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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만드는 방법, 강지연 기획자를 만나다
[인터뷰]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만드는 방법, 강지연 기획자를 만나다
광고기획자’에서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만드는 방법’ 강의를 하기까지 (사진='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만드는 방법'을 강의하는 '강지연의 기획스쿨'의 강지연 대표)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인생에서 직업은 때놓을 수 없는 요소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당장 해야하는 일의 간극 때문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만드는 방법’의 강지연 대표는 여기에 한 질문을 던진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만들고 싶다면, “돈을 언제, 얼마나, 어떻게, 왜 벌고 싶은지 생각해 보았나요?” 그렇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신중한 기획이 필요하다. Q.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강지연의 기획스쿨‘에 대해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안녕하세요. 사실 이 브랜드는 급하게 만들었어요. 제가 만든 게 아니에요. 당시 한 지인의 사업을 돕고 있었는데 수익을 받기 위해 사업자등록증이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급하게 만들었죠. 강지연의 기획스쿨이란 브랜드명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제 와서 의미를 더 생각해보게 됐어요. “브랜드명을 한 번 바꿔볼까?” 생각도 하고 있고요. (곰곰이 생각하다가) “0000“ 어떠세요? 사실 브랜드명에 제 이름을 넣은 것에는 자격지심도 있었어요. 당시 일했던 교육 콘텐츠 기업에서 퇴사를 할 때 “내가 꼭 내 이름이 들어간 브랜드를 만들어야지”하고 다짐했었죠. 실제 사업자로 등록한 지는 얼마 안 됐어요. 2018년 5월이죠. 강의를 한지는 5년 정도가 됐고요. 개인적으로 저를 소개할 때는 늘 ‘기획자’라고 얘기해요. 일을 할 때도, 나 자신을 소개할 때도 언제든지 말이죠. 기획을 좋아하고 기획에 매력을 느껴요. 그 정도? 그 외에는 아직 특별히 소개할 부분은 없네요... Q. 특별히 ‘기획’을 좋아하고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면? 학교를 졸업하고 광고·마케팅 회사에서 근무했어요. 늘 기획서를 썼는데 기획의 논리가 딱 맞아 떨어졌을 때 느껴지는 희열감이 좋았어요. 기획은 정답이 없어요. 기획마다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달성했으면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설정한 목적을 달성했으면 일단 좋은 기획인 거죠. 목적 설정은 스스로 하는 거예요. 인생이든 기획이든 우리가 정답이 있다고 생각해서 딜레마에 빠지곤 하는데, 사실 정답이 있기보단 자기가 답이라 생각한 것을 상대에게 설득하고 증명해 보이면 돼요. 그래서 기획을 공부하면 할수록 더 주체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최근 ‘기획’을 주제로 강의를 하면서 느끼는 부분은, 기획과 교육은 또 다르다는 점이에요. 수업을 하려면 무언가에 대해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상대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할 줄 알아야 해요. 그래서 계속 공부하고 있어요. 꼭 기획이 아니더라도 수업을 들으러 오는 학생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듣고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려면, 그 분야에 대해 깊게 알아야 하거든요. Q. 강지연의 인생은 기획이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 네, 괜찮다고 생각해요.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니었는데 근래 휴식의 시간을 좀 가지고 나니,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원래 제가 생각한 삶은 지금의 모습과는 달랐어요. 생각했던 길은 아니었건 거죠. 멋진 커리어 우먼을 꿈꿨어요. 그런데 살다보니 ‘내가 그런 모습에 가슴 뛰는 사람이 아니었구나’하고 알게 됐죠. 항상 내 삶에 답을 내지 못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와서 보니 그 모든 순간은 다 나의 선택했고, 그 선택의 합을 만든 것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어요. 지금도 고민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로스쿨에 갈까”도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강의는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일인데 그러려면 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요. 내가 아는 나는, 논리를 통해 상대를 설득하는(조져버리는?) 일에 희열을 느끼니까. 그런데 지금 강의는 그렇게 할 수만은 없어요. 학생들을 배려하고 공감해야 하니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을 못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어느 날 그런 제 모습을 발견한 거죠. 그래서 곰곰이 고민하다가 변호사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한 거죠.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변호사를 하게 되면 저는 왠지 재선변호사나 국선변호사만 할 것 같은 거예요. 결국 청년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지금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거죠. 그래서 차라리 지금 내 주변에, 가까이에 있는 학생들을 돌보고 변호하자고 생각했어요. Q. 왜 좋아하는 일이 업이 돼야하나요? 지금 기자님께서 “왜 좋아하는 일이 업(Job)이 돼야 하나요?”라고 질문한 배경에는 ‘좋아하는 일과 돈을 버는 일(Job)은 상반 된다’라는 전제가 이미 깔려 있어요. 중요한 것은 “언제, 얼마나, 어떻게, 왜 벌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죽어도 당장 한 달에 200만원을 벌어야 해”라고 한다면 이 질문은 의미가 없겠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 질문이 꼭 필요하죠. 실제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만드는 법’ 수업에서는 가치관과 좋아하는 일 그리고 잘하는 일의 합집합을 찾아주지, 좋아하는 일만 하라고 말하진 않아요. 그런데 왜 강의제목을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만드는 법’으로 정했냐고요? 그건 과정이 있었어요. 예전에 학원에서 수업을 했어요. 당시 제가 제 수업(강의명 ‘기획力’)을 홍보했을 때는 홍보가 잘 안 됐어요. 그런데 제 수업을 들었던 한 친구가 다른 학생들에게 ‘제 수업’에 이야기를 하면, 이상하게 제 수업이 인기가 많아지더라고요. 그래서 그 친구가 말한 것을 들어 보았죠. 그 친구는 “이 수업을 듣고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고 했다고 했어요. 그 얘기를 듣고 “아, 이게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거구나”라고 알게 됐죠. 강의를 하면서 느낀 부분인데 실제로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다른 어려운 환경 때문에 막혔거나, 알면서도 다른 것에 밀려서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막상 좋아하는 일을 찾고 싶어서 왔다고 해놓고, 상담을 통해 “00은 이것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때?”라고 물어보면 “맞아요”라고 답해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죠. 그럴 때는 당황스럽죠. 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자신에게 질문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는 것도 한몫해요. 뭐든 숙련이 돼 있지 않으면 알아도 지속하기 힘이 부치니까. Q. 책장에 책이 정말 많은데, 책을 좋아하시는 건지? 아, 네. 좋아하기도 하지만, 책을 통해서 얻는 게 많아요. 교육과 심리 관련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무작정 사 놓고 필요할 때 읽어요. 강의에 필요한 부분, 학생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부분 등을 적어놓고 강의에 사용해요. 그래서 항상 가방에 책을 넣고 다녀요. 한 강의(한 커리큘럼)를 준비하기 위해서 보통 7~8권의 책을 읽어요. 최근에는 의사전달 관련 강의를 준비 중인데, 저는 기획을 전공했지 의사전달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라 필요에 따라 책을 보면서 공부 중이에요. 나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간접적으로 경험하기 위해 늘 책을 본다고 할 수 있죠. Q.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만드는 방법’ 강의를 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이 있다면? 강의 자체에 대한 피드백도 좋지만, 저는 강의를 듣고 나서 실제로 학생들이 배운 내용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일궈냈을 때가 가장 뿌듯해요. 삶이 바뀌어야 수업도 의미가 있잖아요. 단순히 수업 자체가 좋다는 건, 그 순간 기분이 좋은 것뿐이 아닐까요? 얼마 전 강의에서 만난 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가장의 역할을 하느라 공장에서 일을 하며 분양 사무소에서 영업을 했던 친구였어요. 어느 날 그 친구가 “자신은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며 수업을 들으러 온 거예요. 그렇게 수업 후에 자기가 원하는 일을 찾았다고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피트니스 컨설팅 관련 일을 시작했다고 했죠. 