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227건 ]
[인터뷰] 다시 촛불 속으로... 민주화는 끝나지 않았다, 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인터뷰#2
[인터뷰] 다시 촛불 속으로... 민주화는 끝나지 않았다, 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인터뷰#2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한국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지만, 가슴의 외침을 따라 3번의 징역과 중정(당시 중앙정보부)의 고문으로 탄압 아래 파묻힌 청춘. 하지만 다시 촛불로 꽃피운 그 삶을 들여다 본다. (사진=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Q. 아이고... 참 파란만장했네요. 그래서 시민운동권으로 나오신 건가요? 86년 석방되었지만,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약 1년간 휴식을 취했어요. 87년 민주대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이 각각 잇달아 전개되었어요. 그 이후 김영삼 선생과 김대중 선생이 분열했을 때 저는 실생활에서의 진보를 목표를 하는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들고, 그 정당 이름으로 독자적인 대통령 후보를 내자고 주장했어요. 또, 김영삼 정당이건 김대중 정당이건 민주연합정부를 만드는데 동의한다면, 공동실천최소강령을 만들어 함께 정권교체를 이루고 민주개혁, 민생복지 등을 실현하자고 제안했어요. 처음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어요. 시간이 부족하여 제가 백기완 선생을 직접 대통령 후보로 호명하여 추대했어요. 기적처럼 무소속후보로 등록이 되었어요. 유세과정에서 큰 주목도 받았어요. 특히, 후보단일화진영과도 연대했어요. 그리하여 김영삼 후보가 민주연합정부를 만드는데 동의한다면서 공동강령을 만들기 위한 협상장에 나오기까지 했어요. 하지만, 백기완 후보 진영 내부의 다양한 의견차이 등으로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어요. 게다가 87년 대선시기 활동으로 88년 4월경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다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약 20일 정도 모진 고문을 당했어요. 74년과 88년 두 차례 당했던 고문에 대한 기억이 뒤섞여 말로 표현할 수도 없어요. 약 10개월 후 석방되어 1989년에는 전국민족운동연합, 90년에는 민중당에 동참했고, 94년부터 약 2년간 경실련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96년 꼬마민주당에 동참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하다가 도저히 돈이 없어서 정치를 계속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96년부터 정계에서 손을 뗐어요. 이후 전국소기업연합에 동참하여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상담을 시작했어요. 경영지도사 자격증을 따서 6~7년 동안 경영 상담 회사를 운영했죠. 민족‧노동 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잘 이해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Q. 그렇군요... 2016년부터 운동권에 다시 참여하셨다고 들었는데, 또 다시 시민운동을 시작하게 되신 계기가 있다면? 이런 생각을 해요. 뭔가를 깊이 생각하다보면,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확신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자꾸만 그런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되니까 시민운동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계속하게 되는 것 같아요. 유달리 사회를 바꾸고 싶은 열망이 큰 편이에요. 96년부터는 후원회원으로 만족하면서 활동욕구를 억누르고 살았는데 열정과 의지가 남아 있으니까 또 하게 됐어요. 직접적인 계기는 2016년 박근혜 前(전) 대통령 탄핵 촛불집회를 지켜보면서 큰 감동을 느낀 것이었어요. 저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새로운 감회로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뜨거워졌어요. 약 30년 동안 시민‧사회 운동을 하면서 수많은 바람을 맞고 실패한 줄 알았던 장면들이 스쳐가면서 이러한 시행착오와 희생 끝에 “민주화가 조금씩 오고 있구나. 진정으로 우리 사회와 국민이 변하기 시작했구나. 대격변기가 도래했구나.”라고 느꼈어요. 오래간만에 만난 지인들도 저를 부추겼어요. 그래서 역사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하자는 생각으로 다시 시민운동을 시작했어요. 2017년 3일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결정된 날,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활동을 재개했죠. “그때 박근혜 대통령을 공천한 이들에게 책임을 져라”고 촉구했어요. 이러한 활동을 통해 개혁연대민생행동을 만들었어요. 개혁연대민생행동의 제안으로 2017년 대선시기부터 2018년 지방자치선거까지 국민개헌운동에 앞장섰어요. 이 과정에서 약 25개 단체가 국민주권개헌행동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어요.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운동도 핵심적 요구는 개헌이었어요. 그 결과, 절차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됐지만, 실질적 민주주의 또는 내용적 민주주의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직접민주주의의 3대 핵심요소인 국민발안, 국민소환, 국민투표 등이 이뤄져야 해요. 개헌안과 법안 등을 국민 스스로 발의할 수 있고, 이들 안건은 국민이 직접 투표로 결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또, 숙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 등도 정착시켜야만 해요, 우리 사회는 모두 함께 공존해야 하거든요. 이를 위해 지방자치선거 이후에는 약 100여개 단체가 사안별로 연대하는 단체인 촛불계승연대천만행동이 만들어졌어요. 촛불계승연대는 국민개헌, 적폐청산, 남북평화를 위해 노력했어요. (사진=송운학 대표의 시민단체운동 활동 모습) Q. 이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음... 시민운동권과 정치권의 이질감이 크잖아요. 왜 만리장성처럼 서로 담을 쌓고 있으려고 할까요? 낮에는 시민운동을 하고, 밤에는 유력한 정치인을 남몰래 따로 만나 로비를 하는 등 각자도생하는 경우가 많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고 있어요. 부패한 담합과 거래 등이 지속되고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올바른 나라 만들기, 정의 등을 위해 정치인과 시민운동가가 투명하고 당당하게 공개적으로 왕래하고 교류하고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말 나라에 필요한 인재라면 정치로 떳떳하게 입문할 수도 있어야 하고요. 또 한 가지는 우리나라는 노동조합 가입률이 저조해요. 전체노동자 대비 노조원 수자가 작다는 말이에요. 우리나라는 원칙적으로 기업에 고용되어 있어야만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어요. 법적으로 강제된 기업주의 노조의 한계죠. 그러다보니 노조가 대기업과 정규직 위주로 조직되었어요. 대기업 이하의 중소‧하청기업 노동자와 특수고용자, 비정규직, 영세소상공인 분들의 이익은 대변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어요. Q.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앞으로 공익과 관련된 모든 일을 감시하는 단체를 만들 생각이에요. 공익감시는 민권으로 보장되어야만 하고, 민권을 행사하는 행위이자 민권을 회복하는 의무이기도 해요. 인권이 개인의 권리라면, 민권은 개개인이 일정 규모 이상 모였을 때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권리죠. 일정 이상의 인원이 모여야 가능한 일이죠. 공익감시권리 역시 일정 이상의 인원이 모여야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어요. 촛불정부라는 의미가 퇴색되고 있거든요. 현 정부가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국회, 대법원 등 거의 모든 걸 다 장악했는데 개헌 하나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까 시민과 국민이 나서서 정부와 지자체가 공익을 위해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 감시를 해야만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서울과학기술대학원 공공정책학 박사과정까지 수료했고, 학위논문을 작성해야만 하는 시간이 1년 정도 남았어요.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해서 심사를 받아야만 하는지 여부에 대해 현재 고민하고 있어요. Q.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 등 민주화운동이나 시민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어 있었을까요? 그밖에도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만약 제가 아버님 말씀에 따라,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낮에는 일하고 야간에는 상고라도 다니면서 독학했다면, 아마도 지금쯤 법조인이 돼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또, 학생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다면 세계적인 대학자는 못 되었을지 몰라도 대학교수는 돼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저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저 스스로를 훈련시키며, 성찰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늘 올바른 길을 걸었다고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올바른 일을 하려고 최선을 다했고, 정의(正義) 편에 서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사진=밝게 웃고 있는 송운학 대표) 오늘 말을 참 많이 했네요. 하지만, 워낙 파란만장했던 삶이라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내용이 많네요. 이렇게 불러주셔서 감사드리고, 다음에 또 한 번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종료)
[인터뷰] 학자를 꿈꿨던 서울대 문리대학생, 반(反)유신 운동에 뛰어들다… 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인터뷰] 학자를 꿈꿨던 서울대 문리대학생, 반(反)유신 운동에 뛰어들다… 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한국 최고의 대학에 입학했지만, 가슴의 외침을 따라 3번의 징역과 중정(당시 중앙정보부)의 고문으로 유신의 탄압 아래 파묻힌 청춘. 하지만 다시 촛불로 꽃피울 그 삶을 들여다 본다. Q. 안녕하세요. 대표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제 성명은 ‘송운학’입니다. 저는 충남 아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주 시골이었죠. 대학교 3학년 때까지 전기가 안 들어왔으니까요. 저희 집은 당시 중농에 속했습니다. 아버님이 땅을 좀 가지고 계셨어요. 제가 신화초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4학년이 되던 해 형님께서 외가댁이 있던 대전공전에 합격하여 공부하러 집을 떠났습니다. 그 때부터 저 또한 형님과 함께 공부하려고 열심히 노력해서 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대전에 있는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저는 책 읽기를 좋아했어요. 충남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전고등학교를 부수석으로 합격했고요. 고교시절에는 문과에서 선두를 다투는 등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심리학과에 진학했어요. (사진=송운학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Q. 시민‧민족 운동에는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 시민‧민족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안병욱 교수님(당시 숭실대 철학과)의 강연을 듣고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도산 안창호 선생님에 대해 알려주셨어요. 그 말씀을 듣고 생각이 많이 트였죠. 제 생각으로는 도산선생님께서 평생 살아오신 삶 속에서 실천하신 사상이 매우 새롭고 진취적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신민회(新民會), 흥사단 등을 창립한데서 알 수 있듯이 근대적 시민의식, 근대적 주권자의식으로 무장된 새로운 국민을 양성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신 분이라고 존경하게 되었고, 저 역시 도산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자고 결심했습니다. *흥사단(興士團)은 1913년 5월 13일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흥사단은 공립협회와 구국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신민회 산하 청년학우회가 흥사단의 전신이다. (위키백과) 그래서 흥사단 대전고 아카데미(결성준비모임)를 만드는데 동참했어요. 거기서는 지덕체, 정의돈수 등을 학습하고 실천했습니다. 5분 스피치(연설), 윤회악수 등과 같은 자기훈련, 집단훈련, 상호학습 등 지금 생각해봐도 상당히 새로운 엘리트 양성과정이었죠. *정의돈수(情誼敦修)는 정답고 의좋은 것, 친애와 동정의 결합, 사랑, 두텁게 닦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서로 사랑하기 공부’, 사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출처 : 음악이 있는 세상, 다음 블로그) 고교시절 제가 입주해서 가정교사를 했던 집안이 대단한 부잣집이었는데, 책장에 출간된 책과 월간지가 많이 있었어요. 