상, 제16회 올해의 영화상-올해의 독립영화상(2015) 수상을 비롯해, 제21회 로스앤젤레스영화제 다큐멘터리부문 대상 수상, 제37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다큐멘터리부문 관객상 수상, 이란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대상 수상 등, 그리고 수많은 해외 영화제로 부터 초청을 받았습니다. 또한 2018년 10월에는 ‘에미상 2018/ 다큐멘터리 공식경쟁’에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2019년 5월 22일 강원도 원주의 어느 음식점에서 95세 할머니의 생일잔치가 열렸습니다. 역대 독립영화 흥행사를 새로 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주인공 강계열 할머니! 강원도 횡성 산골 마을, 잉꼬부부로 소문난 당시 89세의 소녀 감성 강계열 할머니와 98세 로맨티시스트 조병만 할아버지의 사연을 담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많은 관객을 울렸습니다. 76년 세월을 함께한 할아버지는 떠났지만, 노부부의 사랑은 현재진행형! 할머니는 추억을 떠올리며 아직도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행복했던 이야기들을 꺼내놓으며 눈물을 흘립니다.-“우리는 저고리도, 바지도 똑같이 색 맞춰 입고 다녔어. 할아버지가 ‘우리 할머니 없으면 못살아’ 하면 ‘나도 그래요’ ‘우리 이래 살다가 똑같이 갑시다’ 손 붙잡고 그랬어. 혼자 가면 어떡해.”- 이날 잔치에는 딸들과 사위, 손주들, 그리고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연출한 진모영 감독 등이 참석, 할머니의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진모영 감독은 누구? 2014년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드라마 <미생>의 원작 만화, 영화 <명량> 등 신드롬을 일으킨 작품을 연출한 진모영, 해남 출신으로 문성고와 전남대 법대를 졸업한 뒤 독립영화 PD! 그는 현재 ‘영화사 님아(주)’ 대표이기도 합니다. “허구가 아닌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현실의 허구적인 해석 대신 현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영화.”라고 풀이되는 ‘다큐멘터리(documentary)영화는 모든 영화의 원조(元祖)입니다. 1896년 뤼미에르 형제Les frères Lumière가 만든 단편영화라고들 하지만, 일종의 다큐멘터입니다. 그리고 현대적인 다큐멘터리는 1922년 처음으로 상영한 로버트 플래허티(Robert Flaherty)의〈북극의 나누크〉(Nanook of the North)가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극영화보다 현실을 보다 더 밀접하게 다루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리얼리티를추구하게 하고, 감성적으로 관객과 공존하지만 상업 극장에서의 상영은 ’하늘에서 별 따기‘! 우리는 한글을 “우리 민족이 세운 찬란한 문화의 금자탑(金字塔)이라 하는데...그렇다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금자탑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영화사(映畵史)에서는 크게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님아>의 역사는 영화사(映畵사(社) <님아>가 새롭게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2019년 10월 3일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노래는 멀리멀리>(Free My Soul, Free My Song>가 새 역사의 한 장(章)입니다. <나의 노래는 멀리멀리>(감독; 현진식/ 배우 김지희·이순도)는 2019년 제1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한국 음악영화의 오늘’ 부문에서 첫 선을 보이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 핑거스타일 기타리스트 김지희의 음악을 통한 성장과 소통을 담은 ‘힐링 무비’로, 우리 시대 초고속 현실에 지친 모두를 위로하고 희망을 전하는 ‘음악 치료(音樂治療, music therapy)’시네마 입니다. 영화사 <님아>의 영화 소개-“깔끔하고 섬세한 연주가 장기인 풋내기 기타리스트 김지희. 기타를 잘 치는 것 말고는 다른 꿈이 없는 스물넷 소녀지만, 감정 표현이 서툴러 연주가 제자리인 것이 조금 고민! 무대 위에서는 기타에, 일상에서는 엄마 뒤에 숨었던 지희가 어느 날 불쑥, 자신의 노래를 만들고 싶다며 목소리를 내는데…마음 깊은 곳, 오래오래 간직했던 소녀의 꿈과 희망”- 멀리멀리 전하고픈 풋내기 장애 기타리스트의 노래가 시작됩니다! 