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나라, "자유의 굶주림에 몸서리 쳐야만 했다"...북한이탈주민이야기(8)

기사입력 2016.12.06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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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그리워 했던 자유의 굶주림이 나를 탈북으로 이끌어
- 탈북중 뒤에서 총을 쏴도 앞만보고 달리라는 브로커 
- 통일이되면 한국서 알고 배운것 북한친구들과 나누고 싶어
- 영어에 약한 나는 립스틱을 바르고 보니 메뉴규어 였다
- 17세에 몰래 본 "꽃보다 남자"에 매료 돼



[선데이뉴스=정성남 기자]북한에서 핸드폰 세대에 살아왔던 그녀는 배고픔은 모르고 자랐지만 자유의 "굶주림에 몸서리 쳐야"만 했다.

핸드폰과 다른 매개체를 통해 한국 문화를 알게된 후 대한민국을 동경하게 되었다는 강나라양은 당시 가장 아름다운 꿈만 먹고 살아가는 18세 소녀였다. 그러나 "자유의 굶주림에 허덕이던 그녀는 자유가 없는 북한 땅을 탈출해야 한다"는 마음하나로  헤어진 엄마를 찾아, 그리고 자유를 찾아 홀홀단신 나약한 여자의 몸으로 험난한 여정을 헤쳐나와 한국에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예쁜 미모와 함께 한국도착 후 그토록 그리던 엄마를 만났고 한국정착 과정 중 좌충우돌하며 안주하던 그녀는 지금 방송인과 강의, 그리고 봉사 활동으로 하루 하루를 행복하게 보내고 있는 중이다.

본지가 특별기획 연재 보도하고 있는 북한이탈주민들의 진솔한 이야기 시리즈 8번째 그 주인공  강나라양의 이야기에 빠져보기로 한다.  

강나라양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시이며 그곳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예술고등학교를 다녔으며 재학 중인 당시 18세에 대한민국 품에 안겼다고 전했다.


► 탈북을 하게된 특별한 이유는, 누구와 같이 왔는지...

특별한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단 한가지 확실하게 제가 탈북을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잘 아시겠지만 북한은 자유나 모든게 내 마음데로 되는게 없잖아요. 그리고 그때 저는 10대이다 보니 여성으로서 꾸미고 싶고 또한 "가장 그리웠던것은 자유"였어요. 물론 먼저 나와 계신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구요... 그래서 탈북을 하게되었어요.

북한에서 탈출 할 때는 현지 브로커와 같이 왔어요. 청진을 출발해 압록강 방면의 강을 넘어 중국으로 왔으며 그 후 또 다른 안내인과 함께 육로로 태국으로 넘어갔어요. 

► 그렇다면 북한에서의 탈출은 몇명이며 당시 탈북 상황을 말 한다면...

저는 청진을 출발하면서 브로커와 단 두명이 압록강 쪽 강을 넘어왔어요. 그때 저를 안내했던 브로커는 탈북 과정 중 혹시라도 뒤에서 "군인들이 총을 쏴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앞만보고 뛰라고" 말해주었어요. 그 말을 들은 저는 너무 겁이 나기 시작했어요. 탈북 하면서 알고보니 그곳 국경에는 10명의 군인이 강변 산 밑에 한명씩 근무를 서고 있는데 그중 한명이 저희한테 돈받고 그냥 넘겨주는 것이었어요. 

문제는 제가 그곳을 향해 걸으며 강에 도달하여 강물에 들어섰는데 강이 너무 얕은거에요. 압록강이 이런 강이면 하룻밤에 10번도 넘나들수가 있겠다며 제가 그렇게 말을 했어요. 그런데 강을 건너면서 강물이 제 무릎까지 차 오르며 육지가 보이기에 압록강이 개울 같다고 말을 했어요.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내원은 그게 아니며 이제 부터 시작이라는 말을 했어요.