조언 하는 것을 참 좋아했어요. 운동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반도체 공장에서 일을 하다보니 건강을 위해 운동을 계속 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았었고. 그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조언해주는 부분과, 살기 위해 꾸준히 하게 된 운동을 연결해서 일을 할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학생들이 강의를 통해 삶을 바꿔나갈 때, 그때가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에요. 충격 받았던 순간도 많아요. 기억에 남는 건, 한 종강 날 한 학생의 질문에 답을 하면서 제 삶에 대해 예시를 들며 “나는 원래 강사를 할 생각이 없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하게 됐고, 하면서 말하기와 관련된 재능을 알게 됐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한 학생이 굉장히 건조한 말투로 “선생님은 운이 좋으셨네요”라고 말한 거예요. 그때는 정말 가슴을 후벼 파는 느낌이었어요. 처음에는 저에 대한 비난 같아 힘들었다면, 나중에는 저런 말이 툭 하고 나오기까지 그의 인생을 헤아리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정을 듣고, 왜 그렇게 말 했는지도 이해하게 됐죠. Q. 어떤 분들이 이 강의를 들으면 좋을까요? 최근에 관계자에게 들었던 말이 "어떤 친구들은 삶에서 뭔가를 포기하는 것이 너무도 익숙해진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힘든 환경 때문에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건 생각도 못할뿐더러, 포기하는 게 너무도 익숙해진 거죠. 자기가 가진 생각, 환경의 틀 안에서만 생각하고 질문하는 것 말고 그 한계를 넘어서서 본인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하고 얘기하고 행동해볼 수 있어야 해요. 이건 누구나 가져야 할 권리잖아요. 이런 질문을 쉽게 던지기 어려운 분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수업하고 싶어요. 내 욕구, 욕망에 대해 질문해보는 것은 삶에서 정말 중요 하니까요. Q.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시다면? 음 계속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는데, 학교에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교육학이나 심리학에 관심이 있기에 다시 가서 공부를 하고 싶어요. 강의만으로 청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실제로 스스로에 대한 공부를 더 하고 싶기도 하고요. Q. 인터뷰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질문을 자꾸 주셔서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정리가 됐어요. 매번 일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이 정돈된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인터뷰 종료) 기왕 직업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강지연 대표의 말을 들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일이 업이 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한편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만드는 법' 강의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http://blog.naver.com/kamjarr 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인터뷰] 성북구의회 김일영 의장 “민생에 초점을 맞추는 ‘생활구정’ 추구”
[인터뷰] 성북구의회 김일영 의장 “민생에 초점을 맞추는 ‘생활구정’ 추구”
[선데이뉴스신문=장수안 기자] “거창한 사업보다는 민생에 초점을 맞추고 ‘생활구정’을 추구하여 현장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사진= 성북구의회 제공] 제8대 후반기 성북구의회 의장을 맡은 김일영 의장은, 부지런함을 기반으로 지금까지 3천여 건의 민원을 해결해줬다고 한다. 김 의장은 생활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이번 회기에도 가감없이 보여주겠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일영 의장의 일문일답. Q.자기 소개 및 취임 소감. A. 2010년 제6대 성북구의회에 입문해 8대까지 내리 3선을 했고, 제7대 행정기획위원장과 보건복지 부위원장을 지냈습니다. 먼저 성북구의회에 많은 관심과 뜨거운 성원을 보내주신 45만 구민 여러분과 8대 성북구의회 후반기 의장에 선출해 준 21명 동료 의원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성북구민의 뜻을 대변하는 의장직을 맡게 되어 개인적으로 당선의 기쁨보다는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낍니다. 앞으로 2년간 성북구의회는 현장에서 더욱 겸허하게 구민의 작은 목소리도 귀담아 듣고, 구민의 어려움을 해소하는데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고 구민의 뜻이 반영 될 수 있도록 밤낮없이 뛸 것을 약속드립니다. 성북구민의 행복과 성북 발전을 위해 성북구민들로부터 신뢰받는 성북구의회를 만들어 나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Q. 의회 후반기를 맞아 전체적인 운영 방향 및 이루고 싶은 목표는? A.제8대 후반기 의회는 전반기 의장단이 추진했던 것과 같이 ‘현장 중심의 의회’, ‘공부하는 의회’ 의정목표를 중심으로 의정 활동을 이어가겠습니다. 더욱더 낮은 자세로 구민 곁에 한걸음 더 다가가 구민의 말씀을 한마디도 흘려듣지 않는 ‘현장 중심의 의회’를 강화하겠습니다. 이와 함께 열린 마음으로 동료 의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성북구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토론하고 연구하는 ‘공부하는 의회’를 강화하겠습니다. 또한 정파를 초월하여 성북구민의 복리증진을 앞당기기 위해서 소통과 협치를 바탕으로 다양성이 존중받고 상생하는 의회를 만들어나가겠습니다. Q. 이를 위한 구민, 의회 내부, 구청과의 소통 방안은? A. 구민의 대변자로서 구민의 애로사항을 현장에서 직접 청취하고 불편한 점은 의회가 직접 나서 개선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적극으로 하겠습니다. 구민의 뜻이 실현되는 생산적인 의회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항상 열린 마음으로 의원들과 수시로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 화합과 협력을 이끌어 내어 성북구민의 실생활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또한 의원들의 의정활동 역량강화를 위해 토론회와 각종 세미나, 간담회 등을 활성화 시키고,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이수와 의원연구단체 운영을 통해 폭넓은 안목과 전문성 확보를 위해 전폭적으로 지원할 방침입니다. 의회와 집행부는 성북구를 끌어가는 수레의 양바퀴 같은 관계이므로 상호 신뢰와 협조 속에서 긴밀히 소통하여, 집행부의 잘한 점에 관해서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문제점이 있을 때는 따끔한 지적과 대책 논의를 위해 함께 지혜와 힘을 모을 것입니다. 구민의 대표로서 구정을 제대로 감시하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의정 활동을 펼치겠습니다. Q.성북구의 가장 큰 이슈와 그에 대한 의회 차원의 대응방안은? A. 현재 성북구는 재개발 해제 구역 및 해제 예정지역 등 낙후된 주거지가 많습니다. 사업 해제 등으로 인해 해당 지역의 생활환경은 점점 낙후되어 가고 있어, 주민 편의 증진을 위한 도시재생을 통한 주거환경 개선 대책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성북구민들의 사회조사 및 사회지표 조사에 의하면 구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개선되어야 할 분야로 교통체증 해소 및 대중교통 노선확충이 46.7%를 차지할 만큼 취약한 대중교통에 대한 대책을 시급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북구의 문화시설 수는 10.8개로 서울시 전체 평균 13.5개에 대비해 적으며, 문화시설과 문화환경에 대한 성북구민의 만족도가 낮은 반면 문화복지시설에 대한 욕구가 높으셔서 성북구민의 문화예술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키기 위한 문화복지시설이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의회에서는 성북구민들의 교통 체증 해소와 대중 교통 확충을 위한 동북선 경전철 및 강북횡단선 도시 철도 사업 조기 착공 등 사업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집행부에 격려와 쓴소리를 아끼지 않고 감시와 견제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또한 성북구의회는 구민의 문화예술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키고 생활자치의 밑거름이 될 동북권 시민청 건립이 차질 없이 추진될 수 있도록 집행부를 견제 감시하고, 협의가 필요할 때는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구민과 독자들에게 주고 싶은 말씀. A. 그동안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고 함께 노력해 주신 성북구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코로나19 이전의 정상적인 생활로 회복하실 수 있도록 저희 성북구의회는 의회차원의 모든 지원을 다할 것이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울러 성북구민으로부터 ‘유능한 의회’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의회 시스템을 구축하고, 항상 구민의 입장에서 집행부에 대해 견제와 감시를 통한 구민의 대의기관으로서의 의회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의회가 되도록 만들겠습니다.