그런 책들을 읽다보니, 민족‧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죠. 게다가, 1969년 박정희 전(前) 대통령의 3선 개헌, 71년 사법파동 등 고교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여러 사건이 있었죠... 격변의 시기였죠. 특히, 72년 대학 1학년 때 ‘7.4 남북공동선언’이 있었어요. 그런데 좀 이상했어요. 당시 정부는 “멸공해야한다”며 국민을 가르쳐놓고 국민 몰래 자기들끼리 만나 통일을 하겠다고 발표했으니까요. 접촉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는 의심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약 100일 뒤에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어요.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과 같이 일사불란한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어요. 원래 공부를 해서 세계적인 대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안창호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어요. 자유를 전제로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컸죠. 73년도 10월 2일 대학가에서 최초의 ‘반유신 민주화 학생운동’이 벌어졌어요. 저는 사실 처음에는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하지만, 나도 모르게 시위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어쩌다보니 점점 깊숙하게 빠져들게 되었죠. 학생들이 시위를 기밀로 했기에 처음에는 정부도, 경찰도 아무도 몰랐어요. 시위가 일어난 뒤 30분쯤 후에야 경찰이 출동했죠. 경찰이 30여명 정도는 구속시키고, 나머지 학생들은 군대로 끌고 갔어요. 강제징집을 해버렸어요. 제가 다니던 서울대 문리대에서 첫 시위가 일어나자 서울대 법대와 서울대 상대 등 다른 단과 대학도 시위를 했죠. 언론통제로 한 달 정도는 시위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차차 입소문이 나게 되었고, 구속사실을 알리는 단신으로 언론도 간헐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해서 사람들이 알게 됐죠. 그러자 서울시내 거의 모든 대학에서 시위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전국적으로 번질 조짐마저 보였어요. 최초로 제가 주체적으로 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닌 아주 작은 일이었어요. 즉, 구속학우와 선배들을 석방하라는 취지로 유인물 초안을 작성한 것이었어요. 그 시기 유명한 재야인사들이 유신정권에 반하는 개헌서명운동을 시작합니다. 그것을 막으려고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1호’을 선포해 ‘중앙정보부’에 모든 권한을 주게 되죠. 또, 자신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군인들이 민간인을 심판할 수 있도록 긴급조지 2호도 선포해서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도 설치했고요. *중앙정보부 : 1961년 6월 10일 법률 제619호 <중앙정보부법>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발족된 정보·수사기관. 약칭 중정(中情). 그때 진로를 심각하게 고민했고, 우연히 전태일 열사의 일기를 봤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큰 결심을 하게 되었죠. 사람마다 다른 이유와 동기가 있었겠지요. 하지만, 대학생들이 앞장서서 전국적인 시위를 하자는 분위기가 이심전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드디어 시위예정일이 밝아왔습니다. 1974년 4월 3일이었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경찰이 삼엄하게 경비해서 집회와 시위를 개최하기는커녕 유인물도 교정에 운반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선배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내용도 읽어보지 못한 유인물을 제가 운반해서 하숙집 주인에게 폐기해달라고 부탁하고 피신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배포하려던 유인물에 약칭 민청학련이라 부르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단체명이 인쇄되어 있었어요. 박정희 정부는 당일 저녁 긴급지휘 4호를 발동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민청학련은 반국가단체며, 주모자 등을 사형 등에 처한다는 아주 무시무시한 명령이었습니다. 그 당시 반국가단체란 이북이나 이북과 연결된 조직을 말하는 것으로서 국민다수가 이를 믿지 않았어요. 그러자 ‘자생적 빨갱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어요. 그래도 국민다수가 믿지 않자 ‘인민혁명당’(약칭 인혁당)이라는 단체를 날조하여 이북과 연결되어 있는 바로 이 ‘인혁당’이라는 반국가조직의 배후조정 아래 ‘민청학련’이 만들어졌다고 선전했어요.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었어요. *인민혁명당 사건 : 1960~70년대 중앙정보부가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을 결성했다”고 발표하여, 다수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 교수, 학생 등이 검거된 사건. 2007년과 2008년 사법부의 재심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두산백과) 저 역시 4월 5일 중앙정보부가 있는 남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어요. 학교에서도 제적당했어요. 하지만, 학우들이 구속학생을 석방하라는 학내시위를 계속했고 국내외 민심이 이를 지지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는 듯 형 집행정지를 명해 약 1년 만에 풀려났죠. 석방은 되었지만 곧바로 ‘사회안전법’이 만들어졌어요. 희대의 악법인 이 법에 따라 저는 아무런 재판도 없이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되어 늘 감시를 받았어요. 또, 보안감호라는 이름으로 언제든지 저를 투옥시킬 수 있었어요. 형집행정지, 요시찰대상자, 신원조회 등 이중삼중으로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미행했어요. 심지어는 아무런 압수수색 영장도 없이 무단으로 제 거주지에 침입하여 이 잡듯이 뒤지는 일도 발생했어요.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빨갱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낙인이 찍혔죠. 하지만,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과 비교하면, 그것은 약과였어요, 왜냐하면, 전두환 시절에는 이른바 ‘녹화(綠化)사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빨갱이를 정화하겠다.”는 명분으로 적나라한 국가폭력이 수반된 이른바 ‘프락치양성사업’이었어요. 민주화운동에 연관된 친구와 선후배 및 노동운동가, 농민운동가, 빈민운동가, 종교운동가 등을 팔도록 강요했어요. 그 때 양심의 가책으로 또는 양심을 지키고자 자살한 사람도 있고 국가폭력에 시달리다가 의문사한 젊은 학생들이 많았어요. *녹화사업 : 강제 징집된 대학생들에 대한 정훈교육 계획으로, 전두환 정권 1981년~1983년 사이 시행되었다. 당시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과 관제 프락치 활동을 통한 정보 수집을 위해 당국이 실시한 강제징집과 군복무 중 ‘특별정훈교육’이란 이름으로 이뤄진 육체ㆍ정신적 폭력이 수반된 정신교육 등을 가리킨다. 박정희 정권 때에도 녹화사업은 있었으나 단순 입대에서 그쳤다. 그 이후 학력과 전과를 속이고 공장 등에 취업했으나, 한 직장에서 6개월 이상 일해본 적이 없었어요. 요시찰 대상자로서 ‘형 집행정지’라는 신원조회서를 직장에 제출했다가 제가 공장에 취업했다는 것이 정보기관에 알려지면, 다시 투옥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상당히 많은 공장을 전전하면서 돌아다녔지만 원래 목적인 노동운동에 큰 기여를 하지는 못했어요. Q. 당시 연애나 결혼을 할 여력도 없으셨을 것 같은데... 그리고... 다행히 70년대 민주노조운동에 동참했던 아내와 79년 11월 결혼했죠. 그리고 신혼생활 약 6개월 후에 ‘5.18광주민주항쟁’이 발생했어요. 전두환이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민주인사들을 사전에 검거할 것이라는 정보를 하루 전에 입수하고 저는 피신했어요. 5월 17일 자정 경이었어요. 임신 중이었던 아내 말로는 5월 18일 새벽 4시경 홀로 있는 신혼집에 자칭 정보과 형사라는 4∼5 명이 난입하여 난장판을 만들었다는 군요. 사복차림이라 신분을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1∼2명이 군화를 신은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보안사 군인도 있었던 것 같다더군요. 공개수배자가 안 되었을 뿐 집 앞에는 경비초소가 세워졌고, 비공개수배 대상자로서 약 120일 동안 피신했어요. 숨어서 지냈던 곳이 화장실 아래 굴과 같이 열악한 환경이었어요. 기억이 나요. 그때 종아리에 똥독이 퍼져 그 후 3년 동안을 제대로 걷지도 못했었죠. 당시 학생처장이었던 심리학과 교수님이 보증을 서고, 담당형사가 저를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등하교 시간과 수업시작시간부터 종료시간까지 심지어는 강의실 이동시간까지 동행하는 조건으로 그해 9월 중순 비공개 수배가 해제되었어요. 형사와의 동행 및 경비초소 감시 아래 졸업했고, 졸업 이후에도 보이지 않게 감시가 지속되었어요. 하지만, 졸업 이후에도 기사, 기능사 등 자격증을 5개 취득하여 기능직 노동자로서 다시 공장 등에 취업했어요. 85년 5월 말까지 이른바 현장노동자로 생활했어요. 당시 노회찬(前 정의당 의원), 심상정(전 정의당 대표) 등 많은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에 기여하고자 공장생활을 했어요. 그 해 6월 22일 저는 전태일 기념사업회 부설 안양노동상담소를 자비로 설립했고, 초대소장으로 약 36일간 근무했어요. ‘안양지역 노동운동사’라는 책에는 당시 전태일 기념사업회 김문수 사무국장의 제안으로 안양노동상담소가 만들어졌다는 취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저에게 진위도 확인하지 않고 이를 인용한 몇몇 책들이 있어 김문수 선배가 제안한 것은 명칭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고 싶어요. 그 당시 위장(僞裝)취업을 선택한 지식인들은 노조결성 및 파업 등에 적극 동참하기 시작했고, 정보기관이 위장취업자들을 색출하여 심한 탄압을 개시하던 시점이었어요. 그래서 여기저기서 구속자와 해고자가 속출했어요. 저를 신뢰하던 후배들과 노동자들이 저에게 자문과 상담 등을 요청했어요. 상당수는 종교적인 보호막에 들어가면, 노동운동이 추구하는 대의가 변질될 우려가 있으니 그러한 외피 없이 진보적인 시각에서 운영되는 노동상담소를 독자적으로 개설하라고 저에게 요구했어요. 그래서 제 거주지였던 안양에서 (가칭) 송운학 안양노동상담소를 설립하려고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소식을 들었던지 어느 날 평소 교류가 있던 김문수 선배가 연락이 와서 만났어요. 자신은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으로 있고, 장기표 선배가 집행위원장이며, 문익환 목사가 이사장인데 돈도 없이 홀로 상담소를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상담실장이건 교육실장이건 원하는 직책을 다줄 테니 전태일 기념사업회가 있는 창신동 사무실로 출퇴근하면서 함께 상근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제가 정중하게 거절했더니 그러면,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을 테니 전태일 기념사업회 부설 안양노동상담소라는 이름을 사용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어요. 그 때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헤어졌어요. 김문수 선배가 집요할 정도로 여러 차례 요청했어요. 그래서 결국 그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안양이 원래 보수적인 지역이라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너무 자극적이었는지 이 이름 때문에 저는 너무 심한 탄압을 받았어요. 형사들이 여러 차례 찾아와서 상담소 문을 닫으라고 협박했죠. 거절하자 건물주 아들이 선배라고 부르는 깡패 2명과 함께 와서 사무실 출입문과 창문, 문짝과 유리창 및 비품 등을 때려 부수었고, 똥물도 마구 뿌려댔어요. 심지어는 깡패 2명이 각각 제 두 팔을 붙잡아 꼼짝 못하게 만들고 얼굴 등에 인분을 바르고 나중에는 날카로운 과도로 제 목을 겨누면서 임대차 계약을 해지하라고 협박했어요. 함께 근무하던 상근자가 경찰서에 신고했지만,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경찰은 약 1시간 뒤에야 출동하더니 민사상 문제라면서 다시 약 1시간 동안 수수방관했어요. 특수살인죄가 발생할 것만 같은 위태로운 상황이 상당히 긴 시간동안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끝까지 임대차 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하자 형사들이 비로소 건물주 아들과 깡패 2명을 뜯어말려 귀가시켰어요, 냄새도 심했고, 출입문과 창문, 문짝과 유리창 및 비품 등이 파손되어 청소와 원상회복 및 손해배상 등을 요구하면서 사무실 앞 도로에 천막을 치고 앉아 2∼3일 농성했어요. 또, 유인물도 만들어 뿌리고 집회계획도 세우는 등 항의했더니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집회를 주최한 죄 또 그러한 집회 예비음모죄 등을 뒤집어 씌어 구속시켰어요. 10개월 넘게 복역했어요. (2편에서 이어집니다)
문화N티켓, 중소규모 문화예술인 연쇄 인터뷰...가수 최효인
문화N티켓, 중소규모 문화예술인 연쇄 인터뷰...가수 최효인