한 평론가는 “이 영화는 장애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다루지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 속에서 보편적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실존적 인간의 단면을 겸손한 태도로 수용함으로써, 장애와 비 장애 사이의 경계를 극복한다”고 하고, “극복의 패러다임에 갇혀있던 기존 장애를 다룬 영화들과는 다른, 반갑고 새로운 시선을 품은 영화”라고 했습니다. 또 한 기자는 “장애를 가진 뮤지션의 음악에 ‘장애란 없다’라며 풋내기 뮤지션이 전하는 아름다운 성장스토리라고 했습니다. 영화 <나의 노래는 멀리멀리>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제작진의 야심찬 프로젝트! ‘기타 신동’ 으로 잘 알려진 정성하 기타리스트와 듀엣연주 영상을 최초로 공개...정성하 기타리스트는 유튜브 스타에서 뮤지션으로 성장한 음악가입니다. 현진식 감독은 “장애 극복 서사가 아닌 불완전함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면서 “나는 다큐멘터리를 작업하는 사람이면서 뮤지션이다. 김지희 씨의 연주를 보고 여린 감성에 비해 왠지 거칠어 보여 모순적인 느낌을 받고 다른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며 기획 의도를 밝혔습니다. 2019년 10월 2일 저녁 7시 30분 이화여대 안에 있는 아트하우스모모 2관에서 <나의 노래는 멀리멀리> 특별시사회가 열렸습니다. 필자는 ‘진모영 프로듀서’의 초대로 정의정 침향회 회장과 함께 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자, 앞에서 언급한 말들은 별의미가 없었습니다. 스크린 안팎에 자리한 지적장애 기타리스트 김지희와 뮤지션 감독 현진식가 주역이었고, 참 아름다웠습니다. 광석의 노래를 바탕으로 했다는 “나의 노래”도, 정성하의 기타도 소품일 뿐이었습니다. 남은 것은 단 하나! 우리 모두가 <나의 노래는 멀리멀리> 속으로 들어가 ‘삶의 아름다움’이라는 보석을 찾는 일입니다. <나의 노래는 멀리멀리> 만나 행복하세요!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문학예술 ⑤용어풀이로 살펴본 북한의 무용예술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문학예술 ⑤용어풀이로 살펴본 북한의 무용예술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조선문화어사전>보다 11년 먼저 출판된 <조선말사전>(과학원출판사,1962.)은 “무용(舞踊) [명] 춤”(1490쪽)․“춤 팔다리와 온 몸을 률동적으로 놀리여 예술적 형상을 나타내는 예술의 한 형태 ; 무용”(3412쪽)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992년 간행된 <조선말대사전(1)>(사회과학출판사)엔 “무용=춤./ 무용은 사람들의 사상 감정과 생활을 률동적으로 형상한 예술의 한 형태로서 률동동작을 기본 표현수단으로 한다.”(1171쪽), 같은 해 간행된 <조선말대사전(2)>엔 “춤: 팔과 다리, 몸을 률동적으로 움직여 예술적 형상을 나타내는 예술의 한 가지.”(600쪽)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조선대백과사전(9)>(백과사전출판사)에 수록된 ‘무용’의 뜻풀이(발췌) 입니다.-“오늘 자본주의사회에는 부르죠아지들의 라태하고 변태적인 사상 감정과 생활을 반영한 유흥무용이 범람하고있다. 진정으로 인민적이며 혁명적인 무용예술은 사회주의사회에서만 발전할수 있다. 오늘 우리 나라에는 우리 인민의 건전한 사상감정과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생활을 반영한 주체의 무용예술이 개화발전하고 있다. 무용은 우선 진행하는 목적에 따라 예술무용과 군중 및 오락 무용 그리고 실용적 목적을 가진 무용으로 나눈다. 예술무용에는 일정한 예술형식을 갖춘 각이한 나라의 민족무용들과 발레무용을 비롯하여 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진행하는 무대무용들이 속한다. 예술무용은 다시 규모와 형식에 따라 무용소품, 무용조곡, 무용극 등으로 나눈다. 군중 및 오락 무용에는 일반군중무용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민속놀이춤과 사교춤 등이 속하는데 그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즐기기 위하여 하는 무용”- “한편 남에게 보이기 위한 춤이라고 하여도 일부 궁중무용이나 레뷰와 같이 그 목적이 오락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오락무용에 소속시킨다. 실용적 목적을 가진 무용으로서는 고대시기의 무기를 가지고 춤을 추는 군사무용, 종교무용들과 여러가지 의식무용들을 들 수 있다. 