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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로 이용웅 칼럼] '아르코'와 평론가 황현산, 돼지우리와 연출가 손진책
[청로 이용웅 칼럼] '아르코'와 평론가 황현산, 돼지우리와 연출가 손진책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필자는 2018년 8월 8일 일본 대마도 여행을 시작, 10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귀가해서 친구의 부고(訃告)를 접했습니다. -“황현산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1945년)이 향년 73세로 8일 별세했다. 황현산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1일 (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나주 본관서 취임식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했으나 2018년 3월 2일 건강상 의 이유로 사직했다...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강원대학교 문과대학 교수(1985.3~1993.2),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1993.3~2010.3) 등을 거쳤으며...”- ARCO!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라는 거대한(?) 단체의 수장(首長)이라는 자리에 불과 96일 동안 앉았다가 병마(病魔) 때문에 사임하고, 다섯 달 만에 이승을 하직한 황현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그는 2015년 담도암 진단을 받아 치료를 받았으며 2017년 12월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으나 암이 재발하면서 두 달여 만에 사직! 프랑스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1880~1919년)를 사랑했던 문학평론가 현산! 그는 불문학계에선 필자의 후배이지만 동갑내기이며 동료 교수였습니다. 그의 첫 강단(講壇)은 필자와 함께 근무했던 경남대학교 불어불문학과였습니다. 그의 이력(履歷)에서 의미가 큰데, 그의 부고에는 빠져 있었습니다. 왜? 현산에게 교수의 길을 열어준 경남대학교가 국립(國立)도 아니고 고대(高大)가 아니라서? 참 선(善)하고 똑똑한 친구였는데...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그의 죽음을 앞당겼다는 헛된 망상(妄想)을 해보았습니다.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 다시 빌어봅니다. 2018년 9월 9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정권수립일 이른바 99절 70주년을 맞아, 아침 일찍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김일성, 김정일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태양궁전을 찾은 날! 필자는 연출가 손진책 님의 연극 <돼지우리>에의 초대로 대학로를 찾았습니다. 그와 담소(談笑)를 나누고 팜플렛을 받았는데, 그 안에 갇힌 <돼지우리>가 있었습니다. 표지에는 “올해의 아르코 파트너. BEST & FIRST 베스트 앤 퍼스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Arts Council Korea"라고 되어있었습니다. 문화예술의 연구·창작·보급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설립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은 2005년의「문화예술진흥법 개정법률」(법률 제7364호)에 따라 같은 해 8월 민간 자율 기구로 새롭게 출범했습니다. 그 전에는 공식 명칭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었습니다. 팜플렛의 서두(序頭)에는 ‘위원회 위원장 직무대행’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현산이 살아있었으면 여기에 멋진 글을 올렸을텐데...또 한번 헛된 망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팜프렛 표지에 외래어가 왜 이렇게 많을까요? 내용을 보니 'Best & First 연극‘ 4편, 'Best & First 무용‘ 4편...80쪽이 넘는 팜플렛은 고급스러웠습니다. 연극 네 편은 모두 번역극이었습니다. 그런데 ’직무대행‘의 인사말에는 왜 번역극만 공연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한반도의, 한민족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는 거리가 좀 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득 예산 규모가 알고 싶었습니다. 국민의 세금이 몇 %가 되는지도 알고 싶었습니다. 연극 <돼지우리>의 시놉시스 -전쟁 중 탈영한 파벨은 집 안의 축축하고 음산한 돼지우리에 숨어살고 있다. 아내 프라스코비이는 그런 남편을 숨긴 채 전몰군인의 미망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전승기념일, 전몰장병 추모비 제막식이 열린다. 파벨은 이날이야말로 돼지우리에서 나와 자신의 존재를 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시끄러운 돼지우리 안에서 열심히 연설문을 남독하는 연습을 한다. 하지만 프라스코비야는 남편의 기념식 참석을 반대한다. 파벨은 이미 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사해 훈장 까지 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대로 세상에 나가면 어떤 위험이 닥칠지 알 수 없는 삼황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깥 공기가 너무나도 그리웠던 파벨은 급기야 여장을 하고 새벽 거리로 나오게 되는데.. - 팜플렛에는 분명 돼지우리 안에 <돼지우리>가 갇혀 있었는데, 무대의 돼지우리는 자유의 상징이었습니다. 지루하리라 예상했던 ‘살기위해 돼지우리에 숨어 지냈던 탈영병, 그 41년간의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한국연극의 밝은 미래를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내 영혼마저 이 돼지우리와 똑같아 지는 건가?”라고 외친 파벨(박완규)의 나신(裸身)은 섹스와 무관한 자유인이었습니다. 그의 연기는 근래에 보기 힘들었던 열연(熱演)이었습니다. 연출·연기·무대미술의 삼합(三合)은 ‘목포 홍어 삼합’보다 더 맛있었으며, 근래에 보지 못한 수작(秀作)이었습니다! 극장 로비에서 다시 만난 연출 손진책 친구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연극 <돼지우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세계적인 작가 아돌 후가드(Athol Fugard/1932년생)의 작품으로, 지난 봄 많은 박수를 받았던 <3월의 눈>의 손진책(극단 미추 대표)님이 연출을 맡았습니다. 그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내 연극정신은 마당정신이다. ‘지금 여기에서 인간다운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마당정신이라고 본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문제의식이 일맥상통한다. 전통극의 현대화는 평생의 화두지만 억지로 기법이나 형식에 얽매일 생각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작품의 선택 기준에 대해 “푸가드가 평생 일관되게 밀고 나간 인권, 실존, 두려움에 관한 주제 의식이 이 작품에도 녹아 있는데, 유독 저평가됐다. 어떤 면에서 사회나 국가도 우리의 ‘돼지우리’일 수 있다. 우리의 현재와 연결되는 지점을 고민하며 골랐다.”고 했습니다. 극단 미추는 1986년 8월 윤문식, 김종엽, 김성녀, 정태화를 비롯한 30여 명의 단원을 주축으로 연출가 손진책에 의해 창단된 단체로, 민족극 정립에 앞장서 온 단체로 마당놀이를 우리 땅에 정착시켰으며, 창극과 꼭두각시 놀음 등을 지속적으로 공연해왔습니다. 또한 당시의 사회상과 어우러진 작품들로 전통극과 현대극, 뮤지컬을 넘나들며 대중과 만나온 한편 활발한 해외 활동을 통해 우리의 작품을 유고, 헝가리, 중국, 미국 등의 외국에 알렸습니다. 1996년 경기도 양주군에 극장과 교육시설 등을 갖춘 미추산방을 열었습니다. 손진책의〈돼지우리>!“공연기간: 2018.09.08.~2018.09.22./ 시간: 화~금 20:00 / 토~일 15:00 / 월 쉼/ 장소: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입니다. 110분 동안 열연한 파벨 역의 박완규와 프라스코비야 역의 고수희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연출 손진책 친구에게도 박수를! 많은 사람들이 아르코예술극장 앞에 장사진(長蛇陣)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2008년과 2018년의 9월 9일, ‘공화국창건기념일’