[인터뷰] 한국판 셜록홈즈, 한국민간조사중앙회 '유우종 탐정'을 만나다
[인터뷰] 한국판 셜록홈즈, 한국민간조사중앙회 '유우종 탐정'을 만나다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사진=한국민간조사중앙회 '유우종 중앙회장') (사진=한국민간조사중앙회 '유우종 중앙회장') 실제 ‘탐정’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탐정이라 하면, 외국영화에서 본 ‘셜록홈즈’나 ‘명탐정 코난’이 전부다.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탐정을 목격할 수 없음은 물론 탐정이란 말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물론 이 이야기도 올해 8월 5일을 기점으로 옛 역사로 남게 된다. “OECD 가입국 중에 민간조사법이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국민의 가려운 곳을 전부 다 긁어줄 수는 없는데 말이죠. 이제는 우리나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남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유우종 한국민간조사중앙회 중앙회장은 호탕한 미소로 기자들을 맞았다. 36년의 삶을 민간조사원(탐정)으로 살아 온 그의 모습은 기자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냉철하고 유머감각 하나 없지 않을까?”생각했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사건을 대할 때의 냉철함과 사람을 대할 때의 따뜻함이 공존했다. 기자 머릿속의 ‘탐정’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유쾌하고 박학다식 하며 무엇보다 ‘인간미’가 있었다. 그는 최면수사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텄고 우리는 즐겁게 인터뷰를 시작할 수 있었다. Q. 안녕하세요. 유우종 중앙회장님,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한국민간조사중앙회(fpicenter.org) 중앙회장을 맡고 있는 ‘유우종’ 탐정이다. 1983년부터 탐정의 길을걸어 왔고, 호주 공인 탐정 1호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2002년도 대한민국 최초 탐정 자격제도를 자격기본법에 의거 국내 최초로 “민간조사원” 자격, 교육을 실시했다. 독일, 호주, 일본 등 선진 해외연수를 통해 민간조사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면서 1999년에는 16대 국회부터 ‘공인탐정법‧민간조사업법’ 제도화를 위해 20대 국회까지 공청회 및 전문가 간담회 등 학술적 노력과 언론 홍보 등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다. (사진='유우종 중앙회장'이 민간조사업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Q. 21대 국회에서 ‘민간조사업법’ 발의를 본격 앞두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심경이 어떠신가요? 한국민간조사중앙회는 국내 최초로 2000년부터 민간조사법(탐정법) 제정을 위해 노력해 왔다. 16대 국회를 시작으로 20대 국회까지 총 9번 발의했고, 폐기와 임기만료 등의 고통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 노력한 결과 이제는 결실을 앞두고 있다. 여론도 조성, 각종 범죄에 대해 국내의 법률시장과 법원에 한계가 있음을 직시했다. 늘어가는 보험사기 및 각종범죄를 해결할 민간조사업 시장은 한해 50조원 이상으로 경제 활성화와 청년 실업 문제 해결에도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8월 5일 이전에는 ‘탐정’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용을 할 수 있게 됐다. 또한 법제도화 후 “공인탐정중앙회” 등도 만들어 질 것이다 정말 감회가 새롭다. (사진=한국민간조사중앙회/fpicenter.org 공식 BI) Q. 국내 최고의 전문가로서 ‘민간조사업’의 전망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OECD 가입국 중에 민간조사법이 없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었다.” 가입국 중에 어떤 나라든 국가가 국민의 가려움을 다 긁어 줄 수는 없다. 공권력의 사각지대를 메워주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 바뀌는 억울함을 풀어줄 수도 있다. 법이 국민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돼 국민이 법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는 환경은 만드는데도 기여할 것이다. “대법원, 우리법원은 형사소송법 13장 감정, 제 169조(감정), 법원은 학식, 경험 있는 자에게 감정을 명할 수 있다.”고 분명 헌법에 나와 있다. 우리나라도 이제 이 법을 현실에 적용될 때가 왔다. 또한 청년 취업난 시대에 청년 일자리 창출에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번 21대 국회에서 ‘민간조사업법’은 꼭 제도화가 돼야 한다. 어떤 신직업보다도 왕성하게 발전할 것이고, 시장 규모도 크게 성장할 것이다. 단언컨대 청년 일자리 창출에도 1등 공신이 될 것이라고 자부한다. 추가로 탐정, 민간조사의 주요 업무로는 ▲M&A 과정 중 분석 및 사실여부 조사 ▲해외도피사범 소재파악 ▲교통사고조사 ▲화재조사 ▲보험범죄조사 ▲법‧과학 사인규명 ▲기업부정조사 ▲지식재산권침해조사 ▲법원증거자료조사 ▲선박사고조사 ▲조상 땅 찾기 ▲유학생사실조사 ▲산업스파이조사 ▲감정(포렌식, 필적감정) ▲회계부정조사 ▲사람 찾기 등이 있다. 최근 이슈가 된 여러 사건들을 봐도 알 수 있듯, 공권력의 사각지대가 크게 드러난 현실 속에서 이제 국민들이 믿을 수 있는 마지노선이 바로 ‘FPI(민간조사원:Final Private Investigation)’이다. 알파벳 ‘F‘는 ’Final(최종, 마지막)‘을 의미한다. 이곳까지 국민들이 믿을 수 없다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마지막 보루다. 그래서 더욱 전문성과 윤리성, 정의감이 요구되는 직종이다. (사진=유우종 중앙회장은 '호주 공인 탐정 자격을 취득한 최초의 대한민국인'이다) Q. 실제 민간조사원이 큰 문제를 해결한 사례가 있는 지? 개인적으로도 크고 작게 사건들이 많았다. 전부 얘기해줄 순 없지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사건이 대표적이다. 미국탐정 예를 들자면, 미국에서도 ‘세월호’ 같이 큰 사건이 있었다. 그 때 당시, 미(美) 의회에서 해당사건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미국에 있는 탐정회사‧민간조사회사인 거대 공용 회사 ‘핑커튼’(전 세계적으로 13만명이 소속된 거대 공용 탐정회사이자 보안회사)에 일을 의뢰했다. 조사결과 사건 조사를 너무 잘 수행했다. 이에 미(美) 연방수사국이 하는 일 자체를 이 ‘핑커튼‘ 조사 국장에게 운영해달라고 부탁했던 일례가 있다. 민간이 그만큼 앞서 나가는 것이다. 이 외에도 조사가 잘못된 수많은 사건들이 있지만, 국내는 민간조사업법 제정이 되지 않아서 진실을 규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Q. 민간조사원(탐정)에 대해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사실 개인적으로 ‘탐정’이란 용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탐정’이라 하면 돈만 주면 다 해결해주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방송이나 영화, 드라마에 나오는 왜곡된 탐정의 모습이나 불법 행위들이 ‘민간조사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오해를 심어주기도 한다. 민간조사원에 대해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민간조사원의 역할이다. 민간조사원은 경찰처럼 수사를 하거나 범인을 잡는 일은 하지 않는다. 사생활 침해나 주거침입도 하지 않는다. 오직 공공장소에서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방법(사진과 비디오)을 이용해 사실 그대로를 조사해 증거를 수집하고 진실을 밝히는 역할을 할 뿐이다. 절대 민간조사원은 불법행위를 하거나 경찰·검찰의 수사권을 침해하지 않는다. 별개의 영역이다. (사진=유우종 중앙회장은 '민간조사원(탐정)'에 대한 막연한 오해는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Q. 민간조사원(탐정)이 되기 위해 필요한 역량이나 정신이 있다면? 일단 행정상으로는 전문 시험에 정식으로 합격해야 한다. 1차, 2차 시험 후에 3차 실무시험, 면접까지 보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민간조사원의 역할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늘 중립의 위치에 서야하며 법이라는 잣대가 모든 국민에게 공평하게 적용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 민간조사원의 사명이다. 이를 목적에 두고 업무에 임해야 한다. 예전에 3,900억 상당의 거액이 연루된 수출 사기사건 3명의 변호사로부터 의뢰 받아 보안 및 조사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와 함께 사건에 투입됐던 9명이 관련 범죄자를 도와준 관계로 뒷돈을 받고 발각돼 저를 제외하고 전부 구속이 됐다. 이처럼 경호원 및 민간조사원은 항상 법을 준수하고 중립에 서야 한다. 허위나 조작을 했을 시, 자격을 박탈시키는 엄격한 제도가 필요하다. 