지난 시기 순수 무술훈련과 군인들의 전투사기를 돋구기 위하여 진행된 무용가운데서 그 일부는 점차 예술화되여 오늘은 무대예술무용으로 된것도 적지 않다. 우리 나라 무용가운데서 녀성군무로 창조된 《칼춤》이 대표적인 실례로 된다. 무용은 그것이 담고있는 내용상특성에 따라 전설무용, 동화무용, 신화무용 등으로 나눈다. 무용은 다음으로 출연인원수에 따라 독무, 쌍무, 3인무, 4인무, 5인무, 군무, 대군무로 나누기도 하며, 《우리 나라에서 무용이 독자적예술분야로 발전한것은 오래전부터였다. 우리 인민은 예로부터 자기의 창조적인 생활을 아름답고 우아한 률동에 담아 민족무용을 훌륭하게 창조하고 발전시켜왔다.》(<무용예술론>,11~12페지” 북한에선 ‘무용’과 복합된 용어들 중 ‘항일혁명무용’과 ‘민족무용’ 그리고 ‘주체적무용예술’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것은 김일성과 나라의 정통성 때문입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없는 ‘항일혁명무용’은 존재할 수 없고, 체제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민족무용’의 중요성을 역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광의의 ‘민족무용’보다 협의의 ‘조선민족무용’으로 용어 사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체적무용예술’도 주체사상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형태적 면에서는 ‘무용’이라고 쓰고, 분야적 측면에서는 ‘무용예술’이라고 합니다. <조선말대사전(2)>은 “예술: 인간과 그 생활을 형상적 수단과 형식으로 반영함으로써 사람들의 사상정서적 교양에 이바지하는 사회적의식의 한 형태. 가극, 음악, 무용, 미술, 연극, 영화, 그 밖의 여러가지 형식이 있다. 진실로 사실주의적이고 혁명적인 예술은 인간생활의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혁명적세계관을 세우는데 이바지한다.”고 했습니다.(1761쪽) <조선말대사전(1)>은 “무용예술 [명] 사람들의 사상감정과 생활을 여러가지 무용언어로 나타내는 예술.”이라고 했습니다.(1172쪽) 그리고 ‘주체적무용예술’, ‘주체의 무용예술’, ‘주체무용예술’은 ‘주체적문학예술’과 같은 맥락에서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그런데 북한이 무용에서 가장 많이 기술되는 것은 [민속무용]입니다. <조선대백과사전(10)>을 보면, ‘민속무용’(66쪽)은 “인민들 속에서 그들의 다양한 생활과 아름다운 풍속을 반영하여 만들어지고 추어지면서 전해오는 무용”이며, “우리 인민은 우수한 민속무용유산을 풍부히 가지고있다. 고대시기 민속놀이였던 《영고》, 《무천》에 들어있는 춤들, 중세시기의 《처용무》, 《무애무》 등의 탈춤들, 《농악무》, 《강강수월래》 등의 수많은 민속무용들은 풍부하고 다양한 생활내용들을 반영하면서 아름답고 인민적인 춤가락들로 엮어진 민속무용유산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민족문화 유산 계승과 인민들이 창조한 무용들에서 좋은 춤가락들을 찾아내여 창조적으로 쓸데 대한 당의 현명한 문예방침에 따라 많은 민속무용들이 발굴되였으며 그것이 시대와 인민의 미감에 맞게 다듬어져 무대에 재현됨으로써 주체적무용예술의 개화발전에 이바지되고 있다. 《3인무》, 《돈돌라리》, 《칼춤》, 《쟁강춤》, 《달맞이》 등 수많은 작품들을 실례로 들수 있다.”고 기술했습니다. 오늘의 북한무용을 직접 보고 그에 관한 글을 접할 수 있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중국, 일본 등지를 통해서 들어오는 서적이나 영상물에 의존하는 실정이지만 그것도 미미한 수준입니다. 《조선예술》, 《예술교육》, 화보 《조선》, 《천리마》, 《금수강산》, 《조선녀성》, 《등대》 등 잡지와 일간지 《로동신문》, 《민주조선》 등을 통해 [오늘의 북한무용]을 찾아볼 수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북한 무용예술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주체사상과 수령우상정책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참조 : <조선속담>(과학,백과사전출판사) : 1)거문고 인 놈이 춤을 추면 칼 쓴 놈도 춤을 춘다(자기는 할수 있는 처지가 아닌데도 남이 한다고 자기도 덩달아 흉내를 내여 웃음거리가 됨을 이르는 말. ※ 칼-봉건사회에서 : 형틀의 한가지.)(23쪽) 2)굿하고 싶어도 맏며누리 춤추는 꼴 보기 싫어 못한다.(지난날에 : 무엇을 하려고 하여도 미운 사람이 끼여들어 기뻐하는 꼴을 보기 싫어 못하겠다는 뜻으로 쓰이던 말.)(55쪽) 3)그 장단 춤추기 어렵다.(①시키는 일이 똑똑치 않고 자주 변하여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을 이르는 말.]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