[청로 이용웅 칼럼]2008년과 2018년의 9월 9일, ‘공화국창건기념일’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의 <로동신문>은 2008년 9월 8일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라는 글을 게재(揭載)했습니다. 이 수필은 “뜻 깊은 9월의 푸른 하늘가에 울려퍼지는 한편의 노래가 우리 천만군민의 가슴을 한없이 격동시킨다./ 백두산 천지에서 제주도 끝까지 새 기발 높이여 삼천만은 나섰다. 산천도 노래하라 이날의 감격을 조선은 빛나는 인민의 나라다.”로 시작되는데, 김정일이 “9월 9일은 우리 인민이 수령님을 처음으로 국가수반으로 모신 날이라고, 우리는 수령님께서 이어주신 우리 민족의 력사를 계속 빛내여가야 한다고 절절하게” 말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2008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60돐”로 독재자 김정일에게는 뜻 깊을 수 밖에 없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니 환갑잔치를 잘 할 수 밖에... 2008년 9월 9일! 그날 희한(稀罕)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이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 드리는 축하문”을 보냈습니다. 이 축하문은 김일성에게 “가장 숭고한 경의”를, 김정일에게는 “최대의 영광과 가장 열렬한 축하”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김정일이 “곧 위대한 김일성”이며, 김정일이 있기 때문에 “주체의 태양으로 영생”하고 “우리 공화국이 김일성조선으로 세기를 이어 빛을 뿌리고 있다는 것이 전체 인민군장병들과 인민들이 심장깊이 체득한 고귀한 진리”라고 했습니다. 세계사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2008년 9월 9일을 전후해서 북쪽 땅 곳곳에선 김일성 부자 우상화를 위한 문화 행사들이 다양하게 펼쳐졌습니다. 2008년 8월 4일 시작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아리랑》'과 정권 수립 60돌을 기념해 특별히 만든 집단체조 '번영하라 조국이여'도 평양 릉라도 5월1일경기장에서 낮 시간대에 공연되고 있는 등 문화 행사가 이어졌습니다 기념주화도 발행되었습니다. 2008년 9월 8일 자(字) <로동신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제2879호’을 실었는데, 제목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60돐을 맞으며 기념주화를 발행함에 대하여” 입니다. 그런가 하면 ‘평양 9월 7일발 조선중앙통신’은 “조선에서 공화국창건 60돐 경축행사들 계속 진행”이라는 ‘보도’에서 “6일에는 청년학생들의 경축모임과 전국녀맹원들의 웅변모임, 농근맹중앙예술선전대 공연이 각각 진행되였다...농근맹중앙예술선전대 공연무대에는 설화와 합창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 녀성3중창 《휘날려라 공화국기 우리 삼색기》, 녀성독창 《수령님 모시고 천년만년 살아가리》 등의 종목들이 올랐다. 출연자들은 종목들에서 사회주의나라를 세워주시고 조국번영의 만년토대를 마련해주신 김일성동지와 주체조선의 존엄과 위용을 온 세상에 떨쳐주신 김정일동지의 불멸의 업적을 높이 칭송하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9월 9일 자 <로동신문>은 사설 등 많은 기사를 실으면서 북한 시인 김상호의 서정시 <나의 조국>(아래 발췌)을 게재했습니다. / “알지 못해라 언제부터 나의 가슴에 깃들었는지 아마도 그것은 나의 첫 삶과 함께 이미 조용히 자리 잡은 것이리.../ 조국이여, 너는 세기의 하늘높이 나래 쳐오르는 세찬 퍼덕임 그 아득한 높이의 빛발 찬란한 우리의 미래/ 그 미래를 바라보며 온갖 시름 잊은 얼굴들이/ 로동의 기쁨안고 돌아오는 락원의 거리/ 무수한 배움의 창문을 비쳐드는 해살과/ 보육원들이 지켜선 애기들의 고요한 숨결.../그렇다, 조국은 수령님 찾아주신 우리의 삶 수령님 안겨주신 우리의 긍지 영원한 영원한 그이의 품/ 그 품이여라! 조국이여 나의 조국이여”// 김일성 부자를 위한 일종의 우상화 시(詩)입니다. 2008년의 ‘잔치’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행사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2006년에 발행된 <조선말대사전>은 “9.9절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기념일”(433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기념일 =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주체 37(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신 불멸의 업적을 영원히 빛내이고 후세 길이 전하기 위하여 해마다 국가적 명절로 기념하는 9월 9일.”(1406쪽)이라고 했습니다. ‘불멸의 업적’을 남긴 김일성...어처구니(於處軀尼) 없습니다. 그러면 2018년 9월 9일의 ‘칠순잔치’는? 김정일이 2011년 12월 17일 아버지가 이승을 하직하자, 김정은 새 수장(首長)은 2012년 2월 12일 제3차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2016년 두 차례 1월 6일 제4차, 정권 수립 68주년 기념일인 9월 9일 제5차 핵실험을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2017년 ‘신년사’에서 “지난해 우리 공화국에 대한 제국주의 반동세력의 정치·군사적 압력과 제재책동이 극도에 달하였지만, 우리 군대와 인민의 필승의 신념을 꺾지 못하였으며 주체 조선의 도도한 혁명적 전진은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점잖게 말했습니다. 그러고도 2017년 9월 3일 북한은 제6차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2018년 천지가 개벽(開闢)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2018년 2차 남북정상회담(南北頂上會談/북한;북남수뇌상봉(北南首腦相逢)이 9월 18일 평양에서 2박 3일 개최됩니다. 2018년 9월 9일을 전후해서도 이처럼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고 있고, 말도 많습니다. 문정인 대통령 최측근(?)임을 자랑하는 사람은 9월 6일 김정은에 대해 "남에 대한 배려도 보이는 지도자"라고 호평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김 위원장은 집권한 이래 정권 수립 기념일엔 처음으로 군 장성 인사가 단행했습니다. 2018년 9월 9일 북한은? 북한에도 “신뢰”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북한 <조선말대사전>은 “신뢰-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 또는 믿고 의지하는 마음. / ~를 표시하다. /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에 대한 세계 진보적 인류의 다함없는 존경과 신뢰는 국제친선전람관에 전시된 하나하나의 선물들마다에 뜨겁게 어려있다.”라고 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 님! 많은 한민족들이 당신을 신뢰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이 ‘핵폐기’하겠다고 말하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2018년 9·9절에 당신의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빨찌산 김성주·주석 김일성
[청로 이용웅 칼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빨찌산 김성주·주석 김일성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 <로동신문>은 “공화국과 더불어 길이 전할 이야기/ 존엄 높은 국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기사를 게재(揭載)했습니다. 기사 내용을 소개하면, 먼저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의 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일찍부터 인민을 하늘같이 내세우시고 국호도 군대이름도 기념비적 창조물 명칭도 나라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많은 것들을 인민이라는 말과 결부시켜 부르도록 하시였다.”는 말을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이 “새로 창건될 국가의 이름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부를 것을 발기하시였을 때였다...수령님께서는 일부 사람들이 국호에서 《인민》을 빼자고 하였을 때에도 이것은 결국 남조선의 극우익반동들이 주장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을 비호하고 그를 따르려는 위험한 사상이다, 《민주주의》를 빼자는 주장 역시 위험한 견해이다. 이 주장은 우리 혁명발전의 현 단계의 임무를 옳게 인식하지 못하고 특히 조국이 남북으로 갈라진 조건에서 혁명을 수행한다는 것을 무시한데서 나오는 매우 그릇된 주장이라고 하시며 주체성과 인민성이 없는 견해들을 단호히 쳐갈기시였다.”고 기술했습니다. 이어서 신문은 “어버이수령님의 애국, 애족, 애민의 세계가 낳은 우리 공화국의 국호는 김일성 조선의 존엄과 영광의 상징이다. 불패의 강국으로 솟구쳐 오른 내 조국의 모든 승리와 영광은 자랑스러운 국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더불어 온 누리에 빛을 뿌리고 있다. 우리 군대와 인민은 어버이수령님의 위대하고 불멸할 건국업적을 심장깊이 간직하고 경애하는 장군님의 선군혁명령도를 충직하게 받들어 내 나라, 내 조국을 주체의 강성대국, 부강번영하는 김일성조선으로 길이 빛내여 나갈 것이다.”라고 끝을 맺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김일성 주석님!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필자는 과거 일간지 칼럼 <합포만>에서 그를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필자가 잘못한 것일까요? 여기서 그 칼럼 일부 소개하겠습니다. 글은 “김주석(金主席)님, 천청풍난(天淸風暖)하고 일길신량(日吉辰良)한 계절에 생일을 맞이하게 된 주석님이 오랜 세월동안에 이룩한 업적에 대해 불경스런 고언(苦言)을 보내게 돼 죄송합니다. 