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413건 ]
[청로 이용웅 칼럼]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⑥프랑스와 조선독립운동
[청로 이용웅 칼럼]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⑥프랑스와 조선독립운동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경상남도 산청군청(山淸郡廳)은 2019년 3월1일 오전 10시 단성면 남사예담촌 유림독립운동기념관에서 지역 내 독립운동 유공 후손, 지역주민 등 500여명을 초청해 “파리장서운동(Paris長書運動) 100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고 최근 밝혔습니다. 일제강점기 유림(儒林)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만국공법(萬國公法)에 호소한 특별한 독립운동으로 불리는 ‘파리장서운동’ 100돌 기념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산청군이 이 행사를 하는 것은...면우(俛宇) 곽종석 (郭鍾錫,1841∼1919)의 주도로 전국 137인의 유림 대표가 1919년 전문 2674자(長書)에 이르는 장문의 한국독립청원서를 편지로 작성해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것과 유관(有關)합니다. 당시 곽종석은 영남 유림 대표로서 파리장서 전문을 완성하고 김복한, 고석진, 류필영, 이만규, 하용제, 김황 등 전국의 유림과 연합해 파리장서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곽종석은 이 운동으로 투옥돼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겪은 뒤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74세의 나이에 생(生)을 마감했습니다. 남사담 예담촌에는 그의 후학들이 면우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20년 지은 이동서당 등 ‘면우 곽종석 유적’(경남 문화재자료 제196호)이 있습니다. 산청군은 2013년에 남사예담촌에 유림독립운동기념관을, 2018년에 파리장서 기념탑도 남사예담촌에 건립했습니다. ‘파리장서운동’은 1919년 3·1운동 후 경상북도 칠곡군 출신의 장석영을 포함한 유림계(儒林界)가 파리 강회회의에 독립을 요구한 운동으로, 1919년 3·1운동의 독립선언에 서명할 기회를 놓친 유림계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요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김창숙은 1919년 3월 22일 김창숙은 137인의 서명을 받아 이루어진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출국하여 3월 27일 상해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김규식이 민족 대표의 자격으로 파리로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국내에서는 서명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전개되었습니다. 곽종석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림은 서명 작업과 활동 자금을 준비하였고, 김창숙 등은 전국을 대상으로 거사를 계획하였습니다. 장서에는 "사람이나 나라는 모두 스스로를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므로 남의 통치를 받을 필요가 없다. 한국은 오랜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로 스스로 정치할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한다. 일본은 교활한 술책으로 보호를 명목으로 한국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일본의 포악무도한 통치를 참을 수 없어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는 한국의 처지를 만국에 알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에 따라 대한민국은 국권을 상실하였고 한반도는 일제의 무단 식민지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1919년 국권회복을 위한 3·1독립운동을 계기로 국내외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민족의 독립을 위한 역량을 결집하기 위하여 1919년 9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었습니다. 상해 프랑스 조계에 우리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유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정치적 망명자 보호정책에 의지하여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탄압을 벗어나 자유롭게 독립운동을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간접적으로 한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드골 장군이 수반으로 있던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는 중경주재 우리 임시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이해관계가 미미하였던 프랑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de facto) 승인을 함으로서 열강의 지원이 필요했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희망과 힘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한국 임정(臨政)은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애매모호(曖昧模糊)한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Gouvernement provisoire de la République française)는 1944년 6월 3일 알제리에서 성립된 임시 정부로, 1944년 8월 파리 해방과 함께 파리로 이전하고 1946년 10월 27일 프랑스 제4공화국이 성립되기까지, 헌법 제정과 프랑스 통치에 임했습니다. 한반도에 대한 이해관계가 미미하였던 프랑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de facto) 승인을 함으로서 열강의 지원이 필요했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희망과 힘을 주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파리위원부는 유럽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하지만 파리위원부의 황기환(黃玘煥,?∼1923)이 1921년 7월에 미국으로 떠나면서 유럽 일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은 이어지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 유럽의 독립운동은 당시 프랑스 주재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였던 서영해(徐嶺海,1902~1949)가 이끌었습니다. 서희수(徐羲洙)라고도 불리는 부산 출신의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서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에 프랑스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1929년에 유럽 여러 나라에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한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의 명령에 따라 고려통신사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유럽에서의 외교활동은 다시 활기를 찾았고, 1934년 4월 2일에 서영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불(駐佛) 외무행서 외무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하였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1950년 8월에 지원병 1,300여 명으로 구성된 유엔군 산하 프랑스 대대를 창설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을 지휘한 사람은 제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마그랭 베르느레로 몽클라르 장군이었는데, 장군은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까지 자처하면서 프랑스군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이후 프랑스군은 6.25전쟁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친 뒤 1950년 11월 29일에 부산항에 상륙하였고, 북한군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활약했습니다. 프랑스 공화국(République française)! 1886년 한불수교 체결, 2019년이 수교 133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프랑스는 아주 가까운 우방국(友邦國)이었습니다. 필자도 프랑스의 친구였습니다. 1963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에 입학한 이래, 대학원 석·박사 과정을 거쳤고...경남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 프랑스 파리 7대학 교환교수 겸 동남일보 프랑스 파리특파원, 한국불어불문학회 감사, 프랑스 정부 초청 파리 소르본느대학교·아비뇽대학교 연수 등...과거에 프랑스 사람들은 자국이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이고 유럽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필자는 대한민국과 프랑스가 절친(切親) 같은 우방(友邦)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⑤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⑤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울라지보스또크 조선인 반일시위 투쟁 : 주체8(1919)년 2월 로씨야의 연해변강인 울라지보스또크의 조선인들이 일으킨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 3.1인민봉기의 불길은 중국 동북지방과 함께 로씨야의 연해변강에서 급속히 타번져 갔다. 