어떤 영역의 조사를 하던 전문성과 윤리성을 꼭 갖춰야 한다. 정의를 세우는 데 걸림이 된다면 그 자격을 박탈시키는 것이 맞다. 추가적으로 자신의 업무를 위한 사명감, 자기관리, 등도 중요하다, 여기에는 건강과 외모, 의상, 차량 등도 포함된다. 탐정이 너무 눈에 띄면 안 되지 않겠는가.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쓸 줄 알아야 한다. Q. 민간조사업이 주로 활약할 범죄나 사건 분야는 어떤 부분이 있을까요? 최근에는 타인, 지인, 심지어 가족을 담보로 한 보험범죄가 유행하고 있다. 보험사기만 해도 한해 범죄로 인한 손실이 약 10조원에 달한다. 이를 그대로 두면 보험료 인상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 손실이 계속 발생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민간조사 분야의 시장규모가 전체적으로 한해 약 50조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향후 10년 후에는 국가나 기업 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꼭 필요한 신(新) 직업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다. Q. 회장님의 자녀분들에게도 민간조사원을 권하고 싶으신 지? 물론이다. 하지만 30세 정도까지 먼저 해보고 싶은 일을 다 해보라고 했다. 그래야 건강하고 훌륭한 명탐정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은 본인들이 몫이다. (사진=민간조사원(탐정)이 되기 위한 역량과 마음가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유우종 중앙회장) Q. 민간조사업 시장도 시급 측정이 필요하다고 보시는 지? 민간조사업의 경우, 조사비, 성공보수로 보수를 구분하고 있다. 경영을 어떻게 하고 어떤 사건을 조사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시간 개념의 시급으로 보수를 받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미 법적으로 보수에 대한 규정을 만들어 놓았다. Q. 앞으로 민간조사업계에서의 꿈과 이루고 싶은 업적이 있으시다면? 탐정이란 용어를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는 8월 5일, 먼저 이루고 싶었던 업적 하나가 이뤄진다. 그동안 법제화에 20년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 일도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추가로는 첫째, 앞서 말했던 것처럼 국민들이 법을 믿고 따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 두 번째는 탐정 사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다. 법에서 “탐정”이라는 용어 허용이 2020년 8월 5일이기에, 대한민국 최초로 이 날(8월 5일)을 ‘탐정의 날’로 지정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국제 FPI 센터(국제 탐정 센터)’를 만들고 싶다. 각 나라의 탐정들에게 사무공간을 제공하고, 각 나라의 정보를 공유한다. 어떤 나라에 큰 범죄가 발생했을 때 이 센터가 범죄자 정보에 대한 허브(중심 연결고리)의 역할을 해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게 된다. 21세기는 나라는 있지만, 국경이 없는 시대다. 이런 목표들을 가지고 있다. 또한 앞으로는 각 나라와 기업의 리스크(위험) 관리에 민간조사원이 투입된다. 특허침해, 정보유출 등 기업에서 일어나는 부정 위협에 대한 조사를 민간조사원이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사진-유우종(한국민간조사중앙회) 중앙회장의 사무실에 비치된 탐정 관련 물품들) Q. 마지막으로 정부와 민간조사업에 관심을 가질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먼저 정부는 OECD국가인 우리나라에 없는 이 제도를 활성화 시켜 청년 실업도 해결하고 일자리 창출과 경제 활성화에 힘써주길 바란다. 또한 막대한 손해를 야기하는 보험사기도 잡을 수 있게 지원해주길 바란다. 그래야 법의 오류로 인한 국민들의 억울함을 줄이고 국민들이 법을 믿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법에 대한 관리감독을 엄격히 해서 법이 정말 국민에게 사랑받는 법이 되도록 해야 한다. 앞으로 40년 정도는 경찰행정학과, 경호학과, 법학과보다도 이 민간조사학과(탐정학과)가 아마도 각광받을 것이다. 지금 각 대학에서도 탐정, 민간조사학과를 개설하려고 나에게 많은 문의가 오고 있다. 민간조사원 교육을 담당하는 분들은 전문성과 실무능력을 가지고 올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민간조사원은 전문성이 검증된 민간조사원., 명탐정사 들이 필드에서 뛰는 멋진 직업이 될 것이다. 별개로 이 업계에는 실제로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들이 많다. 자기가 하는 언행 자체가 범죄인데 범죄인 사실을 망각하는 경우가 있다.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농담이 아니다. 이런 부분은 스스로 자각하고 주의해야 한다. (사진=멋지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유우종(한국민간조사중앙회) 중앙회장) 추가로 민간조사원 자격증은 등록된 어느 기관에서 따도 상관이 없지만, 실제 자격증을 취득하면 상담, 사건분석, 조사, 조사보고서를 쓸 줄 알아야 한다. 자격증이라고 다 같은 자격증은 아니지 않은가. 깨끗하고 정직하게 전문성을 갖춰서 이 업계가 바르게 성장했으면 좋겠다. (인터뷰 종료) 인터뷰 내내 유쾌한 모습을 보여준 유우종 중앙회장은 법 준수와 항상 중립에 서는 것 등 민간조사원(탐정)의 바른 역할에 대해서는 “한 치의 타협도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국가로 국민들이 법을 믿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유우종 중앙회장의 말대로 정부가 온전히 국민들의 억울함을 모두 풀어줄 수 없기에, 이제 전문 민간조사원(탐정)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번 21대 국회에서 공인탐정법·민간조사업법이 반드시 법제화 되서 대한민국의 법치주의가 한층 더 바로 서고, 한 사람의 국민도 억울함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정의사회가 구현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6.25전쟁 70주년 특별 인터뷰] 6.25 前과 後, 한반도의 살아있는 역사를 마주하다
[6.25전쟁 70주년 특별 인터뷰] 6.25 前과 後, 한반도의 살아있는 역사를 마주하다
[선데이뉴스신문=곽중희 기자] 한여름 장맛비가 거세다. 한반도는 짙은 안개와 함께 6·25전쟁 70주년을 맞았다. 최근 북한 정부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며 현 남한 정부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이에는 오랜 한반도 분단역사 속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한국전쟁 70주년, 하루가 지난 어제 25일에는 6·25전쟁에서 전사한 국군 유해 147위가 머나먼 길을 돌아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평화를 기렸던 남북관계는, 작두 위에 선 무당의 붉은 발처럼 여전히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전쟁은 ‘전쟁’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픔의 앞과 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 온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전쟁과 식민지 시대를 겪어보지 않는 기자로선, 97세(1924년 출생) 백발 어르신의 파란만장한 삶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6.25 참전용사인 최 어르신은 무려 67년이 된 빛바랜 전역수첩을 꺼내 보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Q.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얘기를 해볼게요. 한번 들어보세요. 저는 이남 사람이 아니라, 이북 황해도 신천군 남부면에서 났어요. 안중근 의사 알지요? 그분이 우리 집에서 20리(8km) 떨어진 곳(황해도 해주)에서 살았어요. 그 텔레비전(TV)에 나오는 ‘송해’도 우리 동네서 가까운 (황해도) 대령군이 고향이에요. 대령(군)에 가면 동산이 있는데 거기는 미군(미국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어요. 거는 미국 영토나 마찬가지에요. 우리 어머님의 고향이 대령이었어요. (사진=최 어르신의 본적관련 문서) 저는 5살 때부터 어머니 등에 업혀서 교회를 다녔어요. 그때 형님과 누님이 아파서 병에 걸렸는데, 어머니께서 고향에 있는 최 집사를 찾아가 우리 자녀가 병에 걸렸으니 낳게 해 달라고 기도를 부탁했어요. 그때부터 교회에 나가게 됐어요. 그렇게 예수(기독교)를 믿게 됐지요. (사진=일제강점기 당시 학교 사진, 경남교육청 출처) 국민(초등)학교 때 서울에 수학여행을 왔던 것도 기억이 나요. 그때는 여비가 비쌌기 때문에 수학여행도 많은 사람이 올 수가 없었어요. 우리 집안이 엄청 잘 살았었거든요. 그래서 서울로 2번이나 여행을 올 수 있었어요. 서울 종로1가에 ‘화신상회’라고 있었어요. 그게 6층짜리 건물이었는데, 광화문에요. 그게 일본사람들이 6층짜리 건물을 쓰고 있었어요. 거기서 하모니카를 샀어요. 그때 처음 하모니카를 배웠지요. 