대한민국은 옛날부터 동방의 예의지국이어서 어른을 무척 공경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님”자를 붙였습니다만, 그렇게 부르는 국민들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구요(?) 그건 김 주석님의 출생신분 때문도 아니고, 거짓투성이인 이력서 때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석님이 진정한 한민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김 주석, 최근 발견된 문서를 보면 주석은 “1931년부터 1940년까지 만주에서 빨치산활동을 하다가 일본군 토벌작전에 밀려 소련으로 들어가 1942년 7월 적군(赤軍), 즉 소련극동군에 가담한 것”이 확실하더군요. 김 주석은 그때부터 1945년 시월까지 소련만을 위해 싸운 덕분에, 소련의 훈장을 가슴에 주렁주렁 달게 된 ‘로스케’가 된 것입니다...그건 얼마 전, 당시의 군사령관 레베데프가 소련 군정의 정책이 “조선을 해방시킨 위대한 붉은 군대에 대한 선전”과 “전 인류의 태양,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가 이끄는 영광된 사회주의에 대한 선전”이었다고 증언하면서,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김일성(金日成)만 지도자로 부각시켰다”고 덧붙인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레베데프의 고민이 “엉터리 장군의 영웅화”였다고 하니 유구무언(有口無言)입니다. 그래도 레베데프는 소련만을 위해 일을 했답니다. 그는 조국을 위해 “김일성을 항일 민족 영웅으로 만드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회상을 했습니다. 마침내 당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곧바로 소련의 사주(?)로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남침(南侵)을 자행했습니다. 그걸 보면 당신은 분명 ‘로스케’의 분신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잔악무도한 남침을 했겠습니까...”라고 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과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시고 ‘조국해방전쟁’을 일으키신 훌륭한 독재자! ‘김일성 주석’님! 과거의 결례(缺禮)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김성주(金成柱 또는 金聖柱) :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동 칠골 출생’은 누구인지...북한 <로동신문>은 2018년 9월 들어 “존엄높은 국호-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기사는 아니지만, 많은 9.9절 관련 기사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가령 2018년 8월 26일 자(字) <로동신문>(1면)은 김일성 부자(父子)의 동상 앞에 모인 군중들 사진과 함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의 동상에 인민군 장병들과 근로자들, 청소년학생들 꽃바구니 증정”이라는 기사를 썼고, 8월 27일 자(字)는 “세계 진보적 인류는 조선 인민과 함께 공화국 창건 일흔 돐을 뜻 깊게 맞이할 것이다. 여러 나라에서 경축준비위원회 결성”이라고 했습니다. 작년에도 유사한 기사를 보도한 <로동신문>! 그리고 “자력자강의 승전 포성 높이 울리며 9월의 경축광장에 떳떳이 들어서자. 증산돌격운동의 앞장에 서도록”이라는 기사도! 최근 미국의 대북 전문매체<38노스(38North)>는 북한의 정권수립 70주년 기념일인 9.9절 열병식 규모가 앞서 올해 2월 8일로 날짜를 바꿔(기존 4월25일) 거행한 인민군창건기념일 열병식을 크게 뛰어넘을 것(Surpass)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로이터통신>은 지난 2월 건군절 열병식과 비슷한 규모로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고 9월 1일 보도했습니다. 그것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 외신들이 난리굿입니다. 9월 9일 보면 알 것을! 이제부터 주목되는 것은 미국과 동남아 주요 국가들의 행보입니다. 9월 5일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가지고 평양을 방문한 대북특사단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났고, 중국 시진핑은 제3인자를 특사로 파견하기로 했습니다. 일본 아베는 열외(?)이고, 러시아 푸틴은 북한 방문 계획이 없다고 밝혔으며, 미국 트럼프는 비핵화 프로세스에 빠져 정신없고...북핵문제+북인권문제가 이슈가 될 2018년 9월 유엔총회 때문에 9.9절이 차분하게? 프랑스 계몽사상을 대표하는 몽테스키외(1689~1755년/Montesquieu)는 <법의 정신(De l'esprit des lois)>에서 “공화국은 사치에 의하여 멸망하고, 독재국은 빈곤에 의해 멸망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나라든 국가(國家)는 신성(神聖)하기 까지 한 것입니다. 국가는 함부로 단정 지어서 말할 수 없는 낱말입니다. 곧 국가 창건일을 맞는 북한이 몽테스키외 말에 해당하는 나라 소리를 안 듣기를 바랍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량강도 김정숙군 신파혁명사적지의 전모(全貌)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량강도 김정숙군 신파혁명사적지의 전모(全貌)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최근 남한의 북한 전문 언론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김일성 가문(家門)의 우상화물이 설치된 지역의 주변 도로를 지나가던 한 주민이 동상 초소 경비대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중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8월 18일 오후 ‘양강도’ 김정숙군에 있는 신파혁명사적지 주변을 지나가던 20대 청년이 초소 통과를 요구하자 경비대가 우회할 것을 요구하면서 시비가 붙었고, 폭행을 당한 청년이 병원에 급히 실려갔지만 의식이 회복되지 않고 있다고 내부 소식통이 8월 26일 전했다고 합니다. 소식통은 위 언론매체와의 통화에서 “이곳 혁명 사적지와 김정숙 동상은 평소에도 무장 경비대가 주야로 보초를 서고, 특별 관리를 하고 있다”면서 “폭염 속에서 사적지 주변을 지나던 청년이 통과를 요구하자 경비대가 이를 거부했고, 이 와중에 격한 말들이 오고가면서 충돌이 발생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신파혁명사적지는 1930년대 후반 김정숙이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이 지역에 조국광복회 지하 조직 등을 건설했다고 북한 당국이 선전하는 곳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김정은 집권 이후 김씨 일가 사적지와 동상 훼손과 공격 시도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주변에 감시 초소 증설, 순찰대 편성 등 경비를 대폭 강화해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집권 이후’가 아닙니다. 김정일 시대에는 더 했습니다. 북한에는 ‘양강도’는 없고 ‘량강도’가 있습니다. 량강도(兩江道) 김정숙군(金正淑郡)은 남한의 인터넷 사전에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전은 “양강도의 북서부 압록강(鴨綠江) 연안에 위치하며, 동쪽은 삼수군(三水郡), 서쪽은 김형직군(金亨稷郡), 남쪽은 함경남도(咸鏡南道) 부전군(赴戰郡)과 자강도(慈江道) 낭림군(狼林郡), 북쪽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하여 있다...1981년에 신파군(新坡郡)을 김정숙군으로 개칭하였다. 신파군은 1952년에 신파지구를 중심으로 설립된 군이라는 데서 비롯된 이름인데, ‘신파’는 ‘신갈파(新乫坡)’의 준말이다. 신갈파는 1444년 경에 갈파지역에 새로 개척된 고장이라는 뜻이고 ‘갈파’는 갈과 칡이 많은 고장이란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북한에서는? 북한 <조선대백과사전(4)>은 “김정숙군 : 량강도 북서부 장진강 류역에 있는 군...군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1968년 7월에 친히 찾아주신 특별한 곳이다. 군에는 불요불굴의 공산주의 혁명투사이신 김정숙동지께서 1937년 여름에 혁명활동을 벌리신 사적이 깃들어있다...군에는 불요불굴의 공산주의 혁명투사이시며 항일의 녀성영웅이신 김정숙동지의 동상이 정중히 모셔져있다. 또한 혁명사적비와 헌시비가 세워져있으며 ⪡신파혁명사적관⪢과 신파혁명사적지, 장항혁명사적지가 꾸려져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일개 행정구역을 이렇게 설명하는 나라는 지구상에 없을 것입니다. 과거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도 예를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김정숙군의 설명에 있는 ‘신파혁명사적지’가 바로 앞의 폭행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김정숙의 아들 김정일이 살아있던 2006년에 북한 월간 홍보잡지 <조선>(8월호)은 “신파혁명사적지”라는 기사에서 “항일의 영웅이신 김정숙동지의 혁명활동 자료들이 보존되여 있는 신파혁명사적지는 량강도 김정숙군에 자리잡고 있다...김일성주석께서는 주체26(1937)년 봄 김정숙녀사께 도천리를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신파에 나가 삼수지대에 지하조직망을 꾸리고...조국광복회 조직망을 확대할데 대한 임무를 주시였다. 그때 5월 신파에 나오신 녀사께서는...