로씨야연해변강 조선인들의 반일독립만세투쟁은 울라지보스또크에서의 대중적인 시위투쟁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주체8년 3월 15일 울라지보스또크에서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웨치면서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을 벌렸다. 이틀 후인 17일에는 또다시 울라지보스또크의 조선인 거주지역인 신한촌에서 독립운동집회를 가진데 뒤이어 곧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웨치면서 대중적인 반일시위에 들어갔다. 이때 애국적인 청년학생들은 여러 대의 자동차에 갈라 타고 시위대렬의 앞장에 서서 격문을 뿌리고 구호를 부르면서 군중의 사기를 힘 있게 고무하였다. 울라지보스또크에서의 대중적인 반일시위운동은 18일에도 줄기차게 계속되였다. 이날 로동자들과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조선인들은 조선인마을로부터 도시중심을 향하여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물밀듯이 쏱아 져 나갔다. 그들은 시위투쟁과 함께 각지에 반일격문들을 뿌렸으며 <조선독립선언서>룰 외국 령사들에게 배포하였다. 울라지보스또크에서의 조선인 반일시위 투쟁은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정신을 보여 주었으며 언해변강 조선인들의 반일투쟁을 힘 있게 고무 추동하였다.”(북한 <조선대백과사전(28)>,190쪽) 북한이 ‘울라지보스또크’라고 하는 러시아 극동 항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는 해삼위(海參崴) 또는 해삼시(...)라 불렀는데 실제로 해삼이 많이 나는데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1860년에 최초로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에 조선인 13가구가 정착함으로써 연해주 한인사(韓人史)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869년에는 한반도 북녘 땅의 기근(饑饉)으로 조선인들의 이주가 급증하며 인구가 1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지역 내 콜레라가 발생하자 러시아 정부에서는 조선인의 위생상태를 원인으로 지목하였고, 그 결과 1910년대 초반까지 블라디보스토크 내로 이주, 신한촌이라는 한인 거주지가 건설되었습니다. 신한촌의 1914년 당시의 인구는 무려 63,000명이었습니다. 후일 이 곳은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으로 가장 먼저 임시정부격인 단체인 국민의회가 설립되기도 하였습니다. 위 북한 <조선대백과사전(28)>은 “17일에는 또다시 울라지보스또크의 조선인 거주지역인 신한촌에서 독립운동집회를 가진데 이어 곧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웨치면서 대중적인 반일시위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한촌’에서의 ‘독립운동집회’는 블라디보스토크 3·1운동에 불을 붙인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을 남·북한이 함께 연구해서 3·1운동사를 다시 써야 되지 않을까요? 구한말부터 고려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는데, 초창기에는 아무르 만 연안의 개척리(現 해양공원 일대)에 한인들이 밀집해 거주하다 1911년 러시아측이 콜레라를 이유로 시내 북쪽 언덕에 한국인들을 집단으로 이주시키면서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될 때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한촌을 이루었습니다. 대략적인 위치는 지금의 하바롭스카야 거리 일대로, 현재는 신한촌 기념비와 서울 거리란 이름의 작은 소로만이 존재합니다. 과거 필자가 고려인 3세인 하바로프스크 사범대학교(現 하바로프스크 국립 인문대학교)의 박춘식교수와 함께 찾았던 신한촌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들려준 이야기는 ‘슬픈 노래’ 였습니다. 이런 노래도 찾아야 합니다. 3·1운동 100주년에 정부가 좀 더 세심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박 교수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주립대학교(現 극동연방대학교)을 다시 방문해 들은 ‘슬픈 노래’는 더 슬펐습니다. 연해주의 독립운동! 일제와 연해주 총독의 압박 등으로 한인 사회가 붕괴되고, 자유시 참변등을 위시로 한 각종 독립군들의 사고로 인해 연해주의 독립운동은 1930년대 이후에는 말살되기 시작했습니다. 1937년에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연해주에 거주 중이던 모든 한인들을 열차에 태워 카자흐스탄 혹은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 비사(悲史)도 정확히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바로프스크의 독립운동! 또 다른 비극의 땅 하바로프스크는 하바로프스크 지방의 중심지입니다. 아무르강(Amur River) 또는 헤이룽강(黑龍江) 유역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 강(江)은 상류의 실카 강과 오논 강을 포함하면 길이 4,444km(세계 8위), 유역면적은 205만 2000 km²(세계 10위)가 되며 동쪽으로 흘러 타타르 해협으로 들어갑니다. 러시아어 ‘아무르’는 에로스라는 뜻으로 같은 강을 두고 중국인들이 ‘검은 용’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붙인 데 반해 러시아인은 ‘사랑의 신’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주(州)의 한인 마을인 다반에서 조직된 한인 빨치산부대! 다반촌 일대에는 소코프가 이끌었던 러시아 빨치산부대가 활동하고 있었고, 다반촌 주민들은 이들을 몰래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다반촌을 점령한 일본군은 주민들이 빨치산과 연락을 한다고 하면서 온갖 횡포를 부렸습니다. 그들은 다반촌의 한인학교를 점거하여 1달 가량 머무르다가 불태워 버리고는 빨치산의 공격을 염려하여 하바로프스크로 떠났는데, 가는 길에 러시아 빨치산부대와 교전 중에 전원 사망했습니다. 필자가 하바로프스크에 체류하면서 방문했던 곳들...아무르 강(江)! 몽골고원 북부에서 발원한 흑룡강이 하바롭스크까지 이어져, 아무르강이라는 이름으로 동해와 오호츠크해로 흘러가는 장강(長江)! 탐험가 하바로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하바로프스크의 역 앞에 서있는 하바로프의 동상! 레닌광장과 광장 오른쪽 하바로프스크 주(州)정부 청사! 그곳에서 담소를 나눴던 부지사에 대한 추억, 고려인들이 김치를 팔던 재래시장...최근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로프스크 관광여행’을 다녀온 연구원은 3·1운동의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러시아가 극동 지역 행정중심지를 하바로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합니다. 포항시는 2019년 광물자원이 풍부한 제조업 중심도시인 하바로프스크시를 방문해 경제 활성화를 위한 교류를 추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바로프스크의 묻혀있는 3·1운동사를 밝혀줄 지방자치단체는 없을까요? 하바로프스크 사범대학교 로마노프 총장과 박춘식 교수를 그려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백두산의 과 백두산 밀영(密營)
[청로 이용웅 칼럼] 백두산의 과 백두산 밀영(密營)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아득한 밀림은 눈에 덮이여 / 하늘 땅 저 끝까지 눈부신 광야 / 아 하얀 눈속에 / 봄빛을 안은 고향집이여 / 아 김정일동지 / 세기를 밝힌 고향집이여”- 북한 시인 오영재가 쓴 <흰눈 덮인 고향집>입니다. 북한 땅에서 ‘고향집’에서 살아본 사람은 김정일 위원장 뿐일까요? 물론 북한의 <조선말대사전>도 “고향집”을 “(나서 자란) 고향의 집. <고향의 집>을 정답게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했습니다. 하지만 <흰눈 덮인 고향집>을 보면 <고향집>은 분명 그와 함께 하는 수식어입니다. 김 위원장의 출생...출생지(소련 땅이다, ‘백두산밀영’이다)와 출생년도(1941년 생이다, 42년 2월 16일 생이다)서부터 출생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북한의 수장(首長), 그에 대한 미화(美化)나 ‘선전선동’이 그의 생일 2월 16일 앞뒤에서, 1월부터 2월 내내 이어졌습니다. 물론 축하 행사도 계속 펼쳐지고 있습니다. ‘광명성절’ 생일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최룡해 동지, 리만건 동지, 김여정 동지, 리영식 동지를 비롯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 일꾼들”과 함께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습니다. 그는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입상(立像)에 경의를 표한 뒤 두 사람의 시신이 안치된 영생홀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중앙TV>가 공개한 영상을 보면 김 위원장을 기준으로 왼편으로 선전선동부(리영식·김여정), 오른편에는 조직지도부(최룡해·리만건)가 자리헸습니다. 2월 16일 자(字) <로동신문>은 2, 3면에 전날 열린 중앙보고대회 소식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로동당 부위원장 최룡해는 "로동당과 공화국 정부는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며 "조선을 우호적으로 대하는 모든 나라와의 관계를 발전시켜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예년처럼 “제26차 광명성절 경축 백두산상 국제휘거축전” 개막, 기념우표 발행, 김정일화축전 등이 진행되었고 밤에는 평양 대동강변에서 <조선중앙TV>가 생중계한 불꽃놀이도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념 행사 ‘광명성절 경축 백두산상 국제휘거축전'처럼 ’‘백두산’과 ‘광명성’은 여기 저기에 따라 다닙니다.