[선데이뉴스신문= 김종권 기자]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정보원이 운영하는 문화N티켓에서는 음악인, 배우, 제작진 등 중소규모 공연.행사.축제 문화를 만들어가는 재능 있는 문화 인물들을 소개한다. 첫 주자는 19일 신곡 '사라져간다' 발표 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가수 최효인이 나섰다. 최효인은 MBC '듀엣가요제'에서 최종 우승을 차지하며 음악계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 MBC '복면가왕'에 출연해 뛰어난 가창력과 곡 소화력으로 청중을 사로잡아 준우승을 거둔바 있다. 가수 김나영 소속사인 네버랜드엔터테인먼트에 몸담고 있으며 최근 카카오M 레이블 플렉스엠과 공동 전속 계약을 맺은 최효인은 "실제 어렸을 때부터 동요도 대중음악처럼 부를 정도로 가수의 꿈을 품고 있었다" 며 음악에 대한 오랜 열정을 드러냈다. 평소 그녀는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공연을 자주 보는데 수수료 없는 문화N티켓을 통해 다양한 공연을 접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최효인은 현재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에 대해 "이전엔 당연하고 익숙했던 일상이 다 멈추고 바뀌어버린 것 같다" 며 우려를 표했다. 특히 공연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공연 취소로 인해 힘들어하는 상황을 이해한다고 전했다. 그녀는 "같은 예술인 입장으로 공연장 안에서 관객들과 직접 소통할 수 없는 이 상황이 고통으로 느껴진다" 며 문화예술계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공감을 나타냈다. 가수 최효인의 자세한 인터뷰 내용은 문화N티켓 '문화인터뷰(https://www.culture.go.kr/ticket/interview/new/list) 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문화N티켓은 예술인과 중소규모 문화예술단체 티켓판매를 지원하고 국민들에게 다양한 문화관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구축된 공공 티켓예매창구다. 중소규모 문화예술단체들 공연 작품 등록부터 모바일 발권.검표 관련 창구 서비스와 홍보 지원까지 문화예술 생산자들이 창작에 집중하고 관객과 소통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한다. 문화N티켓 앱은 구글 플레이와 앱스토어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인터뷰] 정진우 시온한방병원장 “한방의 과학화와 세계화에 주력”
[인터뷰] 정진우 시온한방병원장 “한방의 과학화와 세계화에 주력”
[선데이뉴스신문=권오은 기자] 시온한방병원은 한·양방 융합기반으로 한 과학화 된 축척된 기술로 도수치료와 침 치료, X-ray 등 첨단 진단 검사기를 이용해 통증의 원인을 정확히 찾아내 맞춤형 치료를 실시하고 있으며 척추질환, 통증치료, 수술재활, 교통사고 후유증 등의 현대병들을 위주로 한방 치료 분야에서 그 역할을 담담해오고 있다. 또한 장시간 체내에 쌓인 독소를 제거하고 오장육부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에너지원인 기혈이 원활하게 순환될 수 있도록 하여 우리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체질을 개선하고 건강한 체질로 변할 수 있도록 음주해독치료, 공진당, 불끈당,시온청정한약 등의 다양한 한방치료를 시행중에 있다. 인체의 정신작용, 감정 활동 등에 의한 원인으로 현대병에 고민하고 있는 환자들을 중심으로 과학화 된 한의학을 바탕으로 중점적으로 치료하고 있는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 위치한 시온한방병원의 정진우 원장을 찾아 인터뷰 했다. 정진우 시온한방병원장은 "한방의 과학화, 세계화에 힘쓰겠으며 나아가 사회공헌 활동에도 주력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찾아오는 모든 환자들은 모두 내 가족처럼 여기는 환자 중심의 경영을 해나가겠다"고도 했다. "앞으로 한방 비수술 명성과 자부심을 마음에 새겨 통증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겠다"도 밝혔다. 시온한방병원을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시온한방병원은 은평구 응암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수술 후 재활과 후유증을 위주로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체계적인 한방·양방 통합치료를 통해 한국인의 체질에 맞는 치료법과 서양의학의 시스템을 도입하여, 환자 한분 한분 체질과 질환에 맞춰 근원부터 치료하는 진료시스템을 제공하고 있으며 주말 공휴일은 오후 2시까지, 평일은 저녁 8시까지 365일 진료하고 있습니다. 양·한방 협진을 통해 체질이나 다양한 통증증상에 따른 맞춤치료? 시온한방병원은 각각 개인의 체질에 따라 질환에 걸리는 경향 및 작업의 능력, 기타 여러 가지의 내외조건에 견딜 수 있는 능력 등의 차이가 있습니다. 저희 병원은 양·한방 협진입니다. 양방은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계십니다. 그 선생님께서 주로 X-RAY나 영상 판단을 해주시고 혈액검사 등 검사 부분들을 담당합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한의사들은 체질에 맞는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시온은 주로 교통사고 환자분들이 반 정도 됩니다. 무릎이나 어깨 ,허리에 수술하시고 오신 분들이 반 정도 됩니다. 주로 양방 쪽에서는 기계를 이용한 물리치료를 물리치료사들이 하는 도수치료를 하는데 한의사들은 추나치료와 침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도수치료란 무엇인지요? 물리치료사가 손으로 구조적인 문제를 잡고 구조적으로 인해서 변해있는 근육들이나 붕대들까지 손으로 풀어내는 치료법입니다. 양·한방을 설립한 계기는? 2016년도에 불광동에 중화한의원이라고 교통사고 전문 한의원을 개원을 했었습니다. 한방만 운영을 하다 보니 양방원장의 도움이 필요한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규모는 지금보다 많이 작았습니다. 그래서 좀 더 크게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양방 원장님 모시고 진료를 하다 보니 예전에 놓치게 되던 것들을 좀 더 확실한 검사를 통해서 할 수가 있습니다, 특화된 진료와 별도의 서비스가 있다면? 주로 통증을 위주의 내장비적인 문제를 주로 보정하지요. 어떤 한 사람이 나를 때리지 않는 이상, 어디 부딪치거나 다치게 하지 않은 이상, 이외의 모든 병들은 다 환자 본인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 병들을 치료할 수 있게 환자분들의 마음을 다스린다던가 아니면 몸 안에서 독소를 배출해내던가 하는 것이 타 병원보다는 조금 특별합니다. 이는 알고 보면 특별한 것이 아닌 것 같아도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랑할 만 한 특별한 것이지요. 몸 안의 독소 배출하는 것, 이를 위해 기계에서 따뜻한 물을 데워놓고 직접 만든 한약제를 넣어서 몸의 독소를 빼내는 방법. 이런 치료과정이 알고 보면 예전보다 조금 과학화된 것이지요. 그리고 환자들과 상담 할 때 길고 편안하게 합니다. 그래야 환자들은 안심하고 말을 합니다. 환자의 아픔을 알게 되지요. 얘기 중에 환자에 관한 모든 습관으로 인한 병과 그 원인들을 깊게 들여다 볼 수가 있습니다. 구조적인 문제가 아닌 내면에 있는 아픈 부분들을 치료하려고 합니다. 언제나 진지한 상담을 통해 얻은 환자의 정보를 이용해서 치료하는 정신적인 면을 참고로 한방치료를 합니다. 이것이 환자의 심적인 상담을 통한 일대일 환자 중심 치료입니다. 이런 치료가 한방 치료에서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환자들을 위한 환자 중심의 치료를 항상 강조하고 있습니다. 환자의 마음을 생각하는 환자 중심의 치료가 타 병원과는 특화된 치료방법입니다. 양방은 주로 어떤 방법으로 치료하는지요? 양방은 원장님께서는 영상이나 촬영해서 온 자료를 근거로 해서 도수치료를 하거나 기계나 자체 내 MRI와 CP, X-RAY나 초음파 등 과학화된 선진 기계적 치료를 하고 있는 것이 자랑입니다. 한방만 고집하지는 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환자를 치료하여 생명을 다시 회복 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의료 사회봉사활동은? 본 병원의 의료팀이 은평구 그리고 홍천군과 자매결연을 하여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함께 체육대회도 하고 의료지원 서비스도 합니다. 함께 어울리는 것, 좀 더 시민과 함께 하는 것 이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구민과 더 가까이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제가 항상 강조하는 환자 중심치료 즉 정신적인 상담의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은평구 체육회에 소속이 돼있어서 은평구의 관내 행사가 있을 때마다 우리 의료진들이 함께 의료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노인분들을 위해서도 별도 의료서비스도 하고 있으며 협약되어 있는 노인정과 일정에 맞게 그때그때 방문하여 상담을 통한 의료서비스도 하고 있습니다. 추나요법의 목적과 추나요법에 관한 설명을? 추나요법이란 뜻만 풀이하면 밀고 당기고 라는 뜻입니다. 뼈를 밀고 당기고 해서 구조적으로 변형이 온 부분을 제자리로 맞춰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추나요법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인체가 구조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때 치료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척추는 바른 S자 라인이 돼있어야 하는데 심하게 굽어있다던가 하면 속안에 장기들도 눌려서 소화가 안 된다던가 가슴이 답답한 증상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속안에 있는 내장기능들이 정상이 되게 하는 치료방법입니다. 지금은 한방에서는 이런 추나요법을 많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추나요법과 카이로프택틱이란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추나요법과 카이로프택틱은 다릅니다. 추나는 한의사들이 한의사 면허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치료하는 것이고 카이로프락틱은 의료인이 아닌 일반인들이 따로 배워서 하는 것입니다. 치료는 추나요법과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단지 카이로프택틱은 의료인이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서 의료행위로는 볼 수 없습니다. 환자들을 치료하고 완치되면 느끼는 보람은? 당연히 저희 병원에 오셨으면 이분들이 병이 낫게 되어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보람을 느끼기 보다는 치료를 못해주고 좀 더 원하는 만큼 호전을 시켜주지 못했을 때가 더 안타까움이 있죠. 항상 부족한 의료기술을 반성하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이 더 기억됩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병원은 다 다니셨다고 하는데 오셔서 치료를 한 일주일 정도 받고 한약 좀 먹고 나서 그런 증상들이 다 사라졌다고 했던 분들이 계시긴 해요. 그런데 저는 먼저 언급했지만 당연히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의사로서 보람이기 이전에 당연히 해야 될 일이라는 것만 생각합니다. 디스크의 증상과 원인이 무엇이고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지? 디스크의 가장 흔한 증상은 신경학적인 증상이라서 저리거나 마비가 된다거나 그런 느낌들이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뼈를 설명을 드리면 이렇게 붉은색을 표시한 위치가 나와 있죠? (사진 참조)그게 디스크가 튀어나온 것입니다. 구조적으로 이렇게 많이 눌리면서 삐져나오면 신경이 눌리게 되고 신경들이 관장하고 있는 부분들이 눌리면서 거기가 저리거나 마비되거나 그런 느낌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갑자기 허리를 필 수가 없거나 숙일 수가 없는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고 할때 이때 대처하는 방법은 양방이든 한방이든 효과적으로 정확하게 적혀있어요. 심상안정이라고 바르게 누워서 무릎 세워 놓고 무릎에 베개를 한 2개정도 놓으시면 됩니다. 목은 문제가 되지 않게 수건 하나 동그랗게 말아서 뒤통수 바닥에 닿게 게워 놓는다던가, 하는 것도 하나의 디스크 예방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베개를 높게 베는 것은 건강에 안 좋을 수도 있습니다. 양방 한방 요법을 통한 건강한 체질개선과 한방 다이어트란? 한의학에서 주로 쓰는 다이어트 약들을 보면 속안에 있는 지방들을 태워내게 끔하는 약들을 많이 씁니다. 몸에 있는 습기를 빼 내는 약을 좀 많이 쓰거나 해독을 통해서 몸에 있는 노폐물들을 빼내면서 새로운 세포들을 유지시키는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한의학을 폄하하는 커뮤니티나 사람들이 많은데 한의학은 몇 천년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학문이다 보니 비과학적이다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한의학 만큼 과학적인 학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몇 천년동안 이어져 온 학문이고 의술입니다. 최신 연구를 통해서 여태까지 나왔던 것들이다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시온한방병원은 환자 체질에 맞게 치료해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한의학은 고대로부터 동양문화의 뿌리가 되어온 음양설(陰陽說)과 오행설(五行說)을 근본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인체는 온통 기(氣)의 몸 덩어리로 되어있다고 했으며, 이는 자연계의 생명은 음과 양의 상대성의 상보성 그리고 상련성 등의 원리의 생명력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한의학의 신비로움을 알 것이다. 한방(韓方)은 인간의 생명활동에 기를 다스리는 치료법을 과학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에 한방의 세계화를 위해 오늘도 연구하는 정진우 원장의 모습을 보면 한방의 미래가 보인다.