적극적인 혁명활동을 벌리시였다.”고 기술했습니다. 잘 꾸여진 픽션 드라마 ‘젊은 혁명가 부부의 독립운동’이 연상(聯想)되는 것은 왜 일까요? ‘불요불굴(不撓不屈/의지 따위가 흔들리지 않고 굽힘이 없음)’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뿐 더러, 각본(?)이 미숙하다는 판단입니다. 김정숙! <조선대백과사전(4)>은 “김정숙(1917.12.24.~1949.9.22.)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끝없이 충직한 친위전사이시며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어머님이시며 불요불굴의 공산주의 혁명투사이신 항일의 녀성영웅! 함경북도 회령시 오산덕의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가정에서 탄생하시였다. 모진 가난으로 하여 정든 고향을 떠나는 일가와 함께 1922년 봄 두만강을 건느신 김정숙동지께서는 연길현 북구에서...생활하시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섯 살 때 고향을 떠났다는 얘긴데, 지금 그곳은 김정숙 우상화의 도시처럼 되어 있습니다. 아들 김정일 덕분에! 과거 구(舊) 소련연방의 하바로프스크 교육대학교와 경남대학교간의 국제교류에 대한 세부규약을 확정하기 위해 출장을 갔었는데, 그 때 로마노프 총장이 필자에게 북한 서적 <문예론문집(4)> 등을 선물했습니다. 그 속에서 “불후의 고전적 명작-나의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허룡갑이라는 문학비평가의 글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불후의 고전적 명작’이라니!!! 그 어머니가 ‘김정숙’입니다. “불후의 고전적 명작-나의 어머니 ; 세월의 눈비를 다 맞으시고 나를 품어 키우신 나의 어머니/ 만가지 소원을 헤아려 보시며 조선의 고운 꿈 꽃 피워 주셨네/ 비 와도 눈 와도 먼 길 떠나도 손 잡아 이끄신 나의 어머니/ 순간을 살아도 빛나게 살라고 길러 준 그 품을 내 어이 잊으랴/ 기쁘나 힘드나 부르고 싶은 정답고 미더운 나의 어머니/ 그 은혜 못 잊어 세월의 끝까지 수령님 받들어 한길을 가리라/ 어머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뜨거운 그 사랑 내 크게 알았네. / 주체 49(1960).7.15.” 김정일의 “나의 어머니”가 고전적 명작이라는 것도 유구무언(有口無言)이고 , 더 더욱 시(詩) 속에 “세월의 끝까지 수령님 받들어 한길”을 간다고 한 것도 후계자 야욕의...우리 속담에 “어머니 품속에 밤이슬이 내린다.”고 했습니다. ‘밤이슬’은 따뜻하게 감싸 주거나 보호해 주는 환경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사별한 어머니를 그리는 노래가 하늘나라 김정숙의 품속에 ‘피이슬’을 내리게 한 것은 아닌지...그래도 그리운 모정은 있었겠지요! 김정은 위원장은 아버지처럼 할머니를 정치에 이용하지 않으리라 믿어봅니다. 특히 할머니를 우상화하는 것도 가족의 입장에서 중요하겠지만,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지도자가 되기 바랍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청년절의 내막(內幕)과 자랑스런 ‘불령선인(不逞鮮人)’
[청로 이용웅 칼럼]북한 청년절의 내막(內幕)과 자랑스런 ‘불령선인(不逞鮮人)’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은 매년 8월 28일을 1927년 고(故) 김일성 주석이 결성했다는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의 창립 기념일로서 1991년 2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을 통해 '청년절'로 지정했습니다. 매년 이날에는 체육행사와 문화행사 그리고 정치행사들이 다채롭게 진행되는데, 청년절을 청소년을 위한 북한의 사회주의 명절이라고 하면서 2018년에도 많은 행사가 펼쳤습니다. <조선중앙통신>은 2018년 8월 29일 청년절을 축하하는 청년·학생들의 무도회가 8월 28일 청년중앙회관 무도회장에서 개최됐다고 보도하면서, 이날 각 도 소재지에서도 청년·학생들의 청년절 경축 무도회가 열렸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이 각지 공장, 기업소, 농장, 대학에서 청년·학생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런 행사 중에서 하나를 소개합니다. <조선중앙통신>은 “청년절 경축 청년중앙예술선전대 공연 《태양을 옹위하는 청춘의 노래》가 28일 청년중앙회관에서 진행되였다. 공연무대에는 대화시 《금방석》, 녀성독창 《복받은 인민의 노래》, 혼성4중창 《인민이 사랑하는 우리 령도자》, 선동과 남성4중창 《사회주의 지키세》 등 다채로운 종목들이 올랐다. 출연자들은 종목들을 통하여 조선청년운동을 승리의 한길로 이끌어오신 위대한 김일성대원수님과 김정일대원수님의 업적과 청년중시사상을 빛내여가시는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의 위대성을 칭송”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겉으로는 ‘청년 주시’인데 청년절의 속에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이 있습니다. 남한의 MBC는 8월 28일, 북한 <로동신문>이 ‘청년동맹’의 명절인 청년절을 맞아 경제건설에서 청년들이 선봉에 서야 한다고 강조했고, 1면 사설을 통해 '청년들이 경제건설 대진군의 선봉에서 영웅적 위훈을 창조해가자'는 제목으로 이같이 밝혔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로동신문>은 "수많은 청년이 증산투쟁과 돌격투쟁을 맹렬히 벌여 경제 계획을 앞당겨 완수하는 등 선봉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MBC는 2017년 청년절에는 "청년들은 핵폭탄이 돼라"고 독려했었다고 비교해서 보도했습니다. 청년동맹! 북한은 청년동맹의 효시(嚆矢)는 1926년 김일성이 조직한 '타도제국주의동맹'의 주역들이 1927년 8월 28일에 결성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해방 후 결성된 '북조선 민주청년동맹', 6.25 전쟁 이후 '조선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김일성 사후인 1996년 1월 19일, 김일성 우상화를 위하여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이름을 변경되었습니다. 2016년 8월에는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으로 바꾸면서 '사회주의'의 명칭을 삭제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조선로동당규약 제9장에는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은 조선청년운동의 개척자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몸소 무어주신 주체적인 청년조직이며 주체혁명 선군혁명의 대를 이어 나갈 당의 정치적 후비대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편찬한 <조선통사(하)> ‘1958년 판’을 보면 1927년에 대한 글은 “1927년 1월 한강 연안 운빙(運氷) 노동자 1,000명의 파업, 5월 전북 김제 노동조합원 300여명의 5.1절 기념시위와 동맹 파업, 그리고 대구 조선제지회사 여성노동자 700여명의 집단적 태업투쟁, 9월 경성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의 조선인 노동자 100여명의 파업, 10월~12월 함남 영흥 흑연광산 300여명의 파업과 시위” 등이 있는데, 어디에도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에 대한 글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조선노동총연맹은 1927년 9월에 조선노동총연맹과 조선농민총연맹으로 분리”되었다고 기술했습니다. 또한 1925년에 조직되었다는 조선노동당이 1928년에 해산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에도 관련 글이 전혀 없습니다. 아마 1991년 2월 직전에 최종적으로 만들어낸 픽션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이 조선에 없었다는 얘기? 여기서 문득 한 ’조선청년“이 생각나서 소개합니다. 1927년에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던 청년! 2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도 끝까지 의지를 잃지 않았던 한 의사(義士)의 이야기입니다. 의사 박열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하고 고향 문경에 돌아가서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습니다...의사는 검찰에 기소된 이후,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총 21회에 걸친 신문조사를 받았습니다. 조사과정에서 그는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습니다. 박열은 조선시대의 관복과, 신랑이 혼례 때 예복으로 입던 사모관대 차림으로 법정에 출정했습니다. 또 재판장은 피고라고 하지 않고 '그편'이라고 부르고 박열은 재판관을 '그대'라고 호칭했습니다. 실제로 일본 재판 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1926년 3월, 박열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1주일 만에 특별 감형시킨다고 발표했습니다. 사형 판결 후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의사는 독립운동 역사상 최장 기간인 22년이 넘는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도 대역 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그해 10월 27일 44세의 나이가 되어 석방됐습니다. 그 후 6·25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고, 1974년 1월 17일 생(生)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2017년 6월,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로 환생했습니다. 일본인들은 그를 '최악의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1927년에도 감옥에 있었던 박열은 김일성이 외쳤던 ‘조선청년’이 아니고,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한반도의 청년이었습니다. 끝으로 북한 청년들에게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의 태두(泰斗), “목로주점”의 에밀 졸라(1840~1902년)의 말을 전합니다. “청년이여, 청년이여, 항상 정의와 더불어 있어라. 만약 정의의 관념이 그대 속에서 희박하게 되면, 그대는 모든 위험에 빠지게 되리라.”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 발행 금강산 관광안내도와 무지개 뜬 수정봉(水晶峯)