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은 2월 12일 “백두산 밀영에 버들꽃이 피어”났다며 “참관자들은 자연도 절세의 위인의 탄생을 못 잊어 꽃을 피웠다고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고 있다”고 하면서 “백두산밀영”이 그의 생가(生家)임을 강조했습니다. 또 <조선중앙통신>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탄생일에 즈음하여 2. 16경축 중앙미술전시회가 개막되였다. 전시회장에는 백두산3대장군의 혁명업적과 위인적풍모를 보여주는 미술작품들을 비롯하여 70여점의 국보적작품들이 전시되였다. 조선화 《조국해방을 앞둔 2월의 명절》, 《조국에로》는 백두광명성을 안아올리시여 조선민족이 대를 이어 수령복, 장군복을 누리도록 하여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불멸의 업적을 전하고있다.”고 했습니다. <로동신문>은 “백두산밀영 고향집 찬가”를 실었습니다. 신문은 “고향집! 그 이름만 불러보아도 서리꽃정서가 그윽하게 풍기는 정다운 귀틀집이 밀림 속에 서있다. 눈앞에 그려보기만 해도 이깔 숲에 서리꽃이 반짝이여도 들창가에 봄빛이 따스하다고 노래 절로 흘러나오는 밀영의 고향집, 고난의 천만언덕을 넘어 번영의 높은 령 마루에 올라설수록 더욱더 뜨겁게 불러보는 우리의 고향집이여, 눈보라 수 천리 아무리 멀다 해도 한달음에 가고 싶은 백두의 고향집이여, 강성대국의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가슴 벅차게 울려 퍼지게 될 승리의 그날을 눈앞에 둔 오늘도 조용히 서있는 고향집을 바라보니 우리 맘속에 그리움의 흰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린다. 백두산밀영 고향집 찬가가 끝없이 울려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나의 조국은 백두산에서부터 이렇게 시작된다. 위대한 나의 조국은 백두산에서부터 이렇게 시작된다. 밀영의 고향집 뜨락에서 부터 우리 조국의 뜨락이 시작되고 정다운 소백수 물소리로 부터 조선의 시내물소리가 시작된다. 강성대국으로 부강 번영할 나의 조국은 백두산밀영의 고향집에서부터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백두광명성 탄생을 축하하여 군용밥통뚜껑이며 법랑식기들을 들어 축배를 올리고 밀영뜨락의 모닥불 두리에 모여앉아 조선의 앞날을 그려보던 빨찌산 투사들의 격정 넘친 얼굴들이 그대로 새겨진 주체31(1942)년 2월 16일!”라고...그런데 많은 ‘백두산밀영 고향집’에 대한 자료를 보면, 김정일의 생가(生家)에 대해서는 별로 없고, 대부분 김일성 부부의 ‘빨찌산 시절’을 미화(美化)하고 백두산(白頭山)을 김일성 가문의 소유(?)로 만든 자료들입니다. 그들은 ‘민족의 성산(聖山)에 잠시 머물렀을 뿐인데, 마치 백두산을 김일성 일가의 전유물로 선전선동! 북한 문학의 종류에는 ‘구전문학’이 있습니다. <조선대백과사전(3)>은 “구전문학: 오랜 세월을 두고 인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그들의 집체적 지혜에 의하여 창조된 문학. 구비문학 또는 인민창작, 민간문학 등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조선의 민속전통7 구전문학과 민속공예>의 ‘4.구전문학유산의 계승발전’에는 “구전문학유산은 우리 시대-로동당시대에 와서 전면적으로 발굴, 수집 정리되고 깊이 연구되여 현대적 요구에 맞게 계승 발전됨으로써 더욱더 빛나게 되였으며 발전 풍부화되여 문학예술발전과 청소년들과 근로자들의 교양에 이바지하게 되였다.”(150쪽)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1)설화. (1)혁명설화 창조전승’을 ‘백두산전설 ․ 백두광명성전설 ․ 백두산녀장수전설]에 대해 기술했습니다. “백두산전설”에는 “일제식민지통치의 암담한 시기에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민족의 태양으로 우러르며 인민들 속에서 창조된 백두산전설은 광명과 희망,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는 태양의 전설로 인민들 속에 간직”, “백두산녀장수전설”에는 “김정숙동지를 백두산녀장수로 신격화한 전설”! “백두광명성전설”에는“지도자동지의 탄생, 성장과 관련된 백두광명성전설은 해방 후에도 널리 창조전승”되었다고 김정일 생일을 거론했습니다. 그러니까 김정일의 출생 스토리는 구전문학?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말씀! 그런데 우리 <위키백과>에는 “김정일(金正日, 1941년 2월 16일~2011년 12월 17일)라고 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출생“이라고. <다음백과>에는 ”백두산 밀영 또는 러시아-만주 국경지대∼“이라고. 북한 <조선대백과사전>이 ”1942년 2월 16일 백두산 고향집 출생“이라고 했으니까 그런 줄 아세요!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의 “2월 16일은 민족 최대의 경사의 날, 민족적 명절”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의 “2월 16일은 민족 최대의 경사의 날, 민족적 명절”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 달력 2월에 [2.16. 광명성절.(February 16 : Day of the Shining Star.)/ 주체 31(1942) 2.16.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탄생하시였다.(February 16, Juche 31(1942) : The great learder Comrade Kim Jong IL was born.)/ 주체 101(2012) 2.14.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원수칭호를 받으시였다.(February 14, Juche 101(2012) The great Comrade Kim Jong Il was honoured with the title of the DPRK Generalissimo.)]가 적혀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북한의 일간신문 <인민일보>는 2019년 1월부터 계속해서 ‘김정일 생일’ 관련 기사를 올렸습니다. 1월 21일에는 광명성절 경축 준비위원회 여러 나라에서 결성”, “제23차 김정일화 축전이 진행된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1월 22일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현지지도표식비 여러 단위에 건립”...거의 매일 유사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북한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가 발간한 <조선의 민속전통(5) 민속명절과 놀이>에는 “주체위업의 계승자이시며 우리 인민의 친애하는 지도자이신 김정일동지께서 탄생하신 2월 16일을 민족 최대의 경사의 날로, 민족적 명절로 성대히 맞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 같은 김정일 생일 이야기 중 백미(白眉)는 그의 아버지 김일성의 “광명성찬가”입니다. (故) 김일성은 1992년 2월 16일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축하하며 친히 송시 <광명성찬가>”를 지었습니다. -〈詩의 전문〉“白頭山頂 正日峯 (백두산정 정일봉)/ 小白水河 碧溪流 (소백수하 벽계류)/ 光明星誕 五十週 (광명성탄 오십주)/ 皆贊文武 忠孝備 (개찬문무 충효비)/ 万民稱頌 齊同心 (만민칭송 제동심)/ 歡呼聲高 震天地 (환호성고 진천지)// 백두산 마루에 정일봉 솟아있고/ 소백산 푸른 물은 굽이쳐흐르누나/ 광명성 탄생하여 어느덧 쉰돐인가/ 문무충효 겸비하니 모두다 우러르네/ 만민이 칭송하는 그 마음 한결같아/ 우렁찬 환호소리 하늘땅을 뒤흔든다” 김정일 사망(2011년 12월 17일) 후 <로동신문>은 “백두산대국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광명성찬가>”를 실었습니다. 기사는 “소백수골에 추억 깊은 2월이 왔다. 백두광명성이 솟아오른 민족대경사의 그날을 못 잊어 정일봉 기슭에 소중히 자리 잡고 빛을 뿌리는 어버이수령님의 친필송시비! 위대한 빨찌산의 아들, 백두령장의 담대한 기상 웅건한 메부리에 비껴있고 내 나라,내 조국을 불패의 강국, 선군의 조국으로 빛내이신 불멸의 그 업적 칭송하여 소백수가에 세워진 친필 송시비는 하많은 사연 전하며 오늘도 금문자로 빛나고 있다. 《광명성-3》호 2호기의 성공적발사로 5천년민족사의 특대사변을 안아온 태양민족의 크나큰 긍지안고 위대한 장군님을 우러러 만민이 터치는 환호성 우렁차게 울리는 듯싶은 친필 송시비, 정녕 절세의 위인에 대한 다함없는 경모의 마음 끝없이 솟구치게 하는 이 불멸의 글발은 경애하는 원수님의 두리에 굳게 뭉쳐 백두산대국의 위용 떨치며 주체혁명의 새로운 승리를 향하여 억세게 전진하는 천만군민의 앞길을 축복하며 영원한 빛을 뿌릴 것이다.”입니다. 2012년 2월 17일 字 <로동신문>은 “금수산기념궁전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명명함에 관한 공동 결정 공표...금수산기념궁전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명명함에 관한 공동결정 공표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께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대원수님께 숭고한 경의를 표시하며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 충정을 맹세하는 조선인민군 륙해공군 장병들의 례식이 16일 주체의 최고성지에서 엄숙히 거행되였다. 뜻 깊은 광명성절을 맞이하여 태양민족의 성지이며 우리 조국과 인민의 모든 승리와 영광의 중심인 금수산기념궁전은 가장 경건하고 숭엄한 분위기에 휩싸여있었다. 드넓은 광장은 혁명의 최전방에 최고사령부를 두시고 정력적인 초강도 강행군길을 이어가시며 조국과 민족의 무궁번영을 위한 만년토대를 마련하여주신 위대한 김정일 대원수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다함없는 경모의 정으로 세차게 끓어번지고 있었다. 금수산기념궁전 정면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태양상이 모셔져있었다...”