이제 다시 시작이라는 말과 함께 발을 딱 들여놓으니 별로 깊지 않았어요. 괜찮네! 괜찮네! 하면서 강을 건너는데 강물이 점점 깊어지며 제 가슴팍까지 오는거에요. 물을 상당이 무서워 했던 저는 수영도 할줄 몰랐는데 갑자기 강한 물살에 밀려 제가 떠내려 가는 중에 안내원이 저의 목 뒷덜미를 잡고 육지까지 데려다 주었어요. 당시 물살에 밀리지 않을려고 강물을 수도없이 먹었어요. 하지만 육지에 도착한 저는 물안에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때 강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잠겼을 때 영화를 찍는것 같이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 떠 오르며 유언과 같은 말을 했어요 어린 제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 같아 죄송하다구요... 등등 이루 형용하기 힘들 정도의 긴박한 시간이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브로커가 진짜 전문가 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렇게 절박하고 긴박한 과정을 거쳐 중국땅에 올라섰지만 브로커는 국경을 넘었어도 말도하지 말고 또 숨소리 조차 내지 말라는 거에요. 그렇지만 저는 숨이 차올라 헉헉 거리며 "우리 다왔어요? 다왔어요?" 이렇게 말을 했어요. 그 브로커는 다시 한번 진짜 소리 내지 말라며 숲에 앉자 조용히 소근소근 어딘가에 전화를 하는데 알고보니 중국 측에서 마중을 나오는 사람인 것이었어요. 거기선 또 중국쪽에서 마중 나와야 하잖아요. 숲에서 전화를 조용히 하시더라고요 중국 경찰들이 거기 왔다갔다 하는것도 보였어요. 이게 제가 청진을 떠나 압록강을 거쳐 중국에 도착한 일정이라고 말 할수 있는데, 지금에야 이렇게 편히 말 할 수가 있지만 그 당시 긴장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만큼인 것같아요. 그나마 제가 성격이 활동적이고 긍정적 성격이라 이정도 인게 아마 다행 아닐까요?

► 청진에서부터 탈북하며 중국을 거쳐 태국에 도착 했는데 그동안 과정을 설명한다면...

많이 어려웠어요. 특히 중국에서 잡히면 곧장 북송당하니까 중국에 도착하면서 가장 정신적으로 많이 어려웠던것 같아요. 버스를 탈 때도 진짜로 숨어서 탔고 얼굴 조차 마주치지 않을려고 무던 애를 썻던것 같아요. 물론 입도 벙긋 할 수가 없는 것은 입을 여는 순간 바로 탈북한 사람이라는 것이 표시 나기 때문에 그게 가장 긴장도고 위험 했어요.

그리고 중국에서 태국으로 갈때는 강을 건너가는데 메콩강이라는 강을 건너서 가는데 악어가 많아요. 악어강이라고 하는데 절대 밖에 나가지 말라는 거에요. 그것도 나무배였어요. 제 기억으로는 이틀을 그 배에 머무르며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니 태국 땅에 도착을 했어요. 탈북민들이 중국을 제외한 태국 등에 도착하면 곧 바로 난민형식으로 자수를 해야하는데 저도 예외 없이 자수를 했어요.

문제는 자수를 해야하는데 덩그러니 내버려진 저희 탈북민들은 어떻게 자수를 하고 경찰서가 어디인지 조차 몰랐어요. 그래서 당시 함께 중국부터 탈북한 모든 사람들이 도로 한복판에 서있으니까 경찰차가 왔는데, 여기서도 경찰차인지 어떤 차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어 아는 영어로 폴리스!폴리스!만 외치니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분증을 보여줬어요. 자기가 폴리스라고 했어요..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 저희는 경찰서에 도착해 감옥에 들어가는 죄수처럼 앞, 뒤, 옆의 사진을 다 찍고 그곳에 잠시 대기하고 있은 후 우리를 또 이송해서 태국 이민 감호소로 데리고 갔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한달동안의 시간을 보낸 후 한국으로 오게된 것이에요.


► 그렇다면 현지 태국에서의 수용소생활 중 어려웠던 일은...


제가 어리고 철이 없었는지 태국에서 수용소 생활중 힘들었던 것은 밖에 나가서 놀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현실은 그곳이 감옥이며 그게 허용되지 않았어요. 단지, 하루에 한번 딱 한시간 실내에서 운동시켜주며 가족들에게 전화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수용소 내에서 파는 음식이나 간식을 사먹는 시간이 있는데 저는 하루 일과 중 늘 그 시간을 기다리고는 했던것 같아요. 눈을 뜨면 밥 먹고 나면 TV보면서 마냥 누워 있어야 하는데 그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는데 이런것들이 저에게는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 중국에서 태국으로 갈때는 몇명이 함께 움직였는지...