[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 발행 금강산 관광안내도와 무지개 뜬 수정봉(水晶峯)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개심대(開心臺) 고쳐 올라 중향성(衆香城) 바라보며/ 만이천봉 역력히 헤여나니/ 봉(峯)마다 맺혀 있고 끝마다 서린 기운/ 맑거든 깨끗지 말거나 깨끗커든 맑지 마나/ 저 기운 흩어 인걸(人傑)을 만들고저/ 형용도 그지없고 체세(體勢)도 하도할샤.”-정철(鄭澈) 관동별곡(關東別曲)./ 1580년 1월 강원도 관찰사로 원주에 부임한 조선 중기의 문신 송강(松江) 정철(1536~1593년)은 그해 3월에 관동팔경 즉 간성의 청간정, 강릉 경포대, 고성의 삼일포, 삼척 죽서루, 양양의 낙산사, 울진 망양정, 통천의 총석정, 평해 월송정과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을 유람하고 ‘관동별곡’을 집필했습니다. 위의 ‘만이천봉’은 금강산의 상징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천하(天下) 절경(絶景)“이라고 소개했는데, 그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는 이런 서적(書籍)이 아니더라도 인터넷이나 홍보 팸플릿(pamphlet)이 그 역할을 합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금강산국제관광특별구(金剛山國際觀光特別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속한 특구이고, 2002년 금강산 관광을 개방하면서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관광객들은 1998년 11월부터 금강산 관광이 허용되었고, 처음 금강산 관광은 크루즈를 이용해서 관광하는 것이었지만 이후에는 육로를 통해 금강산으로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8년 7월 11일 발생했던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으로 인해 2008년 7월 12일부터 대한민국에서의 금강산 관광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때 필자는 그곳에 있었는데, 돌아오면서 대한민국 현대아산의 홍보물, 필자와 사망한 박왕자 씨가 머물렀던 금강패밀리비치호텔의 홍보 책자 “천혜의 절경! 금강산관광”,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송도원무역회사의 <금강산 관광안내도>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8.15 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의 2차 상봉 둘째 날인 2018년 8월 25일 금강산 수정봉 언저리에 무지개가 떴다는 보도를 접하고 이들 자료들을 꺼냈습니다. 여기서 북한 자료를 소개합니다. <금강산 관광안내도>는 “세계적인 명산 금강산”이라고 전제하고 “오늘 금강산의 큰 바위들에는 로동당시대를 칭송하는 커다란 글들이 새겨져 명산의 장쾌함을 더해주고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도 있지만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수많은 작가들과 미술가들이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글이나 그림으로 묘사하기는 어렵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말이 아니다...어버이수령 김일성 대원수님과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의 따뜻한 손길아래 우리 인민의 문화휴식터로 훌륭히 꾸려진 금강산에는 해마다 수많은 근로자들과 청소년학생들이 찾아와 탐승의 나날”을 보낸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안내서’는 “원산-금강산 108Km/ 평양-원산 200Km"라고 하고, ”금강산→8Km→고성→42Km→통천→58Km→원산→86Km→신평휴식장소→14Km→곡산→60Km→상원→40Km→평양”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금강산 지도와 약도, 삼선암·귀면암·만물상·삼일포·립석·해만물상·총석정의아침·상팔담전설·구룡연저설·보덕암전설·사선기반면전설·명경대전설(“이바위는 거울처럼 생겼다. 이로부터 명경대라는 이름이 생겼다”)을 소개했습니다. 이미 북한은 2008년 ‘금강산-원산-평양’ 관광을 중요하게 판단했고, 김일성 부자(父子) 우상화를 노렸습니다. 그때는 ‘한심한 정책’이었지만, 이제 진정한 금강산관광 정책을 세워야 할 김정은 님! 여기서 8월 25일 무지개 떴던 수정봉(773m)을 찾아가 봅니다. 수정(水晶)이 많이 난다는 수정봉은 금강산의 도심(都心)인 외금강 온정동을 오가다 보면 자주 볼 수 있는 봉우리로, 가장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는 바위산입니다. 남한의 현대아산 발행 <가슴에 남는 여행-금강산관광>에는 “수정봉 코스-수정봉은 온정리 서북쪽에 솟은 높이 773m의 봉우리. 이 봉우리는 특이한 절경을 갖춘 곳이며 오래 전부터 수정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왔으며 세존봉보다 등정소요시간이 짧지만 정상에서의 전망은 세존봉 못지 않아 인기가 높은 코스. 또한 비둘기바위에서부터 금강수정문에 이르는 철계단의 아찔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 등산코스 하나만이라도 우선 개방하면 어떨까요? 수정봉 구역에는 설화도 있습니다. 어느 해인가 천 명이 넘는 왜구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와서 금강산 온정리 쪽으로 들어왔는데...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병장기도 없어서 밤을 틈타 이 지역의 백정봉(白鼎峯)으로 철수하면서 의병들을 운전강 좌우 언덕에 매복하여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노인 한 사람을 왜구들이 들어오는 길목에 배치하고는 왜구들이 쳐들어오는 기색이 보이자 강에 백토와 횟가루를 풀었습니다. 왜구들은 흰색 물이 흘러내려 오자 의병들이 배치해 놓은 노인을 불러 물었습니다. 노인은 왜구들에게 백정봉을 가리키며 천 명이 넘는 의병들이 지금 저 골짜기 안에 있는데 그들이 먹을 양식을 쌓은 노적가리이며 또한 계곡의 흰 물은 의병들이 밥을 지어 먹는 쌀뜨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놀란 왜군들은 즉시 군대를 돌려 달아나 버렸다고 합니다. 8월 26일(일)은 수정봉 지역에서 멀지않은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의 상봉 마지막 날! 25일처럼 무지개는 뜨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무지개 생각을 하다가 문득 김정일 설화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찾아보았습니다. 《조선의 민속전통 7 구전문학과 민속공예》에 《백두산의 장군봉과 향도봉을 련결하는 쌍무지개가 아름답게 비끼였다》, 《정일봉상공에 이른 새벽 쌍무지개》, 《백두산상공에 세상에서 처음 보는 원형무지개가 솟았다》. 백두산과 정일봉 상공에서 일어난 번개와 우뢰, 아름다운 쌍무지개와 원형무지개를 목격한 그 순간 백두산지구 사람들은 누구나 이 전례 없는 신기한 현상에서 우리 혁명을 승리의 한길로 현명하게 령도하고 계시는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령장의 모습을 우러르게 되였으며 이 위대한 승리를 열렬히 축하하는 인민의 마음을 담은 천심의 반영으로 받아들이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김일성 부자의 그림이 있는 수정봉에 무지개가 떴다고 가짜 금강산 설화를 만들지는 않겠지요? 김정은 위원장이 그런 바보짓을 할 지도자는 아닐 겁니다. 금강산 바위에서 ”조국의 영광 민족의 자랑 김정일“이 지워지는 날이 오기를 고대해 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조선 빨찌산”의 백두산(白頭山), 그리고 ”백두산의 사계절“