"새마음 새물결 운동·골목 상권 살리기" (사)그린코리아실천연합 김현우 대표 인터뷰
"새마음 새물결 운동·골목 상권 살리기" (사)그린코리아실천연합 김현우 대표 인터뷰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사진=[사]그린코리아실천연합 김현우 대표) Q. 안녕하세요. 김현우 대표님 ‘(사)그린코리아실천연합’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김현우라고 합니다. (사)그린코리아실천연합은 본회, 전국조직망, NGO가 함께 통합한 시민단체입니다. 환경거버넌스 및 콜레보노믹스 체제를 시스템화 시켜 동네가게·지역상권을 살리는 ‘새마음 새물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친환경국가 건설에 기여합니다. 국가 환경교육 정책의 비전과 목표를 정책 로드맵에 맞추어 학습과 실천으로 만듭니다. 환경적으로 건강한 시민사회를 만들기 위한 특화적 프로그램 개발과 도입합니다.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업과 공헌활동을 전개함으로 지역 내 통합 시장과 사회적 생태계를 조성하는데 헌신하고자 합니다. 둘째는 시민사회단체 및 공익활동에 참여하는 시민과 파트너십을 맺어 사회의 공적인 가치를 창출합니다. 소통과 협력의 ‘새마음 새물결 운동’이자, ‘새로운 시민 사회문화운동’입니다. 지역 경제 살리기 범국민운동을 전개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마중물이 되고자 합니다. (사진=사단법인 그린코리아실천연합 김현우 대표) Q. 단체를 시작한 동기는? A. 학교 및 사회 각 분야에서 실시되고 있는 환경교육을 보다 지속·체계적으로 지원·활성화를 위해 프로그램을 개발해 많는 시민사회단체 회장님들을 찾아뵜었습니다. 아마 20개 이상 단체 회장님을 만났죠. 제가 개발한 프로그램과 국가 환경교육 종합계획 정부안을 대입하며 당위성을 이야기 했는데, 당시에는 “아주 좋은데” 하고 이후에 연락이 없는 것입니다. 더 이상 다른 단체를 찾다가는 “의미가 없겠다” 생각이 들어, 제가 직접 단체를 만들었죠. 그렇게 환경부 산하에 (사)그린코리아실천연합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시민단체의 책임성은 시민의 관심과 협력이 지속될 수 있게 노력하는 일입니다. 시민단체의 변화와 혁신에 저희 단체부터 시민들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는 롤 모델을 만들고자 합니다. Q. 그렇다면 발전에 대한 대안은 있으신지요? A. 네 그렇습니다. 왜 많은 시민단체들이 노력을 많이 안했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주민들의 적극적 협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본 단체가 변화와 혁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개발합니다. 그리고 여론조사 후 선호도가 높을 때 도입·운영해 지속 가능한 실천 운동을 추진해야 합니다. Q. 시민단체와 주민(봉사자) 협력이 잘 안되는 이유가 뭘까요? A. 지역사회의 다양한 문제와 욕구의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를 통한 성과들이 나타나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단체들은 도리어 사회적 문제를 만들고 있는 현실이죠. 또한 빠르게 바뀐 대내외적 환경에 시민단체들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고 판단합니다. 시민단체에 대한 사회적 기대수준은 높아진 반면, 시민단체들은 그 기대수준에 부응하는 활동 성과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로 초래된 사회적 신뢰성의 상실이 시민단체를 둘러싼 오늘의 현실을 설명해 주는 가장 주된 원인입니다. 이러한 상황의 개선 없이 시민운동의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은 불가능하며, 시민운동의 쇠퇴는 우리사회의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고로, 혁신과 변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시민단체의 반성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코로나 시대에 시민단체가 해야할 역할에 대해 조언해주신다면? A. 펜데믹으로 소비가 위축되는 사회가 왔습니다. 우리가 요즘 ‘비대면’이라는 말을 많이 쓰죠. 그런게 사실 ‘비대면’이라는 말은 슬프게도 ‘서민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며 희망도 없어진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비대면 사회에 살아남을 수 있는 정보와 기술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도태되고 말겠죠. 고로 이를 종식시키기 위해선 시민들이 스스로 코로나19 예방 정책에 적극 동참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역할에도 앞장서야 합니다. 또한 서민 경제의 기반인 ‘골목상권살리기 실천운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입니다. (사)그린코리아실천연합 희망나눔 골목상권살리기 운동본부는 출범해 기존 이벤트 형식의 골목상권 살리기 운동을 타파하고 지속 가능한 실천 운동을 구현해 정부가 지향하는 주민과 자영업자가 협력하게 만들 예정입니다. 골목상권을 살리고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적극적인 상생방안을 추진합니다. 또한 골목상권·재래시장에 대한 분석, 대책, 방향을 구체적으로 모색해 지역사회의 자발적 발전전략의 필요성, 골목상권의 중요성과 대책에 대한 공감대를 얻을 겁니다. 시민 분들이 우리 집앞, 골목의 자영업자 분들이 내 가족이고 이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이왕이면 내 집 앞부터 소비생활 문화가 정착이 될 수 있도록 문화 운동을 전국적으로 추진하겠습니다. 안타까움이 많이 있습니다. 최근 코로나가 다시 재확산되면서 지역경제가 많이 무너졌어요. 많은 분들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앞이 안보인다고 합니다. 만약 시민단체들이 시장경제 대응 사회적 기업,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등의 모범적 성공적인 운영사례를 많이 만들어 놓았다면 어땠을까요? 이 성공사례가 민간에 전파돼 선순환 지역경제 활성화로 소득과 일자리가 늘어나고 공동체 경제가 회복되고, 지역경제 순환경로를 만들어 경제를 확대시키는데 기반을 만들었다면 실직자들에게도 새로운 도약의 대안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Q. 새마음·새물결 운동에 대해 설명해주신다면? A 쉽게 말하면, 서로 돕는 협동을 통해 함께 잘 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입니다. 새마음·새물결 운동은 ‘전 국민이 참여하는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있어요. 지역의 문제 해결을 위한 지역과 사회적 변화에 맞는 패러다임의 구축 및 제도화를 준비하고 민·관 협력을 통한 지속 가능한 지역경제살리기 거버넌스의 롤 모델로 만들고자합니다. 본 단체에서는 우선 가장 시급한 문제로 '지역 순환 경제'를 통한 경제 활성화를 꼽습니다. 지역과 공동체의 '상생'을 목표로 하는 사회적 경제가 지역산업과 만나 '지역경제 선순환 구조'를 이룰 때 '부익부 빈익빈'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침체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해답'도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주민들의 적극적이고 절대적 동참이 필요합니다. 전국민이 참여할 수 있게 운동 확산에 매진할 것입니다. 사회적 기여 가치가 소득이 되고 비영리가 영리를 선도하는 시대를 만들어 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정부에서 말하는 진정한 뉴딜이죠. 그러면 착한 일자리도 자연스레 많이 만들어지겠죠. 시민단체의 대부분 현주소를 들여다보면 시민 없는 시민운동으로 명망가위주의 취약한 내부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활동을 하려면 모든 움직임에 돈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돈보다 사명감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기존 단체와 달리 정책을 해결하며 사회적 경제를 통한 수입창출과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프로젝트를 개발 도입운영 하고 있습니다. 공감하고 참여해 주시는 분들이 각 지역에 확대돼 가고 있죠. 의도에 맞는 목적달성을 조기에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돈이 많아야 시민단체도 운영하고 사람도 움직이지 않냐”고 하는데, 일리는 있는 말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아요. 행동이 더 중요하더라고요. 제가 안양에서 ‘골목상권 살리기 운동’을 할 때, 딱 청소부 한 분과 시작해서 2개월 만에 1000명을 모았고 봉사자 면접을 보고 500명을 뽑아 매주 500명 봉사자가 함께해 1년 이상을 함께 했습니다. 저는 행사장에서 식사대접이나 물 한 병도 가져다 놓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봉사자들은 행사의 주인이고 본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직접 살맛나는 도시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체자인 거죠. 봉사의 시작은 대단한 정치인, 기업가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청소부 한분이라도 가능합니다. 힘들다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지역을 사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큰 힘이 되고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Q.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이 있다면? 과거 한강의 기적으로 전 세계를 매료시키고 오늘날 디지털 소프트 파워 붐이 같은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결력의 DNA를 우리 한국인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무척 강력합니다. 이제는 지역경제 국난극복을 위해 국민 전체가 함께할 때라 생각합니다. 지역사랑을 위한 소비촉진운동이 불꽃처럼 일어나 침체된 지역경제 활성화가 전국적으로 확산돼 K-방역·K-POP·K-드라마·K-영화에 이어 국민이 함께하는 K-경제방역에서도 위대한 국민이 함께해 위기극복의 저력을 보였으면 합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게 함께 만들어 냅시다. 감사합니다.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대상 '(사)그린코리아실천연합 김현우 대표' 지역경제발전대상 수상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SFlhwWyZSjc
[인터뷰] "韓國인 노벨상 받을 수 있다" 유재기 한국노벨재단 사무총장 인터뷰