태국에 넘어갈 때는 11명인가 되었어요. 혹여 한, 두명씩 보내면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무리 지어서 보내는데 대부분 8명에서 10명 이상씩 보내고 있어요.

► 한국으로 도착하여 집으로 가기까지는...

그렇게 그리워했던 대한민국 서울에 도착하고 나니 곧장 국정원으로 갔어요. 모든 북한이탈주민들이 걸쳐야 하는 과정 중 하나이지만 어린 저는 그때 많이 지쳐있었던 것 같아요. 도착과 동시에 국정원 가서 조사를 받게되는데 혼자 있는 방에 거주하면서 조사를 받았어요. 물론 이때에도 외부 구경은 할 수 없으며 세끼 밥을 먹으러 오갈때 만이 잠시 바깥 풍경을 볼수가 있었어요. 그렇게 조사를 마치면 다시 하나원에 가서 교육을 받은 후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어요.  

► 보통 하나원에서는 한국정착에 도움이되는 자격증 취득 등의 교육이 있는데 혹 그곳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저는 그런것이 없었어요. 당시 청소년이며 학생이었던 저는 하나원에서 자격증 교육이나 일반 교육이 아닌 학교를 보냈어요. 그래서 저는 공부만 했었어요.

► 한국의 서울이라는 땅을 밟으며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제가 북한에 있을때 이런저런 기회로 한국을 알게 되었는데 정말 기대가 컷어요. 처음 서울시내를 바라본 나는 고층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 자체로 답답하며 숨이 막히는 것 같았어요. 제가 18년동안 살아왔던 북한은 허허벌판 이어서 눈이 확 트이는데 여기는 눈이 막히는 것에 저는 조금 놀라웠어요 .

처음 인천공항은 너무 멋있었는데 그곳을 벗어나 서울 시내에 진입하는 순간 너무 길이 좁고 어지러움을 느꼈어요. 그리고 가게들을 바라보며 중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되었구요. 

► 탈북전 성악을 전공하였는데 북한에서의 학교는...

저는 예술계통으로 에술고등학교에서 성악 전공을 했었어요. 북한에서 목표가 성악을 열심히 전문적 교육을 받은 후 김정일 김정은 악단에 입단하는 것이 저의 꿈이었어요

► 그런데 왜 그 꿈을 접고 탈북을 하게 되었는지...

저는 생각을 깊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고 아주 간단히 생각을 얇게 하고 많이 안해요. 고민도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저는 내가 딱 무었을 하겠다고 생각을 하면 뒷 일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일을 시작부터 하는 스타일이에요. 제가 아까 말슴드린 저의 그 소박했던 꿈 역시 탈북을 해야한다는 생각과 함께 제 머리속에서는 이미 지우개로 지워져 있었어요. 그곳 생활이 서서히 짜증으로 밀려오면서 부터 먼저 한국으로 떠난 엄마 생각과 함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북한의 생활에 신물이 났으며 한류를 접하면서 부터 자유를 갈구하며 탈북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 새록새록 돋아났어요. 그리고 머리속에 지워진 내 꿈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탈북을 결심하게 된 것이에요.

► 얼굴도 예쁘고 노래도 잘하고 하여 북한에서 인기도 많았을 텐데...

솔직히 자랑은 아니지만 북한에서는 인기가 많았어요. 여기 와선 진짜 인기가 없어요. 여기서는 나이드신 팬들이 많고 어르신들 팬이 많다 보니까 나는 인기가 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저를 아껴주시고 관심을 갖기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늘 감사한 마음 뿐이에요.


► 정착과정 중 에피소드나 기타 이야기 거리가 있다면...

한국생활을 하는 저는 이곳 한국은 영어사용이 일상화 된 것을 알 수가 있었어요. 영어는 정말 저에게는 아킬레스건과 같이 가장 취약한 부분중 하나인데 생활속에 영어를 접하다보면 한 두번 당황하고 실수한 적이 아니었어요.

한번은 4개월전에 엘리베이터를 타게되었는데 보통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적혀있잖아요. 제가 가야하는 층이 4층인데 아무리 쳐다보아도 4층이 없는거에요. 어디로 가야되지? 당황해서 일단 내려서 다른 승강기를 탓는데 그곳에도 없고 또 다른것으로 갈아타도 없는거에요.