[청로 이용웅 칼럼] “조선 빨찌산”의 백두산(白頭山), 그리고 ”백두산의 사계절“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한놈도 남기지 말라!⨠ 그이께선 재쳐 웨치시였다. 이분은 이름만 들어도 삼도왜적이 치떠는 조선의 빨찌산 김일성 장군! 이분은 장백을 쥐락펴락하시는 큰 산을 주름잡아 한손에 넣고 동서에 번쩍! / 천리허의 대령도 단숨에 넘나드니 축지법을 쓴다고-. 북천에 새별 하나이 솟아 압록의 줄기줄기에 그 유독한 채광을 베푸노니 이 나라에 천명의 장수 났다고 백두산 두메에서 우러러 떠드는 조선의 빨찌산 김일성 장군!” 위 글은 1947년 2월에 북한 시인 조기천(趙基天/1913~1951년)이 쓴 장편서사시 <백두산>의 일부입니다. 그는 이 시를 발표하기 전에 여러 차례 김일성과 만났는데, <조선문학사>를 보면 집필에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시구(詩句)가 마음에 안 들면 시의 주제인 ‘보천보전투’를 거론하면서 수정도 해주었다고 합니다. 북한 문학계는 이 시(詩)를 유일사상(唯一思想)이 철저히 구현되고, 높은 사상예술성을 가진 기념비적 작품으로서, 이 시기에 나온 첫 서사시인 것으로 하여 문학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이 작품 하나로 조기천은 북한 제일의, 최고의 시인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1946년에는 시인 한명천이 동명(同名)의 <백두산>을 발표했는데, <조선대백과사전(12)>은 김일성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를 열렬히 칭송하면서 그에 맞게 시적 사색과 감정의 심오성과 웅건성을 보장함으로서 송가적 서정시로서의 양상”을 보여주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구름을 뚫고 멀리 산발을 바라보는 준령 백두산 상상봉엔 바람도 천리를 넘나든다. 영원토록 수령님의 이름과 더불어 빛날 너 백두산아!”라고 노래했는데, ‘김일성’이라는 고유명사가 빠져 있습니다. 과거 북한 월간 <조선예술>은 흘러간 대중가요 `눈물젖은 두만강'의 작사자가 한명천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대표작은 <백두산>이 아니라 <북간도>라고 합니다. 김일성은 서정시보다 서사시를 더 좋아했습니다. 김일성, 즉 “조선 빨찌산”과 백두산! <조선대백과사전(12)>은 “우리 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 량강도 삼지연군의 북부 우리 나라와 중국과의 경계에 솟아있다. 높이 2,750m. 주체조국이 걸어온 영광에 찬 력사와 더불어 만대에 길이 빛날 백두산은 우리 인민들과 세계 혁명적 인민들의 마음의 고향이며 주체혁명위업의 찬란한 해발이 솟아오른 혁명의 성산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신 조선혁명의 진로는 백두산에서부터 시작되였고 혈전만리 우리 혁명이 넘고 헤쳐온 불멸의 자욱도 백두산에 아로새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백두산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시작점이며 한반도 주요 수원의 발원지입니다. 단군 신화가 서린 백두산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최고봉은 장군봉입니다. 한반도의 뼈대라 할 수 있는 백두대간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지리산까지 이어지는데, ‘머리가 하얀 산’이란 뜻의 백두산이라는 이름은, 화산 활동으로 생성된 흰색 부석(浮石)이 온 산을 뒤덮고 있어 붙여졌다고도 하고, 1년 중 겨울이 230일 이상으로 정상에 흰 눈이 쌓여 있는 기간이 길어 붙여졌다고도 합니다. 중국인들은 백두산을 ‘창바이 산(长白山)’이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같습니다. 이런 설명이 가장 적당한 글인데, 백두산에서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게릴라(guerrilla) 빨찌산 중의 하나인 김일성을 백두산의 신(紳)으로 만든 북한! 단군 신화의 성산(聖山)을 김일성의 혁명의 성산이라고 하니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아들 김정일도 “혁명의 뿌리가 내린 조종의 산, 혁명의 성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962년에 중국과 북한이 영토의 경계를 나누어 백두산의 60%는 중국 땅, 40%는 북한 땅이 되었습니다. 김일성이 ‘혁명의 성산’을 준 것인지, 빼앗긴 것인지...개인적으로 가소롭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로동신문>은 “백두산의 사계절”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기사는 <백두산에는 8월에도 깊은 골짜기마다 흰눈과 얼음이 남아있어 겨울을 방불케 하지만 만병초가 꽃이 피여 백두산의 경치를 더 아름답게 하여줍니다.>라는 김일성의 ’교시‘를 소개했습니다. 다음은 “백두산의 사계절”(발췌)입니다. “백두산의 경치는 매 계절마다 특성이 있다. 백두산의 봄은 5월 상순부터 시작된다. 이때 기온이 령상으로 올라가면서 봄우뢰가 울고 눈사태가 쏟아지며 골짜기마다 두텁게 쌓여있던 눈이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5월말부터 6월 상순까지도 비와 눈이 엇바꾸어 내리는 현상이 계속된다...5월말-6월초이면 호반에서 먼저 얼음이 녹으면서 천지물이 드러난다. 천지얼음은 6월 중순경에야 완전히 풀리지만 떠다니는 얼음덩어리들은 7월 상순에도 볼수 있다. 7월 중순경부터 시작하여 약 40일밖에 안되는 백두산의 여름은 답사 및 관광의 제일 좋은 시기이다. 여름철에 백두산에는 비가 많이 그리고 자주 내리는데 이 기간에 내리는 비량은 년강수량의 약 35%를 차지한다. 백두산에서는 여름철에도 맑게 개이는 날이 드물다. 그러나 백두산일대는 다른 지대에 비하여 자외선복사량이 많으므로 기온은 높지 않으면서도 따스한 감이 나고 식물의 잎이나 꽃색이 특별히 선명하고 진하다. 백두산의 가을은 8월 하순부터 10월 상순까지 약 50일간이다. 백두산에서는 8월 중순이면 선기가 나면서 첫서리가, 9월 상순이면 첫눈이 내린다. 이 계절에 백두산의 식물들은 점차 록색을 잃고 천지들쭉은 보라색을 띠며 맛있게 익는다. 오직 만병초만이 자기의 푸르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백두산에서 겨울은 년중 제일 길어 200일 이상이다. 겨울계절은 10월 중순부터 다음해 4월 하순까지 계속된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그리고 자주 내리며 바람이 세게 불고 천지얼음은 1. 5m까지 두터워진다. 초겨울에 내리는 눈은 낮은 기온과 강한 바람에 의하여 골고루 쌓이지 못한다. 그러나 3~4월에는 습기가 많은 눈이 내려 거의 그대로 쌓인다...” 최근 한 외신(外信)은 북한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백두산을 하이킹하며 야영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보도했는데, "남한에 본사를 둔 한반도 등산여행사의 설립자인 뉴질랜드인은 북한 당국을 설득해 처음으로 백두산 '오프로드 트레킹'과 캠핑을 허가받았다"고 했습니다. 호주 여성 2명과 노르웨이 남성 2명이 첫 트레킹을 했다는데...김일성·김정일이 평양 금수산태양궁전에 누워 허가를 한 것인이지...2018년 남북정상회담때 두 정상은 백두산·한라산 흙으로 기념식수를 했고, 문재인 대통령이 백두산 가고 싶단 말에 김정은 위원장은 “우리 쪽의 교통 상황이 불비하여 힘드실텐데 그래도 와주신다면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했는데...백두산은 ”조선의 빨찌산“ 김일성의 것도, ”백두산의 아들“ 김정일의 것도, 더더욱 김정은의 것도 아닙니다. 백두산은 우리 한민족의 명산(名山)입니다. 백두산 찾기는 우리 민족부터!!!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해당화(海棠花)폈던 명사십리(明沙十里)에 간 북한 수장(首長)
[청로 이용웅 칼럼] 해당화(海棠花)폈던 명사십리(明沙十里)에 간 북한 수장(首長)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광림(金光林/1929년~) 시인은 고향을 얘기하면서 ‘명사십리’와 ‘송도원’이 “남북한을 통틀어 이만큼 유명한 해수욕장이 또 있을까 싶다.”고 했습니다. 물론 유년시절의 추억이지만, 모래 위에 피는 해당화 열매를 따먹기도 하고, 열매를 실로 꿰메 목에 걸면 훌륭한 목걸이가 되었다고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겨울에 송도원 해수욕장을 찾아든다면 ‘돈 사람으로 취급할지 모르지만’ 송도원의 겨울 산책만은 인적 끊긴 송림(松林) 사이를 무심코 거닐다가 지난 여름 백사장에 남긴 발자국에 눈이 덮히는 것을 보는 것도 감회가 야릇했다고 합니다. 그 시절 원산은 함경남도의 도청 소재지였습니다. 일찍이 ‘해당화’와 ‘명사십리’를 노래한 시인 모윤숙(毛允淑/1909~1990)은 함경남도 원산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마루도 없는 부엌 한 칸, 방 두 칸짜리 초막집 부뚜막에서 밥을 짓던 그의 어머니는 갑자기 산고(産苦)를 느끼고 그 자리에서 모윤숙을 낳았습니다. 모윤숙은 원산보통학교 2~3학년 때 자신의 이런 출생 일화를 소재로 「생일과 아궁이」를 비롯해 「해당화」·「명사십리」등의 시(詩)를 썼습니다. 시인은 명사십리, “해당화에 덮인 흰 모래밭>을 ”나는 지금 이 눈에서 멀고, 명주조개 찾으러, 물 잠그고 헤엄치던 물들아! 지금은 너무 아득한 저 하늘 밑, 알알이 미끄러져 날리던 모래에, 기대고 히살지으며 마음 부플던 시절.“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원산이 북한 강원도 도(道) 소재지입니다. 우리 자료에는 “1946년 9월 함경남도에서 강원도로 편입되었고 도소재지도 철원에서 원산으로 옮겨졌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산시는 금강산의 사실상 관문으로서 금강산종합개발계획에 포함된 국제적 관광지로 개발되고 있어, 외래 관광객에게 개방되고 있는 지역이고, 명사십리해수욕장은 북한의 최대 휴양지이고, 송도원에는 현대적인 대규모 위락시설을 갖춘 송도원유원지가 있으며, 송도원국제관광호텔이 있다고 했습니다. 천연기념물로는 북한 천연기념물 제193호로 지정된 명사십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나무‘원산튤립나무’, ‘원산칠엽나무’가 있습니다. 원산시 송천동에 있는 천연기념물 원산튤립나무는 원산농업대학으로 들어가는 길 오른쪽에 두 그루가 자라고 있습니다. 이 나무는 1923년에 심은 것으로 북한에서 여기밖에 없는 희귀종입니다. 