고 했었습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2019년 원단(元旦)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을 맞아 김일성·김정일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통신’은 ‘궁전’ 참배로 새해 공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하고, 전체 참가자들이 "온 겨레와 전 세계를 격동시키는 역사의 순간순간들로 날과 달이 흐른 2018년을 크나큰 긍지 속에 돌이켜보면서 조선로동당 제7차 대회와 당중앙위원회 4월 전원회의 결정을 받들어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 정신으로 뜻깊은 새해에 보다 큰 기적과 혁신을 창조해나갈 불타는 맹세를 다졌다"고 전했습니다. <조선중앙TV>도 김 위원장이 양복과 넥타이 차림으로 다른 간부들과 함께 참배하는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1월부터 시작된 ‘김정일의 생일잔치는 2월 16일 절정(絶頂)에 도달하고 2월의 끝까지 이어집니다. 이렇게 단정해서 말하는 것은 매년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2월 16일 민족 최대의 경사의 날, 민족적 명절”을 앞두고 ‘충성의 외화벌이’ 운동을 벌이고 주민들에게 강제로 돈을 징수하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함경북도 소식통은 2월 15일 <데일리NK>와의 통화에서 “광명성절이 임박해 오자 청진 시내의 공장, 기업소들, 온성군의 농장들에서까지 충성의 외화벌이 과제가 내려왔다”며 “당국이 조직적인 포치를 내리고 사람당 무조건 1만 원을 내라고 몰아세우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북한 달력에 [2. 5. 설명절(February 5 : Lunar New Year's Day./ 2.19. 정월대보름(민속명절).(February 19 : Jongwoldaeborum, the 15th day of the first month by the lunar calendar.(Korean folk festival)]가 적혀 있습니다. 이 ‘설’과 ’정월대보름‘ 사이에 ‘민족 최대의 경사의 날, 민족적 명절’이 있는데, 백성들에게 뭐든지 베풀어야 하는 게 ‘임금’의 도리가 아닐까요?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1809~1865)은 “취임 연설”에서 “국가는 거기에 거주하는 국민의 것이다. 국민이 현 정부에 염증을 느끼게 되면 그들은 언제든지 그것을 개선할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거나 분할 내지 전복 시킬 수 있는 혁명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민심(民心)은 곧 천심(天心)”!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④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태생적 유래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④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태생적 유래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오늘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신한촌(新韓村)’의 태생적인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합니다. 앞서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③추억의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소개한 경남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정은상교수(현재 언론출판원장)는 이곳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최초로 유학하여 석사, 박사학위를 이수한 학자입니다. 러시아 지역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서 ‘신한촌’의 태생적 유래를 들어보았습니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혁명광장에서 서북쪽으로 ‘오케안스키 대로’를 따라 약 1km를 가다보면 우측에 ‘파크롭스키 파르크(공원)’가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약 500m를 더 직진하다보면 좌측으로 ‘콤소몰스카야’ 거리가 나오고, 그 끝에는 ‘이만거리’와 접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만거리’와 ‘적기대로’가 만나는 지점에 ‘이그나트’라고 하는 백화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백화점은 2002년 8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공식방문 중에 쇼핑을 하고 방명록에 서명을 남긴 상업센터로써 유명해진 곳입니다. 이 백화점 뒤편부터 시작되는 조그마한 언덕으로 구성된 구역에 ‘서울거리’, ‘아무르스카야’, ‘하바롭스카야’, ‘톰스카야’, ‘소유즈나야거리’가 위치해 있습니다. 과거 항일 독립운동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던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다’, 일명 ‘신한촌’입니다. ‘서울거리’는 과거 ‘신한촌’의 흔적을 증명해 주는 행정명칭으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있습니다. ‘서울거리’에는 유일한 가옥이 한 채 남아있고, 이 가옥에는 현재 두 가족이 각각 입주해 살고 있습니다. ‘신한촌’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은 ‘구한촌(舊韓村)’ 혹은 원한촌(元韓村)이 있었다는 논리의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블라디보스토크시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그동안 한국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지만, ‘신한촌’의 태생적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합니다. 러시아 자료 중 마트베예프의 <블라디보스토크시 소사>에 이러한 기록이 있습니다. 19세기 중후반부터 조선으로부터 생존을 위해 노령 땅으로 불법적으로 두만강을 건너서 연해변강으로 흘러들어간 조선인 유민들이 북으로 삶의 터전을 이어나가다가 블라디보스토크시 건설 작업장에서 잡역부나, 부두 노동자로서 정착해 살게 되었습니다. 조선인들은 거주하는 곳마다 대부분 조선에서처럼 집안에 돼지우리를 만들어 가축과 함께 살았습니다. 러시아인들의 눈에는 이런 모습이 매우 비위생적으로 보였고, 전염병의 발병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위원회에서는 조선인들을 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격리시켜서 집단거주 시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원한촌(元韓村)’이나 ‘구한촌(舊韓村)’의 존재는 굳이 표현하자면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흩어져 살고 있었던 한인들을 말함입니다. 조선인들을 어디로 격리시킬 것인가를 궁리하던 끝에 러시아인들은 공동묘지보다 더 먼 곳으로 집단이주 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1860년대 당시에 블라디보스토크시 외곽 외딴 언덕이 있었던 곳이 공동묘지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파크롭스키 파르크(공원)’가 바로 과거 공동묘지 터였던 것입니다. 공원으로 조성할 당시에 이곳에서 많은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시신과 유물이 함께 발굴된 적이 있었습니다. 발굴된 유물과 유품들은 현재 ‘아르세니예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인들은 ‘삶’보다 더 먼 ‘죽음’의 경계 밖에 ‘신한촌’을 두게 된 것이었습니다.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다’라는 어원은 원래 ‘카레이스카야’, 즉 ‘한국의’ 혹은 ‘한국인의’란 뜻의 형용사와 ‘슬라보다’(러시아에서 11세기부터 17세기까지 국유지에서 사유지화한 곳에 자유농민이 자리 잡고 사는 큰 촌락을 의미)가 결합한 합성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명 “똥돼지” 마을이 ‘신한촌’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 마을 입구에 후일 한인들 스스로 ‘독립문’이란 것도 건설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1937일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기 전까지 조선인 학교와 조선인 극장을 설립하여 민족어 교육과 문화 창달에 힘썼던 것입니다. 일제하에서는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운동의 메카로 거듭나게 됩니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어와 노래 및 극장문화의 산물은 곧 이곳 ‘신한촌’이 원천인 셈입니다. 단행본 <박환교수와 함께 걷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저자는 “1.시베리아 항일운동의 요람 신한촌. 한인들의 집단 거주처 신한촌...신한촌은 1911년 이후 한인들이 집단거주하며 독립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신한촌에는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한인신보사, 일세당, 대한국민의회, 노인동맹단 등의 독립운동 단체가 있었다. 신한촌은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특사 중 한명인 이상설, 연해주 일대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최재형 그리고 이동휘 등 항일민족 애국지사들의 집결지였고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기지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의 3·1운동 시발점이었으며, 수많은 독립운동계획들이 수립되기도 한 역사적인 곳이었지만, 4월 참변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라고 했습니다. 