난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 여자가 왜그러는가 하며 쳐다보는것 같아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 다른층은 다있는데 왜 유독 4층이 없는지를 모르는 저는 옆에 있는 분에게 여기 4층이 어딘가요 하며 물어봤어요. 그분은 여기 F가 4층인데요 라며 말 해주었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한국에서는 4라는 숫자가 않좋은 숫자라서 F로  쓴다는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보다는 혼자 얼굴이 빨개지고 있어요.

또 다른 에피소드는 엄마와 처음 마트에 갔어요. 지금이야 알고 있지만 마트에 가보면 보통 애견샵에서 먹이로 통조림통에 고기말린 것을 파는데 저는 그것이 사람들이 먹는 통조림인줄 알고 장바구니에 담았어요. 이런 저를 바라보던 엄마는 그걸 왜샀냐고 저에게 물어보시기에 제가 먹으려고 샀다고 했더니 "그건 강아지 먹이"라고 해 주셨어요. 저는 솔직히 그 통조림이 개고기 통조림인줄 알았어요. 집에 돌아온 후 엄마와 아빠께서는 그것은 강아지 먹이라 말씀하시며 웃었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또 2개월 전에는 엄마와 함께 백화점에 갔어요. 립스틱 매장에 갔는데 너무 제가 원하는 색깔이 있는거에요. 그래서 입에다 칠했어요. 칠했는데 그게 바로 매니큐어였어요. 입이 너무아파 화장실 뛰어갔는데 저는 아직 까지 영어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한국에서 좌충우돌하고 있는 중이에요.

► 북한에서 어떤 경로나 어떤 방법으로 한류를 접했는지...

저는 북한에서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여기 보면 이승철이라는 가수가 있잖아요. 이승철 조성모 이루 윤도현밴드 이런 노래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때부터 많이 들었는데 북한 노래는 다 찬양 일색 이잖아요. 그런데 한국 노래는 정말 듣기 좋았어요. 그리고 한국의 TV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제일 처음으로 본것 같아요. 그때 그 드라마를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았던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치마도 무릎위에 올라가면 안되고 또 청바지나 이런것도 입으면 안되는 거에요. 그런데 짧은 치마에 머리도 염색. 매직하고 그런것들이 다 예쁘기만 했어요. 그때 아마 17세 였던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한류를 볼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USB를 구입해서 보고들 있어요.

► 방송인으로 호칭되는데 방송인으로서의 적성에 맞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요즘하는 일은...

저 자신이 이런말 하기 좀 뭐하지만 저는 어려서부터 배운게 예술이어서 한국에 와서 가수가 되고싶었어요. 그러나 와 보니 가수가 된다는 것이 너무 어렵고 힘든 길인것 같고 방송은 예술인으로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이 길을 선택하게 된것 같아요. 그리고 적성에 맞는 일이니 열심히 하다보면 좋은 길이 열릴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금전적 수입보다는 저를 더 성숙하게 키운다는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방송이외에 활동은 가끔씩 이곳 청소년들과 성인들 위주로 통일안보 강의를 하고 있는데 얼마전 미국에서 13일간 체류하며 강의를 다녀왔어요. 

► 본인이 청소년시기에 바라본 북한의 실상은...

글쎄요...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북한의 실상이라면 예전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만은 않은것 같아요.
 
그런데 이곳 SNS를 통해 댓글이 달린것을 보면 그곳 "북한 주민들은 다 굶어 죽는다", "얘들이 여기와서 자기네 도와달랜다" 등 북한 주민들을 거지 취급하는 듯한 글들을 볼수가 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제가 봤을때는 북한이 예전처럼 굶어죽는 사람이 많고 다 못사는게 아니라 빈부격차가 심해서 잘사는 사람은 아주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정말 못살고 그게 다 차이가 나뉘어지는 것 같아요.  굶어죽는 사람은 제가봤을 때 크게 없어요. 물론 제가 살아 온 환경과 그 외 지역에서 사는 주민들과의 격차 등을 소상히 알지 못해서 이런말을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아마 이런것들, 특히 빈부의 격차같은 것은 공산주의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계급사회의 병폐와 끝없는 부조리에 의한 산물이며 이것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눈속임과 규제, 그리고 감시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역시 배고픔이 아닌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찾아 이곳으로 온것 이구요.