월산칠엽나무도 비슷한 위치에 있는데, 90년 가까이 자란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나무 역시 희귀종으로 천연기념물입니다. 그리고 원산에는 항구 동남쪽에 녀도(女島)라고도 불리는 려도(麗島)가 있고, 1771년(영조 47년)에 세워진 명적사(明寂寺)가 있습니다. 이것이 어제와 오늘의 원산입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은 “강원도의 소재지. 도의 북부. 원산만 연안에 자리 잡고 있다. 남동부는 안변군, 남서부는 법동군, 북서부는 문천시, 북동부는 조선 동해와 원산만과 면하고 있다. 동서(룡천리-영삼리) 길이 26km, 북남(송천동-칠봉리) 길이 18km, 면적 314.4㎢로서 도 면적의 2.83%, 그 가운데서 섬 면적 3.73㎢. 시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주체34(1945)년 9월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현지지도하신 불멸의 혁명사적이 깃들어 있다. 또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주체 36년 9월에 위대한 공산주의 혁명투사 김정숙동지와 함께 다녀 가시였으며 주체 54년 5월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현지지도하신 유서 깊은 곳이다. 시의 개선광장과 송도원국제소년단야영소에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상이 정중히 모셔 져 있으며 여러 곳에 혁명사적기념비들이 있다. 시에는 강원도<김일성동지 혁명사적관>이 있다. 또한 항일혁명투쟁시기의 혁명적구호나무들이 있다.”고 기술했습니다. 사전은 원산시를 소개하면서 서두에서 김일성 일가(一家)의 업적을 거론하고 있는데, 특히 ‘9월’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원산의 미래는? 북한 수장(首長)과 9월의 앞에서 해당화(海棠花)폈던 명사십리(明沙十里)에 간 이유가 김일성 일가의 업적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곧 북한 정권수립 기념일, 9·9절이 다가옵니다. 최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동지께서 리설주 동지와 함께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 건설장을 현지지도 하시었다"고 보도하면서, 김정은 위원장이 "우리나라의 경치 좋고 아름다운 해변가들에 문화 휴식터를 훌륭히 꾸려 인민들이 마음껏 향유하게 하려는 것은 당에서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사업이며 제일 하고 싶었던 사업 중의 하나"라며 "이제는 눈 앞에 현실로 바라보게 되었다...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건설과 같은 방대한 창조 대전은 강도적인 제재 봉쇄로 우리 인민을 질식시켜보려는 적대세력들과의 첨예한 대결전이고 당의 권위를 옹위하기 위한 결사전"이라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통신’은 "지금과 같이 모든 것이 어렵고 간고한 시기 이처럼 요란한 대규모 공사가 세계적 문명을 압도하며 결속되면 당과 군대와 인민의 일심단결 위력이 만천하에 다시 한번 과시될 것"이라며 "세상에 둘도 없는 해양공원을 건설하여 다음 해 10월 10일을 맞으며 인민들에게 선물하자"고 말했다고 전송했습니다. 그러면 김정은(金正恩)은? “1984. 1. 8, 북한 평양” 출생이고, 아버지 김정일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김정일의 4번째 부인 고영희이며, 그녀의 차남으로, 김정일이 사망한 후 그를 이어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스위스 베른 귀믈리겐에 있는 국제학교에 다녔다는 것 외에는 성장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2002~2007년 김일성군사종합대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항간(巷間)에서는 그가 원산 태생이라고 합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그는 7월 한 달에만 총 18차례에 걸쳐 현지지도에 나섰고, 8월에도 백두산·묘향산 등지를 계속 찾고 있습니다. 경제적 성과 창출을 독려하는 동시에 애민(愛民) 지도자 이미지를 강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되는데, ‘9·9절’과 정상회담이 그의 가슴 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2018년 8월 13일 북한의 요청으로 열린 고위급 회담의 의제는 남북정상회담였는네, 회담 결과, "9월 안에" 정상회담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가 해당화(海棠花)폈던 명사십리(明沙十里)에 간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의 9월 행보(行步)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청로 이용웅 칼럼] 영원한 명배우 전무송의 연극
[청로 이용웅 칼럼] 영원한 명배우 전무송의 연극
[선데이뉴스신문]<조선일보>(2018년8월16일字) 문화면 기사의 주인공은 “연기 56년, 이 역할만 7번째…난 진짜 배우 되려면 멀었다”고 토로(吐露)했습니다. 8월 17일(금) 개막된 연극「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역 전무송 님은 “이 작품엔 개인적 의미도 깊다. 올해는 1984년 처음 윌리 역을 맡겨줬던 극단 성좌의 연출가 고(故) 권오일(1932~2008) 선생 10주기다. "'내년에 세일즈맨 꼭 한번 하자'고 하시더니 이듬해 돌아가셨어요. 연습하면서 선생님을 떠올리고, 선생님이 이 연극에 바랐던 점들을 되새깁니다."라고 했습니다. 순간 권오일 교수님이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권 대표님은 극단 <성좌>를 이끌며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존 오스본 작, 1970),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테네시 윌리엄즈 작, 1980), 「시련」(아서 밀러, 1982), 「적과 백」(이재현 작, 1983), 「밤으로의 긴 여로」(유진 오닐 작, 1984), 「봄날」(이강백 작, 1984), 「검은 새」(정복근 작, 1985),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유진 오닐 작, 1985), 「초승에서 그믐까지」(윤조병 작, 1986), 「쟁기와 별」(오케이시 작, 1989), 「세일즈맨의 죽음」(아서 밀러 작, 1989),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테네시 윌리엄즈 작, 1998) 등을 연출했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훌륭한 연출가였습니다. 이미 타계한 연극인 중 필자가 가장 사랑했던 권오일 선배님과 김의경 선배님! 보고 싶습니다. 김의경(1936~2016) 선배님은 서울사대부고 선배님이고, 극단 <현대극장> 대표 시절에 필자의 <창원현대극장>과 교류하면서 연극 활동이 함께 했습니다. 전무송 님과의 첫 만남은 창원의 연극 무대에서 였습니다. 첫 인상은 평생 연극의 길만 걸을 것 같은 배우였습니다. 그때 싱가폴에서 구입한 휴대용 재떨이를 선물했는데...그리고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전 선배님과 해후(邂逅)를 했었습니다. 신문은 영원한 배우 ‘전무송’을 “1962년 평생 스승 유치진(1905~1974) 선생의 연극아카데미 1기생으로 첫발을 뗀 연기 인생이 이제 56년. 얼굴 주름살이 연기에 바친 세월만큼 또렷하다. 그가 17~26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의 보험외판원이자 가장(家長) 윌리 로먼으로 다시 무대에 선다. 이 역할만 7번째”라고 소개했습니다. 배우 ‘전무송’은 인터뷰에서 "34년 전 처음 윌리를 연기할 때 '거참, 울 아버지랑 똑같네' 싶었거든. 그때는 아들 입장에서 아버지 옛 모습을 그리고 상상했어요. 이제는 내가 아버지가 돼 그 체험의 절실함으로 연기해요. 아버지 마음엔 동서양 구분이 없나 봐. 부드럽고 힘 있는 말투다. 자식 밥그릇에 고봉밥을 조심조심 눌러 담는 아버지 손길 같다.“고 했습니다.“배우는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남 험담하거나 깎아내리지 않으며, 스스로 내세우거나 비하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마음의 공부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신문이 그의 삶을 소개했는데...여기서 이 기사를 인용해 봅니다. -젊을 때 그도 술 취하면 싸움질이 예사인 적이 있었다. 그의 연기를 아낀 유치진 선생이 따로 불러 말했다. "무대에서 말하는 데 10년, 제대로 연기하는 데 또 10년 걸린다. 그걸 넘어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 전무송은 "그 말씀이 평생 나를 쫓아다녔고 아직도 진짜 배우 되려면 멀었다"고 했다. "이건 겸손이 아니에요, 욕심인 거지. 선생님이 말한 그 경지에 도달하고 싶은 욕심. 안 되는 걸 아니까 채우려고 계속 하는 거고." 전무송이 빙긋 웃었다.- -무대를 반세기 지켜왔으나 대중은 임권택 감독 영화 '만다라(1981)'의 승려 지산으로 그를 처음 알아봤다. 그 역할의 모델이 된 스님을 만나기로 한 전날 밤 꿈을 꿨다. 낡은 바랑을 메고 가던 스님이 평상복에 비닐 가방 든 남자로 바뀌는 꿈이었다. 가방 안엔 연습 뒤 끓여 먹을 라면 한 봉지와 담배 여섯 개비 든 담뱃갑이 들어 있었다. "이거다!" 전무송은 배우인 자신과 깨달음을 구하는 스님의 길이 하나임을 봤다. "배우에겐 그런 순간이 있어요. 고민을 거듭하다 절실함의 극치에 다다르는 순간. '안 되면 관두지 뭐'하고 생각하면 벽뿐이야. 꼭 해내겠다는 절실함이 내면에서 응결되면 퍽, 하고 뭔가 와요." 전무송은 "절실하면 길이 보이고 조금씩 완성으로 가는 것 같다. 이 나이에 건진 건 그것뿐"이라고 했다.