이 글은 이어지는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⑤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에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합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③추억의 울라지보스또크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③추억의 울라지보스또크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울라지보스또크 : 로씨야의 원동지방 남부에 있는 도시. 연해변강 소재지이다. 인구 64만 3,000명(1992년). 조선 동해 뾰뜨르웰리끼 만으로 뻗는 무라비요브 아무르스끼 반도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울라지보스또크는 하바롭스크와 함께 로씨야 원동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원동지방이 로씨야의 령토로 된 1860년에 로씨야는 여기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였다. 그 후 로씨야에서 태평양 연안에 있는 최대의 항구도시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1879년에 흑해 연안의 오데싸와 정기항로가 개설되고 1903년에 씨비리철도의 종착점으로서 로씨야의 중심부와 련결되면서 울라지보스또크의 경제적 지위가 올라갔다. 19세기 말에 대학(동방학원)이 창립되였으며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1918년 4월부터 1922년 10월까지 일본군대의 강점 하에서 이 도시의 조선독립운동가들의 대부분이 학살 및 추방되였다. 도시에는 기계, 선박 수리, 전자기구, 식료공장들과 여러 개의 대학, 극장, 박물관들, 수많은 과학연구기관들이 있다. 울라지보스또크는 로씨야 태평양함대의 기본기지이다. 항구수역은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얼지만 항구는 쇄빙선의 사용으로 년중 운영되고 있다. 1980년대부터 화물 취급량에 있어서 나호드까항보다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철길과 자동차길로 하바롭스크, 나호드까, 우쑤리스크와 련결되고 있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대백과사전(28)>,190쪽) 1991년 2월 필자는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하바롭스크’역(驛)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울라지보스또크’로 항했습니다. 열차의 침대칸에서 동행한 박춘식 교수와 이야기 꽃을 피우며 11시간을 달렸습니다. 위 북한 자료의 ‘울라지보스또크’는 ‘블라디보스토크’이고, ‘하바롭스크’는 ‘하바로프스크(하바롭스크) 입니다. 박 교수는 고려인 3세로 하바로프스크 사범대학교 교수였습니다. 위의 ’울라지보스또크‘에 대한 설명에는 ’시베리아‘를 ’씨비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한의 사전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설명을 적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러시아어: Владивосто́к) : 러시아 극동의 군사기지이며 프리모르스키 지방의 행정중심지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출발점이며,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의 문호이다.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60만 3천명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세 나라의 국경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며 개인 사업과 국제 무역, 관광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이곳은 태평양 함대의 모항이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해군 함대들이 친선 사절로 온다. 주된 산업은 조선업과 어업, 어류·해산물 가공업, 군항 관련 산업이다. 러시아 태평양 함대의 본부가 있는 군항(軍港) 도시이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는 폐쇄도시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어로 "동방을 지배하다"를 뜻한다. 1860년까지는 중국의 영토였고, 해삼위(海參崴)로 불렸다. 연해주 남부에 위치한 표트르대제 만을 아무르스키 만과 우수리스키 만으로 나누는 좁고 긴 산악 반도인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반도(길이 30km, 너비 12km)의 남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러시아 해군의 태평양 함대의 기지가 위치한 군항 도시이다. 반도 선단의 금각만 연안에 시가지가 있다.”(대한민국<위키백과>) 그때 필자가 탑승했던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아시아의 우랄산맥 동부의 첼랴빈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약 7,400km의 대륙횡단철도인데 정식명칭은 ‘대시베리아철도’입니다. 남한의 <위키백과>는 “일반적으로는 이 노선을 포함해 야로슬라브스키 역부터 블라디보스토크 역까지의 9,297km 구간을 지칭하며, 또한 넓은 의미로는 몽골 횡단 철도·만주횡단철도(동청철도)·바이칼-아무르 철도(제2 시베리아 횡단 철도)까지 포함해 시베리아 횡단 철도라고 부른다. 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까지의 구간은 1956년부터 2001년까지는 모스크바로부터 북동쪽 방향으로 모스크바~야로슬라블~키로프~페름~예카테린부르크를 경유하는 노선을 사용하였다. 2001년부터는 그보다 남쪽의 모스크바~블라디미르~니즈니노브고로드~키로프~페름~예카테린부르크 노선을 이용한다...동양과 서양을 걸치는 노선이기 때문에 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몽골과의 직통운전도 있다.”라고 기술했습니다. 필자는 과거 경남대학교 문과대학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홍보부장·국제학술교류위원회 총간사를 겸했었는데, 1991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주립대학교(現 극동연방대학교)와 하바로프스크 사범대학교(現 하바로프스크 국립 인문대학교)을 공식 방문했습니다. 방문 목적은 두 대학교와 맺은 자매결연 및 학술교류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때 직항로(直航路)가 없어 일본 니가타공항에서 소련항공을 타고 하바로프스크로 들어갔습니다. 하바로프스크에서는 하바로프스크 사범대학교 로마노프 총장 · 교수들과 두 차례 협의회를 가졌고, 하바로프스크州 부지사 접견 등등. 그리고 박춘식 교수와 방문한 극동주립대학교에서는 여성 부총장 · 교수들과 두 차례 협의회를 가졌는데, 부총장은 안중근 의사 등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연해주 독립운동 거점 신한촌’ 등을 꼭 가보라고 권유했습니다. 경남대학교는 한ㆍ러 수교 전인 1989년 러시아 극동국립대학교와 자매관계를 맺었으며, 현재의 극동국립연방대학교와 2014년 9월 새로운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고히 한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경남대학교와 극동국립연방대학교는 앞으로 두 대학 간 교류ㆍ협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1989년, 경남대학교가 주관한 ‘대한민국 대학생 1기 소련연수단’이 결성되어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18개 대학의 24명이 선발되었습니다. 연수단의 총학생회장으로는 경남대학교 경영학과 정은상 학생이 선발되었습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주립대학교(現 극동연방대학교)에서 현대러시아어를 전공하고, 석사·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경남대학교로 교수 재직하면서 언론출판원장을 맡고 있고 러시아어 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국내 최고의 러시아통”이 2019년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에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최근 그로부터 ‘박춘식 사망’ 소식을 접했습니다. ‘울라지보스또크’에의 추억(追憶)이 되살아났고....명복(冥福)을 빌었습니다. 지금은 블라디보스토크나 하바로프스크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91년에는 시베리아 철도를 타려면 KGB(국가보안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만큼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극동국립대학교 부총장의 권유로 찾아본 신한촌 등과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 이야기는 [청로 이용웅 칼럼-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④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어 갈 예정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학의 泰斗 박재규 경남대 총장의 ‘일념, 평화통일 길’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학의 泰斗 박재규 경남대 총장의 ‘일념, 평화통일 길’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우리는 끊임없는 만남 속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만남을 통해 자신 뿐 만 아니라 타인의 존재가치를 깨닫게 되며 어떤 특별한 만남에 의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기도 한다...불교의 팔고(八苦) 중에는 애별리고(哀別離苦)가 있다. 부모와 형제, 부부 등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을 말한다. 