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로 이용웅 칼럼] 문화재사랑- 2022년 8월호-[가르침과 배움의 즐거움]

기사입력 2022.08.2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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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사랑-2022년 8월호 표지-문화재청 발간.jpg
문화재사랑-2022년 8월호 표지-문화재청 발간

 

[선데이뉴스신문=이용웅 칼럼] [문화재(文化財)란 각 나라나 유네스코에서 보호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특수 재산들을 말합니다. 유네스코에서는 1970년 46개국이 가입한 '문화재의 불법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의 금지와 예방수단에 관한 협약'에서 문화재의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이 협약에서 정의한 문화재란 고고학·선사학·역사학·문학·예술 또는 과학적으로 중요하면서 국가가 종교적·세속적인 근거에 따라 특별히 지정한 재산을 말합니다. 이 협약은 자연유산도 문화재에 포함시켰습니다. 한국에서는 1962년에 제정된 문화재보호법 제2조에서 문화재를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 등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요도에 따라 국가지정문화재, 시·도 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등 여러 지정문화재로 분류됩니다. 그밖에 토지·해저·건조물 등에 포장된 문화재인 매장문화재가 있습니다] 


‘문화재’하면 대부분 잘 압니다. 그런데 ‘문화재 사랑’하면 대부분 ‘사랑’이라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랑하면서도 사랑한다고는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월간 [문화재사랑]을 발간해 왔습니다. 그런데 2021년에는 격월간(隔月刊)으로 변경, 발행하고 있습니다. 2022년 임인년(壬寅年) 3월에 [문화재사랑 2022년 3월호(통권 제208호)]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문화재사랑 2022년 4월호(통권 제209호)]가 나왔습니다. 이어서 [문화재사랑 2022년 8월호(통권 제213호)]가 나왔습니다. 이 8월호에는 [1. 흙과 불로 탄생한 새로운 책가도 (冊架圖)]]], [.2. 요람에서 배우는 평생의 가르침,가정교육]], [3. 성리학을 담는 철학의 그릇사적 안동 병산서원]//이 있습니다. 다음은 [요약 발췌] 입니다. 


문화재사랑-2022년 8월호-[흙과 불로 탄생한 새로운 책가도 (冊架圖)].jpg
문화재사랑-2022년 8월호-[흙과 불로 탄생한 새로운 책가도 (冊架圖)]

  

[1. [“흙과 불로 탄생한 새로운 책가도 (冊架圖)]] // (요약 발췌) // “현대적 책 읽기 경험과 만난 책가도/ 조선시대 정조가 사랑한 그림으로도 알려진 책가도는 글 읽기를 좋아하고 학문의 길을 추구하던 선비의 사랑방이나 서재에 두어 책을 아끼고 늘 가까이 두겠다는 마음을 반영했다...나는 과거 선비정신을 담아내고 남성의 취향으로 향유된 책가도를 현재를 사는 여성의 시선과 내 모습으로 나타내고 싶었다.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었다. 단순히 나의 취향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수많은 사물 중 그 사물을 작품에 넣은 합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 옛날 책이 선비정신으로 여겨졌던 것처럼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작품 속에 담긴 책을 통해 지혜로움에 다다를 수 있길 바랐다. 수많은 사물이 한 작품을 구성하는 책가도처럼 흙과 불을 기본으로 다채로운 재료를 변주해 나만의 책가도를 만들고 싶었다.⇒ 


⇒그 무엇도 흔들 수 없는 흙의 단호함; 내가 사용하는 테라코타 기법은 청자토나 분청토 같은 흙을 매개로 거대한 도판(陶板)을 만들고 그 위에 또다시 흙을 덧붙이거나 파내어 입체감 있는 부조 형식으로 기본 형태를 만들어 나간다. 완성된 작품이 휨 없이 똑바른 선과 형태를 보이는 것은 휜 부분을 갈고 다듬고 메우고 다시 갈아내는, 시의 흐름도 잊어버릴 만큼 고단한 작업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형태가 만들어지면 건조한 다음, 가마에 들어갈 만큼의 크기로 분할한 뒤 구워낸다. 처음부터 상처는 없었다는 듯 올곧은 형태가 완성되면 비로소 채색 작업을 하게 된다. 구운 조각을 합판 위에 재구성해 붙이고 이후 그 표면에 아크릴 물감을 여러 번 겹쳐 채색한다. 이 과정을 통틀어 ‘테라코타 릴리프 (Terracotta Relief)’라고 부른다. 구워진 흙이 바탕이니 세필로 선을 몇 개 긋고 나면 붓이 무뎌져버린다....온몸이 삐거덕거리며 아우성을 쳐도 아침이면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 작업대 앞에 선다. 하고 싶은 작업도, 큰 공간을 사용하고 싶은 욕심도 깊어진다. 과거의 유산인 책가도로 살아 숨 쉬는 현재를 만드는 작업을 앞으로도 이어가고 싶다.“] 