지금도 하모니카를 들고 다니는데, 가끔 불고 그래요. Q. 뭔가 하모니카가 멋지게 느껴지네요... 그 이후엔 어떻게 되셨나요? (사진=일제강점기 당시 학교 사진, 경남교육청 출처) 일제 강점기(1910.8~1945.8) 때 국민(초등)학교를 나와 중학교에 입학하려 했는데 입학시험에 불합격이 된 거에요. 운동만 해가지고 공부할 줄을 몰랐지요. 그렇게 중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1년 동안 집에서 놀기만 했어요. 맨날 운동하고 놀기만 했지요. 학교 다닐 때 운동을 아주 잘했어요. 축구, 육상, 마라톤, 모두 학교 대표 선수였어요. 특히 달리기를 잘했어요. 학교 운동회에서 마지막 계주에서 전교생이 응원전을 하는데 ‘차이호껭(최 어르신의 일본 이름)’이라고 제 이름을 크게 외쳤었지요. 학교 이름은 ‘경신학교’였지요, 아마? 어느 날은 황해도에서 전국 도대항 육상 대회가 열렸어요. 우리 학교가 신천군의 대표였는데 내가 학교 대표로 나갔어요. 400m 계주였어요. 나는 꾀가 많아서 1번 주자로 뛰었는데 1등으로 출발했죠. 그런데 2번 선수가 넘어져 가지고 결국 1등을 못했지요. 아이고 참... 지금 생각해도 아까워요. 대회를 한다고 80리(32km)를 기차를 타고 갔지요. 그때의 기억이 많이 나요. Q. 많이 아쉬우셨을 것 같아요... 그리고 ‘차이호껭‘이라는 외침소리가 왠지 모르게 슬프게 들려요. 그때 중학교에 못가서 집에 있는 중에, 누가 하는 얘기를 주워들었어요. 중국에 가면 돈 벌기가 쉽다는 거예요. 그때 부모님 돈을 몰래 훔쳐서 중국에 갔어요. (허허허...) 중국에 어디 거처가 있을까 살폈지요. 당시 외사촌 형님의 매부가 중국에 있었어요. 참, 신기하지요? 부모님께 얘기도 하지 않고 어린놈이 혼자 갔으니까, 간다고 얘기하면 안 된다고 할 것이 뻔했으니까. (사진 = 일제강점기 당시 철로의 모습) 기차를 타고 갔는데 신의주까지 가는 열차에는 항상 일본형사들이 있었어요. 뭐 때문이냐면 아편장사, 금 장사를 잡기 위함이었지요. 그런데 나는 나이가 어려서 여행권이 없었어요. 그래서 꾀를 냈죠. 신의주에서 내려서 (국민)학교 수학여행 갔을 때 들렀던 여관에 가서 잠을 잤지요. 그리고 다음날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넘어갔어요. 당시에 신의주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신의주 사람 행세를 해서 몰래 건너갔지요. “나 신의주 사람이다”고 꾀를 냈어요. (허허허...) 그렇게 만주에 들어갔지요. 처음에는 외사촌 형님을 찾아갔어요. 형님이 중국의 길림(성)에 있었어요. 길림에 가면 한강같이 큰 강이 흘러요. 그 강이 ‘송하강’이에요. 송하강을 따라 80리(32km)를 올라가면 일본사람들이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우리 (친)형님이 그 발전 사무소에서 과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허허허... 참 기가 막히죠. 그래서 내가 찾아가니까 형님과 아주머니가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이 어린놈이 어떻게 여기에 왔냐고 하면서 언능 돌아가라고 했어요. 그런데 내가 그랬죠. 갈 수 없다. 돈 벌러 왔다고. 밥 벌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사진= 옛날 공장 모습, imgur 출처) 그때 사무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등급이 나눠져 있었어요. 1등 국민, 2등 국민, 3등 국민이었지요. 사무소에서 일하는 일본사람들은 1등, 기술을 배워 일하는 한국 사람은 2등, 중국사람과 단순 노동자는 3등 국민으로 취급했어요. 그래서 일본 사람들 앞에서는 할 말도 제대로 못했어요. 중국 사람은 짐승취급을 당했다니까요. 그런데 일을 하다가 도망을 가게 됐어요. 형님이 내 월급을 주지 않고 본인이 다 써버린거에요. 그때 생각이 나는데 “만약에 백만원이 생긴다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노래가 있었어요. 그 시절에는 100만원이 있으면 큰 성공으로 취급했었지요. 나는 고향에 어머님께 돈을 붙여드려야 하는데 (월급을 주지 않으니) 그럴 수가 없어 계속 있을 수 없었지요. Q. 아이고... 또 그런 일이 왜... 그렇게 나와서 매부(외사촌 누님)집에 찾아갔어요. 매부는 당시 공의(중국당국이 인정한 의사)였어요. 다짜고짜 매부의 병원을 찾아갔어요. 내가 들어가니까 병원에서 어떤 병 때문에 왔냐는 거예요. 그래서 그랬죠. 나는 병 때문이 아니고 내 매부를 만나려고 왔다고. 사실 나는 매부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어요. 얼굴도 모르고 찾으러 간 거지요. 허허허!... 매부는 나를 보더니 마차에 태워 누님을 만나게 해줬어요. 누님도 엄청 놀랬지요. 빨리 다시 돌아가라고 했어요. 여길 어떻게 왔냐고. 못 간다고 했죠. (사진=일제강점기 당시 명동거리 모습) 매부네 병원 밑에 전라도에서 온 사람이 하는 치과가 있었어요. 거기에 부탁해서 잡일을 맡아 했어요. 처음에는 물건도 정리하고 시키는 일을 전부 다 했지요. 나는 지금도 이빨(인공치아)을 만들 수 있는데, 당시에 눈치껏 옆에서 보고 배웠어요. 그리고 조선(이북 고향)에 나올 때는 그 치과주인이 같이 우리 집에도 왔었어요. 한번은 치과 재료를 사서 중국에 가다가 세관에 잡혔어요. 일본형사들이 내가 가지고 간 재료가 아편인줄 알고 붙잡았어요. 그때가 아마 17~20세쯤이었지요. 생각해보면 참 웃겨요. 우리 아버지께서(집안이) 가난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런 고생을 사서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Q. 당시에 마음에 둔 여성분은 없으셨나요? (므흣한 웃음) (사진=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여성의 사진, 'Blue ruin1'의 flickr 출처) 고향에서 18~20살 때 결혼을 했어요. 그 당시에 고향에 일본여자가 와 있다고 소문이 났었어요.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었어요, 매일 탔지요. 그래서 나도 같이 타는데, 너무 세련돼 보이고 예뻐서 마음에 들었지요. 그 사람이 아버지는 한국 사람이고 어머니는 일본 사람이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온 거에요. 연애를 해서 결혼을 했지요. 이름은 ‘보끄 기미꼬’ 한국말을 잘 못했어요. 그때 동네에서 그 여자가 시집갈 사람은 “최00(최 어르신)” 밖에 없다며 사람들이 놀리고는 했어요. 같이 살면서 딸을 하나 낳았어요. 이름은 ‘최0희’에요. 물론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요... Q. 아 그러셨군요... 그럼 남한에는 어떻게 오시게 됐나요? 오시고 나서 6.25 전쟁이 터진 거죠? 아, 내가 얘기할게요. 그때도 교회 다녔는데 분단이 되고 나서 이북에는 ‘목사’가 살아남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교인들이 나를 목사로 세울 작정으로 신학교에 보냈어요. 평양에 있는 감리신학교 기숙사에 살았는데 토요일이면 고향 교회에 가야만 했어요. 집까지는 200리(80km)였지요. 집에 갈 때도 올 때도 경찰서에 보고를 했어요. 보고를 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 지도 몰랐어요. 그렇게 평양과 고향(신천)을 왔다 갔다 했지요. 그렇게 신학교를 다니다가 경찰서에서 통지서 하나를 받았어요. 내일 아침 9시까지 내무소로 들어오라는 하는 거예요. 갔는데 큰 종이가 있었어요. “인민군을 뽑으려고 불렀나?” 싶어서 잘 보니까 군인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교회 다닌다는 것을 알고 데리고 가서 죽이려고 하는 거였어요. 신체검사를 하는데 신체에 이상한 부분이 있는지만 확인을 하는 거에요. 거기에 내 신학생 이력이 다 있었지요. 그때 “이제 나는 죽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살고 싶어서 장로신학교에 있는 매부를 찾아갔어요. 그런데 매부가 “너는 왜 여기 남아서 쓸데없는 짓이냐 하고 있냐”고 하면서 “그따위 짓 하지 말고 다른 젊은 사람들처럼 이남으로 언능 내려가라“고 벌컥 화를 내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살라고 그랬던 것 같아요. Q. 정말 파란만장하셨네요. 삶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셨어요... 그렇게 아는 분을 통해서 어떻게 탈북을 할 계획을 세웠어요. (최 어르신은 이전 일제징용 당시 아내였던 ‘기미꼬'와 ‘2살배기 딸’에게 고향에 가 있으라고 하고 헤어졌다고 했다. (그 이후에 탈북하면서 지금까지 보지도 만나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이남으로 오게 됐어요. 7명이 모여서 산을 넘었지요. 밤새도록 걸었어요. 그런데 새벽에 인민군에게 들켜서 다시 높은 뒷산으로 도망을 갔어요. 그중에 1명은 붙잡혔고, 다른 1명은 아무리 불러도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겨우 5명만 넘어왔지요. (사진=영화 '윤희' 출처) 넘어오는 중에 아기와 함께 온 여자들도 있었는데, 거기 황해도 사지원(탈북의 최전선)에서 아기가 울거나 하면 자기 아이를 죽이기도 했어요. 아 우는소리(애기 울음소리)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잡히면 안 되니까... Q. 어떻게 그런 일이... 그후엔 어떻게 됐나요? 그렇게 남한에 넘어와서 청단이라는 도시에 있는 경찰서까지 걸어갔어요. 대한청년단의 감시를 받았어요. 조사를 받는데, 공민증(북한의 주민등록증)에 신학교 학생이란 기록이 있다보니 대우를 잘 받았어요. 조사 후에 ‘특무부대’로 넘겨졌어요. 특무부대(당시 공산당을 잡아내는 기관)는 당시 가장 무서운 곳이었지요. 거기
[인터뷰]정성 물산 이정숙 대표, 자원개발의 여왕! 피눈물의 광산개발 40여 년!
[인터뷰]정성 물산 이정숙 대표, 자원개발의 여왕! 피눈물의 광산개발 40여 년!