그렇지만 이런말들이 나오는 것은 아마 다 이유와 근거가 있는 말이라는 생각도 해요. 제가 이세상에 태어난 시기가 바로 북한에서 그 끔찍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 태어났어요. 당시 저희 집도 이 시기에 형편이 아주 어려운 살림이었다고 들었어요.  저희 엄마가 끼니 없어 저를 물엿을 먹여가며 키웠다고 말씀을 해 주었어요. 그때 엄마가 장에 다니셨는데 목이 건들건들한 저를 업고 다니셨는데 제가 아직까지 키가 안자라는 이유가 아마 풀죽을 먹여가지고 몸에 힘이 없어서 그런것 같아요. 하하하... 

► 청진소개를 한다면...

저희 고향 청진은 항구 도시며, 이렇게 항구가 있다보니 유통이 잘되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게 밀수는 아니고 물류 유통으로서 물품이 들어와 장사도 잘 할 수 있고 또 화교들이 많아 중국 물품들을 많이 가져오다 보니 청진시민들의 살림을 편하게 해주고 있지만 물건이 조금 비싸게 매매되고 있어요. 물론 거의가 중국제품이라고 보시면 될거구요.

► 지금 활동중인 방송프로그램은, 처음 방송에 프로그램은...

체널 A 에서 방영하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는 저번달에 종료했고 지금은 TV조선 남남북녀 시즌2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매주 목요일 강남역에서 공개 음악방송을 하는데 전 그곳에서 MC를 맡아 하고 있는 중이에요.

제가 방송을 처음 했던거는 이제 만나러 갑니다가 처음이죠 작년 11월 그때 처음으로 방송을 해봤는데 제가 원래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앞에서 말하고 이런걸 못해요. 한번 말하면 얼굴이 진짜 빨개지는데 처음 나간 방송인 이제 만나러 갑니다를 촬영하는 중 얼굴이 너무 빨개진거에요. 그때 저는 "안녕하세요 저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온 19살 강나라입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얼굴이 토마토색으로 변하는 거에요. 집에서 내가 보는데 정말 창피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내가 한국에 와서 TV에 나올 줄이야 하는 의구심과 함께 내가 살다 보니까 TV에 나오는 꿈만같은 날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했어요. 


► 지난 8.15때 독도에 간 이유와 태극기를 흔들었을때의 심경은...


저는 북한에서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많이 공부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독도에 갈 수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이전에 해병대 특전사 병영체험을 다녀왔는데 그곳 관계자분들이 저에게 독도 탐방하는데 나라씨도 같이 참여할거냐고 저에게 의사를 물어보시기에 저는 너무 좋은 기회여서 가겠다고 대답했어요. 그렇게 독도를 가게되었는데 당시 스케줄 문제로 다른 촬영을 마친 후 새벽 시간에 저 혼자 따로 올라갔는데 그 유명한 광개토대왕 해군 함정에 승선해 갔었어요. 그렇게 도착한 독도는 북한이나 여기 한국에서 말로만 사진으로만 보았지 직접 본 일이 없었으며 그것도 우리민족 전체에게 뜻 깊은 8.15 광복절에 갔잖아요. 독도는 정말 이쁘며 작고 아기자기했어요. 나도 모르게 뭉클거려서 눈물이 살짝 가랑가랑 고였어요.
 
그러던 중 함께 오신분들이 이곳 독도에 왔는데 사진 한 장 남기고 가야지 하시는 말씀에 저는 "대한민국  태극기를 들고 사진 찍을래요" 해서 찍었는데 SNS에서 큰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어요.

► 한국에와서 학업은 계속하는지, 그리고 뮤지컬에 출연한 것은...

얼마전 휴학을 했어요. 명지전문대에 다니면서 뮤지컬을  전공했었어요. 평소에 저는 연기에 관심이 많고 지금도 배우를 꿈꾸고 있어요. 우연히 오디션 사이트에 오디션 공고가 있기에 메일을 통해 프로필을 보냈는데 오디션을 보자는 연락이 와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었어요.

그때 국적은 한국 사람인데 도저히 한국사람과 같은 말이 안되며 표준어가 안되는 거에요. 그래서 감독님이 북한 인물 한명을 추가로 만들며 대본을 수정하게 되었고 그 뮤지컬에서는 연예인이 되는 꿈을 안고 탈북을 한 학생으로 출연을 하게 되었어요.

► 본인이 한국에서 가장 하고싶은 일은?