[인터뷰] "韓國인 노벨상 받을 수 있다" 유재기 한국노벨재단 사무총장 인터뷰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프리랜서 기자]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노벨상.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전세계에서 인류 발전에 큰 공여를 한 인물에게 주는 저명한 상이다. 노벨상 하면, 학창시절 선생님께서 "일본은 노벨상을 자주 받는데 왜 우리는 받지 못할까" 했던 푸념이 떠오른다. 어린 나이에 "그런가보다"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궁금하기도 하다. 지난 2000년 김대중 前(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전후로 한국은 단 한번도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한국노벨재단 사무총장'이자 '문학박사'인 유재기님을 만나 그 속사정을 들어보았다. (사진=유재기 한국노벨재단 사무총장·문학박사·언론인) Q. 안녕하세요. 유재기 박사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언론인·문학박사이자 한국노벨재단 사무총장을 맞고 있는 ‘유재기’라고 합니다. 저는 문학인이자 언론인입니다. 현재는 6개의 언론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발행한 신문은 ‘문학신문’입니다. 국내 최초의 문학신문이에요. 24년이 됐죠. 故(고) 황금찬 시인 아시죠. 제 스승이십니다. 저는 문학이 모든 예술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스웨덴을 4번 다녀왔어요. 예술 분야에는 연극, 영화, 음악 등 분야가 많지만 노벨상에는 문학상만 있습니다. 그래서 문학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벨상: 스웨덴의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의 유언에 따라 인류에 공헌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수여됨, 6개 부문(문학, 화학, 물리학, 생리학 또는 의학, 평화, 경제학)이 있음. 사람들이 ‘노벨문학상’하면 글을 잘 써야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2015년에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어요. 이 작품은 전쟁에 참전했던 여성 200명을 만나 인터뷰를 담은 책입니다. 기자 출신인 작가는 ‘생생한 전쟁 회고담’과 ‘전쟁 전후의 여성들의 삶’을 담아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작가가 글을 잘 썼다기 보다 그 생생한 말과 삶을 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작품의 내용 중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전쟁터에서는 적을 죽여야 살 수 있잖아요. 한 여군이 적을 만나 총으로 쏘려고 했는데, 총을 쏘지 못했데요. 왜냐하면 그순간 뱃속에서 아기가 발길질을 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죠. “전쟁터의 여군들은 여성성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고 표현했어요. 글만이 문학이 아니에요. 말도 문학입니다. 이듬해 2016년 전에는 가수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어요. 밥 딜런은 작가가 아니라, 가수잖아요. 노래 가사도 문학인 거죠. Q. '노벨타임즈'은 어떤 곳입니까? 노벨타임즈는 한국노벨재단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입니다. 한국노벨재단은 1997년에 만들어졌고 24년 역사를 지니고 있죠. 초임 이사장님이 여전히 이사장의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과거 故(고)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기여에 큰 수상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노벨타임즈는 창간한지 8년이 됐습니다. 예전에 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삶을 담은 ‘나를 알고, 세계를 알자’라는 책을 썼습니다. 당시 현대그룹 홍보부에 연락해 정주영 회장이 했던 말은 모두 달라고 했죠. 그렇게 말을 모아서 책을 냈었습니다. 오는 12월에 노벨상 후보들을 모아 ‘노벨상 챌린지 포럼’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반기문 前 유엔사무총장에게 기조 연설도 부탁했어요.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꼭 나올 수 있게 돕는 겁니다. 또한 ‘제 2의 노벨상’을 만드는 데에도 기초가 될 것입니다. Q. '노벨상'을 한국인들이 많이 받지 못한 이유는? 일단은 정치적 영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에는 ‘노벨상 관련 정책’을 펼치지 않았어요. 노벨상 추천은 정부나 관련 재단에서만 추천이 가능합니다. 개인은 (너무 많아서) 신청을 할 수가 없어요. 한국 정부는 노벨상에 대해 잘 모르고 관심도 없을 수 밖에 없었죠. 노벨상은 경제수준에 맞게 수상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산업 발전을 나타내는 가장 큰 지표가 노벨상입니다. 아직 미흡하지만, 국내도 노벨상에 도전하시는 분들의 열정이 뜨겁습니다. 최근 한 기업의 회장님이 카이스트에 600억 재산을 기부했어요. 노벨상을 탈 수 있게 써 달라는 부탁이었죠. 참 멋진 일입니다. 또 한번은 일본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오키야마'에 갔는데 일본의 한 생방송 프로그램 ‘꿈을 향하여’에 참여했어요. ‘짐 로저스’라는 유명 투자자가 사외이사로 있는 에이펙셀 강박사와 함께 갔습니다. 일본은 지금껏 25개 이상의 노벨상을 받았어요. 그 이유는 한 가지라고 봅니다. 누군가 노벨상에 도전할 때는 전문성과 협업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전문성을 가지고 노벨상에 도전한다고 하면 주변 업계에서 도와줘야 해요. 그런데 우리 한국은 아직 협업 문화가 부족합니다. 외국에 사는 교포들 간에도 불신이 짙은 면이 있어요. 의식이 선진화 돼 있을수록 노벨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만약 한의학이 노벨상에 도전한다고 하면 의학 관련단체에서 가만 있을까요? 늘 가치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는 그를 배 아파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기는 반대세력이 있기 마련이에요. 안타깝습니다. 또 노벨상 수상을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배려와 협업이 필요합니다. 참고로 요즘은 추천이 아니라 미디어에서 이슈가 돼 가치를 인정 받아 후보에 오르기도 합니다. 노벨평화상 같은 경우는 개인이 아니라 단체가 받기도 합니다. 평화는 혼자서 이룰 수 없으니까요. 예전에 한 중국 반체제 운동가는 구치소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어요. 멋진 일이죠. 한국도 예전에 한 평화단체가 추진한 ‘피스레터(평화의 손 편지) 운동’ 같은 사례는 정말 노벨 평화상에 도전해볼 만큼 가치가 있죠. 이런 운동들이 지속됐으면 좋겠어요. Q. ‘노벨상’을 받기 위해 국내 교육이 변화할 부분이 있다면? 요즘은 젊은 세대가 모두 전자매체에 빠져있는 점이 좀 아쉬워요. 그래서 제가 운영하는 언론사에서는 ‘축구대회’를 열 계획 세웠어요. 운동에너지를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취지죠. 너무 전자기기에만 빠져있지 않도록. 국가에서 디지털과 종이 문화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게 관련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Q. '언론은 문학과 같다'고 하셨는데,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언론도 말과 글로 전달하잖아요. 기자는 보도 작가에요. 기자는 사실 기반의 짧은 글을 써요. 그래서 보도 작가라고 표현하죠. 그렇게 보면 전국민이 하루종일 문학 속에 산다고 볼 수 있죠. 신문도 문학이고, 방송작가도 문학가이고요. 문학의 카테고리는 굉장히 넓어요. 문학이라는 세계는 어마어마하게 큰 세계입니다. Q. 글을 읽지 않는 세상이 온듯 한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부정적으로만 볼 순 없어요. 시대가 바뀌었으니까. 다만 젊은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앞서 말했듯 문학을 종이책으로만 보기 때문도 있어요. 사실 우리가 뱉는 말 자체도 문학이에요. 말로 하면 구어체, 글로 쓰면 문어체죠. 말 자체가 다 문학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해요. Q. 앞으로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 원래 어릴 적부터 노벨문학상을 받는 게 꿈이었어요. 그 꿈도 여전히 있지만, 지금은 준비중인 연재소설 구상과 유수 일간지에 소설 연재를 계속하고 싶어요. 언론인 문학인으로서 계속 활동하고 싶습니다. ‘선업선과 악업악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 좌우명인데, 선한 일을 행하면 선한 결과를 가져오고 악한 일을 행하면 악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의미죠. 과거 팔순의 병든 어머니를 10년 모셨어요. 당시 인천시에서 ‘시민의 날’에 효자상을 받았죠. 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서울에 자가주택 2채를 마련했어요. 어머니께서 주신 선물인가 싶어요. Q. 마지막 소감은? 가지고 있는 공간을 활용해 언론과 문학의 발전에 끝까지 기여하고 싶어요. 또 한국노벨재단을 지원해 한국인 노벨수상자가 나올 수 있게 돕고 싶습니다. 오늘 이렇게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터뷰] 日의 궁도 아니다, 韓의 국궁이다
[인터뷰] 日의 궁도 아니다, 韓의 국궁이다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프리랜서 기자] 주몽, 불멸의 이순신, 최종병기 활, 안시성, 이 작품들의 공통점을 아는가. 바로 한민족의 ‘활(弓)’ 국궁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활’은 과거 전쟁무기로, 현대에는 전통문화로 대중에 알려졌다. 하지만 대부분 단순히 ‘활쏘기가 있다’ 정도만 알지, 민족의 얼을 담은 ‘국궁(궁술)’의 의미와, 이 국궁(궁술) 문화가 오늘날까지 어떻게 보존됐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오늘은 일평생을 한민족의 활쏘기, 궁술(국궁)을 알리기 위해 살아 온 대한궁술협회의 연익모 총재를 만나 궁술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사진=연익모 대한궁술협회 총재) (사진=대한궁술협회 제공) Q. 안녕하세요. 총재님, 대한궁술협회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저는 대한민국궁술협회 총재를 맞고 있는 ‘연익모’라고 합니다. 연개소문 장군의 후예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대한궁술협회는 20년이 됐어요. 저는 원래 대한궁도협회 소속이었습니다. 서울시 궁도협회 총무 이사까지 지냈는데 당시 하나 아쉬운 점이 있었어요. 무엇이냐면, 활을 쏘기 전에 늘 ‘정간배례’라는 걸 했어요. *정간배례 : 일본 군국주의 시절 했던 참배 중 하나로, 활터에 올라온 한량들이 ‘정간(正間)’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판대기에 90도로 허리를 굽혀 절을 하는 의미 없는 의식. 정간은 ‘건물의 중간’이라는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없음. 그 의미와 역사에 대해선 정확히 기록된 바가 없음. 궁도를 하는 사람들 내에서는 예전부터 활터의 예절이라며 신사들에게 강요했고, 하지 않으면 쫓아내기까지 했음. ▲참고기사 [정진명의 문화산책] 국궁계의 가짜뉴스 : 굿모닝충청 http://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237453 대한궁도협회의 정간론에 대한 비판 : 국궁신문 http://www.archerynews.net/news/view.asp?idx=410 정간배례는 “정간사상”을 내세우며 정간이라 씌어진 ‘건물 가운데’를 향해 절을 하는 겁니다. 아무 역사적 기록도 없는 행위를 그냥 우상숭배처럼 하는 거죠. 어느 날 궁금해서 “이걸 왜 하느냐”고 물었는데 “역사적으로 늘 해왔던 거라서 한다”고 하더라고요. 조사해보니 이 ‘정간배례’는 일제 강점기에 참배를 하기 위해 만들었던 일제의 잔재였어요. 또 ‘궁도’라는 말의 의미도 물었는데 “우리는 대한체육회에서 시키는 일만 한다”며 “우리가 굳이 그 의미를 알 필요가 있나”라고 하더라고요. ‘궁도’란 용어는 우리나라의 ‘활쏘기’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일본이 강제로 ‘궁술(국궁)’을 누르고 넣은 용어에요. 일제의 잔재지 한국의 역사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요. 이걸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립국어원에 수록된 국어대사전에 보면, 사정(射亭) 용어는 일제강점기 어용학자가 한국의 활쏘기를 놀이문화로 격하시키려 한 부분을 아래와 같이 수정을 요구해 받아들여졌어요. 한량들이 어울려 놀기 위해 활터에 세운 정자가 아니라, 활쏘는 사람들이 무예 수련을 위해 활터에 세운 정자가 맞는 거죠. 후손에게 올바른 활 문화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우리나라의 궁술을 잊고 살아야 하는가” 고민했었죠. 그러다 2012년도에 석호정(남산에 있는 활터)이라는 공간에서 1년 동안 ‘궁도 청산 결의대회’를 개최했어요. 그 소식을 들은 대한궁도협회는 저를 제명시켰어요. 그때가 2000년이었죠. Q. 그랬군요.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셨나요? A. 2001년에 사단법인 ‘한국국궁문화세계화협회’를 설립했어요. 2002년 월드컵때 월드컵 조직위원회을 찾아갔어요. 가서 “한국의 전통 활쏘기 문화를 알리겠다”고 협조를 요청했죠. 한강에 난지정이라는 활터가 있는데, 활쏘기 시연을 무료로 하겠다고 했어요. 월드컵 기간에는 월드컵 조직 위원회에 승인된 단체만 행사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조직위의 승인을 받아 활쏘기 시연을 했죠. 그때를 계기로 외국인들도 ‘한국 활쏘기’에 대해 많은 분들이 알게 됐죠. 한국 활쏘기, 국궁의 위상을 처음으로 알린 거죠. 2005년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김명민(극중 이순식 역)씨가 활을 쏘는데 양궁(손가락 3개로 시위를 당김)으로 활을 쏘는 거예요. 이순신 장군이 양궁식으로 활을 쏘다니 말이 안되잖아요. 그래서 대한궁술협회에서 드라마 가처분 신청을 한다고 이의제기를 했죠. 그랬거니 KBS가 난리가 났어요. (사진=궁술[국궁]에 대해 설명하는 연익모 대한궁술협회 총장) 그를 시작으로 문체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이 참에 한국 활쏘기의 원형을 복원하자고 제안했어요. 