[선데이뉴스신문=이계춘 기자] 이 정숙 대표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동네 아줌마로 보이지만 길바닥에 나 뒹구는 돌맹이 하나 흙 한 줌도 그냥 보지 않고 유심히 관찰하며 만져보고 분석해보고야 성이 풀린다는 그야말로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돌 전문가 돌박사다. 이 땅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직업이 있다. 그중에서도 광산업은 아무나 뛰어들지 못하는 특별한 분야이고, 그 속에서도 여성이 한평생을 몸 바쳐 일한다는 것은 극히 보기 드문 사례이기에 오늘 필자는 경북 경주시 산내면에 소재한 주식회사 정성 물산주식회사의 이 정숙대표를 만나 본다. 이 회사는 어떤 회사입니까?네, 우리 정성 물산은 납석 전문 광업회사인데 납석은 곱돌로도 불리며 화학식은 (AI203. 4SIO2. H2O)이고 원적외선을 다량 방출하여 인체에 유익한 고령토 과에 속하는 천연광물로서 기존 시멘트의 독성을 대체한 친환경 건축자재와 친환경 도료, 도자기 등 도요 산업의 주원료로 쓰이고, 최근에는 정성 물산에서 농업용 토지개량 활성 토로 개발에 성공, 농민들 앞에 크게 호평을 받고 있답니다. 이 정숙대표의 지나온 날들은 시련과 고통 좌절 실패 그리고 또 도전! 도전! 또 도전! 끝에 성공과 희망의 길을 걷고 있는 그야말로 오뚜기 같은 처절한 인생을 살아왔노라 눈시울을 적시며 말한다. 이 대표의 고향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 자락의 작은 시골 마을의 부유 한 집에서 세 자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모자랄 것 없이 부모님 극진한 사랑 속에 행복하게 잘 자라 스물여섯 나이에 홀 시할머니 홀시아버지 슬하의 외동아들에게 서울로 시집을 왔는데 오자마자 중풍에 걸려 거동이 불편한 시할머니 홀시아버지의 똥오줌 다 받아 가며 병간호를 지극정성으로 해오다 두 분 다 돌아가시었고, 그 후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성격 차이로 갈등이 심해 결국 이혼을 선언 딸 아이와 임신한 아이를 품고 집을 나오게 된다. 그러나 집 나오면 고생이라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과 슬픔 속에 두 아이를 가진 엄마의 몸으로 가까운 지인의 도움으로 그야말로 내가 꿈꿔왔던 분야 광산개발을 위해 청주에 있는 청주대학 광산학과에 입학 유일한 여학생으로 마침내 졸업하고 광산 분야에 뛰어들어 처음으로 경북 봉화에 있는 고령토 광산에서 고령토를 채굴하여 많은 돈을 벌었는데, 매장량 관계로 눈물의 철수, 복구를 하고 한 때는 전라남도 고흥군 거금도에서 일본으로 수 만 톤의 바지선으로 일본에까지 돌을 수출했고, 그 후로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의 규석 광을 개발했고, 또 그 후로 강원도 삼척 갈남리에 장석 광을 개발했지만, 광업 분야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거친 남성들의 틈 바구니 속에서 온갖 욕설과 폭행 속에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 하는데 이 가운데서 이 대표도 별의별 일 다 겪으며 억순이 악순이로 살아오다 6년 전부터 경북 경주시 산내면 소재 납석 광산인 정성 광업을 개발 여러 연구진 박사들과 함께 의기투합 마침내 친환경 농업의 결정판 농지개량용 활성 토 개발 발명에 성공 특허를 출원 지금 전국에 보급 농민들의 호평 속에 전국의 농업인들을 방문 상담하고 또 마케팅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단다. 사실 지금 우리 땅 우리 농토는 지나온 수만 년 우리의 먹을거리 곧 식량을 공급해준 고마운 땅이지만 그동안 우리는 식량 증산에만 눈이 어두워 각종 화학용 비료와 치명적인 농약을 무자비하게 살포 이제는 어느 땅도 신음하지 않은 땅이 없고 그 병든 산성화된 땅에서 선충과 박테리아로 인해 연작 장애가 발생하고 농작물은 누렇게 탄저병이 나고 그렇게 병이 나고 탈이 난 먹을거리를 우리가 안심하고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농민들도 PLS(잔류농약 허용 기준)을 2020년 올 해 부터 정부가 시행함으로 도저히 농사를 질 수 없는 비상사태에 이르렀는데 그래서 이 정숙대표는 늘 이 분야에 관심을 두고 우리 땅을 살리자.! 우리 땅이 죽어간다. 땅이 죽으면 우리도 죽기 마련이다며 우리 땅에 생기를 불어넣자! 요즘 가수 유산슬의 노래처럼 우리 땅을 싹 다 갈아엎어 주세요! 하며 활성 토로 우리 땅을 갈아엎어 우리 땅을 살리자며 친환경 활성 토사업에 운명을 걸다시피 열정을 다해 비지땀을 흘리며 동분서주 바삐 뛰는 이 정숙대표 그가 살아 온인생 길 말로 다 할 수 없는 가시밭길이었지만 70을 바라본 그 나이에 우리 땅을 바꾸자며 활성 토가 정답이라며 YTN-TV를 통해 방송에서 역설하며 자신감을 보이는 그 열정적인 모습 앞에 어려운 인생 길이였지만 참 귀한 인생 살아왔구나. 농민을 위해 국민을 위해 건강한 우리 땅을 위해 오늘 멋진 인생 살아가는 이 정숙대표에게 박수를 보내며, 2020 한국을 빛낸 인물 대상 파워리더 대상의 주인공으로 선정한다.
뮤지컬 배우 카이, 재능기부 화보.인터뷰 공개
뮤지컬 배우 카이, 재능기부 화보.인터뷰 공개
[선데이뉴스신문= 김종권 기자] 뮤지컬 배우 카이(정기열)의 재능기부 화보와 함께 나누는 삶에 대한 신념이 담긴 인터뷰가 공개됐다. 잡지 빅이슈에서는 지난 2월 발표된 카이의 자작곡 '함께 흔들리자' 소개와 함께 자선활동 참여에 대한 생각을 확인할 수 있는 인터뷰가 공개됐다. '함께 흔들리자'는 배우 카이의 에세이집에 수록됐던 가사에 음가를 붙여 만들어진 노래로 힘든 순간일수록 함께 하자는 위로의 주제를 담고 있다. 게재된 인터뷰에서는 자선활동에 대한 배우 카이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는 카이는 2015년부터 문화 소외계층 청소년들에게 직접 구매한 공연 티켓을 전달하는 뮤드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어 "나눔의 영역이 확대되길 바란다" 는 카이의 생각은 공식 팬클럽 결무리에까지 전파되고 있다. 팬클럽의 자발적인 의견이 모아져 진행된 연탄기부는 4년간 꾸준히 지속되며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또한 지난 1월 대규모 산불로 피해를 입은 호주에 재난 피해 극복을 위한 후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한편 카이는 4월 18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단독 콘서트 '벨칸토'를 개최한다. 카이의 화보와 인터뷰 전문은 잡지 빅이슈 224호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인터뷰- 뮤지컬 배우 리사 "'마리 퀴리'는 많은 위로가 되는 공연"
인터뷰- 뮤지컬 배우 리사 "'마리 퀴리'는 많은 위로가 되는 공연"
[선데이뉴스신문= 김종권 기자] 뮤지컬 배우 리사(정희선)는 열정적이다. 2013년 그녀가 출연한 뮤지컬 '보니앤클라이드'를 보고 그녀의 열정에 빠졌다. 깊이 있는 목소리와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그 후로는 그녀가 출연한 작품을 보지 못하다(이상하게 일정이 안 맞았다) 2월 29일 뮤지컬 '마리 퀴리'를 관람했다. 한국에서 드문 여성 서사를 보여준 '마리 퀴리'에서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있는 리사를 3월 2일 광화문 카페에서 만났다. Q: 이 작품은 수학, 과학 등 공식이 많아 연기하기 힘들어 보인다. 어떻게 준비했나? 리사: 정말 힘들었다. 외워야 할 게 많았다. 원래 문과 전공한 사람들은 수학, 과학에 약하다. 원래 공연 앞두고 걱정하지 않는데 이번 작품은 정말 외워야 할 게 많아 힘들었다. 나중에 김태형 연출(과학고-카이스트 졸업)이 우리들에게 공식을 설명해줬다. 그걸 들으니 조금 이해가 됐다. 힘든 작품이지만 관객들 반응이 좋아 힘이 난다. 우리 공연을 보러 온 관객 중 다시 오는 사람도 있다. 그게 이 작품 매력이다. Q: 한국에서 여성 서사를 다룬 작품이 드물다. 이 작품이 가진 의미가 크다고 보는데? 리사: 아무래도 여자 배우들은 남자 배우들보다 연기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 사랑 이야기, 시대극에서 남자 배우들 부인이나 여자친구 등으로 나온다. 그런 점에서 '마리 퀴리'는 특별하다. 관객들에겐 조금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웃음) 여성 과학자 이야기라 어려울 수도 있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다들 어렵다. 