저는 연기자가 되는게 지금 가장하고 싶은일의 일순위 이에요. 연기자가 되고 싶은 이유는 제가 북한에서도 연기, 발성에 대해 관심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때는 노래를 전공했으니까 노래를 꾸준히 했었어요. 한국에 온 이후 저는 TV도 보고 연기도 보고 유투브에 나오는 영상물에 대한 연기를 잘 따라하고는 했어요. 그렇게 하다보니 저와 잘 맞는것 같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연기가 너무 하고싶어요. 저는 그냥 걸어 다니는 역할을해도 하루종일 할 수가 있어요. 연기가 그만큼 하고 싶은 것 같고 너무 애정이 가는것이에요. 그래서 단역 같은것도 꾸준히 하며 제 연기의 꿈을 키우고 있는 중이에요. 

► 북한이탈주민으로서 정착과정 중 정부나 기타 남한사람들에게 바라는 점은...

저는 바램 같은 것은 하나도 없어요. 정착을 하면서 정부나 기타 기관을 통해 저희에게 장학금을 8학기를 지원 해주고 있어요.  진짜 8학기의 학비를 저희가 자비로 공부 하려면 북한이탈주민들에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 되는데, 저는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고 저희가 여기에 잘 정착할 수있도록 주거는 물론 세세한 음식의 일부까지 다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것으로도 늘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고 빛진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은... 

제가 이곳 한국에와서 받은 것 만큼 보답을 해야죠. 저는 일단 통일을 하루빨리 원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에요. 지난번 한국대학생들과 탈북대학생들이 함께 독일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베를린 장벽 앞에서 통일을 위한 노래를 합창했어요.

앞으로도 통일을 위한것 이라면 아무 조건도 이유도 없이 다 달려갈 거에요. 방송인이라고 출연을 한다고 페이에 연연치 않을것 이고요. 그러다보니 통일에 대한  탈북한 청소년이 한국에 정착하는 내용의 뮤지컬 "달콤한 철쭉"에서 주연으로 출연을 했어요. 제 삶의 우선순위 세 손가락안에 통일이 늘 자리하고 있는것 같아요.

그리고 시간과 경제적 등의 여력이 된다면 양로원, 독거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나 병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을 찾아뵙고 제가 갖고 있는 노래나 연기로 그 분들을 위로 하는 일도 열심히 할 계획이에요. 

► 하시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저는 지금 대한민국에 와서 제 자신에 대한 삶에 충실히 살아가고 있으나, 때로는 힘들때가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더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간다면 어는정도의 자리가 안정이 되고 그때 우리가 통일이 되면 내가 여기서 배운만큼 북한친구들에게 나눔을 하고 싶어요.

저의 이런것이 소박한 꿈일지는 모르지만  탈북소녀 강나라를 예쁘게 봐주시고 많은 격려와 지지를 당부드리며, 늘 여러분들의 응원에 보답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하는 강나라가 될것을 약속드릴께요. 감사드리며 여러분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끝)

강나라양은 북한의 노래가사에도 있듯이 살기좋은 나라, “내나라 제일 좋아” 이런 노래를 어려서부터 따라부르고 듣다보니 대부분은 사람들은 다 믿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정보가 제한되어 있으며 "북한사람들이 오직 볼 수 있는 것은 좋은 것만 내 보내는 미디어의 역할이 큰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한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여기저기서 생기다보니 인식의 변화가 많이 오고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렇지만 "이 마저도 보다가 적발될 시에는 총살에 처해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함부로 볼려고 엄두를 내지 않고 있다"는 그녀는 탈북 전 북한에서는 예술고등학교 학생으로 당시 18세 였다고 말한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입학한 예술고등학교는 어려서부터 보고 들어왔던 김일성 3부자 찬양노래가 일색이었다. 이것저것 규제와 제한 그리고 감시속에 숨이 막힐 수밖에 없는 삶은 그녀에게 한류를 알게하였고 이것이 자유라는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인터뷰 시간속에 비추어진 그녀는 명랑하고 밝은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지만 내면에 감추어진 지난 세월의 아픈 흔적은 지울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모든것이 감사하다는 마음과 함께 생각보다 빠른 통일을 예견하는 그녀의 당돌함은 이미 우리들 가슴속에 서서히 한울타리 한 가족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것 같았다. 

 

[정성남 기자 csn80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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