이를 정부에서 받아들였죠. 그렇게 ‘2005년 문화원형디지털콘텐츠화 사업 자유공모(통합형)’에 참여했죠. 콘텐츠기획 및 수행계획서를 만들어 ㈜네오그라프라는 기업과 협력해 ‘한국국궁문화세계화협회(대한궁술협회)’로 공모를 따냈죠. 그렇게 공식적으로 국고 2억6천만원 (자부담 8천만원) 총 3억4천 만원을 가지고 1년에 걸쳐서 ‘한국 활쏘기를 디지털 콘텐츠로 개발 ’ 및 복원했어요. 그렇게 법적으로도 공식 문화 컨텐츠로 인정 받았죠. 국가공인 국가지원 한국 궁술콘텐츠에는 시대별(선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 현대, 해외 등) 활과 화살 및 부속품 등이 콘텐츠로 담겨있습니다. Q. 대한궁도협회에서는 아무런 제제가 없었나요? A. 들어보세요. 그때 ‘대한궁도협회’에도 공문을 보냈어요. 이제부터는 ‘국가 공인 표준 콘텐츠’로 등록이 됐으니, 이를 배워 제대로 이수해서 ‘활쏘기’를 가르치면 어떻냐고. 그랬더니 대한궁도협회에서 저를 고소를 했어요. 공문을 보낸 걸 ‘업무방해, 협박’이라고. 물론 ‘무혐의’를 받았죠. 공문이 업무방해가 될 수는 없다고 판정났죠. 이후에 문체부, 지방자치단체, 활터 등 다수 단체에 공문을 보냈어요. 제가 그 이후에 결심한 게 있어요. 궁도협회와 싸우지 말자고. 기존 궁도인들은 이 궁술(국궁)에 대해 귀를 열고 듣지를 않으니까 그들끼리 생활체육의 일환으로 활터에서 심신단련으로 활쏘기를 하고, 우리는 교육과 문화를 승계하고 알리는 목적으로 하기로 했죠. 궁술문화콘텐츠가 제작됐으니, 이제 국민들한테 알려야 하잖아요. 그래서 국궁교본을 발간했어요. 문화체육관광부에 제출했죠. 그렇게 문화체육관광부 24954호 ‘로 등록되어 국궁도서’가 탄생했죠. 나라에서도 인정받는 콘텐츠가 된 거예요. Q. 궁술(국궁)을 교육 콘텐츠로도 많이 알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A. 2008년도에 서울시, 부산시, 전남, 충북, 경기 교육청에서 ‘전국교원 국궁직무연수’를 시작으로 활쏘기를 학교에 널리 보급하고 있어요. 교육청에 승인도 받고. 매 시즌마다 30명씩, 지금까지 1000여명의 교직원들이 궁술교육을 받았죠. 물론 교육부에는 국궁과 궁도가 모두 등록돼 있어요. 하지만 국궁과 궁도는 과녁과 자세가 자체가 틀려요. 다른 거예요. 일제 침탈 때 들어온 명칭을 사용하는 궁도, 우리 전통 활쏘기를 되살려서 운영하고 궁술(국궁)으로 나눠졌죠. 부산시 교육청에서는 ‘학교스포츠클럽 전국국궁대회’를 개설했어요. 근래 교육부에서 후원 명칭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고, 2021년도부터 궁술대회에 참가하여 1등을 하는 학생은 교육부 장관상을 받게 됩니다. 2012년도에는 ‘궁술문화원형보존회’를 발족했어요. 엊그제 부산에서 사무실을 개원했죠. 또 서천군 청소년 수련원이 사업 승인을 받고 있는 중이에요. 궁술사관학교, 궁술교육원, 궁술영상관, 궁술체험장 등 교육 시스템을 갖추려고 추진 중입니다. 또 기쁜 소식은 궁술(국궁)이 2020년 7월 30일 '국가무형문화제 142호'로 지정됐어요. 이제 국가공무원들도 우리나라의 국궁을 배우고 연수를 받을 수 있게 된 거죠. 학생들도 우리의 활쏘기 문화를 당당하게 체험할 수 있고. Q. 궁술(국궁)을 위해 오랜시간 일해 오셨는데, 힘든 점은 없으셨나요? A. 말도 마십쇼. 처음에는 아내의 반대도 엄청 심했어요. 당신이 뭔데 그걸 하냐고. 세상에 당신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데. 생업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그랬죠. 하지만 교육부나 정부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지금은 아내도 가족들도, 주변 사람들도 인정을 해줘요. “전 세계에 태권도가 다 보급돼 있지 않냐. 국궁도 표준콘텐츠로 등재가 됐으니 태권도 시범을 하기 전에 국궁을 30분 정도 먼저 하면 어떠냐”는 제안도 국기원 측에 했었어요. 옛 성균관에서는 활쏘기, 말타기 등 대사례(왕이 참관해 활을 쏨), 향사례(지방 고을들이 참관해 활을 쏨) 등 활쏘기를 꼭 했었어요. 그래서 우리 한민족을 기마민족, 활의 민족이라고 부르잖아요. Q. 궁술의 큰 장점이 있다면? A. 우선 활쏘기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장애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가능해요. 자세는 척추를 곧게 세우고. 복근과 단전에 힘을 줘요.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길 때 복식호흡과 단전호흡을 동시에 합니다. 숨 2/3를 들어 마시고 숨을 멈춘 후 활을 쏩니다. 그리고 나머지 숨을 뱉어요. 호흡의 집중으로 정신 수양도 되죠. 국궁을 쏘고 나면 ‘9시 뉴스’를 켜놓고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날 정도라니까요? (농담) 아이들에게 국궁을 교육하기 위해 활을 당기는 손가락마다 의미를 부여했어요. 양궁, 궁도와 다르게 궁술은 ‘다섯손가락’을 모두 이용해요. 엄지(자신감), 검지(목표). 중지(용기), 약지(인간관계). 새끼(약속)이죠. 또 활에는 우리 민족의 역대 명궁들의 캐릭터를 그렸어요.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역사 공부를 하면서 활도 쏘는 거죠. Q. 궁술과 함께한 특별한 추억이 있다면? A. 어느 날 활터에 있는데 지인인 모 대학교 교수가 수맥을 찾겠다고 수맥탐지기를 들고 온 거예요. 수맥이 지나는 곳에 활을 한 번 대보자고 하길래 터에 거치돼 있던 각궁, 개량궁을 댔더니 수맥탐지기가 반응하는 거예요. 신기했어요. “활에 어떤 에너지가 흐르나?” 싶었죠. “선조들이 이 국궁으로 나라를 지켰으니까 호국영령들의 넋이 담겨 있구나” 했어요. 그때 “내가 이 국궁을 알리는 일에 사명감을 잊으면 안되겠구나” 느꼈죠. Q. 궁술(국궁)의 전망을 어떻게 보시나요? A. 아주 밝게 봅니다. 미래의 교육문화 산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단순히 활을 쏘는 게 아니라, 민족의 결과 정신을 담아서 콘텐츠화 시키는 거죠. 그러려면 교본이 필요하니 교본도 만든 거고요. Q. 새로운 시대에 궁술이 나아갈 방향은? A. 4차 산업혁명시대의 변화는 비단 정보, 통신, 제조기술의 혁명뿐 아니라 미래 교육의 변화도 불러 왔어요. 지식의 범람에 변화의 속도도 빨라졌죠. 더 이상 교과서 속 지식의 전달 만으로는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어려워졌습니다. 소프트웨어 활용에 익숙한 학생들은 교육방법의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어요. 즉 현장 체험교육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전국에는 수백군데의 향교가 있고 명륜당(조선시대 학교)도 있어 지역 학생들이 궁술(국궁) 문화를 배우고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거죠. 각 나라마다 민족궁은 다 있지만, 가장 멀리 나가고 과학적인 궁은 바로 우리 한국의 국궁이에요. 국궁은 ‘5궁’이라 불리는데 활대가 5번 곡선을 이루며 휘어져 있기 때문이에요. 처음에 중앙에서 한 번 휘고 양끝으로 가면서 한번 더 휘어져 있어요. 활을 쏘면 2번 팅기며 추진력이 강해지는 거죠. Q. 남북 궁술문화교류를 하고 있다고 하시던데, 맞나요? A. 네, 본 협회는 통일부에서 북한주민접촉승인을 받아 외교부의 협력으로 납북 궁술교류를 시작한 결과 3번의 북측 관계자와 조우했습니다. 아직도 북한은 조선궁술연맹이 있어 한민족 활 문화의 대화는 동질감이 있어 잘되고 있어요. 2018년 11월 2~3일에 금강산에서 심도 있게 대화를 했어요. Q.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한국 전통 활쏘기가, 국가무형문화제가 됐고,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궁술문화의 최종은 궁술을 세계화 하는 겁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우수한 궁술 문화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밑거름이 되도록 잘 보존해서 대대손손 민족 궁술 활쏘기 문화를 후손들에게 알리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영화소식] 『후쿠오카』, 주연 윤제문 인터뷰, “소풍처럼 행복하게, 기분 좋게 촬영한 작품”
[영화소식] 『후쿠오카』, 주연 윤제문 인터뷰, “소풍처럼 행복하게, 기분 좋게 촬영한 작품”
[선데이뉴스신문=김건우 기자] 「“주어진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감정을 체화시키려 노력했다”」 시네아스트 장률과 두 번째 만남부터 촬영 비하인드까지 영화 <후쿠오카>가 개봉을 앞두고 배우 윤제문의 인터뷰를 전격 공개했다. [사진='후쿠오카', 제문 역의 배우 윤제문 / 제공=인디스토리] <후쿠오카>는 28년 전 한 여자 때문에 절교한 두 남자와 귀신같은 한 여자의 기묘한 여행을 담은 작품이다. 시네아스트 장률이 “몸 전체가 연기다”라 말하고, 배우 권해효가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귀여운 배우, 선과 악을 넘나드는 연기”, 배우 박소담이 “믿고 갈 수 있는 든든한 선배”라고 입을 모아 극찬한 것은 다름 아닌 배우 윤제문. 영화 <후쿠오카> 속 자신의 이름과 같은 캐릭터 ‘제문’을 맡아 새로운 면모를 뽐내는 그가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에 응했다. 배우 윤제문은 인터뷰에 앞서 <후쿠오카>와 영화 속 캐릭터 ‘제문’에 대해 “후쿠오카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해효’를 찾아간 ‘제문’과 ‘소담’, 3일 동안 기묘한 세 사람이 함께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제문’은 28년 전 사랑했던 ‘순이’를 못 잊고 헌책방을 운영하며 혼자 지내는 바보 같은 면과 순정파 면모를 모두 지닌 인물이다”라고 설명했다. 자신의 본명과 같은 캐릭터 ‘제문’을 연기한 소감을 묻자 “작품을 할 때, 내가 맡은 캐릭터의 모습이 나에게 어느 정도 있다고 여기고 연기하는 편이다. 악역을 맡아도, 캐릭터가 표현하는 감정과 성격이 내 안에 있다 생각하고 그걸 끄집어내려고 노력한다. ‘제문’ 자체를 특정 짓지 않았다. 주어진 상황 안에서, 또 주어진 공간 안에서 배우들과 어울렸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감정, 대사들을 체화시키려 노력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고, 과장되지 않게 연기했던 것 같다. 조금 더 상황에 집중되는 장점이 있어서 신기했다”라고 답했다. [사진='후쿠오카', 스틸 컷 / 제공=인디스토리] <후쿠오카>의 조합이 안정적이고도 색다른 이유라면, 두 번째 호흡하는 장률 감독과 실제 절친한 사이인 배우 권해효, 그리고 처음 연기합을 맞춘 배우 박소담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장률 감독님은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2018) 촬영이 끝나고 먼저 다음 작품까지 또 함께하자고 해주셨다. 장률 감독님의 작품을 감명 깊게 보았기에, 개인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경험이었다”, “권해효 선배는 대학로에서 같이 연극했던 절친한 사이다. 영화 촬영을 통해 더욱 친해지게 되었고,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다”, “박소담 배우는 <후쿠오카>에서 처음 만났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데도 어리다는 느낌을 못 받았다. 촬영할 때 집중도가 좋은 편이어서 함께 연기하는 배우로서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어서 좋았다”는 촬영 소회를 밝혔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행복했던 작품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걸어서 촬영장에 가고, 아침 대용으로 삼각김밥을 먹으며 촬영하던 추억들이 촬영이 아니라 소풍을 나온 것처럼 행복했다. 이렇게만 촬영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하게, 기분 좋게 찍었던 작품이었다”는 말로 <후쿠오카>에 대한 애정 어린 말을 남겼다. 뒤이어 차기작이자 임상수 감독의 신작 <헤븐: 행복의 나라로>(가제) 출연 소식을 밝히며 “이제는 악역 좀 그만 하고(웃음), 대중들한테 좀 더 따뜻한 이미지, 편안한 이미지로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동네 아저씨, 동네 형 등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역할들로 푸근하게 다가가고 싶다. 어떤 장르나 채널이든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전환점이 될 <후쿠오카>를 관람할 예비 관객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시기다. 영화 <후쿠오카>가 관객분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곱씹을수록 그 의미를 찾게 되는 대사와 만담처럼 주고받는 완벽한 연기합은 배우 윤제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익숙했던 악역에서 벗어나 다소 기묘한 순정파 캐릭터 ‘제문’으로 귀여운 면모는 물론 캐릭터와 100% 싱크로율을 보여줄 영화 <후쿠오카>에 시네필들의 이목이 주목된다. 영화라는 장르만이 가지는 여유 속에서 매력을 발산하는 베테랑 배우 윤제문의 새로운 매력을 보여줄 영화 <후쿠오카>는 8월 27일 극장으로 찾아온다.