우리 민족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이러한 아픔과 한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2000년 박재규 통일부장관의 수필 “소중하고 특별한 만남” 中에서)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는 1972년 9월 1일 ‘경남대학 부설 통한문제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며, 1973년 3월 10일 ‘경남대학 부설 극동문제연구소’로 명칭을 변경하고, 박재규 박사가 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리고 47년 세월...극동문제연구소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인 연구소로 발전하였고, 그 중심에는 박재규 경남대학교 현 총장이 있었습니다. 박재규 박사는 연구소의 과거이며, 현재이고, 미래입니다. 그만큼 박 총장은 연구소에 열정을 다 바쳤고, 그의 삶이기도 했습니다. 극동문제연구소는 1998년 3월 북한대학원 개원을 계기로 연구소의 연구 기능과 대학원의 교육 기능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이들 상호간의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극동문제연구소는 제2의 창설 의지를 다지며 북한 및 통일 분야에 있어 세계 최고의 명문이자 메카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지난 47년의 결실입니다. 극동문제연구소는 2018년 통일부와 함께 한반도 평화‧번영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키고 공고화하는 ‘한반도 국제포럼(KGF)’ 사업을 주관하며 6개국에서 7회에 걸쳐 국제학술회의를 진행하는 등, 총 140회에 달하는 국제학술회의를 국내·외에서 개최해왔습니다. 연구소는 10년 전부터 선정‧발표되는 ‘대한민국 100대 싱크탱크 : 외교 ․ 안보 부문’에서 국책 및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10위권 내에 이름을 올리며 역량을 인정받아 왔으며, ‘2018 DMZ 평화상’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연구소의 산 역사인 박 총장은 1972년 극동문제연구소 설립을 시작으로 경남대 교수, 극동문제연구소 소장, 경남대 총장을 비롯해 한국대학총장협회 회장,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 동북아대학총장협회 이사장 등으로 재직하며 평화통일을 위한 연구와 교육에 헌신해왔습니다. 대표 저서로는 <북한외교론>, <북한의 신외교와 생존전략>, <북한의 딜레마와 미래>, <새로운 통일 이야기> 등 다수가 있습니다. 또 제26대 통일부 장관 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재직하면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을 맡아 남북정상회담과 6ㆍ15 공동 선언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 남북 화해와 협력시대의 토대를 마련하는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 같은 노력들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청조 근정훈장을 받았고, 미국 F.D.U. Global Understanding상, 제1회 한반도평화상, 프랑스 시라크재단 분쟁방지 심사위원특별상 등을 수상했으며, 미국 F.D.U., 러시아 극동국립대, 일본 가나가와대, 대만 중국문화대, 일본 소카대 등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17년 마침내 박재규 박사의 회고록(자서전) <일념, 평화통일 길>이 햇빛을 보았습니다. 평화통일을 향한 일념으로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자서전을 발간한 것입니다. 박재규 총장은 제Ⅰ장에서 1960년대 후반 북한·통일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본격 연구하게 된 것을 계기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설립, 북한 문제 및 한반도와 공산권 정세 변화 등 당시 다루기 어려웠던 주제로 국내외에서 각종 국제학술회의 개최, 경남대 행정대학원 북한학과 개설 및 경남대 북한대학원 개원에 이어 북한전문대학원인 북한대학원대학교 설립, 남북관계가 소원했던 시기 방북해 김일성종합대학 및 김책공업종합대학과의 학술교류 추진, 데라우치 문고 반환 사업 추진 등 학술 교류를 통해 북한·통일문제를 비롯한 중·소 등과 관련해 한반도 안보 문제를 다루는 등의 활동상을 다뤘습니다. 제Ⅱ장에는 통일부 장관에 취임해 최초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준비 및 개최, 수석대표로 활약했던 제1~4차 남북장관급회담 등의 주요 활약상을 다양한 사진들과 함께 담았습니다. 남북정상회담과 관련, 박 총장은 2000년 6월 14일 평양 목란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정일 위원장 바로 옆 자리에 앉아 금강산관광 문제, 이산가족 문제, 경의선 연결 문제 등 다양한 남북 간 현안에 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제2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남북 당국 간 군사회담 개최 문제에 북측이 너무 소극적으로 나와서 김영남 상임위원장과의 오찬과 면담까지 지연시키면서 김정일 위원장 면담을 요구했고, 밤을 새워 기차를 타고 달려가 자강도에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남북국방장관회담 개최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는 성과를 거뒀다고 소개했습니다. 2018년 학교법인 한마학원은 “현재 지역 대학들은 신입생 입학 자원의 감소와 수도권 대학으로의 집중화 등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며 “이 같은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축적된 경륜과 식견을 바탕으로 업무를 종합적으로 판단ㆍ조정하는 역량이 뛰어난 박재규 현 총장이 적임자”라며 제11대 총장에 박 박사를 선임하면서 “박 총장은 경남대 교수와 총장으로서 45년 이상 재직하면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대학 구성원들에게 명확한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고 역량을 강화해 경남대학교를 최고의 명문사학으로 성장시키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했습니다. 11대 총장 임기는 2019년 2월 8일부터 2023년 2월 7일까지 4년간입니다. 2019년 1월 28일 필자는 사이버 강좌에 대한 보고를 위해 경남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박 총장님을 만났습니다. 2월 14일(목) 취임식을 앞두고 대학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펼쳐 보이셨습니다. 과거 필자가 경남대학교의 홍보부장·국제학술교류위원회 총간사로 보필할 때 보다 훨씬 의욕이 충만...그 당시보다 건강도 좋아 보였습니다. 그는 경남대가 ‘2018년 대학 기본역량 진단’에서 어려운 관문을 뚫고 최고등급인 [자율개선대학]으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국내 최고의 명문 사학’의 영광(榮光)을 차지하겠다는 각오를 표명했습니다. 경남대학교의 비상(飛翔)과 박 총장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합니다. 11대 총장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북한학의 ‘태두(泰斗), 경남대의 ’태두=태산과 북두칠성‘로 영원하시길 소망합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중국(中國)의 춘절(春節)과 한반도(韓半島)의 설날
[청로 이용웅 칼럼] 중국(中國)의 춘절(春節)과 한반도(韓半島)의 설날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지금 중국은 최대 명절인 춘절(春節∙중국설) 준비에 한창입니다. 중국은 윈난(雲南) 쿤밍(昆明) 세계원예박람원(世博園)에서 개최된 연등회에서 새해 등불을 밝히는 등 중국 각지에 화려하고 다양한 등불이 켜지는 등 새해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택배’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알리바바 산하 물류 회사인 차이냐오(菜鳥)와 상하이 철도 그룹은 설 대이동에 맞추어 ‘택배 기사 전용 열차’ 배차! 상하이 훙차오(虹橋)에서 안후이(安徽) 진자이(金寨)로 향하는 G9402편 열차를 배차해 400여 명의 택배 기사들의 귀향을 도왔습니다. 중국의 설 대이동은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 중국중앙(CC)TV) 등은 2019년 1월 21일부터 춘절 귀향, 귀성을 돕기 위한 설 연휴 특별수송기간인 춘윈(春運)에 돌입했다고 보도했는데, 올해 춘절 연휴는 2월 4일부터 10일까지 7일간, 춘윈 기간은 1월21일부터 3월1일까지 총 40일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올해 전국 귀성·귀경객 수는 29억 9000만 연인원으로, 전년 대비 0.6% 증가했다고 밝혔습니다. 중국의 칭다오신문(青島新聞)도 같은 날 “하루 동안 칭다오(青島)에서 기차를 이용한 승객은 5만 명, 버스를 타는 귀성객은 4만 명에 달했다. 특히, 항공편을 이용하는 승객은 270만 명으로, 지난해 최고 이용객 숫자를 넘어섰다.”고 보도했습니다. 중국의 춘절기간 고향 방문은 1979년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40년 동안 여객 이동량은 1억 명에서 30억 명에 가까이 되며, 이동 속도 또한 시속 40km에서 350km까지 빨라지고 있습니다. 기차는 매일 4,860편 편성 예정이며, 춘절 기간 동안 비행기 53만 여 편, 버스 81만 여 편, 선박 2만 여 척이 투입되어 춘절기간 동안 여객 운송을 투입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한반도의 설 고향 방문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중국에서는 설을 춘절(중국어 간체자: 春节, 农历新年, 정체자: 春節, 農曆新年, 병음: Chūnjié, Nónglì xīnnián 춘제, 눙리신녠)이라고 합니다. 민족 대이동은 한반도와 유사하지만 땅이 엄청 넓어 보통 1주일 이상을 휴일로 정합니다. 옛 풍습으로는 마당에 폭죽을 터뜨려 악귀를 쫓기도 하고, 문에 닭이나 다른 형상을 그려 붙여 놓았습니다. 임금과 부모에 절하고, '초백주'라는 술을 바칩니다. 정월 7일은 인일(人日)이라 하여, 7가지 채소로 국을 끓이고, 사람 형상을 병풍에 붙이기도 합니다. 