이 어려운 시기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힘이 됐으면 한다. Q: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냈다. 극 중 '마리 퀴리'처럼 차별당한 적은 있는지? 리사: 아버지가 외교관이라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스웨덴, 폴란드, 독일 등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나도 동양인이라 유럽에서 인종 차별 당한 적이 있다. 유럽 사람들은 동물원 원숭이 보듯 나를 대했다. 나보고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 묻기도 했다. 그 때는 아직 한국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사춘기 때 힘들었다. 그러다 한국 문구세트를 유럽 친구들에게 갖다 주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다. 유럽은 우리보다 문구세트가 예쁘지 않다. 지우개 달린 연필 등을 갖다 주며 아이들과 친해지려 노력했다. 그래서 극 중 '마리 퀴리'가 처한 상황에 공감이 많이 됐다. Q: '마리 퀴리'를 연기하는 세 배우 연기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 리사: (김)소향 씨는 애교가 많다. 부드럽고 여성적이다. 하지만 연기할 때는 강하다. 2018년 초연 때 '마리 퀴리'를 연기해 그런지 자신 만의 방식대로 연기한다. (정)인지는 무척 진지하다. 생각이 많고, 말이 없다. 우리 셋이 모두 다르다. 기자님들이 세 번 정도 공연을 봐야 한다.(웃음) Q: 직공 '안느 코발스키'를 연기하는 이봄소리(김다혜), 김히어라와 호흡은 어떤지? 리사: 이봄소리(김다혜)는 전부터 알던 친구였다. 목소리가 부드럽고 여성적이다. 김히어라는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여린 외모와 달리 남성적이다. 두 배우 모두 호흡이 잘 맞는다. Q: 그동안 여러 뮤지컬에 출연했다. 앞으로 연기하고 싶은 배역이 있나? 리사: 모든 작품을 다 해보고 싶다.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화려한 작품도 좋고. '엑스칼리버'처럼 칼싸움을 하는 역을 연기하고 싶다. 여러 작품을 했지만 아직 하지 못한 작품이 많다. Q: 코로나19로 문화계가 어렵다. '마리 퀴리'는 괜찮은지? 리사: 우리 작품은 그나마 괜찮다. 여러 작품이 취소되고, 연기됐다. 충무아트센터는 관객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관람한다. 이 힘든 시기에 내가 출연하는 '마리 퀴리'가 관객 한 사람이라도 위안을 얻었으면 한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로 위로가 된다. 출연하기 잘했다고 생각한다. 리사는 무척 활발했다. 운동을 좋아해 그런지 활발하고 솔직했다. 남편(키노33엔터테인먼트 이규창 대표)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말할 땐 무척 행복해 보였다. 코로나19로 요즘 우울했는데 리사의 밝고 솔직한 모습을 보니 희망이 생겼다. 그녀가 뮤지컬 배우로 아무 일 없이 순항하길 빌며 뮤지컬 '마리 퀴리'가 많은 사랑을 받길 기도한다.
인터뷰- 뮤지컬 배우 박강현 "'웃는 남자'로 많은 것을 얻었다"
인터뷰- 뮤지컬 배우 박강현 "'웃는 남자'로 많은 것을 얻었다"
[선데이뉴스신문= 김종권 기자] 박강현은 안정적인 연기력과 노래로 주목받는 젊은 배우다. 2019년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슬픈 사랑을 나누는 '페르젠 백작', 2020년 뮤지컬 '웃는 남자'에서 끔찍한 외모를 가졌지만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는 '그윈플렌' 역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나도 이 두 작품으로 박강현을 처음 알게 됐다. 그전에 몇 번 보도자료 받고 '괴물 성대' 박강현 단신 기사를 쓴 적 있지만 작품으로 본 건 '마리 앙투아네트'와 '웃는 남자'가 처음이었다. 강한 인상은 아니지만 부드럽고 섬세한 연기, 뛰어난 노래가 기억에 남았다. 2015년 데뷔했지만 신중한 화법이 인상적인 배우 박강현을 17일 강남 뮤지컬 카페 스테이지 246에서 만났다. Q: 2018년 초연에 이어 이번 재연에도 다시 출연하게 됐다. 이유가 있는지? 박강현: 제작사 대표가 나를 불러줬다. 창작 초연이라 '그윈플렌' 역에 애정이 갔다. 초연 때 수호(김준면), 박효신 같은 유명한 사람들과 같이 출연하게 돼 조금 걱정했다. 난 유명하지도 않은데. 이번 재연 때는 더 발전되고 깊어진 '그윈플렌'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한 번 했으니까 작품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초연을 했기 때문에 작품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생각이다. Q: 이번 재연은 초연과 달라진 점이 있는가? 박강현: 2018년 초연보다는 조금 여유가 생겼다. 초연과 비교했을 때 조금 개구쟁이 같은 모습으로 연기했다.(웃음) 2막 마지막 장면 '그 눈을 떠' 넘버를 부르고 바로 '웃는 남자'를 불러야 해 조금 힘들다. 그 장면이 제일 힘들다. 영국 상원 의원들을 설득하는 장면이라 감정이 많이 들어간다. 커튼콜 때까지 그 감정이 남아 있을 때가 많다. Q: 이번 '그윈플렌' 4명이 모두 다르다고 들었다. 다른 '그윈플렌'들과 사이가 어떤가? 박강현: 모두 사이가 좋다. (조)규현이 형은 TV와 똑같다. 내가 TV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닌데 가끔 규현이 형이 옆에서 장난을 많이 치는데 연습 때도 그런다.(웃음) 내가 생각한 '그윈플렌'은 입이 찢어지고 사람들을 웃기게 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부분이 '그윈플렌' 역할과 규현이 형이 잘 맞다고 본다. Q: 데뷔 5년을 맞았다. 기억에 남는 작품은 있는가? 박강현: '웃는 남자'다. 이 작품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상도 받고, 이름도 알렸다. 이 작품 덕분에 내가 발전하고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2019년 11월 '웃는 남자'가 영화로 나와서 극장에서 상영했다. 그걸 보고 이번에 '웃는 남자' 공연을 보러 온 분들이 많다. 여러 가지로 내게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Q: 언제부터 배우를 꿈꿨는지? 박강현: 고1때 TV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2002년, MBC)를 보고 이나영에게 반했다.(웃음) 배우가 되면 이나영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3 때 연기학원에 등록해 연기를 배웠다. 그 때 무대가 좋다는 걸 알았다. 무대란 공간에서 내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학(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 들어갔는데 거긴 뮤지컬 전공이 없었다. 군대(경찰 홍보단) 있을 때 한지상 형(대학 선배) 등 뮤지컬 배우들을 만났다. 그들과 만나면서 뮤지컬을 알게 됐다. 제대 후 계속 오디션을 봤다. 그러다 작품에 계속 출연하게 됐고 여기까지 왔다. Q: 계속 작품에 출연하고 있다. 힘들지 않는지? 박강현: 힘들다. 하지만 일이 있다는 게 고맙다.(웃음) 공연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정말 공허하다. 내가 제대로 잘 살고 있는건지 모를 때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도 일단 연습실에 가면 배우는 게 많다. 난 살기 위해 연기한다.(웃음) 일이 있다는 게 감사하다. Q: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가? 박강현: 내 길을 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 나를 좋아해주는 관객들을 위해 성실하게 내 길을 가겠다. 관객들이 '웃는 남자'를 보러 많이 왔으면 한다. 박강현은 앞으로 한국 뮤지컬을 이끌 배우답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성실하게 인터뷰에 임했다. 질문 하나 하나에 진지하게 답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약간 철학자 같은 모습으로 인터뷰에 성실하게 임한 박강현이 한국 뮤지컬을 이끌 별로 진화하길 바란다.
