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 북한 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 등과 영화인 최은희(崔銀姬)씨

기사입력 2018.04.17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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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은희씨 영정. 사진 공동취재단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북한 <조선중앙년감》(1985) : 예술영화《돌아오지 않는 밀사》․《탈출기》․《철길을 따라 천만리》․《길》 ; “[신필림영화의 출현] 1984년에 신필림영화가 처음으로 나왔다. 신필림영화촬영소는 웽그리아의 부다뻬슈뜨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 촬영소 총장은 지난날 남조선에서 영화업에 종사하다가 괴뢰도당의 정치적 탄압과 박해를 피해 해외로 망명한 신상옥이며 부총장은 그의 부인 최은희이다.

 

신필림영화촬영소는 1984년에 《돌아오지 않는 밀사》를 처음 내놓은데 이어 《탈출기》, 《철길을 따라 천만리》, 《길》 등 여러 편의 예술영화를 내놓았다. / 예술영화 《돌아오지 않은 밀사》는 리준이 1907년 화란의 헤그에서 열린 제2차《만국평화회의》에 고종황제의 밀사로 참가하여 국권회복의 뜻을 못이루게 되자 비극적으로 할복 순국하는 이야기를 통하여 외세의존은 망국의 길이며 오직 자주독립만이 진정한 독립과 번영의 길이라는 력사의 진리를 깊이있게 보여주고 있다. / 예술영화《탈출기》는 해방 전의 진보적 작가였던 최서해의 동명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것으로서 일제식민지통치의 반인민적성격을 낱낱이 폭로하고 인민대중이 제국주의와 착취제도를 반대하여 항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투쟁의 필연성을 예술적으로 확증하고 있다. / 예술영화 《철길을 따라 천만리》는 한 철도기관사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 인민들에게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참다운 삶과 행복을 마련하여주는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을 실감있게 보여주고 있다. / 예술영화 《길》은 한 녀성 자동자 운전사의 우여곡절에 찬 생활을 통하여 각이한 길을 걸어온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책임지고 지켜주는 품은 오직 조선로동당 뿐이며 당에 모든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살아갈 때 삶은 빛난다는 진리를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244~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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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신상옥'씨와 북한 김일성

 

위 북한 자료의 주인공은 영화인 ‘신상옥 · 최은희’ 입니다. 위에서는 북한이 두 사람을 “정치적 탄압과 박해를 피해 해외로 망명”했다고 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1978년 1월 최은희 씨가 홍콩에서 실종되어 납북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신상옥 씨는 실종된 최은희 씨를 찾아 헤맸고, 해외에서의 활동을 모색하기 위해 한국을 떠난 신상옥 씨까지 6개월 뒤 납북되었고, 그는 북한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상옥은 1986년 북한을 탈출한 이후, 대한민국에서 계속 영화 제작에 전념했고, 2006년 4월 11일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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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신상옥'씨와 북한 김정일

 

최은희 씨의 장남인 신정균 영화감독은 2018년 4월 16일 "어머니가 오늘 오후 서울 가양동 한 내과에 신장 투석을 받으러 가셨다가 임종하셨다"고 밝혔습니다. 16일 오후 4시 30분쯤 지병으로 세상을 하직한 것입니다. 한국 영화 중흥기를 이끌며 ‘김지미 · 엄앵란’씨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던 ‘큰 별’이 떨어진 것입니다.1978년 1월 14일, 안양예술학교 최은희 교장은 공무 차 홍콩을 방문했다가, ‘약속이 미뤄졌으니 바닷가에 놀러가자’는 지인을 따라나섰고. 그 뒤 홍콩 수사 당국은 “괴한들에게 북한으로 끌려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납북된 두 사람이 북한 땅에서 재회한 것은 최은희 씨 납북 5년 뒤인 1983년이었습니다. 그는 북한에 도착해 38살의 김정일(당시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비서)의 후원 아래 안정적인 삶을 살았지만, 신상옥은 대부분을 수용소에서 보내며 탈출도 3번이나 시도했습니다. 두 사람은 북한의 영화산업을 발전시키려는 김정일의 ‘욕망(慾望)의 제물(祭物)’이었습니다.

 

어쨌든 두 사람은 김정일의 주선으로 다시 영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칼럼 서두(序頭)에서 소개한 “신필림영화촬영소는 웽그리아의 부다뻬슈뜨에 본거지...촬영소 총장은 지난날 남조선에서 영화업에 종사하다가...해외로 망명한 신상옥이며 부총장은 그의 부인 최은희이다. 신필림영화촬영소는 1984년에 《돌아오지 않는 밀사》를 처음 내놓은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은희 씨는 북한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김정일의 신임을 얻은 이들은 1986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여행 허가를 받아 8년 만에 북한에서의 탈출을 시도, 비엔나의 미국대사관으로 가서 CIA 요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탈북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최은희씨는 미국에서 오랜 망명 생활을 했고, 1999년에 귀국했습니다. 그는 8년 전 한 언론의 기고문에서 “나는 분단국가의 유명 배우라는 이유로 인생의 전환기마다 타의에 의해 고난을 겪어야 했다. 다른 이의 삶을 연기하는 영화배우로 살았지만, 내가 살아온 길 자체가 한 편의 영화가 됐다.”고 기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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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魯 李龍雄/ 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선데이뉴스신문 논설고문/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소장/

 최은희씨는 이승을 하직했습니다. 그는 3년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제일 좋아하는 노래로 김도향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꼽은 것도 그래서다. 그는 이 노래를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틀어 달라고 부탁해 놓았다고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바보처럼’? 영국 속담에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현명함을 생각하지만 현자는 자기의 어리석음을 안다.”고 했습니다. 고인(故人)의 명복(冥福)을 빕니다.

 

북한은 ‘영화예술’을 “우리 나라 사회 제도의 현실적 기초로 되는 조선 로동당과 공화국 정부의 정책을 광범한 인민 대중 속에 적극적으로 선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사회주의 기초 건설을 위한 우리 인민의 불굴의 투쟁과 그들이 달성한 빛나는 성과와 위훈을 형상화하여 인민들을 고상한 애국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으로 교양하며 그들을 창조적 로력 투쟁에로 고무 추동하는 중대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은 “최은희 소화 데레사님의 선종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삶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고인은 영화 속 변화무쌍한 역할을 통해 다양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신 분으로 기억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고인(故人)의 빈소에는 원로 영화인과 후배 연기자 등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분단(分斷)을 가로질러 영화처럼 살다“ 간다는 대한민국 영화배우 최은희 씨에 대한 평가는 훗날 있을 것입니다. 그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빕니다.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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