[인터뷰] 박덕은 시인 "이 세대에게 시(詩)가 필요한 연유"
[인터뷰] 박덕은 시인 "이 세대에게 시(詩)가 필요한 연유"
[곽중희 기자, 박정민 사진 기자] 당신은 시(詩)를 읽는가? 아니면 쓰는가? 얼마 전 술자리에서 시를 좋아하는 한 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은 ‘시를 읽지 않는 사람’과 ‘시를 읽는 사람’과 ‘시를 쓰는 사람’으로 나뉘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각 부류의 사람이 세상을 담는 마음의 깊이가 서로 다르다는 말이었다. 기자도 시를 좋아해 자주 썼었다. 하지만 세상살이에 치여 점차 ‘시’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한 평생 시를 쓰며 낭만을 경영해 온 한 시인(詩人)을 만났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감성을 파헤친다는 시(詩), 먹고 살기도 바쁜 폭주의 시대에 ‘한 편의 시(詩)’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싶어졌다. (사진=해맑게 웃고 있는 박덕은 시인) Q. 안녕하세요. 박덕은 시인님, 본인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박덕은’이라고 합니다. 전북대학교 문학박사 과정을 거쳐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지금은 어른들을 대상으로 문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989년 1월에 문학반 하나를 시작해 지금은 13개의 문학회로 성장했는데, 현재까지 400명 정도의 작가를 배출했어요. 지금까지 제자들이 전국에서 받은 상을 집계해보니 총 689개의 문학상을 수상했더라고요. 인터넷 문학방송(유튜브 채널 ‘낭만 대통령의 문학토크’)을 시작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방송을 통해 전 세계와 소통하다 보니 학회도 지금은 규모가 많이 커졌어요. 일본에서 방송을 보고 수업을 들으려 한국에 왔다가 다시 수업을 듣고 일본으로 돌아간 사례도 있어요. 저는 ‘낭만대통령’이라 불립니다. 제자들이 지어 준 이름인데 “가진 것은 없지만 낭만은 많다”는 뜻을 가지고 있죠. Q. 어떻게 시인이 되셨습니까? 원래 저는 소설 전공이었어요. 대학원을 갔는데 당시 전공교수님이 시에 엄청난 열정을 가진 분이었어요. 시를 쓰지 않으면 어떤 문학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수업에 올 때마다 시를 5편씩 써 오게 했어요. 처음엔 이해가 안됐죠. 안 쓰면 수업을 들을 수 없다고 하니까... 난 소설 전공인데 왜 자꾸 시를 쓰라고 하는지. 그렇게 쓰다 보니 쓴 시가 엄청 쌓인 거죠. 그 교수님 덕에 시와 인연을 맺었죠. 그때는 반항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교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이해가 돼요. 시의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정말 문학을 깊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때는 문학계에서 3차까지 추천이 돼야 시인 칭호를 받을 수 있었죠. 보통 시인에 등극하는데 10년이 걸렸어요. 이호석, 황순원 소설가의 문장력이 깔끔한 이유는 바로 시를 쓰다가 소설을 쓴 분들이기 때문이에요. 시인 출신이라 문장력이 확실히 달라요. 그래서 시를 깨달은 다음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 분들의 글이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사진=한실문예창작 동인지 제15집 '시의 집을 짓다'를 보고 있는 박덕은 시인) Q. 요즘 젊은이들이 쓰고 읽는 ‘시’는 그 형태가 많이 달라졌는데, 어떻게 보시나요? 두 가지가 떠오르는데, 일단 젊은 사람들이 글 읽는 것을 어려워하다 보니 요즘에 발전한 게 바로 ‘디카시’에요. 디카시는 바로 시를 쓰되 5행 이내로 쓰는 형태의 시에요. 반드시 사진 한 장과 함께 5행 이내로 써야하죠. 지금은 중고등학교 국어교재에 아예 디카시를 포함시켰어요. 문학 영역이 시, 수필, 소설, 동시, 디카시 이렇게 구성됩니다. 엄연히 디카시가 자리를 잡은 거죠. 국내 신춘문예 ‘시 부분’ 상금 평균이 300만원인데 디카시 상금은 300~500만원이에요. 더 많죠. 시의 주 흐름이 디카시로 흘러갈 가능성이 훨씬 높아요. 저는 이를 미리 예측했어요. (디카시의 디카는 ‘디지털 카메라’를 말합니다) 왜 이런 디카시나 나왔는가 생각을 해보니까, 디카시는 스마트폰에 딱 맞게 사진 하나와 글 5줄 정도가 딱 들어갈 수 있게 하다보니 만들어졌어요. 저는 디카시를 7~8년 전부터 올렸죠. 최근에도 짧은 디카시 하나를 올렸는데 올리자마자 64명이 자기 페이지에 공유를 한 거예요. 이게 급속도로 번져간다는 거예요. 앞으로는 디카시가 문학계를 주름잡을 거예요. 젊은이들이 긴 글을 읽지 않고, 또 글만 있는 것 보다 ‘사진’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배’라는 시가 있어요. 제목이 ‘배’고 내용은 “단순히 어부만 태운 것은 아니다. 역마살과 낭만도 올라탔다”에요. 그리고 배 사진이 있죠. 이게 바로 디카시에요. 이렇게 하면 독자도 짧은 시간 안에 가슴에 감성을 불러일으키게 되죠. 삭막했던 가슴에 감성의 폭을 순식간에 높이는 거예요. 요즘 부부사이에 이혼이 많은 것도 서로 다른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감성의 폭을 넓혀 상대의 감성을 이해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사진='디카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박덕은 시인) Q. 우리 사회에 ‘시(詩)’가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예전에 모 유명 정치인의 부인을 만날 일이 있었어요. 좀 친해졌을 때 얘기를 나눴거든요. 그때 그분에게 딱 두 가지를 얘기했어요, “만약 남편분이 대통령이 돼서 영부인이 되시면 청와대 내에 한달이나 일주일에 한번 시 창작 교실을 운영하게 하십쇼. 그러면 무조건 청와대 직원들은 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럼 순식간에 청와대의 군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성을 파고드는 공무원이 국민을 사로잡는 것이지, 엄포와 힘으로만 통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영부인이 되시면 대통령 행사에 따라가지 말고, 경비원 2~3명만 데리고 사복을 입고 아무데나 가서 봉사활동을 하시길 바란다”고 했어요. “그러면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영부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죠. 왜 이런 생각을 했냐면, 옛날 조선시대에 벼슬을 하려면 과거시험을 봤어요. 시험이 끝나고 마지막 테스트가 무엇이었냐면, 바로 즉흥시를 쓰는 거였어요. 그를 가지고 장원급제를 뽑았어요. 일단 다른 것들이 통과되면 즉흥시를 가지고 판단했죠. 왕이 시들을 쫙 깔아놓고 영의정과 함께 평가를 하는 거죠. 그렇게 ‘장원급제’가 됐어요. 시를 통해 그 사람의 감성의 깊이와 심성까지 볼 수 있는 거죠. 이처럼 과거의 장원급제는 이 시(詩)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안됐어요. 백성을 잣대로만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 백성들이 살아가는 감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깊게 통치할 수가 없어요. 시를 공부한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깊이가 달라요. 시를 어렵게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시는 전공이 아닌 분들도 충분히 쓸 수 있어요. 평범한 주부에서 시작한 분들도 누구나 시인이 돼요. 배운다면 말이죠. 현재 제가 가르친 제자들 중에서도 평범한 주부지만 전국의 백일장에서 유수한 상을 많이 받은 분들이 아주 많아요. (사진=한실문예창작의 동인지 제15집 '시의 집을 짓다' 시집을 보며 밝게 웃고 있는 박덕은 시인) Q. 시(詩)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요? 시의 가장 큰 가치는 무엇이냐면, 사람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의 세계를 파헤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아내가 저녁밥을 지어야 하는 순간에 밥을 안 짓고 창밖에 달을 보고 멍하니 있어요. 그걸 본 남편이 “여보, 밥줘. 뭐하고 있어?”라고 하니 아내가 “여보, 오늘은 달이 참 밝아”라고 하는 거예요. 남편은 밥 먹어야 하는데 아내가 달을 보고 있으니 이상하잖아요. 이때 이 아내는 왜 그러냐면, 낭만의 꿈을 가졌던 자기가 기껏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려고 대학교에서 대학원까지 마쳤나 회의가 든 거죠. 사랑 때문에 밥은 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인생에 회의가 든 거예요. 이럴 땐 남편이 잘못 건드리면 아내가 이혼장을 내밀 수도 있어요. 여기서 남편이 ‘시’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커피를 타 가지고 슬며시 아내에게 가서 “여보, 내가 오늘 저녁은 라면 끓여 먹을게. 여기 앉아서 좀 쉬면서 당신 하고 싶은 것 해. 당신 나 때문에 여태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살았잖아”하고 아내의 감성을 다독여줬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여기서 “뭐하고 있어, 밥이나 빨리 줘”하고 핀잔을 놓는다면 아내 마음이 어떻겠어요? 시는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섬세한 감성자락을 파헤쳐 표현해 선물해주는 거예요. 이것 맛보게 해주면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굉장히 성숙해져요. (사진=시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박덕은 시인) Q. 시인들이 겪는 (현실의) 어려움이 있다면? 사실 시인들은 생활이 어려움이 많아 대부분 부업을 같이해요. 시만 써서는 먹고 살기 힘드니까. 저희 제자들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영국 같은 나라는 ‘개관 시인 제도’가 있어요. 시만 쓰면서 살아가는 시인 중에 “존중받을 만하다”고 판단이 되면 나라에서 연 300파운드(한화 45만원) 정도를 지원해줘요. 큰 금액은 아니지만 시인의 명예를 드높여 주는 거죠. 저도 가진 재산은 없어요. 집이나, 땅은 없지만 낭만을 가득 가지고 있죠. 고로 누구 앞에서 쫄지 않아요. 가진 건 없지만 마음에 낭만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번에 유명 정치인 아내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던 거예요. 지금 아이들도 다 컸고 굳이 돈을 많이 벌 필요도 없으니까. 낭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거죠. Q. 오늘날 ‘시’가 봉착한 현실적 어려움은? 사실 시집이 거의 안 나가죠. 요즘은. 그러니 시인들이 인세를 받을 수가 없어요. 요즘 출판업계의 현실을 보면, 출판사가 서점에 책을 깔아놓는 자리를 돈을 주고 사서 자사가 홍보하는 책을 몽땅 깔아버려요. 그러니 앞에 깔린 책이 자연스레 베스트셀러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사람들의 심리가 앞에 책을 볼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그렇게 순위가 올라가면 또 서점에서는 그 책을 베스트셀러로 진열해 버리니까. 내용보다는 마케팅의 비중이 높아진거죠. 안타까운 현실이에요. 일제 강점기 당시 계몽시가 유명했어요. 심훈과 이광수가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 스타였죠. 당시 이광수의 무정을 읽으려고 간이역 앞에 줄을 섰었으니까. 그때는 그만큼 시의 가치가 인정을 받았는데 요즘은 많이 달라졌죠. 심훈의 계몽시보다는 정지용의 이미지시가 더 사랑받는 시대가 되었죠. Q. 또 이루고 싶은 꿈이 있으실까요? 제가 꿈꾸는 것이 무엇이냐면, 고대 그리스에 있는 광장 같은 강의 공간을 만드는 거예요. 그리스의 광장이나 교육관은 모양이 위로는 대각선, 양옆으로는 부채꼴 모양이에요. 알아보니까 이게 참 과학적이더라고요. 강사의 목소리가 앞이나 뒤나 똑같이 들린다고 해요. 그래서 강의실은 평면으로 만들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양쪽 벽에는 시집과 책들을 배치하고 강의를 하고 싶어요. 제가 전국을 다니면서 강의를 하기 보다는, 그런 공간이 있으면 참 좋겠어요. 