춘절의 기원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으로는 2000여 년 전 어느 하루 순(舜)이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자, 하인들을 거느리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데서 기원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이날을 세수(岁首)로 여겨왔고 순의 천자 계승설이 음력 새해의 유래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설날! 음력으로 1월 1일! 구정, 정월 초하루, 음력설로도 불리며 한자어로는 원일(元日), 원단(元旦), 원정(元正), 원신(元新), 원조(元朝), 정조(正朝), 세수(歲首), 세초(歲初), 연두(年頭), 연수(年首), 연시(年始), 신일(愼日), 달도(怛忉), 구정(舊正) 등으로 불립니다. 우리는 양력 1월 1일을 ‘신정’이라고 하고, 북한은 ‘양력설’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음력 1월 1일을 ‘설날’이라 하고, 북한은 ‘설명절’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명절은 민속명절과 사회주의 사회에 맞추어 새롭게 생성·발전된 명절이 공존하고 있는데, 민속명절은 단오·추석·설날·한식 등이며 이 가운데 추석은 1988년, 설날과 단오는 1989년에 공휴일로 제정되었습니다. 그러면 북한은 설날을 어떻게 말할까요? <로동신문>은 다음과 같이 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정서와 향취가 짙게 어려 있는 설맞이풍습은 크게 설맞이준비, 설옷, 설인사, 설음식, 민속놀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설명절을 하루 앞둔 섣달 그믐날에는 집 안팎을 깨끗이 정리하고 설옷과 설음식을 준비하였다. 설명절 옷차림을 설빔이라고 하였다...세배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인사법인 조선절로 하였다. 세배풍습은 우리 민족이 웃사람을 존경하고 례의를 귀중히 여겨온데서 생겨난 것이다. 세배가 설명절의 가장 중요한 례식이였으므로 설명절날부터 보름 남짓한 기간에 먼 곳에 있는 웃어른들에게도 찾아가 세배를 하기도 하였다. 설명절날 명절음식을 차려놓고 가족, 친척들과 이웃들끼리 나누어 먹는 것이 제일 이채로왔다.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찰떡, 설기떡, 절편과 같은 여러가지 떡류와 지짐, 수정과, 식혜, 고기구이 등이였다. 그 가운데서 제일 손꼽히는 것은 떡국이였다. 떡국은 흰가래떡을 얇게 썰어서 팔팔 끓는 장국에 넣고 잠간 끓이다가 꿩고기나 소고기볶은것을 넣고 양념을 친 것이다. 꿩고기를 아무때나 쉽게 구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하여 민간에서는 일반적으로 닭고기를 꿩고기 대신으로 쓰기도 하였다. 바로 이러한 생활풍습으로부터 《꿩대신 닭》이라는 말이 유래되였다고 한다. 우리 인민들은 설을 쇨 때마다 떡국을 반드시 끓여 먹는것으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흔히 애들의 나이를 물을 때면 《떡국을 몇 그릇 먹었느냐.》라고 묻기도 하였다. 설날의 음식상에는 여러 가지 특색 있는 민속음식들이 오르는 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즐겁게 하여주었다. 설명절을 특별히 장식하게 한것은 여러가지 민속놀이였다” 이어서 <로동신문>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설명절 풍습에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적인 생활풍습, 아름다운 정서가 어려 있다. 우리 인민의 전통적인 설맞이풍습은 오늘 당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선군시대의 요구에 맞게 더욱 빛나게 계승 발전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과연 북한 주민들이 설날은 즐겁게 향유(享有)하고 있는지...북한 당국이 최근 ‘설명절’을 앞두고 “체제수호를 위해 경각성을 높이면서도 밝은 분위기를 조성할 것을 촉구하는 지시문을 하달”했다고 합니다. 과연 북한 땅에 지금 ‘진정한 설날’이 존재하는 것인지...한민족 모두가 함께 즐기는 2020년 ‘설’을 기대해 봅니다.// “까치 까지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우리 언니 저고리 노란 저고리/ 우리 동생 저고리 색동 저고리/ 아버지와 어머니 호사하시고/ 우리들의 절 받기 좋아하세요”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2019년 북한예술단 중국공연을 통해 본 북한 문학예술
[청로 이용웅 칼럼]2019년 북한예술단 중국공연을 통해 본 북한 문학예술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이번 공연은 중⋅북 양측의 중요한 공동 인식을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문화교류 행사이자 중⋅북 수교 70주년을 경축하는 중요 행사...문화 예술교류가 중⋅북 관계에서 특색과 전통이 풍부한 중요한 부분..이번 공연이 원만한 성공을 거둬 중⋅북 양국 인민의 우호를 증진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기대했다..."중·북의 전통적인 우의를 계승하고 각자의 사회주의 문화 건설에 적극적으로 공헌하기를 희망한다...2018년 이래 김 위원장을 4차례 만나 새로운 시기 중⋅북 양당과 양국 관계 발전에 중요한 공동인식을 이뤘다...중국은 북한과 함께 양측이 이룬 공동 인식을 잘 실현해 양국 인민의 행복과 지역 및 세계의 평화 안정 발전 번영에 적극 공헌하기를 바란다” 위는 최근 중국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북한예술단이 베이징을 방운했을 때 한 ‘말·말·말’입니다. 베이징 국가대극원에서 1월 27일 가진 이틀째 공연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부부가 관람했습니다. 1월 23일 단둥(丹東)을 거쳐 24일 베이징에 도착한 북한예술단에 시진핑 주석의 파격 행보가 이어졌습니다. 1월 27일 저녁 공연에 시 주석이 부인 펑리위안 여사와 함께 부부 동반으로 공연을 관람하고 부부가 함께 무대에 올라가 출연진과 기념사진까지 찍었습니다. 베이징 소식통은 "외국 정상 부부의 방중이 아닌 특정 단체 공연에 국가 주석 부부가 참관하는 경우는 드문 사례"라면서 "더구나 국가 주석 부부가 무대 출연진과 같이 사진을 찍는 것도 이례적"이라고 전했습니다. 중국 국가 주석 부부가 외국 정상 부부가 아닌 외국 고위급 인사 1명, 리수용 북한 로동당 부위원장을 만났다는 것도 관례상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2019년 1월 24일 리수용 북한 로동당 부위원장과 현송월 심지연악단 단장이 이끄는 북한예술단이 1월 24일 정오쯤 임시열차 편으로 베이징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280여 명으로 짜인 예술단은 국가공훈합창단과 삼지연악단 등 평양 예술가들로 구성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방한모를 쓰고 군복 차림을 한 북한 예술단원들은 기차역 플랫폼에 깔린 빨간 카펫에 내리며 중국 측의 각별한 의전을 받았습니다. 북한예술단의 베이징 공연은 지난 2015년 12월 현송월 단장이 이끈 모란봉악단의 방중 이래 처음으로, 당시 공연 시작을 몇 시간 앞두고 북·중 간 불협화음이 일면서 공연단이 갑자기 귀국해버렸습니다. 그리고...2019년 베이징 소식통은 "이번 공연단의 규모는 해외에서 진행된 공연 중에서 역대 최대"라며 "역대 최대 규모의 공연단은 올해가 북중 수교 70주년을 맞은 의미 있는 해인 데다가 최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차 방중까지 하며 양국관계가 가까워진 것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중국과 북한의 이 같은 전통적 커넥션의 복원은 2018년에 조짐을 보였습니다. 중국이 2018년 4월 김일성의 106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예술단을 북한에 파견하면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2019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중국 <신화통신>은 [북한 예술단 공연이 문화교류의 교량을 놓았다]는 제하(題下)의 기사에서 춘제(春節/·중국의 설)를 앞두고 북한예술단이 공연을 통해 중국 관중을 기쁘게 했다고 평가하고, "최근 1년 동안 북·중 문화 교류가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다"면서 중국예술단이 지난해 4월 방북한 점을 강조했습니다. <신화통신>은 "국가 간 교류는 국민끼리 서로 친함에 있다"면서 "이번 북한예술단의 방중 공연은 북·중 문화 교류를 촉진하고 양 국민의 우호 감정을 증진하며 전통 우의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진핑 주석은 ”문화 예술교류가 중⋅북 관계에서 특색과 전통이 풍부한 중요한 부분“라고 했습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중국의 ‘문학예술“ 뜻은 우리의 뜻과 다릅니다. 최근 대한민국의 한 명사는 "서로 마음을 닫고 있으면 소통이 안 되지만 시 한 편, 노래 한 곡, 영화 한 편을 같이 보면 경계를 허물고 마음을 나누게 돼요. 70년 넘게 서로 다른 체제에서 살아온 남북이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문화예술의 역할이 필요합니다."고 했습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북한의 ‘문학예술“ 뜻은 우리의 뜻과 아주 다릅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9)>(466쪽)은 “문학예술 : 문학, 영화, 연극, 음악, 가극, 미술, 무용 등 인간과 그 생활을 형상적으로 반영하는 사회적의식의 제형태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시대는 끝임없이 전진하고있으며 문학예술에 대한 인민의 요구도 날을 따라 더욱 높아지고있다. 문학예술은 마땅히 시대와 함께 전진하여야 하며 자주성을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을 선도하여야 한다.》(《주체문학론》, 3페지) 문학예술은 인간과 그 생활에 대한 형상적 화폭을 통하여 의의있는 인간문제, 사회적문제를 밝혀내며 시대의 선진사상과 사람들의 지향과 념원을 예술적으로 구현한다...”라고 했습니다. 북한 ‘주체의 문학예술’은 문학예술의 핵(核)입니다. 