-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1915~2005)의「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의 줄거리, 30년간 오직 세일즈맨으로 살아온 윌리 로먼은 그 일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성실하게 살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육체적·정신적 노동은 계속 늘어가는 반면 수입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생활고를 겪게 됩니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두 아들 비프와 해피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방황하고 타락합니다. 현실과 자식들에게 배반당하고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던 완고한 윌리는 늘 다투어오던 비프와 화해하던 날, 아들에게 보험금을 물려줄 생각으로 자동차를 과속으로 몰아 자살하고 맙니다. 이 작품으로 작가는 퓰리처상과 연극비평가상을 받았습니다. 배우 ‘전무송’은 "이 연극을 보고 사람들이 자신을 찾고 싶어졌으면 좋겠어요. 아버지는 아버지로, 엄마는 엄마로, 아들은 아들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스스로 질문해보게 되는 그런 무대를 만들고 싶어요."라고 했습니다. 이번 공연에는 아역배우 출신 사위 김진만이 연출을 맡고, 배우인 딸 전현아가 제작하고, 아들 전진우가 극 중 아들 비프 역으로 나오고, 외손자는 회사 사장 아들 목소리로 출연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해서 더욱 빛난 이번 공연은 한마디로 훌륭한 수작(秀作)이었습니다. 8월 18일(토) 공연을 마치고 분장실에서 만난 전무송 님은 첫 만남에서 느낀 ‘평생 연극의 길만 걸을 것 같은 배우’였고, 여전히 아름다운 ‘청년’처럼 보였습니다. “연극이 배우의 예술임을 증명해 보인 역사적인 인물”이 틀림없었습니다. 행복해하는 배우의 모습에 필자도 행복했습니다. 미구(未久)에 재회(再會)를 약속하고 대학로예술극장을 나선 필자는 ‘세일즈맨의 죽음’이 고마웠습니다. 분명 훌륭한 수작(秀作)이었습니다. 8월 26일(일)까지 관객의 행렬이 장사진(長蛇陣)을 이루기를 기대해 봅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청로 이용웅 칼럼] 금수강산의 3대 폭포와 선군팔경(先軍八景) 울림폭포
[청로 이용웅 칼럼] 금수강산의 3대 폭포와 선군팔경(先軍八景) 울림폭포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우리가 생명의 횃불에 불을 켜려고 할 적에 무서운 불바다가 우리를 둘러싼다. 그 불길은 사랑인가, 미움인가, 기쁨인가, 고통인가! 그 모두가 뒤엉키어 있다. 만약 미움과 고통에 쫓기어 돌아선다면 태양은 우리의 뒤에 있을 것이다. 여기 폭포가 솟는 것을 보라! 한번 떨어지니 다시 떨어지고 기천(幾千)의 흐름이 되어 흐르는가 하면, 다시 그것이 모여 높이 공중으로 물거품을 올리고 있다. 이 폭포의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음영(陰影)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움에 차 있다.”(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독일 문호(文豪) 괴테(1749~1832)의 폭포 이야기가 유난히 생각나는 팔월입니다. 폭염(暴炎)! 끝없는 열대야 속에서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폭포(瀑布)입니다. 남미(南美)의 이구아수 폭포, 북미(北美)의 나이아가라 폭포,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가 세계 3대 폭포라지만, 금수강산(錦繡江山)의 3대 폭포, 즉 금강산 구룡(九龍)폭포, 설악산 대승(大勝)폭포, 개성 박연(朴淵)폭포도 절경(絶景)입니다. 금강산 구룡폭포는 구정봉에서 뻗어내린 구정대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 벼랑의 두 봉우리 사이에서 폭포벽을 따라 물안개를 이루며 떨어지는데, 폭포벽과 그 바닥은 하나의 웅장한 화강암덩어리로 되어 있는 보기 드문 폭포입니다. 화강암 절벽 위에 패인 우묵한 곳으로부터 은빛 물방울을 흩날리면서 쏟아지는 폭포수는 흰 비단필을 드리운 듯하며 이곳에서 울리는 폭포소리는 우레소리와 같습니다. 폭포 밑에는 돌절구 모양으로 깊이 패인 '구룡연(九龍淵, 깊이 13m 정도)'이라 부르는 폭호가 발달해 있으며, 옛날 금강산을 지키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설악산의 내설악에 위치한 대승폭포는 ‘폭포의 왕자’라 불리울 만큼 물줄기가 웅장한데, 본래는 한계폭포라 했습니다. 부모를 일찍 여윈 대승이라는 총각이 어느 날 폭포 절벽에 동아줄을 매달고 석이버섯을 따고 있었는데, 죽은 어머니가 그의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 올라가보니, 지네가 동아줄을 쏠고 있었다는 전설에 의해 이 폭포를 대승폭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박연폭포는 개성시 북쪽 16㎞ 지점에 있는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의 웅장한 화강암 암벽에 걸쳐 있는데 높이 37m, 너비 1.5m이며, 북한 천연기념물 제388호입니다. 산성폭포라고도 하며, 예로부터 서경덕·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로 유명합니다. 폭포 위쪽에 있는 직경 8m의 박연은 큰 바위가 바가지 모양으로 패여 생긴 것이며, 그 한가운데에 큰 섬바위가 솟아 있어 흘러내린 물이 이 바위에 부딪쳐 박연에 담겼다가 폭포로 떨어집니다. 우리 금수강산(錦繡江山)에는 아름다운 폭포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전(前) 수장(首長) 김정일은 ‘선군팔경’이라면서 ‘울림폭포’를 자랑했습니다. 북한의 월간 <조선>은 ‘선군8경’이라는 연재물에서 ‘구슬폭포’와 ‘비단폭포’ 그리고 ‘강원도 천내면에 있는 울림골’이라는 제목의 사진 세 장과 함께 <울림폭포의 메아리>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보면, “조선에서 손꼽히는 폭포중의 하나인 울림폭포는 강원도 천내면의 천연수림 속에 이름 없이 묻혀 있다가 인민군군인들에 의하여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게 되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절벽에서 타래져 내리는 장쾌한 폭포소리가 하도 커서 그 이름도 울림폭포라 부른다. 인민군군인들은 울림폭포를 찾아낸데 이어 이 지구에서 구슬폭포와 비단폭포, 6담과 같은 명소들도 발굴하였다. 김정일령도자께서 펼치신 선군혁명령도를 충성으로 받들고있는 인민군군인들은 험준한 칼벼랑과 산발들을 톱아오르며 탐승도로들을 내고 관망대들을 건설하여 울림지구를 절경을 이룬 훌륭한 문화휴식처로 전변시켰다. 천지를 진동하는 울림폭포는 그 장쾌함, 웅장함과 함께 이 땅에 사회주의강성대국을 일떠세우려는 군대와 인민의 억센 기상이 담겨진것으로 하여 선군시대의 8경의 하나로 되였다.”(11쪽)라고 쓰여 있습니다. <울림폭포의 메아리>는 ‘선경(仙境)’이라고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폭포가 ‘절경’이 된 것은 단지 김정일의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2001년에 발간된<조선대백과사전(28)>에 기술된 “울림폭포 강원도 천내면 동흥리에서 15리가량 떨어 져 있는 폭포. 법동군의 룡포혁명사적지에서 동북쪽으로 25리가량 떨어 져 있다. 높이 75m. 우리 나라에서 손 꼽히는 폭포중의 하나이다. 이곳에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주체90(2001)년 8월에 다녀가신 불멸의 혁명사적이 깃들어 있다.”(193쪽)라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경치 같기는 하지만, 선경은 폭포가 아니라 폭포 근처에 있는 인민군 부대? 다음은 많은 울림폭포를 소재로 한 시(詩) 중 하나인 <울림폭포, 너의 그 울림 속에>(송재하 씀) 입니다. “내리찧는 그 소리 골안마다 차고 넘쳐 너 울림폭포인가 / 한줄기로 쏟아지면 그 소리 성차지 않아 다시 두 줄기로 쏟으며 하늘땅을 뒤흔드는 너의 그 울림 /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들으면 들을수록 장쾌하지만 병사들이 찾아낸 네앞에선 이 마음 불을 안은 듯 뜨거워 / 탐승길에 펼쳐진 자갈도 무심히 밟을수 없노라 심산 속에 묻혀있던 이름 없는 너를 찾아 병사들이 땀흘려 안아 빛낸 자욱자욱...총대로 조국을 수호하고 총대로 이 강산을 꽃피워가며 우리 병사들이 울려가는 승리의 행진곡에 너의 그 울림 어찌 하늘땅만을 울리랴 천만군민의 심장마다 애국의 울림으로 메아리친다 / 우리 장군님 병사들의 그 열렬함 그 뜨거움 떨어지는 물줄기에 다 비껴있고 흩날리는 물보라에 다 어려있어 너보다 아름다운 폭포 이 세상 그 어디서 찾아볼수 있으랴 / 끝없이 울리라 울림폭포여...” 울림폭포를 “선군시대의 주력군으로 위용 떨치는 인민군 군인들의 헌신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에 의하여 21세의 첫해에 자기의 황홀한 자태를 드러나게 되었고 조선의 손꼽히는 폭포들중의 하나로 되었다. 오늘도 끊임없이 울려가는 울림폭포의 장쾌한 메아리에는 조국강산을 더욱 훌륭하고 아름답게 가꾸시려는 김정일령도자의 높은 뜻을 받들어 강성대국의 휘황한 래일을 개척해나가는 조선의 군대와 인민이 지닌 숭고한 지향과 의지가 비껴있다.”고 자랑하는 북한! 산주폭포·용연폭포 등 20여 개의 폭포가 있어 울창한 수목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묘향산(妙香山)을 자랑하면서 ‘관광 돈벌이’를 하지 것이 좋을텐데...금수강산(錦繡江山)의 폭포(瀑布)는 모두 아름답습니다. 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논설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