제가 이 꿈을 이루기 위해 빌게이츠한테 편지를 몇 번 썼는데 붙이지를 못했네요. 아이고 참, 하하. 이런 강의실을 하나 만들어서 시를 가르치고 학생들을 만나고 싶죠. 그리고 제 딸이 화가인데 저에게 그림은 잘 안 그려주다 보니까, 제가 직접 그려요. 최근에는 전남 담양 메타쉐퀘이아 길 옆 남촌미술관에서 8월 한 달 동안 유화초대전을 하고 있어요. (사진=시집 한실문예창작 동인지 제15집 '시의 집을 짓다'를 들고 있는 박덕은 시인) (사진=박덕은 시인은 이달 8월 1~30일까지 담양 남촌미술관에서 유화초대전을 열고 있다) Q. 인터뷰 소감 인터뷰 한 것 같지 않고,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 종료) 인터뷰가 끝나고 나니, 한 동안 짓지 못했던 시를 짓고 싶어졌다. 한 순간 스쳐 지나는 수편의 글보다 한 사람의 가슴에 일평생 새겨지는 시(詩)를 쓰고 싶은 마음, 그것이 시인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좋은 시(詩)들이 뭇사람에게 더욱 사랑받아, 우리의 감성은 더욱 짙어져 서로를 깊게 이해할 수 있는 날들이 오기를 바란다. *박덕은 시인이 걸어온 길 한실문예창작 지도 교수 전북대학교 문학박사 전전남대학교 교수 박덕은 예술관 관장 박덕은 문학관 관장 소설가, 문학평론가 동화작가, 아프리카tv BJ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새한일보 신춘문예 당선 창작문학신문 신춘문예 당선 사이버중랑 신춘문예 당선 김해일보 시민문예 당선 경북일보 호미문학상 당선 낭만대통령 박덕은 시인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박덕은 시인의 시(詩) 관심 당신의 아침을 호수 위에 펼친다 별빛이 머물다 간 자리에 어제의 채도 껴입은 초록을 물그림자로 띄운다 따스한 꽃잎 한 장으로도 물의 심장은 둥근 지문으로 쿵쿵 뛰는데 밤낮없이 비를 긋는 당신은 바깥쪽이 젖고 나의 마음은 늘 안쪽이 젖는다 파문 이는 동그라미의 안과 밖 그 사이 어디쯤에 새소리 푸르게 출렁이는데 몸을 꺾는 겨울 속으로 서둘러 가는 당신의 뒷모습, 물이랑의 간격은 좁아져 날카롭다 -박덕은 시인(낭만 대통령)
[일요인터뷰] 황은지 한국화 작가. “한국화의 오방색 그 독창성이 세계를 품다”
[일요인터뷰] 황은지 한국화 작가. “한국화의 오방색 그 독창성이 세계를 품다”
'태양의 축제' 일월오봉도를 주제로 오방색으로 살아있는 자연을 친근하게...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한국화를 살리되 매화에서 변화의 시작을.... [선데이뉴스신문=신민정/권오은 기자] “한 인간의 생각 하나하나가 내가 아닌 타인 관조로 생명이 되어 꿈틀거린다.” 아침의 고요가 풍성한 연의 뿌리가 되고 모진 비바람과 폭풍이 연이 된다. 꿈의 소원이 두 손을 모은 혼의 기도가 연꽃을 피게 할 것이다. 한국화의 변신은 한정된 기존의 사고가 늘 가슴 속에서 울고 있었기 때문에 황은지 작가의 꿈의 울분이 이제 독창성으로 세계를 품게 된다. 용을 품고 부귀로 승천하는 과감한 그 독특한 독창적 사상은 늘 자연에서 온다. 하늘의 태양, 별 ,구름, 바람, 산, 꽃. 나무, 새들 등의 새싹, 나무들은 그의 역동적인 혼의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최근 인사동에서 전시 중인 황은지 한국화 화가의 ‘태양의 축제, 한국화 세계를 품다.‘의 개인전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황은지 한국화 작가를 만났다. ‘황은지 작가의 작품감상, 그리고 작품완성 과정과 개인전을 열기까지의 소견‘ 태양의 축제는 일월오봉도를 주제로 오방색으로 살아있는 자연을 친근하고 깊이 있는 역동성을 혼으로 표현해 낸 자아를 되찾게 된다. 개인전은 지난 12일 시작하여 오는 18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신상에서 열린다. 이 전시에는 황은지 작가 작품의 완성과정에서 무려 1년 6개월간에 걸처 완성된 작품도 전시 되었다. 그 과정에서 뼈아픈 사정이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아픔을 이겨 내는 처절함이 한국화 '옥황상제의 구슬' 작품의 완성도에 절정을 이루게 된다. 모든 것을 집대성한 혼의 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화는 원래 작품의 의미가 간결하며 단아한 맛과 정아한 마음이 있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기법과 양식으로 그린 그림이다, 색은 천박하지 않고 짙은 채색을 피하는 것의 보편성이 있다. 하지만 색은 담채 정도의 채색을 한다. 소재는 주로 한국적 소재이며 한지에 붓으로 그린다. 하지만 그는 한국화는 작가의 개성이 중요하며 개성을 살려 차별화 해 가는 것이 필요한 과제라 생각하고 있는 남다른 작가이다. 또한 그는 이와는 달리 정적이면서 평면적이지만 매화의 점과 팔팔 팔의 솔방울, 우주의 눈 등이 동적인 것은 파동이 그의 에너지가 넘친다. 그의 그림에는 부귀영화의 상징인 부엉이를 태워 승천한 용의 표현과 선과 색상이 파도처럼 자연스레 넘실거리며 붓의 신들린 흐름과 직선의 각을 여백으로 남기는 미완성적 완성작을 표현하는 작품을 감상한 고객들에게 의문을 갖게 하는 특색이 있으면서 혼을 쏟아 내는 작가이다. 황 작가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유난하게 생각과 공상이 많았다고 했다. 어린 시절에는 하늘의 태양과 파란 별, 구름, 바람, 산과 들, 꽃, 나무, 새 등과의 자연과 대화를 하거나 소원을 빌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러한 것들을 오직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강렬한 생각이 이제 개인전을 시작으로 그리고 세상에 개인전을 시작으로 탄생되기 시작되었다. 그의 작품 중에는 한국화의 전통적인 그림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에서 영감을 받아 황 작가만의 혼으로 해석한 표현 방식으로 산봉우리와 물결, 하늘을 색과 정연하고 대칭적인 것들을 손이가는대로 곡선과 선을 역으로 균형 있게 흔들어 놓았다. 자세히 작품을 감상해 가면 작업의 과정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영혼에 뜨거운 용광로 같은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이러한 작품의 완성과정에서 늘 희열을 느꼈다고 했다. 개인전을 앞둔 2달 전까지만 해도 몸이 아파 1년여를 생사를 오가는 고통 속에서 지냈다고 했다. 이를 기적적으로 회복한 후 붓을 잡고 마무리로 남은 작품들을 완성했다고 했다. 지난날의 번뇌와 고통 속에서 하나, 둘, 피어난 작품들 모두는 황 작가의 영혼이 하나하나 고스란히 작가의 아우라로 녹아 있는 작품들이라고 했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에는 한국화를 살리되 매화에서 변화의 시작을 연다. 대칭의 중앙에 매화의 꽃을 방울방울로, 그 줄기로 검은 색으로 치고 정적을 벗어난 방울의 역동성의 변화를 조심스레 시도한다. 이후 그는 우리전통의 적, 청, 황, 백, 흑, 등의 오방색을 다채로운 채색과 먹색의 조화로 은근하고 강렬한 내면의 원색을 다채롭게 화폭에 담아냈다. 특히. ‘옥황상제의 구슬’은 한국산화의 사계의 아름다운 모습을 자기만의 색체조절과 독특한 기법 그리고 내면에서 형성된 조응을 통해서 형상화 시킨 작품으로 작가가 아끼는 작품이라고 했다. 작가는 이 작품은 기성세대의 작품들과는 차별화를 둔 작품이라 했다. 한국적인 맛과 멋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한국의 통상적인 미와 멋을 상징성과 은유성을 내재적 우월성으로 독특한 기법으로 각인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이번 개인전의 제목의 “‘태양의 축제’ 한국화 세계를 품다” 독창적 표현은 2019년 중국 베이징에서 전시를 하고부터 나라사랑이 일어났고 앞으로 한국화 세계화에 관심을 두고 싶어졌다고 했다. 작가 자신이 이 방면에 더 열정을 쏟아 더 좋은 한국화 작품을 위해 구성을 하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나라 모든 작가들이 노력해야 되지 않겠냐고 했다. 이를 위해 붓의 정직성과 정치적 욕심과 개인적인 욕심이 없어져야 되지 않겠냐고 했다. 평소 내제된 혼의 에너지는 기의 발산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엄청난 에너지의 축척되었기에 작품을 그려낼 수 있다고 했다 붓은 정직성이 없으면 안 된다고 했다. 정직성의 혼의 에너지 이것이 중요하지 않느냐고 했다. 2019년 중국 베이징에서 전시를 했다. 이 전시에서 중국인의 반응과 작품 전시에서의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작품을 전시하는 작가라면 본인의 작품이 호평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가?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나의 작품이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금색과 부귀영화와 팔팔(88)의 수를 상징하는 소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품을 그리는 한국의 작가로서 아쉬운 점이 많다.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사랑하는 나의 작품 '태양의 축제'을 쪼개서 전시한 것은 가슴이 너무 아프다. 앞으로 이런 관행은 없어져야 한다. 있을 수없는 일이다. 이런 관행은 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의 해결은 작가가 더 유명해지길 바랄 수밖에 없지 않는가? 유명한 작가라면 감히, 이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태양의 축제'는 그래서 더 애착이 가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창착 한국화 ‘천상’은 독특한 조형적인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해 자신만의 공간속에서 조형적 고뇌와 사색을 지속하면서 감성적 혼을 화면에 오롯이 담고자 했으며 내면으로부터의 감흥에 진솔하게 조응하면서 그것을 고스란히 표출했다. '한국화' 독특하고 과감한 기법은 어디에서 오는가?늘 한국화의 기본 기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치 만들어 내는 것 같아 싫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머릿속에 내재된 수많은 영상적인 사상을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현실과 내가 접하고 접한 점의 율동과 역동성을 또 다른 보이지 않은 세계의 생명들과 놀고 싶었다. 이를 보는 인간들의 모습은 무엇인지도 어떤 반응일지도 궁금하기도 하고... 물속의 고기와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높은 빌딩, 그리고 만들어진 물체들의 조화는 늘 숨어있다. 그러나 평화롭고 행복해야 하는데 늘 뚜렷하지 않아 인간은 자연에 부끄럽다. 이의 극복을 위한 노력은 작품이다. 정신적 연결의 고리를 만들어 내는 작가가 낸 작품의 힘이 아닌가? 그래서 본인은 늘 고민하고 상상한다. 그리고 머리에 담아 숙성을 시키고 나면 폭발하고 발산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 에너지를 만인과 자연들 그리고 나와 공유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붓을 들었다고 했다. 인간과 사물 그리고 자연을 보는 시각적 감각을 더 키우고 싶어, 수도 없는 시간을 붓으로 함께 한다고 했다. 나라와 우리 그리고 자연을 나의 또 다른 개체로서의 나의 시선으로 인식을 담고 상징적 표현을 변화로 만들어 보고자 고민하며 살아간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끈임 없이 변화하고 발전해가려는 황 작가의 점으로 이어지는 매화의 방울꽃과 힘이 있는 검은 줄기, 이글거리는 태양의 눈, 파란 우주에 파란 눈의 예리함, 달을 숨긴 구름, 용에 올라탄 부엉이, 팔팔의 솔방울 색체의 강렬함과 유연한 곡선, 직선의 이어진 정렬의 까다로움 그리고 이어진 곡선의 파도 등의 독특한 내면적 생각의 모두는 한국화의 새장을 여는 창의적 사고의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황은지 한국화 작가의 에너지는 끝도 없으며, 창조적이고 왕성한 작품활동을 기대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옥황상제의 구슬’한국화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황은지 작가[동영상제공=황은지 작가] ▲‘부귀영화’ 한국화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황은지 작가[동영상제공=황은지 작가] ▲‘천상’ 한국화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황은지 작가[동영상제공=황은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