북한의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에서 개정된 ‘조선로동당규약’에 “조선로동당은 맑스․레닌주의와 우리나라 현실에 그를 창조적으로 적용한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주체사상을 자기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라는 말이 들어갔습니다. <조선대백과사전(19)>(373쪽)를 보면,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주체의 문학예술은 새 시대의 요구와 인민대중의 지향에 맞는 공산주의적문학예술이다. 》(《김정일선집》 3권, 30페지) 현시대는 위대한 주체시대이다.”/ 이 인용문은 김정일이 집필했다는 <영화예술론>(1973년 4월 11일)의 ‘머리말’에 기술된 글입니다. 김정일은 <영화예술론>에서 사전류에 수록되지 않은 ‘공산주의적문학예술’과 ‘공산주의문학예술’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주체의 문학예술’은 ‘주체문학예술’ 또는 ‘주체적문학예술’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주체문학’과 ‘주체예술’을 구분해서 쓰기도 합니다. ‘주체의’가 수식하거나 ‘주체’가 복합된 ‘문학예술’이 21세기에 자주 쓰이는 용어입니다. 공식적 이데올로기가 된 주체사상, 이 ‘유일사상’을 근저로 한 ‘문학예술’이라는 말입니다.  《조선말대사전》(1992년판)을 보면, “《주체사상은 사람이 세계에서 주인의 지위를 차지하고 세계를 개조하는데서 결정적역할을 한다는것을 과학적으로 해명한데 기초하여 력사의 주체인 인민대중이 자기 운명을 자체의 힘으로 개척해나가는 길을 밝혀주는 혁명사상입니다.》/ 사람중심의 완성된 세계관, 가장 완성된 혁명리론과 전략전술, 령도리론과 령도방법을 밝혀주는 위대한 혁명사상, 주체의 사상, 리론, 방법의 전일적체계로서의 위대한 김일성동지혁명사상을 주체사상이라고 말한다.”(296쪽)라고 했습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했습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2019년 북한 달력의 표지, 그리고 1월과 2월
[청로 이용웅 칼럼] 2019년 북한 달력의 표지, 그리고 1월과 2월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원래 캘린더(calendar)란 말은 라틴어로 ‘금전출납부’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옛날 로마에서는 금전의 대차 관계를 매달 삭일(朔日)에 청산하는 풍속이 있어서 결국 금전출납부가 달력을 의미하는 말로 전용(轉用)케 되었던 것입니다. H.D.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숲속의 생활>에서 “캐나다 태생의 채벌군인 그가 가진 책이라곤 한 권의 달력과 한 권의 수학책 뿐 이었다. 달력은 그에게 일종의 백과사전이었다. 그는 달력 속에 인류 지식의 요약이 들어있다고 보았다.”라고! 1년 365일을 순서대로 표시한 캘린더는 월 단위로 된 월력이 많지만 하루에 한 장씩 떼는 일력, 3개월 단위로 된 것, 1년을 한 장으로 표시한 것 등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탁상형과 벽에 매다는 것 등등...북한도 매년 달력을 발행합니다. 북한 외국문출판사에서 발행한 북한의 2019년 달력 표지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외국문출판사(foreign Languages Publishing House, DPRK)/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The great Comrades Kim Il Sung and Kim Jong IL Will Always Be with Us.)"/"새해를 축하합니다.(Happy New Year.)"/"주체(JUCHE) 108(2019)]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0돐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의 홍보 로고(logo)와 악단 지휘자, 장고 치는 여배우, 태권도하는 청년, 5월1일 경기장! 2018년 9월 9일 북한이 정권수립 70주년을 맞아 준비한 열병식만큼이나 전 세계 관심을 끈 것은 체제선전용 집단체조인 <빛나는 조국> 입니다. 평양 ‘5월1일 경기장’에서 첫 선을 보인 집단체조는 드론, 레이저, 영상 기술 등 최신 기술이 총동원된 것으로 반미구호는 사라진 대신 남북 정상 회담을 비롯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외교를 자축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습니다. 드론 대형이 경기장 상공에서 ‘빛나는 조국’이라는 문구를 연출하고 대규모 카드섹션을 통해 만들어진 스크린에서는 남북정상 회담의 영상이 방영되기도 했습니다. 2013년까지 공연했던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에서는 볼 수 없던 기법들이 도입된 <빛나는 조국>은 ‘아리랑’과 마찬가지로 체제 선전과 관광수입이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지에 있는 5월1일 경기장은 평양 릉라도에 있는 15만석 규모의 경기장으로 과거 집단체조 ‘아리랑’이 공연됐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관람석 가격은 특등석 800유로(약 103만원), 1등석 500유로(약 64만원), 2등석 300유로(약 38만원), 3등석 100유로(약 13만원)! 외화벌이는 자명(自明)한 사실입니다. 북한은 이것을 달력 표지에서 확실히 밝히고 있습니다. 2019년 1월 19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에 따르면 '빛나는 조국'의 총연출을 맡은 김목룡(70) 피바다가극단 총장은 인터뷰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남측 성원들이 긴장감을 가지지 않도록 노래도 계몽기 가요들과 통일 주제의 가요들로 선정하도록 했다"며 이같이 밝혔습니다. 남북정상회담 기간 중 문재인 대통령은 9월 19일 밤 10시 20분 쯤 평양시 릉라도 5.1경기장에서 <빛나는 조국>을 관람 한 뒤 15만 명 북한 주민 앞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예술 공연이 정치에 이용된 것입니다. 5.1 경기장은 1989년 5월 1일 로동절에 준공되었습니다. 착공 당시에는 ‘릉라도 경기장’으로 불리다가 1989년 4월 중앙인민위원회에서 ‘인민대 경기장’이라고 명명하였으나, 이틀 뒤 중앙인민위원회에서 다시 5.1경기장 명칭으로 확정했습니다. 5월 1일 경기장이라는 이름은 준공식이 국제 로동절인 5월 1일이라는 점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리고 표지에 있는 “주체(JUCHE)”는 죽은 김일성 주석이 태어난 1912년을 기점으로 한 북한의 연도 표기법입니다. 달력 1월에는 “소한 1.6/ 대한 1.20”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0돐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의 로고와 공연 사진 이인무(二人舞) 뿐입니다. 차마 김정은의 신년사는 넣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달력 2월에는 [립춘 2.4/ 우수 2.19/ 2.16. 광명성절.(February 16 : Day of the Shining Star.)/ 주체 31(1942) 2.16.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탄생하시였다.(February 16, Juche 31(1942) : The great learder Comrade Kim Jong IL was born.)/ 주체 37(1948) 2.8.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조선인민군을 창건하시였다.(February 8, Juche 37(1948) The great Comrade Kim Il Sung founded the Korean People‘s Army.)/ 주체 101(2012) 2.14.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원수칭호를 받으시였다.(February 14, Juche 101(2012) The great Comrade Kim Jong Il was honoured with the title of the DPRK Generalissimo.)/ 2. 5. 설명절(February 5 : Lunar New Year's Day./ 2.19. 정월대보름(민속명절).(February 19 : Jongwoldaeborum, the 15th day of the first month by the lunar calendar.(Korean folk festival)]가 적혀 있습니다. 위의 “김일성동지께서 조선인민군을 창건”이라는 문귀(文句)는 역사적 사실일 뿐입니다. 북한의 ‘설명절’과 ‘정월대보름’은 2월에 본(本) 칼럼에서 소개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2월 내내 북한의 언론 매체를 뒤덮을 김정은 위원장의 부친 생일 관련 글들도 매한가지입니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광명성’은 1965년에 발행된 <조선어사전>에는 없는 어휘인데, <조선어대사전>(1992년)에는 “① 환하게 빛나는 별 ② 항일혁명투쟁시기; 환하게 빛나는 별이라는 뜻으로 《친애하는 김정일동지》를 높이 우러러 이르는 말. 최근에는 ‘백두광명성’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김일성이 김정일 생일(1992.2.16)에 썼다는 송시, 김일성의 붓글씨 한자 7언 송시’! 다음은 김일성의 <광명성찬가> 입니다. “白頭山頂 正日峯(백두산정 정일봉) 백두산마루에 정일봉 솟아있고/ 小白水河 碧溪流(소백수하 벽계류) 소백수푸른물은 굽이쳐흐르누나/ 光明星誕 五十週(광명성탄 오십주) 광명성탄생하여 어느덧 쉰돐인가/ 皆贊文武 忠孝備(개찬문무 충효비) 문무충효 겸비하니 모두다 우러르네/ 万民稱頌 齊同心(만민칭송 제동심) 만민이 칭송하는 그 마음 한결같아/歡呼聲高 震天地(환호성고 진천지) 우렁찬 환호소리 하늘땅을 뒤흔든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2012년 1월 12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특별보도’를 통해 “주체의 최고 성지인 금수산기념궁전에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를 생전의 모습으로 모신다”고 공표했다고 보도했고, 김정일 생일인 2월 16일을 ‘광명성절’로 제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2019년 북한 달력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주체사상의 365일’ 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