문화재사랑-2022년 8월호-[요람에서 배우는 평생의 가르침,가정교육].jpg
문화재사랑-2022년 8월호-[요람에서 배우는 평생의 가르침,가정교육]

 

[2. [요람에서 배우는 평생의 가르침,가정교육] // (요약 발췌) // ”교육의 뿌리, 가정/ 가문(이하 ‘가정’으로 표기)의 지위는 그 집안에서 인격이나 재능이 뛰어나 명성을 얻은 사람이 고위 관직으로 나아가는, 즉 개인의 능력을 중심으로 인물을 평가하는 가학(家學) 사상을 기반으로 중시되기 시작했다. 가학은 가정의 풍조와 선조의 유풍을 통해 나타난다. 선조의 유풍 또는 조상의 뒤를 이은 혈통을 통해 후손의 성격이나 재능이 계승된다는 발상이다. 이런 가학은 가계(家系)나 가격(家格)을 탐구하는 족보학(族譜學)의 발달로 이어졌다. 나아가 『안씨가훈(顔氏家訓)』을 비롯해 제갈량(諸葛亮)·왕승건(王僧虔)의 『계자서(戒子書)』, 양춘(楊椿)의 『계자손(戒子孫)』 등 후세에 가족훈(家族訓)의 원형이 되는 교훈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조선의 경우, 퇴계 이황이나 다산 정약용 등 대학자들의 편지를 비롯한 다양한 방식의 자식 훈계에서 가정교육의 의의를 엿볼 수 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 표현 하듯, 한 가정의 교육은 구성원 사이의 친밀과 화합을 강조하고 궁핍한 친척을 위한 도움을 권장하는 등 삶의 실제 내용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크게 보면 혼란한 세상에서 가정을 생존시키기 위한 처세훈이 핵심이다. 작게는 각 각의 가족 단위인 가정에서 자손이 번영하기를 바란다. 이런 교육은 어쩌면 그 목적이 단순하다. 그러나 의미는 심오하다. 가정의 조직을 유지하고 생업을 수행하며 제사를 중심으로 의례를 거행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를 수행 하고 가정을 합리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가사(家事)’ 가 필요하다. 가사는 가정이 지향하는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처리해야 할 일을 총칭한다.“] 


문화재사랑-2022년 8월호-[성리학을 담는 철학의 그릇사적 안동 병산서원].jpg
문화재사랑-2022년 8월호-[성리학을 담는 철학의 그릇사적 안동 병산서원]

 

[3. [성리학을 담는 철학의 그릇사적 안동 병산서원] // (요약 발췌) // “화마로부터 지켜낸 건축의 진수/ 2020년 4월 25일, 안동시 풍천면 인금리에서 시작된 산불이 강풍에 재발화하면서 병산서원은 최대 위기를 맞았다. 초속 10m 안팎의 강풍으로 진화작업이 순탄치 않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화재 예방에 총력을 기울였고 안동 산불 화마(火魔)로부터 병산서원을 지켜낼 수 있었다. 병산서원의 전신은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 역할을 해오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풍산현에 있는 것을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이다. 1607년 서애가 타계하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광해군 5년(1613)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에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에게서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된 이곳은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며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보호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진 뒤 강당은 1921년, 사당은 1937년에 각각 다시 지어졌다. 병산서원에는 유성룡의 문집을 비롯해 문헌 1,000여 종 3,000여 책이 소장돼 있다.../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보여주다/ 고요히 자리한 병산서원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은 만대루이다. 누마루를 떠받드는 기둥은 휜 나무를 그대로 썼고 주춧돌은 다듬지 않은 투박한 모습이다. 2층 마루로 오르는 계단은 거대한 통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서원의 중심인 입교당 마루에 앉으면 만대루가 한눈에 보인다. 기둥과 기둥 사이로 강이 흐르고 병산의 푸른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명성과 달리 한없이 소박한 모습은 자연을 즐기는데 방해되는 요소를 최소화했다. 7칸의 누각은 건물 안으로 강과 산을 더 끌어들였고, 바라보는 사람마저 그 속에 녹아들게 해 준다. 만대루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구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에서 따왔다고 한다.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라는 뜻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풍경을 감상하게 만드는 이곳.”] 


[”병산서원은 2019년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 등과 함께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되었다. 철종 14년(1863)에는 임금에게서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서원이 된 이곳은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며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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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魯 李龍雄/ 명예석좌교수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선데이뉴스신문/상임고문/ 

한반도문화예술연구소 대표/


[이용웅 기자 dprkcultur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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