인터뷰- '영웅본색' 최대철 "'영웅본색'은 내 연기 인생 전환점이다"
인터뷰- '영웅본색' 최대철 "'영웅본색'은 내 연기 인생 전환점이다"
[선데이뉴스신문= 김종권 기자] 뮤지컬 '영웅본색'에서 제일 기억에 남았던 배우는 '마크' 역 최대철(최원철)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송자호'와 '송자걸' 형제를 지켜주는 의리 있는 역이라 눈길이 갔다. 무용을 전공해 그런지 총격전 장면도 날렵하게 소화했고 연기와 노래도 감동적이었다. 겉모습과 내면이 모두 멋있는 남자 최대철을 28일 광화문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Q: 2019년 MBC '복면가왕'에서 아픈 친구를 위해 출연했다고 말했는데 무척 감동적이었다. 그 친구는 어떤가? 최대철(이하 최): 많이 좋아졌다. 친구가 꼭 출연해 달라고 해서 나왔다. 하지만 상대가 무척 강해 1회전에서 떨어졌다. 그 친구는 내 고향 강원도에서 11살 때 서울로 전학오면서 만났다. 30년 넘게 계속 만나고 있는 친구다. Q: 뮤지컬 '영웅본색' 출연 계기가 궁금하다. 최: KBS2 드라마 '왜그래 풍상씨'에 같이 출연했던 유준상 형이 오디션 보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영웅본색' 오디션을 봤다. 8년 만에 뮤지컬 출연이라 설렜다. 왕용범 연출과 이성준 음악감독 등 제작진이 마음에 들고 같이 나오는 배우들도 좋다. 이 작품이 내 연기 인생 전환점이다.(웃음) Q: 무용(한양대 무용과) 전공이라 몸놀림이 가볍다. 총격전 장면에서 돋보였는데? 최: 무용을 전공했지만 티를 안 내려고 했다. 감정선만 살렸다. 욕하는 장면에서는 실제로 감정을 실어 연기했다. 노래와 연기 연습을 열심히 했다. 공연 개막 일주일 전 불안해서 2시간 마다 잠을 깼다. 집사람과 따로 잘 정도였다. 그러다 나를 믿기로 결심했다. 자만하면 안 되지만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요즘엔 편안하다. Q: 뮤지컬을 앙상블부터 했다고 들었는데 힘든 점은 없었나? 최: 뮤지컬 오디션에서 많이 떨어졌다.(웃음) 모 작품에선 오디션 합격했는데 일주일 후 이름이 알려진 연예인으로 교체됐다. 무척 슬퍼서 영화, 드라마에 진출해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 난 무용, 연극, 뮤지컬, 영화, 드라마 다 했다. 요즘도 드라마와 뮤지컬을 같이 하지만 공연을 소홀히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뮤지컬 연습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여한다. 일부 배우들처럼 영화, 드라마 핑계로 뮤지컬 연습에 빠지고 싶지 않다. Q: 왕용범 연출과 계속 일하고 싶은가? 최: 계속 일하고 싶다. 왕용범 연출은 정말 천재다. 그리고 엄청 꼼꼼하다. 앙상블 동작까지 하나하나 알려준다. '영웅본색' 첫 연습 날 모든 예행 연습을 다 했다. 그런 적은 처음이다. 이성준 음악감독 음악도 무척 좋다. '영웅본색'은 정말 정이 가는 작품이다. Q: 연극에 많이 출연했다. 연극 무대에 설 계획은 있는가? 최: 연극 무대에 꾸준히 섰다. 연극, 영화, 뮤지컬, 드라마 모두 내게는 소중하다. 요즘 '영웅본색' 공연을 보고 팬이 생겨 기쁘다. 공연 끝나고 나가는데 5~6명 정도 되는 여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일이 사인해주고, 사진 찍어주면서 기뻤다.(웃음) 내 팬클럽도 생겼는데 회원이 50명 정도 된다. 기쁘다. Q: '송자호' 역을 맡은 유준상, 임태경, 민우혁(박성혁) 세 명 연기가 모두 다르다. 어떤 느낌을 받는지? 최: 세 명 모두 다르다. 상대 배우가 반응이 좋으면 연기할 게 없다. 그 작품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유)준상 형, (임) 태경 형, 우혁이 모두 반응이 좋다. 우혁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귀엽다. Q: '영웅본색'을 왜 봐야 하는지 설명해달라. 최: 요즘 세상이 삭막하고 무섭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 친구 간의 우정, 형제 자매간 우애 등 소중한 가치들이 많다. 점점 잃어가는 이 가치들을 한번쯤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뮤지컬 '영웅본색'은 그런 가치들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인터뷰 전 스마트폰을 잃어버려 난처해하는 최대철의 모습을 보며 20년 전 나도 버스에서 지갑을 잃어버려 속상했던 일이 갑자기 떠올랐다. 빨리 스마트폰을 찾길 바라며(알 수 없지만) 유쾌하게 인터뷰에 응해준 최대철이 고마웠다. 인터뷰를 많이 안 했지만 이렇게 재미있었던 적은 없었다. 10년이 지나도 기억에 남을 오늘 인터뷰를 끝까지 성실하게 해 준 최대철이 지금처럼만 잘 나가길 빌어본다.
인터뷰- '영웅본색' 유준상-왕용범 연출 "창작 뮤지컬 벽을 넘겠다"
인터뷰- '영웅본색' 유준상-왕용범 연출 "창작 뮤지컬 벽을 넘겠다"
[선데이뉴스신문= 김종권 기자] 유준상은 언제나 활력이 넘치는 배우다. 왕용범 연출은 '프랑켄슈타인', '벤허', '삼총사' 등 남성적인 대작들을 선보인 연출가다. 뮤지컬계 단짝 두 사람이 만난 뮤지컬 '영웅본색'을 2019년 12월 28일 보고 예전 추억에 빠져들었다. 20일 오후 대학로 카페에서 두 사람을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Q: 이 작품에서 힘든 점은? 왕용범 연출(이하 왕): 창작 뮤지컬이 힘들다. 스타 배우들도 출연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번 '영웅본색'에 출연해준 배우들이 고맙다. 배우들 희생이 있어 한국 창작 뮤지컬이 존재한다. 유준상(이하 유): '영웅본색'은 연습을 진짜 많이 했다. 1초 아끼려고 배우들끼리 계속 합을 맞췄다. 무대 전환이 무척 빨라 정신없다. 나보다 '자걸' 역을 맡은 배우들이 고생한다. 제작진이 제일 많이 고생한다. Q: 한국 뮤지컬은 여성 관객들이 많다. 이 작품은 남성 관객들이 많은데 반응이 어떤가? 유: 처음엔 걱정했다. 배우들이 공연하다 반응 없으면 힘이 빠지는데 커튼콜 때 관객들이 환호했다. 우리 작품이 일본, 미국 가도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왔다. 90년대 초반에 일본 가서 뮤지컬 보곤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일본 뮤지컬을 뛰어넘었다. 이젠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도 우리 뮤지컬이 통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Q: 이 작품은 남자들 우정, 의리, 배신 등 전통적 가치를 말하고 있다. 요즘 세대에게는 낯설 텐데 어떻게 극복할 건지? 왕: 처음엔 엄청 고민했다. 요즘 세대는 '더치 페이'가 익숙하다. 반면 '영웅본색'은 '내가 밥을 사야 하는' 그런 작품이다. 요즘 복고가 유행인데 10~20대에게 이 작품이 먹힐 수도 있다. 기성 세대에게는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지금 세대에게는 복고가 새롭게 다가갈 수 있다. Q: 유준상은 언제나 활력이 넘친다. 비결은 무엇인지? 유: 뮤지컬을 하면서 열정을 얻는다. 무대에서 얻는 힘이 영화, 드라마까지 할 수 있게 한다.(웃음) 창작 뮤지컬을 오래 하면서 이 작품들을 놓치고 싶지 않다. 무대에서 힘을 얻는다. 왕: 유준상 선배와 알고 지낸 지 12년 됐는데 변하지 않는다.(웃음) '힘든 게 뭐야?' 란 말을 유행시켰고, 후배들이 제일 싫어하는 선배다. 대본을 제일 빨리 외워서 그렇다. 하지만 배고픈(?) 앙상블들에게 자기 카드를 내주면서 간식을 마음껏 사게 하는 '큰형님' 같은 배우다. 존경스럽다. Q: '영웅본색' 3편을 뮤지컬로 만들 계획은 없는지? 왕: 영화 '영웅본색' 1편과 2편 장점을 엮어 만든 게 뮤지컬이다. 이 작품은 독립적으로 하고 싶다. 어느 분이 공연을 보고 '왕용범이 오우삼이다' 란 평을 했다. 뮤지컬 '영웅본색'으로 남고 싶다. 두 사람은 유쾌했다. 그렇지만 한국 창작 뮤지컬을 발전시키겠다는 굳은 의지가 두 사람 눈빛에서 느껴졌다. 두 사람이 보여줄 다음 행보가 무척 궁금하다. 뮤지컬계 영원한 단짝 유준상과 왕용범 연출이 우리 뮤지컬을 더욱 발전시키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